10. 사역이 재생산되려면. 위임하라 3 (약함을 즐기자) -메콩강소년(정도연)-
6. 사역이 재생산되려면 위임의 순간에 마귀가 틈타지 못하게 영성을 관리해야 한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고 이웃 사회에도 덕을 세우는 감동적인 위임식이 있다. 반면, 위임을 앞두고 목사와 성도들이 갈등하고 아파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불확실한 미래와 제한된 현실의 충돌 현상이다. 사랑이 없다거나 분에 넘치게 많은 걸 요구해서가 아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섬김이 부족하거나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서도 아니다.
한국교회에 이런 안타까운 모습이 발생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가장 큰 이유는 목사와 선교사 자신이 성숙하지 못한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목회와 선교는 자기 변화를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수십 년 목회하고 선교하면서도 이기적인 욕심을 비우지 못한 자신에게서 그 이유를 찾으면 좀 더 평안해지리라 생각한다.
거룩한 영적 정체성이 흔들리면 열등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열등의식은 사명적 정체성과 실제 바라는 목적이 다를 때 나타난다.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면서 실제 바라는 삶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될 때 나타나는 내적 갈등이다. 거룩한 사명을 말하는 자들의 열등의식은 교만과 위선으로 드러난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히면 자기희생에 대해 물질적 보상을 바란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누리며 나누는 것이 공의다. 누려야 할 사랑을 누리지 않고 포기했다고 해서 희생이 아니다. 자기 권리를 은혜로 누릴 줄 아는 자가 이웃의 권리도 지켜줄 수 있다. 나도 목회와 선교는 자신과 가족의 희생이 먼저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런 희생에 동정해주는 것을 사랑으로 오해했다.
목회와 선교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거룩한 희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자학적인 희생을 자랑하려고 해서다. 자학적인 자기희생을 목회자와 선교사의 모습인 것처럼 인식하게 한 것은 마귀의 고단수 전술 전략이다. 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보다, 무능한 존재의 값싼 희생을 내세우게 했다.
자학적인 자기희생은 거룩한 제사가 될 수 없다. 일종의 보상심리다. 거룩한 헌신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목회자와 선교사가 자기를 정직하게 사랑하는 분위기와 구조를 만들어 가야 한다.
둘째, 거룩하게 변화되지 못한 성도들의 이기적인 믿음도 중요한 원인이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의 목적을 자신이 성화 되어가는 것에 두기보다, 자기 유익을 우선순위에 두었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구원의 모습으로 믿어왔기 때문이다.
장로, 권사, 집사라는 교회 안의 신분을 자기 변화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 않고, 자신이 쌓은 공로에 대한 보상과 명예로 착각하고,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해서다.
이런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자학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목사와 선교사를 훌륭한 분이라고 말하면서 동정을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 착각한다. 이들이 위임이라는 축제의 시간에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가는 마귀의 앞잡이가 될 수 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향기로운 희생 앞에 마음을 모을 줄 안다. 지혜로운 성도는 거룩한 일을 가장한 무능한 자를 동정하지도 않아야 하고, 거룩한 희생에 대해 마음 없는 입술의 칭찬으로 얼버무려서도 안 된다.
셋째, 양들은 자기 목자를 모르고 목자도 자기 양들을 모르는 탐욕적인 목회를 해온 목회자도 원인이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선지자적 메시지는 뒤로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강조한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말하기보다, 사랑과 용서를 죄를 두둔하고 의인을 고독하게 하는 도구로 교묘하게 이용한다. 자기 영리를 위해 교회와 성도들을 이용하는 자는 삯꾼이다.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영혼으로 변화하도록 말씀을 가르치기보다 자기 영광을 위해 설교한다. 성도들을 죄와 싸워 이기는 십자가의 군병들로 훈련하기보다, 자기 교회에 붙잡아두고 자기에게 충성하도록 하는 훈련 프로그램이 믿음의 성숙인 양 강조해 죄인들의 우월감을 부추긴다. 의인들의 고독은 외면하고, 죄인들의 편리를 쫓는 시설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법을 어기고 빚을 내서라도 목이 좋은 곳에 땅을 사고 각종 이름으로 시설을 지으려 한다.
농어촌이나 어려운 환경, 선교지에서 보내는 기도 편지는 제대로 성도들에게 읽어주지 않으면서 교회당을 증축하고 꾸미는 헌금을 위해서는 시대에 뒤질세라 강조한다. 헌금을 영혼 구원과 이웃 사회에 공의를 전하기 위해 사용하기보다 이런 건물을 관리하고 세상의 부를 축적하는 곳에 투자한다. 헌금의 1차 지출 대상은 영혼이다. 그 영혼들의 섬김으로 교회당의 공간들은 관리되어야 한다.
세계 모든 대형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영적 실업자가 대다수라는 것이다. 많은 수의 성도들을 자랑하는데, 그리스도의 지체로 고용 창출되어 교회를 섬기는 성도는 많지 않다. 6만 명 성도를 자랑하는 목사에게, 6만 성도들 가운데 몇 명이나 자기 역할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냐고 물었다. 부목사를 불러 얻은 답이 약 1,500명 정도라고 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약 5만 8천 5백 명이 실업자인 교회, 용산역 노숙자 교회나 마찬가지다. 건강한 교회는 실업자가 없는 교회다.
대형교회 성도 대다수는 목자를 모르고 목자도 그들을 모른다. 그의 양이 아니고 그들의 목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편리한 예배를 선호한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죄의 편리함을 이겨야 가능하다. 출애굽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바로의 협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사흘 길을 가는 여정이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만 버리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믿음은 반쪽 믿음이다. 예배의 장소에서 의무와 책임지고 해야 할 역할이 없는 자는 영적 실업자다.
위임을 두고 나타나는 아픔의 배경에는 이런 영적 실업자들이 누리는 편리한 예배가 있고, 영적 고용 창출되어 예배드리다가 그 역할에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들이 있다. 차마 하나님은 멀리할 수 없어 찾아온 성도가 있고, 그들을 유혹해 자기 유익을 챙기는 삯꾼 목사가 있다.
대형교회에는 작은 교회에서 상처받고 차마 하나님은 떠날 수 없어 아무도 모르게 살짝 예배만 드리고 가는 성도들이 많다. 대형교회의 역할 중 하나는 이런 성도들이 치료를 받고 새 힘을 얻어 다시 그의 기능적 역할이 필요한 곳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들을 자기 교회에 잡아두기 위한 훈련은 믿음의 성숙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런 훈련으로 목이 뻣뻣해진 자들이 대형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들 주변에 많다. 교권주의자에게는 목돈을 쾌척하면서도 거룩한 자의 고독을 위해서는 커피값도 인색하다. 자기 목사들의 이름을 위해선 만사 제쳐놓고 세계 어디든 쫓아다니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인 척하면서, 거룩한 고독에 대해서는 교만하다.
넷째, 각 교단의 총회와 노회, 시찰회를 교권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어서다. 교단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속한 교회들의 신앙고백의 기준을 바르게 잡아주고, 소속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목회하도록 권하고 지도하는 것이다. 그 정체성을 따르지 않는 교회나 목사를 징계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단 대부분이 그 본연의 임무를 상실한 지 오래다.
불의한 교권주의자들이 성도들의 헌금을 눈먼 돈처럼 여기고 먼저 쓰는 게 임자라는 식으로 득세하고 있다. 여기에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장로, 권사, 집사들이 동맹하고 있어서, 거룩한 헌금이 거룩하게 쓰이질 않고 있다. 개신교는 가톨릭의 교황 중심의 통일성을 이단성으로 정죄하면서 수많은 교황을 만들어내었고 헌금이 공정 분배되는 길을 막아버렸다.
확실한 직업이 없는데 교단 산하 단체장의 이름으로 세계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며 헌신예배 순서 맡아 살아가는 자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 이들의 돈줄이 되는 것을 믿음으로 여기는 장로들이나 집사들의 믿음을 신뢰하기 어렵다.
7. 하나님 나라와 의를 사모하는 목회자, 성도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한 자에게 마음의 쉼을 주어야 한다. 그들이 거룩한 희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도록 위로해 주어야 한다. 긴 세월 헌신해온 삶을 가난 때문에 그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배부른 거룩은 거룩이 아니고 배고픈 거룩은 오래 갈 수 없다. 배부른 거룩을 위해서는 위선이 필요하지만 가난한 거룩을 시원케 하는 것은 십시일반이 필요하다. 선하고 거룩한 일은 한 사람이 독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돈이 많다고 가난한 고독을 홀로 책임질 수는 없다.
1) 평생 농어촌이나 미자립교회, 선교지에서 헌신하고 은퇴한 목회자와 선교사들의 노후, 삶의 부족한 부분을, 내 생활에 티가 나지 않을 만큼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자동이체하는 십시일반 후원자가 되자.
가난한 의인의 고독을 위로하는 것은 내 삶의 부스러기면 충분하다. 악은 내 삶의 부스러기를, 너무 작고 미미해 부끄럽다, 미안하다는 핑계로 나누지 못하게 한다. 선과 거룩에 동참하는 것은 분량으로 따지지 말아야 한다. 선한 부스러기를 나누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다. 사탄은 우리가 선명한 거룩과 선명한 진리, 선명한 공의로 사는 것을 방해한다. 선명한 진리, 거룩, 공의를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은 여전히 악의 편에 있다는 뜻이다.
액수가 많으면 오래 하기 부담스럽다. 이런 은혜를 받는 목회자와 선교사들은 정직하고 올곧은 삶으로 세상과 싸워가는 자들에게 희망이 되고 저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삶으로 보답하자. 동정을 자극해 부담을 주지 말자.
낮은 자존감 세우려고 삯꾼 목사들에게 돈 봉투 주지 말고, 거룩한 고독을 위해 십시일반에 동참하라. 세상에서도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 했다. 정승처럼 벌어 개보다 못하게 쓰는 돈이 교권주의자, 대형교회 목사들의 이름을 위해 쓰는 헌금 명목의 돈이라 생각한다.
2) 시찰회 노회 총회, 각 상비부는 각종 회의를 열고 교통비로 주고받는 봉투를 부끄러워하고 이 돈을 어려운 목회 현장과 선교지에서 헌신한 동료들의 은퇴비로 드리자. 총회장 노회장 거마비를 없애자. 그러면 자연스레 총회장이 되려고 많은 헌금을 불의하게 사용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런 목회자에게 잘 보이려고 공금을 횡령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장로 권사 집사도 없어질 것이다. 요셉의 공의는 자기가 맡아 소유하고 있는 것을 공정 분배하는 것이다.
3) 도시 교회나 자립하는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들은 교회의 영적 실업자들을 고용 창출해야 한다. 그들에게, 30년 이상 건강하게 목회했으나 노후가 고독해진 목회자와 선교사들에게 십시일반 후원자가 되라고 권하고 가르치고 격려하라. 대형교회 목사들이 자기 이름을 위해 쓰는 돈을 조금만 줄여도 농어촌 교회나, 선교사 한두 명은 단독 책임질 수 있다고 본다.
평생 약한 자들과 함께 목회하고 선교해 온 동역자 여러분! 우리의 노후가 불의하게 부를 축적한 자들의 노후와 같지 않다는 것도 은혜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내가 섬기고 사랑해 왔던 약한 자들이 노후를 사는 방법으로 노후를 준비하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감사합시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가 가랑이 찢어지는 꼴 되지 않도록, 바울처럼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족한 줄로 여기고 자족하는 은혜를 누립시다. 세계 여행 못 다닌다고 기죽지 말고, 건강관리 잘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나라 팔도강산에서 행복을 누려봅시다. 당연히 해야 할 의무와 책임에 성실하지 않으면 심판을 면치 못하겠지만 약함을 누리는 것은 주의 샬롬을 누리는 길입니다.
첫댓글 아멘 약할때 강함되시는 주님을 의지하여 오히려 약함을 즐거워하며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