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시대 포르투갈 탐험가들
당시 대항해시대를 지원한 왕은 1438년 등극한 알퐁수 5세다. 그는 아프리카로의 항로를 열도록 해 아프리카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1481년까지 통치하면서 아프리카 지역 영토를 확장했다. 1456년에는 엔리케의 지원을 받은 베네치아 탐험가 카다모스토(Alvise Cadamosto)가 카보 베르데(Cabo Verde)까지 진출했다. 1462년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더 남쪽인 시에라 레온(Sierra Leone)에 도착했다.
1481년에는 알퐁수 5세의 아들인 주앙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포르투갈 왕권을 좀 더 강력하게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로의 탐험과 영토확장에도 앞장섰다. 1484년에는 디오구 캉(Diogo Cão)이 아프리카 서부 콩고(Congo)강을 탐험했다. 1488년에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Cape of Good Hope)에 도착했다.
이와 달리 카스티야 레온왕의 지원을 받은 콜룸부스(Christopher Columbus)가 1492년 아메리카의 카리브해에 도착했다. 이듬해 초 유럽으로 돌아온 콜룸부스는 리스보아에 들러 포르투갈왕 주앙 2세에게 탐험의 결과를 알렸다. 이에 주앙 2세는 알카소바스 조약(Treaty of Alcáçovas, 1479)을 인용하며, 콜룸부스가 발견한 지역이 포르투갈 땅임을 선언했다. 이 조약에 따라 그때까지 카스티야 왕국은 육지에서의 지배권을, 포르투갈 왕국은 바다에서의 지배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주앙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사벨라 1세에게 친서를 보냈고, 양국 사이에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에서 협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어 양국간에 바다 국경선이 정해졌다. 카보 베르데 서쪽 1,500㎞ 지점까지는 포르투갈의 땅이고, 그 서쪽은 카스티야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495년까지 주앙 2세는 합법적인 후계자를 세우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왕위 후계자였던 알퐁소 왕자가 1491년 먼저 죽었고, 서자인 조르게(Jorge)를 왕위에 앉히려는 청원이 교황 알렉산더 6세에 의해 거절되었기 때문이다.
1495년 주앙 2세의 사촌인 마누엘(Manuel)이 왕위를 계승해 마누엘 1세가 되었다. 그는 탐험과 무역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꽃피웠다. 1521년까지 재위하면서 포르투갈을 최고의 항해제국으로 만들었다. 1498년에는 바스쿠 다 가마가 희망봉을 지나 인도까지 항해할 수 있었다. 1500년에는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이 브라질 연안까지 항해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브라질은 포르투갈 식민지가 되었다. 1501년에는 코르테-헤알(Corte-Real) 형제에 의해 북아메리카의 라브라도(Labrador) 지역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1503년에는 브라질에 공장을, 인도 코친에 항구를 건설하면서 식민지 건설을 위한 거점을 마련했다. 1505년에는 코친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총독부를 설치했다. 1506년부터는 모로코의 에사우이라, 소코트라, 오만(1507), 인도의 고아(1510), 말라카(1511) 등을 식민지화했고, 1516년에는 걸프만 연안의 오르무스(Ormus)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포르투갈은 오만, 아덴, 오르무스를 거점으로 이슬람 국가와 교역을 했고, 말라카를 거점으로 중국, 일본과 무역을 했다. 이처럼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나라들과 교역함으로써 부를 축적했고, 세계 최고의 해양제국으로 성장해 나갔다.
마누엘 1세는 1521년까지 통치하면서 절대왕정을 유지했고, 법적인 통치를 강화했다. 종교적으로 이슬람교도를 추방했고, 유대교도의 개종을 강요했다. 1521년 12월 심한 열병에 시달리다 죽어 헤스텔루 교회(Restelo Church)에 묻혔다. 그리고 1551년 두 번째 아내 마리아와 함께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 포르투갈의 왕위는 마누엘의 장남인 주앙 3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주앙 3세 때 포르투갈은 에스파냐, 오스트리아와 혼맥으로 연결되면서 영토를 가장 크게 넓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