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올인" 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대히트 친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한여자를 위해 목숨을 불사하고 온몸을 던져 사랑하게 되는 드라머틱한 장면이 시청자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그정도에는 못미치지만 제 아내와의 만남도 참으로 운명적으로 이루어져 오늘날까지 살아오게 되었기 때문에 부끄럽지만 공개 해 드립니다.
우리 대도의 회원님들중에 기혼자께서는 배우자님과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나요?
저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소 스토리가 길더라도 틈틈히 재미삼아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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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도에 세계적으로 제2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중동의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담합을 하여 하루아침에 석유값을 2배로 올려 버린 것이었다.
에너지원을 석유에만 의존하던 전 세계는 경악을 했고 그 여파로 내가 다니고 있던 기아자동차의 자동차 판매도 하루 아침에
직격탄을 맞았다.
공장에서 생산을 하여도 차가 팔리지 않고 점점 재고만 쌓여지게 되자 우리같은 기술직 사원들도 차출하여
영업현장에 내보내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난 마산에 있는 경남지점으로 내려 가 졸지에 차 세일즈하는 영업사원들과 섞여 영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판매는 무척 어려웠다.
오일쇼크 이전에 고객들이 차량구입 신청을 해 놓고도 6개월씩 기다려야 출고가 되었을 만큼 호경기를 구가하던 시절, 판매사원들이 워낙 고객에게 폭리를 취하고 난 뒤여서 회사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흐려져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디스카운트를 해주고 무이자에 분할가로 싸게 판매를 한다고 하여도 이미 호경기때 판매사원들이 인심을 많이 잃었고 또 불경기까지 겹쳐 판매는 어려울대로 어려워져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3달 동안 5대를 판매하지 않으면 공장으로 원대복귀 시켜주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종일 발바닥이 따갑도록 돌아다녀 보아도 고객들의 반응은 시들하고 때는 여름이라 땀만 뻘뻘 흘리며 하염없이 길거리를 헤메는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내 생전 방문판매 영업이 그토록 어렵다는걸 처음으로 체험 하였다.
첫달은 공치고 둘째달에 운좋게 1대를 팔았는데 그럭저럭 고객이 늘어나 3달동안 겨우겨우 5대를 다 팔긴 팔았다.
그러던 가운데 우연히 마산에 시집 와 있는 친척 여동생 영진이와 소식이 닿아 한번 만나게 되었다.
영진이란 동생은 아내와 대전여고 동창으로서 나에게 처음 이성을 소개시켜준 사람이었다.
영진이를 만났더니 대뜸 하는말이 "남숙이와 요즈음도 연락하며 지내느냐?"고 물어왔는데 난 그때 아내가 어디사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기까지의 결코 순조롭지 만은 않았던 사연을 밝혀야만 다음 얘기가 진행이 되겠다.
원래 아내는 대전에서 살고 있었고 난 대구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 만날 인연이 없을테지만 앞서 말한 대로 친척 여동생 영진이가 펜팔을 하라며 소개 시켜 주어 알게 되었다.
그때가 대학교 2학년 1학기때 였다.
당시는 메일 같은것도 없었으므로 직접 편지를 주고 받는 펜팔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한번 소식이 오갈려면 짧아야 열흘이고 보통 보름 정도는 소요 되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어떤가?
메일이 오가는데 단 몇분이면 충분하다.
그것도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디라도 가능하니 참으로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농경사회 시대에 100년 걸리는 일이 산업사회에서는 1일이면 가능하다 하고 요즈음 같은 디지털 시대에선
1초만에 가능하다고 하니 세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변화의 속도가 엄청 빨랐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아내와 편지가 몇번 왔다갔다 했을 무렵 여름방학이 되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영진이로 부터 "친구들과 함께 무주 구천동에 있는 덕유산에 캠핑 갈 예정이니 오빠도 친구들과 함께 오라"는 편지가 왔다.
그래서 친구 2명을 급히 수배하여 열차를 타고 대구와 대전의 중간 지점인 영동역에서 영진이 친구들과 만났는데 거기에서 처음으로 아내를 만났다.
아내의 친구들은 모두 9명쯤 되었는데 만나자 마자 좀 재잘거린다는 정도를 넘어 정신이 없을 정도로 떠들어 대기에 "충청도 아가씨들이 원래 이렇게 시끄러운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 했다.
덕유산에 가는 버스길은 비포장도 많고 산길이 꼬불꼬불 험했는데 가는 도중 일행중에 한명이 멀미를 한다고 난리법석을 피우다가 겨우 덕유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적당한 야영지를 찾아 아내 친구들의 베낭을 풀어보니 통틀어 텐트가 한개 뿐이었는데 그것 마져도 폴대도 없고 끈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무가지를 잘라 폴대를 대신하고 베낭끈을 전부 풀어서 겨우 텐트를 쳐 주었더니 고맙다는 인사도 없고 오히려 "산에 오면 이런건 당연히 남자들이 해결해 줘야 하는거 아니예요?"하기에 쓴웃음이 나왔다.
다음날 덕유산 정상을 가다가 한 친구가 뻗어버려 응급처치를 하느라 대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내는 수줍음을 좀 타는 성격인데다 거기에서는 인원이 많아 단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도 별로 갖지 못한채 캠핑을 마치고 헤어졌다.
그후 그해 10월 연휴가 있던날 난 비상금을 털어서 대전엘 갔다.
그때도 영진이가 안내를 해 주어 아내가 다니는 공주교대까지 찾아가 만났다.
역시 많은 대화는 나누지 못한채 3명이서 탁구를 치거나 과수원에 가서 과일을 사 먹는등 비교적 단순하고 무덤덤한 데이트를 하다가 대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이듬해 1973년 1월29일 난 공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는데 훈련소가 대전에 있으므로 입대 전날 대전으로 가서 또 아내와 만났다.
그때도 덤덤하게 같이 녁을 먹고 영화를 한편 보는걸 끝으로 그후 엄마는 79년도 다시 만나게 될때까지 7년간 소식을 모르고 지냈다.
공군에 입대 했을때도 훈련을 마치고 가족면회때 행여나 아내가 올것인가?
기대 했지만 오지 않았고, 영진이만 면회를 와 조금 실망이 되었다.
그후 경남 사천으로 부대 배치를 받아 6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다시 김해 비행장으로 배치를 받았는데, 그무렵 아내의 편지가 끊겨 버렸다.
간간히 아내의 모습이 생각 났었지만 아내도 그후 자기집이 이사를 해 버렸고 또 교사로 발령을 받아 서해안 쪽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기에 서로의 소식을 모르고 지낸 채 나도 제대하고 졸업후 서울로 취직을 하는등 각자 바쁜 행진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마산에서 영진이를 만나 비로소 7년만에 아내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난 28살이었고 아내는 26살이었는데 난 그소식을 들으면서도 "아마 결혼을 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영진이가 어느날 대전에 갔다 오더니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면서 연락 해 보라고 내게 아내의 집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그러나 난 수년만에 불쑥 전화를 걸어 상대편이 날 알아보지 못하면 창피할 것 같기도 하고,또 아내에게 그간 "결혼 예정자라도 생긴 상태" 라면 실망만 될것 같아 망설이다가 주머니속에 전화번호를 간직한채 약 한달정도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날 회사 사무실에서 당직을 서게 되었는데 그날이 이른바 그 유명한 "부마사태"가 일어난 날이었다.
78년도 당시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으로 당선된 것도 모자라 영구집권의 목적으로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김영삼씨등을 연금시키자 부산과 마산에서 동시에 데모가 일어난 것이다.
데모대 뒤에서는 소방차가 따라 다니면서 "모든 불을 소등하라" 마이크로 떠들어 대는 어수선한 밤이었다.
그러니 TV도 끄고 신문도 못 보는 암흑천지에서 볼게 아무것도 없었는데,순간 "전화는 가능 하잖아" 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아내집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꺼내 놓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는데 다행히 나를
금방 알아보기에 간단한 인사말을 나누고 "이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한번 만나자"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그후 막상 대전까지 간다는게 또 망설여졌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서울에서 예비군 훈련통지가 왔기에 서울로 올라가 훈련을 마치고 저녘에 고속터미널에서 마산 가는 버스를 타려는데 차표가 전부 매진되어 버렸다.
그러나 대전가는 버스는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일단 대전으로 가 보자!" 싶어 아내의 학교로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연결이 되기에 대전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대전 터미널에 도착하여 아내가 일러주는 대로 어느 레스토랑을 찾아가 만났다.
그때가 79년 8월19일 이었다.
7년만에 만난 아내의 모습은 다소 성숙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는데 옛날 보다 좀 더 활달하고 얘기도 곧잘 하는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일주일 뒤 다시 대전으로 가서 아내의 집에 안내를 받아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니 장모님께서 나와
집안환경에 대해 소상히 물어보셨다.
그러나 당시 나의 아버지는 상당히 편찮으셨고 시골집에다가 장남이라고 하니 아마도 탐탁치 않게 생각이 들었는지, 세번째 만나러 갔을때 아내가 "이제 그만 만나는게 좋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아내는 나를 만나기 얼마전 부모님의 주선으로 맞선을 보았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으면 그사람과 약혼을 할까 긍정적으로 고려중" 이라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서로가 나이도 찬 상태고 또한 7년이 흐른 지금 다시 만나 만약에 잘 추진이 된다면 천만다행
이겠지만 반대로 잘 안되게 되면 공연히 지금의 만남이 시간만 낭비하고 후회만 남게 될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날 아내와 헤어진후 마산으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아내의 말대로 "그만 두는게 정말 현명한 판단일까...." 마산에 도착할때 까지 내내 생각을 거듭하여도 뾰족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마산의 하숙집에 도착해서도 뇌리에서 아내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그로부터 이상하게 며칠동안 잠도 오질 않고 입맛도 없어 밥도 거의 굶은 채 회사에 결근계를 내고 하숙방에 누워만 있었는데 24시간 내내 머리속에서 아내의 모습만은 떠나질 않는게 가슴이 답답해 미어지는것만 같았다.
그런 상태로 며칠이 지나자 심하게 몸살이 나 버렸다.
난 당시 집안의 형편으로 보아 여동생이 결혼하고 나면 30세가 넘어 결혼해야 될것 같아 어떤 여성을 만나도 결코 결혼 대상자로 눈여겨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그때까지 맞선 같은것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자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던 그해에 사형지간이 되는 자형의 막내여동생이 자신이 교사로 있을때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던 후배를 한명 소개시켜 준 일이 있어 몇번 만났는데 그때 상대편이 나에게 결혼하자고 말한 적은 있었다.
그당시 사형도 나에게 "좋은 혼처" 라고 몇번이고 그처녀와 결혼할 것을 몇번이나 간청하였다.
그러나 난 전혀 마음이 움직여지질 않아 끝내 사양하고 말았다.
결혼은 특히 남자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무언가 운명같은 영감(쉬운 말로 "필")이 느껴지지 않는 대상자를 선택하면 분명히 나중에 후회가 따르는 때가 있다고 선배들이 말하였다.
아내와의 만남에서 처음으로 "운명같은 느낌"을 받고 나자 비로소 "나도 이제 결혼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며칠을 고민하고 다 굶어 죽어가는 듯한 내몸에서 이상하게도 새로운 힘이 서서히 솟는것 같았다.
난 그 다음주 일요일 다시 대전으로 가서 아내를 만나 내 심정을 토로 하였다.
그리고 "그 누가 반대를 하더라도 난 반드시 결혼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아내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거의 매주마다 대전을 들락 거렸다.
난 결혼을 할때까지 "몇번을 들락거려야 결혼이 성사되나?" 싶어 그때부터 고속버스표 영수증을 모아 보았는데 모두 57장 이었다.
그러니 그로부터 결혼때까지 1년간을 거의 매주 대전으로 간 셈이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아내도 마음을 열게 되었고 몇달 지나서 약혼식도 올리게 되었는데 그러한 과정을 "내평생 두번하라면 힘들어서 못할 것 같다"만 그땐 젊어서 였는지 몰라도 정말 많은 열성을 쏟아 부었다고
기억된다.
마산에서 지낸지 3개월후 본사에서 원대복귀 하라는 발령을 받고 서울로 발송할 이삿짐을 싸는데 땀이 비오듯 흐르면서 얼마되지도 않는 짐을 다 싸고 나니 지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난 컨디션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마산에 있는 어느 개인 내과병원엘 가니 단순한 몸살이라며 주사와 약 처방을 해 주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며칠간 약을 먹었더니 좀 호전 되었다.
다시 서울로 원대복귀 하여 회사를 다니다가 또다시 심한 몸살기가 느껴졌다.
이번엔 안되겠다 싶어 종합병원에 찾아가서 검진을 받아 보았더니 청천벽력 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간 폐결핵에 걸려 있었는데 그것도 폐에 동전만한 구멍이 뚫려 있는것이 "중증상태" 라며 의사는 즉시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로부터 1년6개월 동안 술과 담배를 끊고 약을 먹어야만 했다.
따라서 술을 피해야 하니 회식자리나 친구들과 만날 일이 없어져 버렸다.
퇴근만 하면 곧장 하숙집으로 와서 매일 책만 읽었다.
그랬더니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시간이 되시면 중3인 우리아들 과외지도를 맡아 달라"고 부탁 하기에 매일 공부를 시켜주었다.
그 덕분에 그집에서 있을때 하숙비는 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휴일마다 대전행을 멈출수는 없어 계속 대전을 들락거렸다.
당분간 아내에게 나의 병을 비밀로 하였다.
그리고 투약을 계속했는데 3개월이 지나 사진을 찍어보니 전혀 낫지를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라는 세브란스병원 흉부외과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이상하다 싶어 담당의사에게 잘 낫지않는 이유를 물어보니 "일주일정도 입원해서 정밀검진을 받아 보라"고 하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담당 의사는 "폐결핵이 아니고 혹시 폐암 일런지도 모르겠다" 고 하기에 그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의술로 폐암이 그정도로 진행 되었다면 거의 살 가망이 없는 것이다.
"그래 인명은 제천이다,하늘에 운명을 맡기자!"고 마음을 추스리며 유서를 한장 써서 하숙집 책상위에 놓고
아무도 몰래 입원을 하였다.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어느날 아내가 회사로 전화를 걸어 나를 찾았으나 입원했다고 하니
깜짝 놀라 "당장 병원으로 오겠다"는 것을 난 대수롭잖은 병이라고 안심시키며 오지 말라고 하였다.
일주일후 다행스럽게도 검사결과는 역시 폐결핵 이었는데 워낙 병이 깊어 평면 사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아 다시 여러 각도에서 투사하는 단층촬영을 하고 보니 그 사진에는 희미하나마 나아가고 있는게 발견되었다.
퇴원후 대전에 가서 아내를 만나 병이 발견된 시점부터 그때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내말을 들으면서 아내는 나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길게 울었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심지어 내가 죽더라도)배우자가 되겠다"라고 했다.
또 반드시 나을거라고 용기도 북돋아 주었다.
그렇게 몇달이 흐른후 양가에서 결혼이 승낙되어 우선 아내 집에서 목사님의 주례로 간단히 약혼식을 하였는데 그후 갑자기 아내가 혼인신고를 하자고 하였다.
난 "결혼식도 하지 않았는데 왠 혼인신고? 내가 어디 도망이라도 갈것 같아?"라고 아내에게 물으니"향후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것인데 서울로 발령을 받으려면 기혼자가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에 그제서야 난 수긍이 갔다.
그래서 고향에 연락드렸더니 보건소에 다니고 있는 어머니께서 면사무소 직원을 잘 알기에 부탁하여 당사자들이 가지 않고도 혼인신고를 마치게 해 주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혼식도 하기 전에 혼인신고 부터 먼저 했는데 막상 나중에 결혼식후 아내가 서울로 발령을 받지는 못했다.
결혼식 날자가 몇달후로 다가 오니 나의 병이 좀 빨리 나았으면 했는데 회복속도가 좀 늦는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 졌다.
문제는 그 병은 "잘 먹어야 빨리 낫는 병"이라고 하는데 하숙집에서는 도저히 잘 먹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하숙집의 주인 아저씨가 좀 개판인 사람이었다.
어느날 몸 보신을 좀 하려고 개소주(개고기를 한약재와 더불어 푹 고아서 짠것)를 한말이나 만들어 주인집 냉장고에 넣어 두었더니 그 아저씨가 그날밤 술 이 취해서 들어와 전기코드를 확 빼 버리는 바람에 상해서 몽땅 내다 버렸다.
아무래도 "좀 빨리 몸을 회복시켜야 되겠다" 싶어 회사에 한달간 병가를 내고 선산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집에서 내가 직접 개를 한마리 잡아 먹으면서 어느정도 소구(잘 먹음)를 했다.
그러나 벽돌찍는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걸 보면서 무위도식 할순 없어 조금씩 일을 거들곤 했는데 어느날
누나가 옷을 사가지고 와 한참이나 이리저리 거울에 비춰보고 있는걸 보고 있자니 난 영 비위가 상했다.
왜냐하면 "늘 돈이 없다고 짜증을 내면서 무슨 옷자랑 이냐?"싶어 한마디 던졌는데 그때부터 기분 나쁜 말이 오가다 대판 싸우게 되었다.
집에 있는것도 마음이 편치는 못했다.
그러는 가운데 아내는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선산까지 나를 한번 찾아 오겠다"고 연락을 하였다.
기계소리 시끄러운 우리집 보다는 밖에서 만나는게 좋을것 같아 구미역에서 만나 금오산엘 같이 올라갔다.
때는 여름이라 금오산의 시원한 폭포가 좋을것 같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길제동굴 등을 구경하며 장래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대구로 내려 가 내가 다니던 경북대학교 캠프스를 보여주고 동촌유원지등을 구경 하다가 대전으로 돌려 보내었다.
사실 결혼전에 아내는 내가 있는 곳으로 만나러 온 적은 통틀어 딱 3번 뿐이었는데, 한번은 이런일도 있었다.
80년도 1월쯤 나의 거듭된 초청(?)끝에 겨우 아내가 나를 만나러 처음으로 서울에 왔었는데 서울 구경을 다 마치고 당일 돌아가려고 고속버스 터미널에 갔더니 고속도로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 그만 버스가 끊겨 버렸다.
그래서 급히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어떤 택시가 합승으로 대전으로 간다고 호객을 하고 있었다.
그 택시엔 이미 어떤 아가씨가 한명 타고 있었는데 아내도 태우면서 택시비를 주고 차가 출발하는걸 본 후 난 시흥동 하숙집으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택시기사의 인상이 좀 고약하게 생겼길래(범죄자 인상이었음) 마음에 걸려 혹시나 싶어 택시번호를
따로 적어 두었다.
하숙집으로 되돌아 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아내는 다짜고짜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서울역 근처 공중전화인데 오늘밤 늦게 대전에 도착할 것 같으니
대전 으로 전화를 좀 해달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자초지종을 물어 볼 여가도 없이 아내는 그 말만 하고 "빨리 기차를 타야 한다" 면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난 "아까 고속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간지 벌써 2시간 이상 지났는데 그동안 뭐하다가 이제야 다시 기차를 타고 간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시계를 보니 이미 밤10시를 넘기고 있었고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는 순간적으로 나를 영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내의 부탁대로 대전에 전화를 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혹시 아까 그 험상궂은 택시기사에게 납치라도 당했다가 탈출한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미치자 마자, 난 후다닥 입은 옷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시흥동 육교밑에서 택시를 잡고 "수원역으로 무조건 최대한 빨리 갑시다"라고 기사에게 재촉했다.
기차는 서울역에서 수원까지 최소한 40분 정도는 걸리므로 내가 시흥동에서 수원역까지 빨리만 가면 그 기차를 탈 수 있을것 같았다.
그런데 도로를 보니 눈이 다져져서 반들반들 하였다.
따라서 속력을 낼 수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합승요금이 천원 인것을 "기사님 4천원 다 낼테니 35분 이내에 수원에 도착하도록 해 달라"고 하자 그 택시 기사는 시속100km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커버 길에서도 마찬가지로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데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꼭 쥐고 가느라 손에도 이마에도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때 아마 택시가 미끄러져 굴렀다면 십중팔구 황천길이었을 것이다만 그 기사는 신들린 사람마냥 쌩쌩 달렸다.
지금 생각하니 난 그 당시 무지하게 마음이 급해서 재촉했지만 그 기사는 뭣 때문에 단돈 4천원에 목숨걸고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달렸는지? 궁굼하다.
하여튼 무사히 수원역에 도착하여 표를 사서 개찰구에 들어서니 저만치서 기차가 플렛폼으로 들어 오는게 보였다.
급한 나머지 계단을 2개씩 건너뛰어 마악~출발 하려는 기차에 겨우 올라탔다.
그리고 아내를 찾으러 전 객차를 뒤졌는데 이게 왠일인가? 아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혹시 화장실에 있나 싶어 화장실 문까지 전부 두드려 확인하여 보았는데 아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까 아내로부터 받은 전화는 납치범에 의해 강제로 말한 것인가?" 별의별 상상이 다 들면서 점점 더 불안해 졌다.
그러다가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 "내가 너무 급해서 기차를 잘못탔나?"싶어 표를 확인 해 보니 손에는 분명히 대전행 기차표가 쥐어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이 열차는 대전역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것이고 10분 뒤에 서대전역을 거쳐 광주로 가는 열차가 또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말을 듣는 순간 밖을 보니 열차는 마악 천안역에 도착하려는 중이었다.
난 천안역에서 후다닥 내렸다.
당시는 12시 부터 통행금지 였는데 벌써 자정을 넘겼고 온천지는 눈으로 하얗게 덮혀 있었다.
벤치에 앉아 뿌연 수은등을 보고 있자니 "이 흰새벽에 무슨 난리냐?" 싶은 생각이 드는데 문득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오마샤리프가 내전을 피해 피난하던 도중 기차역에서 집단으로 누워 기다리던 그 장면이 떠 올랐다.
10분이 내게는 한시간 같았는데 잠시후 플랫폼에 또 한대의 열차가 씩씩거리며 힘차게 들어서는 모습이 보이는게 아닌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내리고 나서 객차에 들어섰더니 그칸 통로에 바로 아내가 보였다.
순간 아내는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아내는 시흥동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잘 모르므로 내가 천안에서 어떻게 그열차를 탈수 있었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생각하는듯 했다.
둘다 정신을 차리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 택시기사는 고속도로로 가긴 갔는데 역시 눈 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게 되자 시내를 빙빙돌다 결국 서울역에 내려 주며 기차를 타고 가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내 옆을 보니 처음 합승하기 위해 탔던 그 아가씨도 보였다.
그런 인연으로 우리 일행3명은 서대전역에 내려 여관방을 하나 얻어 같이 자게 되었다.
왜냐하면 통행금지가 있던 때 이므로 12시만 넘으면 택시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처음으로 아내와 같이 밤샘을 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 "쌩쑈"를 하고서 밤새 한숨도 못자고 다음날 난 다시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타고 회사로 출근을 했는데
그날은 하루종일 졸려서 애를 먹었다.
얘기를 원위치로 돌려서 고향집에서 요양을 하는둥 마는둥 하고 다시 서울로 가 업무에 복귀하니 처음있던 부서에서 다른 부서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화물차량에 각종 특수장치를 부착하는 "특장차부"라는 곳에서 협력업체에서 납품하는 각종 부품의 검사업무를 맡게 되었다.
따라서 나의 전공분야 와는 달리 금속이나 기계를 알아야 하고 도면도 볼 줄 알아야 하는 생소한 분야를 접하게 되었지만 난 관련책자나 자료를 보면서 공부해 가며 무난히 업무를 수행해 나갔다.
난 기아자동차 퇴사 이후에 다시 생소한 삼성생명,삼성화재와 같은 보험업무도 수십년 하였으며 지금은 주물이나 특수재료를 다루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누구나 전공과 다르더라도 관심과 집중하는 노력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다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품 검사일을 맡아보니 자연히 외부의 협력업체와 연계가 되었는데, 협력업체의 입장에선 납품을 할때 우선은 검사에 합격해야 창고에 입고를 시킬 수 있고 차례로 자재과의 결재를 거쳐 경리과에서 대금을 받을 수 있으니 막강한(?)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한번은 협력업체의 승용차를 빌려 타고 대전에 가서 장인,장모님을 모시고 아내와 같이 김천 직지사를 다녀 오기도 했다.
지금은 승용차가 보편화 되어 있지만 당시는 승용차를 타고 놀러 간다는건 서민들 형편으론 아무나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정부의 에너지절약 시책 때문에 일요일은 휘발유를 판매하지 않아 미리 말통에 기름을 사 놓고 트렁크에 싣고 다녀야 장거리도 여행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드디어 결혼식 날자를 잡게 되었다.
아내의 집안에선 기독교를 믿었고 나 또한 미신 같은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사주단자니 궁합이니 택일이니 하는건 일체 물어 본 적이 없고 그저 "서로 기억하기 좋은날로 잡자"고 고르다 보니 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다.
또한 그날은 "개천절"이어서 평생 공휴일에 결혼기념일을 기억 할 수 있고 또 하늘이 열린날"이 좋겠다고 합의하여 1980년 10월3일을 잡았다.
당시 장모님께서 다니시던 교회의 목사님을 주례로 하고 예식은 대전의 라이카예식장에서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내가 결혼식 날자를 잡고 고향집으로 가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목놓아 큰 걱정을 하셨다.
왜냐하면 집안에선 단돈 1원도 보태 줄 돈이 없었고 나 또한 남동생 대학 등록금을 대고 집안에 용돈도 부쳐 드리고 하느라 모아 놓은 자금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 지금까지 사전에 생각은 충분히 하지만 돈이 없다고 해서 결코 걱정하지는 않았다.
돈은 사람을 위해 있는것 이므로 노력하면 다 해결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사고는 사람의 운명까지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모하게 덤비거나 모험, 투기등은 위험하니 피해야 한다.
지금도 아내는 나에게 가끔 "양복을 새로 사 입으라"고 한다.
그럴때 마다 항상 "난 필요없다!" 라는 대답과 함께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살것"이라고 말한다.
결코 내가 양복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금의 수입으로 매달 양복 한벌씩 사 입는다 하더라도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러나 난 기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 삼성생명이나 삼성화재에 다닐때는 난 양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회사에 나가면 소장때는 물론 과장,지점장이 되었을때 부하직원이나 상사가 있고 또 늘상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이므로 깔끔한 양복을 입고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그렇질 않다.
그리고 지금 양복을 새로 사기 시작하면 자연히 과거에 가지고 있던 양복은 안입게 되어 장농안에서 잠자다가 유행이 지나면 하나 둘씩 버리게 된다.
자연히 낭비가 따를 수 밖에 없다.
또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
아직은 아이들이 결혼도 다 하지 않았고 언제쯤 어느 여건에서 살게 될지 알 수 없다.
작품으로 비유하자면 아직은 미완성품인 셈이다.
향후 아이들이 이사회에 나가 훌륭히 제몫을 하며 자리 잡을때 까진 여전히 나의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 항상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단돈 만원이라도 남으면 저축을 하며 지내야 하는게 당연하다고 본다.
난 과거에 저축을 할땐 일단 저축 목표액을 세우면 무조건 저축하고 나서 남은 돈을 썻다.
쓰고 나서 남는 돈을 저축 하려면 평생 가도 목돈을 만들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성에서 퇴직 후 몇년간 양복을 입다가 험하거나 떨어진것은 하나씩 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원래 속담에도 "주머니에 돈이 그득한 사람은 싸래기 밥을 먹어도 든든하고 겨울에 홑적삼만 입고 다녀도 춥질 않다"고 했다.
내실이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이 결혼을 하기전 사돈댁과 인사를 나눌때 쯤이면 과거의 양복도 별로 없을 것이고, 또 어차피 새로
살때도 될때 일 것이므로 좋은 양복을 사 입으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내심을 아내는 잘 모를때가 많을 것이다...
각설하고 아내와 상의하여 결혼식 날자를 잡고 나니 사실 나도 좀 갑갑했다.
그때까지 취직후 3년간 월급을 타서 전부 우리집 가족들을 위해 다 써 버리고 수중엔 한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게 상심하진 않았다.
우선 같이 살 방부터 알아 보아야 했는데 회사 정문으로 나가면 시흥동이며 서울지역 이어서 방한칸 짜리가 전세로 300만원 정도 했지만 후문으로 나가면 "시흥군 소하리" 라는 시골로서 100만원 정도에서 구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인천 경기은행에 다니고 있는 고종사촌 봉진이 형에게 적금대출로 100만원을 빌려서 방은 해결하고 결혼예물 비용은 회사의 새마을금고에서 빌리고 또 동료 이름으로도 대출을 내어 해결하였다.
그런데 신혼여행 경비가 약 30만원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았는데 짐작 해 보니 축의금이 그정도는 들어올것 같아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미리 여행사에 예약을 하자니 우선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산으로 가 사업상 현금을 만지고 있는 누나에게 "축의금이 들어오면 갚아 줄테니 30만원만 빌려 달라"고 했다.
당연히 내가 그동안 집안이나 누나에게 도움을 준걸 감안하면 선뜻 누나가 그냥도 줄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누나는 의외로 "돈도 없는데 어떻게 빌려 주느냐?"고 하면서 불평을 하는게 아닌가?
성질 급한 나는 "빌려주기 싫으면 그만둬라!"면서 또 한번 대판 싸웠고 어머니께선 자식이 결혼 한다는데 부모가 되어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울상을 지으셨다.
결국 30만원을 빌리긴 하였고 난 신혼여행 후 곧 바로 갚아 주었는데 지금은다 지나간 일이라 잊어버렸지만 당시엔 무척 서운했었다.
봉진이 형에게 빌린 100만원으로 회사 후문 근처의 시흥군 소하리에 있는 방한칸을 전세로 빌렸다.
그 방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조그마한 부엌이 있고 다시 쪽문을 열면 방이 있는 그런 구조였는데 방 크기는 좋았지만 양사방이 건물벽에 갇혀 있는 위치여서 좀 어두컴컴 했다.
방을 소개하는 아줌마는 "신혼부부인데 좀 컴컴하면 오히려 더 좋지 않냐?"면서 농담을 하길래 계약을 하고
방수리에 들어갔다.
요즈음은 집주인이 도배도 다 해주고 하지만 당시엔 워낙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서 그런지 주인은 배짱으로
세를 놓고 도배나 수리는 세입자가 해야만 했다.
일요일날 도배지를 사서 나 혼자 하루종일 도배를 했다.
그런데 부엌을 보니 연탄 아궁이여서 그런지 벽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기에 회사에서 흰색 페인트를 얻어다가 전부 칠하고 나니 부엌이 조금은 훤해 보였다.
수리가 다 끝나자 나는 아내에게 자랑(?)도 할겸 그다음 일요일날 만나 우리가 같이 살 신혼 살림방을 보여
주었는데 아내는 다 둘러본 뒤 버스를 타고 갈때 왠지 얼굴이 굳어 지는가 싶더니 별 말이 없고 나중엔 우는것 같았다.
난 속으로 "아내가 내 노력에 감동해서 우는걸로 짐작" 했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그때 "이런 시골구석 같은 동네에다 방도 그런데서 어떻게 사나?"싶어서 실망스러워서 울었다는 것이다.
하여간 동상이몽 이라더니...
80년 10월 3일 대전 라이카 예식장에서 양가 어른과 친지를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친지는 물론 기아자동차의 직원들과 고향 친구, 대학교 동창, 군대시절의 선.후배까지 하객들이 많이
참석해 주었다.
물론 아버지께선 편찮으셔서 참석치 못하시고 대신 삼촌이 혼주석에 참석했다.
요즈음 처름 비디오 촬영이 없어 녹음만 해 놓았는데 다시 들어보니 목사님의 주례사가 좀 재미있다.
"두 사람은 향후 합심 노력하여 반짝반짝 빛나는 유니나(주방세제 이름)처름 살림 잘 살아라"고 하여 하객들이 웃었다.
신혼여행은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제주도로 갔는데 처음 가 보는 제주도는 관광지로서 훌륭하였고 참 아름다웠다.
2박3일간 택시를 대절하여 다녔는데 기사가 사진사 역할도 해 주어 사진을 많이 찍고 왔다.
별탈없이 2박3일간의 신혼여행을 마친후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아내가 "대전 아래로는 한번도 가 본적이 없다"고 하기에 우리는 경주에 들러 하루동안 관광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공항에서 곧바로 고속버스 터미널로 택시를 타고 갔더니 공교롭게도 막차는 이미 떠나 버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왠 택시기사가 "경주,경주!"하면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일명 "나가시 택시"라 하는데 경주의 택시가 부산에 손님을 내려놓고 빈차로 돌아가면 기름값이 아까우니 싼 요금으로 합승하여 다시 되돌아가는 차 였다.
먼저 우리가 타고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다른 손님 한명을 태웠는데 그는 울산 가는 손님이었다.
따라서 울산을 경유하여 경주로 가게 되었는데 택시 기사의 속셈은 울산으로 가서 다시 경주로 가는 손님을 합승하여 가려는 욕심으로 아마 기차시간에 맞추어 울산역에 도착할 계획을 잡은것 같았다.
하지만 기사는 출발 후 부산시내에서 울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잘 몰라 이리저리 물어가며 헤메는 바람에 시간을 많이 허비하게 되었다.
겨우 울산가는 국도를 찾아 시외로 들어서자 마자 택시기사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은 마침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내가 봐도 좀 조마조마 할 정도로 90키로 이상의 속력을 내었다.
하지만 "택시기사 이니 운전은 알아서 하겠지.. "생각하며 좀 피곤하기도 하여 눈을 감은채 나의 왼팔을 아내의 목에 감고 반은 졸면서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참후 울산시내에 들어서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차가 급정거 한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택시 앞 유리가 박살이 나면서 내 얼굴에도 유리파편이 튀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없었는데 잠시후 정신을 차리고 차 밖으로 나와보니 그 택시는 주유소에서 좌회전을 하며 나오고 있는 트럭의 뒷바퀴를 정면으로 들이받은 상태였다.
기사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고 택시는 앞부분이 심하게 찌그러짐은 물론 엔진커버가 깨질 정도로 엄청난 충돌을 하였던 것이다.
바로 길 건너 파출소가 있어 경찰이 뛰어오고 가던 차들이 멈춰서고 그야말로 아수라장 이었는데 난 순간적으로 아내가 걱정되어 살펴보니 아내는 잠자다가 충돌하는 순간 깨어나서 놀랬긴 하였지만 다행히 외상은 멀쩡해 보였다.
나도 다친데는 없는것 같았으나 앞 이빨이 좀 흔들거렸다.
그즉시 병원으로 옮겨져 X-레이도 찍고 몇가지 검사를 받았는데 가벼운 타박상 외에는 별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십년감수 했다!" 면서 겨우 한숨 돌리고 근처 여관을 찾아 자고 막상 아침에 일어나니 걸음을 못 걸을 정도로 온몸이 쑤시고 결렸다.
다음날 아침부터 경찰에 가서 조서를 쓰고 경찰의 질문에 이것저것 답변하느라 황금같은 하루가 다 흘러 가 버렸다.
그래도 목적대로 그날 저녘 경주로 갔는데 사고를 낸 택시기사가 일러준 대로 불국사 근처의 여관으로 가서 자고 나니 그다음날 아침 택시기사가 찾아왔다.
그 기사도 고의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과실이 크다며 우리에게 "다른 택시로 무료 관광을 시켜 주겠다"고 하였지만 그때부터 택시는 보기만 해도 겁이나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우린 순회버스를 타고 관광을 다녔다.
하마트면 둘다 하루라도 한집에서 살아보기 전에 교통사고로 죽을뻔 했지만 명이 길어서 그런지 그후로도
별탈이 없었다.
몇년전 인도양에서 쓰나미가 발생했을때 외국의 바닷가로 여행간 신혼부부가 자고 있는 사이 파도에 쓸려 가 시체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처름 사고는 우리 인생에서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우리 아이들도 평생 운전을 하며 살아가야 할건데 운전은 "정말 조심 또 조심해야 함을 명심"하라고 강조한다.
과거 삼성생명에 다닐때 동료 한명이 대구에서 포항으로 전근 되었는데 자신의 자가용으로 월요일 아침 새벽에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영천을 지날때쯤 큰 유조차가 전복되어 누워있는걸 보고 급히 차를 멈춰 세웠다.
그 경우 당장 차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춥다며 차안에서 마냥 앉아 있다가 몇분 후 뒤에서 달려오는 20톤 대형트럭이 그대로 들이받는 바람에 차안에서 오징어같은 형태로 즉사하고 말았다.
그와 같은 경우에 일본에서는 운전면허 교습시 "즉시 차에서 내려 길 바깥으로 피신하라"고 교육을 시키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교육이 없으니 방심하다가 죽고만 것이다.
또한 접촉사고가 났을때도 갓길에서 서성거리다가 대형차에 치여서 죽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고속도로에서는 200미터 후방에 삼각대를 세워놓고 수시로 차가 오는것을 보며 경계해야 하고 특히 밤에는 갓길 추돌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아무튼 죽은자만 억울한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딸 한별이가 태어난후 어릴때 우리 부부 신혼여행의 사진들을 보더니 "난 왜 여기 안 데려 갔어?"라고 하기에 우리는 한참이나 웃었다.
제주도는 결혼하고 10년후쯤 지용이가 중학교, 한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무렵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다시
한번 더 갔었는데 그때도 택시 기사가 우리 가족들을 힐끗 보더니"선생님, 그동안 농사 참 잘 지어서 오셨네요"하여 또 웃었다.
지금은 노후걱정도 없이 어느정도 안정적으로 살게되었고 다행히 아이들도 무난히 다 졸업하고 취직을 하였지만 지나간 세월들을 생각하면 산을 몇개나 넘은것 같은 심정이다.
그리고 흘러가 버린 젊은시절이 무상하고 지난가버린 역격의 세월들이 너무나 무심하다.
말 그대로 인무상이여라.....
그래서인지 어느날 부터 난 아래의 성철 큰스님의 出家詩(출가시)좋아하게 되었다.
彌天大業紅盧雪(미천대업홍로설)
-하늘에 넘치는 큰일은 붉은 화롯불에 한점의 눈송이요-
跨海雄基赫日露(과해웅기혁일로)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일지라도 밝은 햇볕에 한방울 이슬일세-
誰人甘死片時夢(수인감사편시몽)
-그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超然獨步萬古眞(초연독보만고진)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것 버리고 나홀로 걸어 가노라-
회원님 여러분 미천한 제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요한 드림-
첫댓글 그 열정 지금까지 죽~~~~~~~대단도 하셔라.......잘 봤습니다.
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한님! 1편의 대하소설 같은 사모님과의 러브스토리 너무 잼나게 잘 읽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순애보이군요1 항상 낙천적이고 적극적으로 사시면서도 인생의 고비마다 산전 수전 공중전 해상전 다 겪으신 인생 풍파에 경의를 표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건필 바랍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나게 사시는 형님을 뵈니 저도 즐겁습니다. 건강하세요...
고맙네 아우님 조만간 함지산 벙개 함 하세나. 그런데 자네 휴일 스케줄 쪽지로 라도 좀 보내주게나. 자네 휴일에 맞추어서 벙개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