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촌의 인류학. 빈부격차에 대하여.
난 직장병행 수험생이다. 운이 좋은 건지 직장이 여의도에 있어서 대학동에 살기 시작했다.
근데 수험 메타가 바뀌며 직병... 아니다. 잡설은 그만 하고.
1. 고시촌의 언덕
여튼 난 싼 데 산다. 고시촌 언덕을 어기어차 오르다 보면 있는 곳이다.
지난 주말에 분리수거 하려고 나갔는데, 한 아저씨와 딸이 짐을 옮기고 있더라.
밖에 택시가 있는 걸 보니 자차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 5층까지 짐을 이고 나르는 걸 보니. 나도 마음이 안 좋아 짐을 같이 날라 드렸다.
... 후회했다. 일단 너무 더워잉 ㅜㅜ
그리고. 짐을 옮기며 알았는데, 이사 오는 호실이 나랑 같은 층이더라. 근데 남자인 내가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따님이나 아버님이 무서워할 수도 있었기에 괜히 도왔나 싶었다. 그래도 더워서 제일 후회.
이삿짐을 같이 나르고, 나는 1층으로 내려왔다. 다행이 짐이 더 있지는 않았다. 따님은 집 안을 정리 중이었는지 1층에 안 내려왔다.
아버님은 1층에서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아마 딸에게는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었으리라.
한 달에 학원비가 얼마나 드는지.
식비는 얼마로 계산을 해야 하는지.
전기요금이나 가스요금은 얼마가 드는지.
옷은 얼마나 쓰는지.
보증금은 안전한지.
책값은 얼마가 드는지.
비상금으로 얼마 정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합격하기가 어려운지.
질문은 거의 돈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마 아버님은 고시수험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직장인이기에 월 지출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그래서 정말 세세하게 다 알려드렸다.
넉넉 잡으니 1차 시험과, 2차 시험 0~3기 한 사이클 잡으니. 지금부터 14개월 정도로 예산을 같이 내봤다.
옷값은 솔직히 모르고, 식비는 나를 기준으로 하니 14개월에 900만원 정도 잡아볼 수 있겠더라.
아버님 표정이 안 좋았다. 돈을 벌어봤다면 안다. 1년에 대충 1천만원이 빠진다는 건. 사실상 모을 수 있는 돈이 없다는 의미다. 노동자 개인에게 이건 엄청난 리스크다.
나도 괜히 죄송스러워 내가 남자여서 식비가 많이 나간다고, 나는 헬스장을 다녀서 조금 더 나간다고. 그리고 난 직장인이니 뜬금 없이 돈이 깨질 때가 있다고 위로해드렸다.
딸이 내려왔다. 딸은 나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따님은 아버지와 인사를 했다.
가까이 있는 건 매너가 아닌 것 같아 다시 분리수거대로 갔다. 어떤 놈이 그냥 봉투에 온갖 쓰레기 넣어서 여기 뒀더라. 잡히면 죽는다.
그런데 부녀의 말은 다 들리더라.
"아빠. 조금만 버텨주라. 나 꼭 합격할게."
"그래! 아빠가 힘 닿는 데까지는 지원할 테니까. 열심히 한번 해봐!"
딸은 계단으로 올라갔고. 아버지는 담배를 태우셨다. 내가 딸을 따라 올라가면 그건 그것대로 그림이 안 좋아서... 난 편의점으로 향하려 했다. 편의점 바나나는 나의 두 끼를 책임지니까.
가려는 와중에 아버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영화 테이큰처럼 나에게 경고를 하시려는 걸까. 아저씨는 나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이셨다. 온통 땀 투성이셨다.
2. 트루엘
오늘 직장에서 출장길에 바로 퇴근하라 해서 기분 좋게 집으로 향했다. 나는야 월급루팡. 징계절차도 안 밟겠지. 지하철역에 내려 집으로 향했다.
밥값이나 아끼자 해서 롯데리아 쿠폰을 쓰러 엘트루인지 트루엘인지 건물 1층 롯데리아를 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역시 대기업 맛은 위대하다를 되뇌고 있었다.
건물 바로 앞에 밴츠 두 대가 서더라. 어휴 이 건물에 불법 업장이라도 있나 싶어서 지켜봤다. 솔직히 심심하기도 했고.
앞의 suv 벤츠에서 한 아저씨가 내렸다. 그리고 뭔 전화를 하더니 여자 둘이 중앙 입구로 나오더라.
엄마와 딸로 보였다. 캐리어 3개랑 이마트 그거 튼튼한 거. 그런 느낌의 백을 가지고 나왔다.
백에는 2단 독서대와 눈에 익은 노동법 교재가 있었다. 근데 캐리어를 풀더니 책들을 그 앞에 있는 고물상? 거기 리어카에 살포시 얹더라.
그리고. 책 참 많더라. 멈춰 세우고 나 몇 권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주변머리가 없어서 못 했다.
뒤에 있던 승용차 벤츠에서도 한 아저씨가 내리더니 캐리어를 싣더라. 그리고 엄마로 보이는 여자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라. 남은 짐을 가지러 가는 거겠지.
혹시 남는 책을 내가 주울까 싶어서 냅다 튀어나왔다. 자존심 상하지만 그래도 혹시 아는가. 공짜로 이렇게 훑어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
게다가 책 상태 좋으면... 알라딘에 넘길 수도 있고. 자존심 상하지만 그랬다. 부자들은 모르는 짤짤이의 경제학이 있도다.
리어카로 슬금슬금 가던 길에 딸로 보이던 여자는 (엄마로 보이는 분이 수험생일 수도 있음), 아빠로 보이는 남자에게 "아빠 미안해" 라고 하더라.
아빠로 보이는 남자는 "아니야. 이것만 길은 아니니까. 한 서너달 쉬면서 생각해보면 되는 거야." 라고 자상하게 웃더라.
책 주으러 간 내가 부끄러워져 다시 롯데리아로 돌아갔다. 기분이 좀 묘해서 사치라도 부리고 싶어져 소프트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3. '용기'의 기회
물론 어쩌면 아무일도 아닌 두 사건일 수도 있다. 근데... 기분 좀 묘하더라.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이런 그림에 내가 예민한 걸수도 있고.
문득 드는 생각은, 전문직 시험이라는 게 '용기'를 낼 기회의 차이가 이미 형성 되어버린 게 아닐까 싶다.
아마 이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꽤나 했던 사람들일 거고, 전업으로 2~3년 생각하는 사람들은 집안 경제 사정이 아주 궁핍하지는 않을 거다.
나도 그렇고. 아니다. 난 직장인이구나.
하여튼.
고독하고, 공포에 휩싸이기 쉬운 고시 기간을 견디게 하는 배경도 이제는 차이가 나는 게 아닐까.
게다가 돈 때문에 진입조차 못한 이들도 있을 텐데.
고시촌 언덕을 오르는 사람도 있고, 트루엘의 입지와 시설을 누리는 사람도 있겠지.
음...
모르겠다. 그저 용기를 내며 투쟁하듯 살아가는 모든 수험생들에게 복이 있기를.
온누리에 행복이 가득하길.
괜히 싱숭생숭 해져서 공부하기 전에 감정 정리차 끄적여 보았네요.
다들 힘냅시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솔직히 더 슬픈 이야기도 있는데. 행여나 특정 될까봐 안 씀... 고시촌 입성의 그림은 거의 상단 내용과 똑같더라고요 ㅜㅜ
그래도 따님이나 아버님이나 서로 울먹울먹하면서 계속 짐 나르고 손 잡고 계시는 걸 보면.
그 분은 잘 될 듯. 안 된다 해도. 그런 가족이 있다면 이미 잘 된 듯.
난... 잇힝. 출근하기 싫엉♡
난 안 될 듯
재밌게 읽었어요. 종종 이런 글 써주세요 ㅋㅋㅋ
글 정말 정말 잘 쓰시네요.... 씁쓸한 웃음과 왠지 모를 슬픔이 모두 느껴지는...
이게 현실,,
돈없으면 집에서 온첨반하지 굳이 신림까지가서 월세살면서 150씩 뿌려야되는지 정말의문이에요 집에서하면 0원인데..공부안되면 공공도서관가면 되고
막연한 공포감이겠지요. 집에 있으면... 가정사에 따라 쉽지 않을 수도 있고요.
이미 일어난 현상을 뭐 어쩌겄습니까. 그저 온누리에 평화가 있기를... 나무아비타불관세음보살.
글을 참 잘 쓰시네요 서글픔이 묻어 있어서 더 슬펐어요.. 온몸이 땀투성이셨던 아버님의 따님.. 꼭 합격하시길 얼굴 모르는 이가 멀리서나마 기원하겠습니다. +글쓴이님도 꼭 합격하세요!!!
세상사 공평하지 않다는걸 잘 알지만.. 그래도 좀 더 절박하고 좀 더 어려운 사람 먼저 붙었으면 좋겠다ㅜㅜ 시간 돈 여유 넉넉하고 쉬어가며 해도 되는 사람보다..ㅜㅜㅜㅜ
😂
그냥 집에서 해도 되는데 굳이 신림동까지 가서 빈부격차라...
기회비용 때문에 시험공부 엄두도 못 내는 사람이 천지삐까리일텐데요.
집에 있는게 정말 공부하기 힘든 상황들도 있죠
세상이 정해둔 “여유”를 기준으로 하면
여유가 없을수록 더욱더 집에 이런저런 일들이 많구요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림에서 집중해서 단시간에 끝내야겠단 간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죠..
어떤 상황이든 도전한다는 것에 응원합니다
이 요인도 있는듯. 대학교 때 교육봉사 나갔는데. 아이들이 모두 집에 있는 것에 대해 일종의 공포감을 갖더라고요. 집이 안정을 주지 못하는 환경들도 꽤 많음
재밌어요 ㅋㅋㅋ저도 직딩인데 공감갑니당 종종 써주세요
재밌어요 재밌어🥺🥺
또…또 써주세요ㅋㅋㅋㅋㅋㅋ
우당탕탕을 위협하는 ㅋㅋㅋㅋ 강호의 등장 두분 꾸준히 연재바랍니다
필력이,,,작가 하셔도 되겠어요!!!
명문이네요 공부안하는 수험생 위로받고 갑니다.. 부모님께 전 배신 그만해야 하는데 정말 죄송해서 죽고 싶네요 매일같이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들도 작성자 분이 후회 없이 남은 삶을 살 수 있게 먄들어줄 도전의 시간이에요.
저도 도전하다가 멍청하게 포기한 일도 많아요. 다만. 내가 해봤다! 다만 나에게 맞지 않았던 일이다! 이 감각을 가지게 된다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더라고요.
반면 도전 안 해본 것들은 후회로 남아 찝찝하게 나를 괴롭히고요. 도전을 하신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드려요. 저도 직장 다니며 하는 게 아직은 제가 여기에 몰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 저도 당당하지는 못하네요. 다만.
그래도. 삶을 사랑하기에 도전도 하고 자괴감도 드는 거라 생각해요. 지금까지 고생하셨어요. 더 멋진 일들이 있을 거예요 :)
@iiilili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어떻게든 나아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