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지맥(虎尾支脈)은 낙동정맥(洛東正脈) 상의 삼강봉(三江峰)에서 東北으로 분기하여 치술령을 거쳐 포항의 호미곶으로 이어진다. 한편, 삼태지맥(三台支脈)은 호미지맥 상의 조항산 부근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무룡산(舞龍山)을 거쳐 방어진 화암추 등대로 이어진다. 학풍회(鶴風會) 2013년 1월 간산(看山)은 이 호미지맥과 삼태지맥에서 뻗어 나온 몇 개의 산줄기다. 특히 이번 간산은 만주 선배님의 안내로 조선의 명풍수로 알려진 성지(性智) 대사가 남긴 비결서에서 대발복지로 지목된 경주군 영분공 김명종 묘소와 은진 송씨 묘소가 포함되어 있다.
성지 대사는 조선(朝鮮) 명종(明宗) 때 경북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에서 홍석구의 서얼로 출생하였으며 서자였기 때문에 서당에 다니지 못하고 15세에 인근 연방산 월영사(月影寺)에서 중이 되었다. 성지가 영남(嶺南)에서 풍수(風水)에 능하다는 소문이 나자 환관(宦官)에 의해 광해군(光海君)에게 소개되었는데, 곧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한양 도성 안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 과정에서 명나라에서 귀화한 풍수인 시문용과 더불어 인왕산을 주산으로 한 인경궁(仁慶宮)과 경희궁(慶喜宮)의 터를 잡았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처형되었다(김두규 저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년 참조).
성지 대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만 총 35건의 기사(記事)가 검색되는데 그가 광해군의 신임을 받았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정치적으로 몰락했기 때문인지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광해군은 서자 출신으로서 자신의 정통성에 대해 깊은 열등감을 가졌고 또 임진왜란으로 민심이 이반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교하(交河, 지금의 파주 부근)로의 천도를 추진하였고 이것이 여의치 않자 인왕산을 주산으로 한 궁궐의 조성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문용, 성지 등의 풍수가 득세하여 권세를 누린 것이다. 많은 조정 대신들은 피폐한 재정문제를 들어 교하 천도 및 새로운 궁궐 조성에 반대하였고 급기야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정치적 승자(勝者)의 기록인 실록(實錄)에 광해군 및 그의 추종세력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임은 너무나 뻔한 이치라 하겠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성지에 대한 흥미로운 인물평을 보면 다음과 같다[광해군 8년 丙辰(서기 1616년) 3월 24일 甲午 조 참조].
性智, 狂僧也。自言能解地理方書, 而目不知文字, 以諺書論風水, 其言不依古方, 怪謬可笑。倡言: “仁王山石山突起甚奇, 又仁王二字, 乃是吉讖。 若王者居之, 曆數可延而太平可興。” 又曰: “國初卜社稷基于此, 當時術士, 必有意見。宜遷社稷於他所, 而卜宮其址。君父享安, 則社稷亦固, 當遷何疑?” 聞者大駭。 遂卜基於社壇墻外。 先是, 社祭飯甑自鳴, 聲聞一里, 未幾卜宮, 壞墻拓址, 人以爲其應。 仁王釋迦之美稱也, 山舊有仁王寺故名。 性智嘗葬其母骨于昌原安骨浦佛母洞曰: “吾後身爲佛, 浦洞名, 皆先兆也。” 蓋洞本名火池, 乃爐冶之異名。 洞舊有鐵爐故名火池, 與佛母俗音相似, 故幻而稱之。 性智不曉方書, 故文以俗說, 皆此類也
성지(性智)는 미친 중으로, 스스로 지리(地理)에 대한 방서(方書)를 잘 이해한다고 하였다. 글을 읽을 줄 몰라서 언문으로 풍수(風水)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말이 예전 방술대로 하지 않아 괴이하고 어긋나서 가소로웠다. 그는 ‘인왕산은 돌산으로 몹시 기이하게 솟아 있으며, 또 인왕(仁王)이란 두 글자가 바로 길한 참언(讖言)이다. 그러므로 만약 왕자(王者)가 그곳에 살 경우 국가의 운수를 늘릴 수 있고 태평시대를 이룰 수 있다.’고 떠들어 대었으며, 또 ‘국초(國初)에 사직단(社稷壇)의 터를 이곳에 잡은 것은 당시의 술사(術士)가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였다. 그러니 사직단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서 그 터에다 궁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임금이 편안하게 지내면 사직 역시 견고한 것이니, 마땅히 옮겨야지 무슨 의심을 둘 것이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크게 놀랐다. 이에 드디어 사단(社壇)의 담장 바깥에다 궁궐의 터를 정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제(社祭)에 쓰는 시루[甑]가 저절로 소리를 내어 그 소리가 1리 밖까지 들렸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궁궐의 터로 잡아 담장을 무너뜨리고 터를 닦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에 대한 응험이라고 하였다. 인왕(仁王)은 석가(釋迦)의 미칭(美稱)으로 산에 예전에 인왕사(仁王寺)가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었다. 성지가 일찍이 그의 어미의 뼈를 창원(昌原) 안골포(安骨浦) 불모동(佛母洞)에 장사지내고는 말하기를 ‘나의 후신(後身)은 부처가 될 것으로, 포와 동의 이름이 모두 그에 앞선 조짐이다.’고 하였다. 대개 불모동의 본이름은 ‘불못[火池]’으로 노야(爐冶)의 이명(異名)이었다. 동에 예전에 철로(鐵爐)가 있었으므로 ‘불못’이라고 이름하였는데 ‘불모(佛母)’와 속음(俗音)이 비슷하므로 그렇게 칭한 것이었다. 성지가 방서(方書)에 대해 모르므로 속설(俗說)로 꾸며대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상황을 감안할 때 만주 선배님이 인용한 풍수비결서가 실제로 성지대사가 쓴 것인지 아니면 후세 사람이 성지대사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내용이 상당히 심오한 풍수적 지식을 담고 있고 정확한 혈처(穴處)를 지목하고 있어 흥미롭다.
경주시 외동읍 개곡리 동쪽 산록에 원종공신(原從功臣) 청평군(淸平君) 청안이씨(淸安李氏)의 묘소가 있다. 청안(靑安)은 충청북도 괴산군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1405년(태종 5) 청주에 속해있던 청당현과 도안현을 합하여 청안현이라 하다가 후에 청안면이 되었다. 청안이씨(淸安李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충원공파의 시조 이양길(李陽吉)의 시호는 충원(忠元)으로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검교시랑, 예빈사동정을 역임했다. 왕에게 직간한 것이 화가되어 제주판관으로 내려갔다가 공민왕 5년 순절했으며, 후에 청안군에 봉해졌다. 충간공파의 시조 이한번(李漢蕃)의 시호는 충간(忠簡)으로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한림학사와 영광군사를 거쳐 국사원 검열관을 지냈다. 1363년(공민왕 7년) 홍건적을 막은 공으로 청안백에 봉해졌다. 경주시 안강읍, 경주시 외동읍, 포항시 북구 청하면 청계리, 의성군 의성읍, 울산 울주군 온양읍 발리, 언양읍 반송리, 청량면 율리 등에 청안이씨의 집성촌이 있다.
이 묘소의 주인공은 그 부인이 상당군 한명회의 딸이라 하므로, 1452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고 1474년 현감(縣監)을 지낸 이기(李基)임이 분명하다. 묘지로 가는 입구에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이 집안사람들을 기린 비석과 제실이 있고, 묘 앞에는 거의 같은 내용의 비석이 두 개 서있다. 하나는 정면으로 다른 하나는 측면으로 서있는데 이장(移葬)의 증거라고 한다.
만주 선배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의 형국(形局)은 학(鶴)이 내려앉은 형상으로 학의 머리 부분에 점혈(點穴)하였고 이 묘의 바로 뒤에 고묘(古墓)가 있어 혈처로부터 약간 아랫부분에 점혈이 된 것은 조금 아쉽다고 한다. 이러한 형국에는 석물을 많이 쓰면 좋지 않다고 한다. 학의 머리 부분을 돌로 눌러놓으면 힘을 쓰지 못한다는 뜻이리라. 형세론(形勢論)의 관점에서 보면 이곳의 내룡(來龍)은 단맥(單脈)으로 내려오다 쌍맥(雙脈)으로 분기되었는데 혈장(穴場)이 두툼해서 혈을 맺고 있다고 한다. 좌향(坐向) 및 이기론(理氣論)의 관점에서 보면 간인룡(艮寅龍) 축좌(丑坐), 좌선수(左旋水) 미파(未破) 목국(木局) 묘파(卯破)이고, 주변의 사(砂)는 병오정(丙午丁) 방이 높고, 오(午) 방에 일월안(日月案), 신(申) 방에 필봉(筆峰)이 있고, 술(戌) 방이 높다고 하는데, 패철(佩鐵)을 주로 사용하는 이기론(理氣論) 풍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도무지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경주 코아루아파트 뒷산 형제봉(兄弟峰) 산록(도지동 산20-2)에 경주군(慶州君)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의 묘소가 있다. 김명종(金鳴鍾)은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의 셋째 아들로서 경순왕(敬順王)이 왕건(王建)의 고려(高麗)에 귀부(歸附)한 후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다. 영분(永芬)은 그의 시호(諡號)이다.
경주김씨상계세보(慶州金氏上系世譜)에 따르면 경순왕에게는 아들이 9명 있었는데, 그 중 장자 일(鎰: 麻衣太子)과 차자 황(湟)만이 경순왕이 왕위에 있을 때의 부인인 죽방부인(竹房夫人)의 소생(所生)이며, 나머지는 고려에 귀부한 후 왕건의 딸로서 후비로 맞은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소생이라고 한다.
만주 선배가 말한 성지대사 비결서에는 이곳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又東去四十里 方谷兄弟峰下有 玉女薱舞形 甲卯作穴橫琴案巽得辛破 大發地
또 동쪽으로 사십 리를 가면 방곡 형제봉 아래에 옥녀대무형(玉女薱舞形: 옥녀가 어지러이 춤을 추는 형상)으로 갑묘(甲卯)로 작혈(作穴)하고 가야금을 비스듬히 든 안대(案臺)를 갖추어 손(巽) 향에서 물을 얻고 신(辛) 향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파구(破口)를 이룬다. 대발복지(大發福地)다.
만주 선배님에 따르면, 이곳의 형국은 옥녀산발형 또는 옥녀대무형으로 형제봉 아래 능선 중 가장 넓은 자리가 진혈(眞穴)인데, 김명종의 묘소는 측면으로 점혈(占穴)되어 진혈과는 거리가 있고 그래서 후손들이 크게 발복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좌향론의 관점에서는 자좌오향(子坐午向), 좌선수(左旋水), 신파(辛破), 화국(火局)이라 한다. 묘의 뒷면은 북쪽 앞면은 남쪽이며 묘의 앞쪽으로 흐르는 물이 왼쪽에서 휘감아 나가 서북방향으로 빠져나가는 불의 국세(局勢)라는 뜻일 터인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역시 이기론에 대한 지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이런 걸 일러 당달봉사 혹은 청맹과니라 하던가.
경주 외동에서 둥둥이재를 넘어 양남으로 가다보면 길 오른쪽(양남면 효동리 1625번지)에 은진(恩津) 송씨(宋氏)의 묘소가 있다. 은진송씨의 시조는 송대원(宋大原)으로 자는 천지(川至), 원래의 이름은 송견(宋堅)이다. 고려시대에 판원사를 지냈고,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졌다. 송씨상계보(宋氏上系譜)에는 모든 송씨의 도시조(都始祖)가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화한 송주은(宋柱殷)이고, 은진송씨는 송주은의 후손인 송자영(宋自榮)의 둘째 아들 송천익(宋天翊)에게서 연원하지만 명확하게 계보를 밝히는 문헌이 없어 송대원을 시조로 삼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대원의 6세손 송유(宋愉)의 두 아들 송계사(宋繼祀)·송계중(宋繼中) 대에서 송계중이 사직공파로 분파하고, 송계사의 두 아들 송요년(宋遙年)과 송순년(宋順年)이 각각 목사공파와 정랑공파로 분파한다. 이 3파에서 다시 50여 파로 나뉘어져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하였다.
성지대사 비결서에는 이곳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西去十里有 金盤形玉杯案 酉座坎得辰破 大發之地
서쪽으로 십리를 가면 임금의 수라상 같은 형국에 옥(玉)으로 만든 잔 같은 안대(案臺)를 가졌는데 좌향은 유좌(酉坐)이고 감향(坎向: 북쪽)에서 물을 얻고 진향(辰向: 동남쪽)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파구를 이룬다. 대발복지이다.
형세론의 관점에서 보면 서북쪽에서 갈 지(之)자로 꿈틀거리며 내려온 내룡이 묘소로 이어지고 그 좌우로 청룡백호가 길게 감싸고 있다. 또한 그 앞쪽으로 종(鍾)처럼 생긴 안산이 묵직하게 앉아 있고 좌우에서 흘러내린 물이 무덤 앞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합류하여 동남으로 흘러나간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풍수이론에 맞아떨어진다. 좌향론의 관점에서는 경유룡(庚酉龍) 유좌묘향(酉坐卯向) 좌선수(左旋水) 진파(辰破) 수국(水局) 묘파(卯破)라 한다.
이 묘소의 특이한 점은 무덤 앞쪽에 탁자 같이 잘 생긴 바위가 있고 무덤 뒤쪽에도 조그만 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인데 옥상선배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 바위들 때문에 이 자리가 더욱 좋다고 한다.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북서쪽으로부터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것만 빼고 나면 완벽에 가까운 자리가 아닌가 싶다.
은진 송씨 묘소에서 양남 쪽으로 얼마쯤 더 내려가 경사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 2차선 도로와 접한 무덤 1기가 누웠다. 만주 선배님에 의하면 옛날 경지정리를 하기 전에는 이 묘소 바로 앞까지 도랑물이 들어왔다고 하는데, 지금의 2차선 도로를 내룡으로 보면 영락없이 기다란 고기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이다. 이름하여 유어형(遊魚形) 형국인데, 평범한 지형지물을 살아있는 유기체에 견주어 점혈(點穴)하는 그 발상이 놀랍도록 신선하고 친환경적이다. 이와 같은 발상의 전환이야말로 무대뽀로 밀고 깎고 덮어버리는 우리시대에 더욱 요청되는 덕목이 아닐까.
양남으로 좀 더 내려가다가 2차선 도로를 벗어나 왼쪽으로 들어가면 구만(九萬)이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만주 선배님에 따르면 구만석지기 부자가 나올 양택지(陽宅地)가 숨어 있다고 하여 구만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 앞으로 제법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로 하서천(河西川)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흐르며 구슬처럼 동글동글한 산들이 사방에서 마을을 향해 모여드는 형국이 편안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무룡산(舞龍山: 해발 452m)은 삼태지맥(三台支脈)을 구성하는 주요한 봉우리 중 하나다. 문수산(文殊山), 함월산(含月山)과 더불어 울산의 진산(鎭山) 중 하나로 꼽히고 울산지역 학교들의 교가(校歌)에는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무룡산에는 용과 선녀의 전설이 전해지는 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무룡산 꼭대기에는 연못이 있어 일곱 마리 용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무지개를 타고 옥황선녀 일곱이 연못으로 내려와 용들과 한데 어울려 놀았다.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하늘로 올라갈 시간이 되었으나 용들과 서로 정이 들어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용과 선녀들이 모두 함께 하늘로 오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용들 중에 눈먼 장님용 하나는 하늘로 오를 수가 없었다. 이 모습을 본 마음씨 착한 한 선녀가 장님용이 너무나 가여워서 같이 남기로 하였다. 선녀와 용들이 하늘로 오르던 그 날부터 시커먼 먹구름이 일고 천지를 진동하는 천둥이 치며 장대같은 비가 일주일이나 퍼부었다. 하늘의 옥황상제가 진노한 것이다. 일곱 선녀가 내려가 여섯만 올라왔고 승낙 없이 용들까지 데려온 까닭이었다. 그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다시 무룡산 연못으로 귀양왔다. 한편 눈먼 장님용과 마음씨 착한 선녀는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하늘나라로 등천한 후에 옥황의 조화로 눈을 떠 선녀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땅에 다시 내려오게 된 선녀들은 날마다 근심어린 눈으로 하늘만 쳐다보았지만 용들은 선녀들과 같이 지내는 것이 행복하여 날마다 춤을 추었는데 얼마 지나 옥황의 노여움이 풀려 모두 춤추고 기뻐하면서 하늘로 등천하게 되었다. 그 후 무룡산 정상에는 연못은 없어졌으나 대명지(大明地)가 있다고 하였으며 여기에 묘를 세우면 울산에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울산에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들면 무룡산에 누가 몰래 묘를 세우지 않았나 하고 샅샅이 뒤져 기어이 묘를 찾아내어 파내곤 했다 한다.
무룡산 정상에서는 정자바다와 울산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특히 야경이 아름다워 울산 12경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만주 선배님은 무룡산 정상에서 북쪽에서부터 굽이쳐 흘러오는 삼태지맥을 가리키며 두 곳의 숨은 혈처를 보여준다. 얼핏 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대단한 혈처이다.
무룡산 남서쪽 산록(연암동 산56-3번지 일원)에는 일단(一團)의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그중 오른쪽 제일 위쪽에 있는 묘소가 정해영(鄭海永) 전 국회부의장의 조부 묘이다. 문외한(門外漢)이 보아도 대번에 혈처임으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명당이다. 내룡(來龍)이 다소 급하게 내려와 봉긋하게 잉(孕)을 만든 후 무덤으로 흘러들어가고 그 좌우로 여러 겹의 좌청룡 우백호가 무덤을 감싸고 있다. 무덤 앞으로도 여러 겹의 안대(案對)가 편안한 높이에서 펼쳐져 있다. 특히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면서 비쳐드는 석양(夕陽)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다스리는 불국토(佛國土)를 떠올리게 할 만큼 장엄(莊嚴)하다.
옥상 선배님의 설명에 따르는 묘소 아래쪽에 파놓은 인공연못 때문에 이 묘소의 발복(發福)이 빨라졌고, 그로 인해 손자인 정해영이 엄청난 부와 권력과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해석(海石) 정해영은 1915년 울산 중구 진장동에서 300석 지기로 미곡상을 하던 집안에서 태어나 병영초등학교와 외솔 최현배 선생의 사랑방을 드나들며 학습했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부산 범일동에서 태공정미소를 경영하며 기초를 닦은 뒤 당시로는 첨단산업인 연탄공장을 창업해 19공탄을 처음 개발·시판해 전국 연탄 공급의 3분의1을 차지했다. 그로인해 산림황폐화를 억제하는데 기여했고 32세에 ‘석탄왕’ 칭호를 얻었다. 39세 때인 1954년 울산 을구에서 무소속 출마해 3대 민의원에 당선된 뒤 7선을 했으며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된 제8대 국회에서 부의장을 지냈다.
정해영의 정계활동은 모두 야당생활이었다. 고향후배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야권에 머물렀고 오히려 군정종식을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선생이 후배들을 위해 1955년 서울 성북동에 설립해 1980년까지 운영한 ‘동천학사(東川學舍)’는 울산 출신 서울 유학생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며 사회 각계 500여명의 주요 인사들을 배출했다.
동천은 유년의 꿈을 피운 울산 동천강(東川江)에서 따왔다. 동천학사 출신의 인사로는 고 김태호 내무장관, 최형우 전 내무장관, 안우만 전 법무장관, 심완구 전 울산시장, 박진구·이규정·차수명·차화준·최병국 전 국회의원 등이 있다. 박맹우 울산시장도 동천학사 마지막 기수로 분류되고 있다. 정해영의 동생 정일영은 2선 의원을 지냈고 아들 정재문은 3선 의원을 역임했다.
풍수지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 중 하나는 같은 기(氣)끼리는 서로 감응한다는 동기감응설(同氣感應說)이다. 동기(同氣)가 서로 감응한다는 말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는데, 먼저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조상과 후손은 같은 기를 가지고 있어 조상의 유골을 좋은 터에 모시면 그 영향을 받아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과 자연 사이, 즉 사람이 나고 자란 곳은 그 터와 사람이 같은 기를 같게 되어 좋은 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그 터의 영향을 받아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전자가 음택지에 적용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양택지에 적용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동기감응설에 따를 때 가장 큰 난제(難題) 중 하나는 왜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도 누구는 발복을 하고 누구는 발복을 하지 못하며, 또 왜 같은 집에서 나고 자란 형제라도 누구는 발복을 하고 누구는 발복을 하지 못하느냐는 문제이다.
여기 정해영 선생의 예에서 이와 같은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적선(積善)의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사람들의 가치체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서물(書物)을 꼽으라고 한다면 ‘변화(變化)의 철학체계’ -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卽通)은 그 단적인 표현이 하겠다. - 로 일관하고 있는 주역(周易)이 그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이 주역(周易)의 문언전(文言傳)에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다. '선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는 뜻이다.
비록 자신은 평생을 가난에 허덕이며 살다죽어도 생전에 착하게 살고 남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면 그에게 은혜를 입었던 사람은 그 후손을 도와주게 될 것이고 비록 생전에 많은 권세와 부를 누렸어도 남들에게 지독하게 해악을 끼쳤으면 그가 살았을 때는 위세에 눌려 그 분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가 죽었을 때는 그 후손들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이치가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말 속에 담긴 깊은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명당의 발복은 터라는 자연조건과 적선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교호적(交互的)으로 상호 작용할 때만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정호당 선배님의 포도증류주와 천사 선배님의 고량주와 안장구, 그리고 윤숙 후배님의 종합선물세트에 취해서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하루 종일 좋은 터를 많이 밟아서일까. 간산을 마치고 어둠이 깔리는 도로를 달리는 차안에서는 정신이 얼얼하면서도 기분 좋은 피로가 몰려왔다.
2013년 1월 12일 못은 달을 비추는 거울 月池 |
첫댓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바탕이 되는 외부 환경 변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과 땅입니다.
따라서 오래 동안 우리 조상들이 살아왔던 삶의 터전은 산기슭 강기슭 - 들판가, 물가, 강가였습니다.
울산의 진산은 무룡산이고, 언양의 진산은 고헌산입니다.
문헌을 찾아보면 조선 정조 10년(1786년)에 나온 울산읍지(蔚山邑誌) 산천(山川) 조에
'부(府)의 동쪽 24리에 무리룡산(無理龍山)이 있고, 진산이다'고 기록돼 있고, 울산읍지 뿐만 아니라
동국여지승람이나 문헌비고 등 울산에 대한 옛 기록에는 무룡산을 하나 같이 무리룡산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무룡산이라고 불린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지만, 근대에 와서부터라고 하네요.
아무리 못난 사람도 웃음을 가지면
예뻐보이듯이 비록 음택의 기운을 받지
못할지라도 이웃을 사랑하고 보시하면
후손이 잘되리라 희망적인 말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명당발복을 떠나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사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