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숲찾아 .27] 전남 화순 운주사 석탑·석상림 | ||||
題字 : 土民 전진원
不可思議 그대가 가지고 가야할 것 '상상의 날개'
인간 삶에서 불가사의한 일이 없으면 재미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해되면 무슨 맛이 있겠는가. 인간의 지각능력으로는 알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현상이나 유물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우리의 삶을 오히려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천불천탑(千佛千塔)'이라 불리는 '운주사 석탑(石塔)·석상(石像)림'은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불가사의요 미스터리라 할 만하다. 규모나 형태 면에서도 대단한 데다, 이같은 조형물을 누가·언제 만들었는지, 왜 조성했는지 전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여러가지 설이 난무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그 실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는 유적이다. 나른한 봄날의 기운을 타고 운주사 유적이 이끄는 상상의 세계를 거닐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리라. #석탑 20·석상 100여기 운주사(雲住寺·'運舟寺'로도 표기)는 전남도의 중심부인 화순군의 도암면 대초리에 자리잡고 있다. 나주시와 장흥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도암면은 무등산 줄기가 뻗어 내려와 야트막한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곳 산야지대의 깊숙한 계곡에 위치한 운주사는 길을 따라 찾아가기 전에는 외부에서 식별하기도 쉽지 않다. 이같은 지리적 환경은 별다른 보존 노력 없이도 오랜 세월 동안 그 유적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최근 세운 일주문은 여느 사찰처럼 평범하지만, 이 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색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해발 200여m의 천불산(千佛山) 계곡 안쪽으로 길게 펼쳐진 평평한 협곡의 잔디밭 중앙으로 석탑들이 이어지고, 평지 옆 암벽 곳곳에는 석상들이 늘어서서 반대편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다. 법당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신기하고 놀랄만한 일이 더해진다. 우리나라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석탑이나 석상이 즐비하다. 기하학 문양이 새겨진 석탑을 비롯해 비행접시를 포개놓은 듯한 원반형 탑이 있는가 하면, 서역에서나 볼 수 있는 석조 불감(佛龕)도 있다. 석탑이나 석상은 산 허리 곳곳에도 세워져 있다. 왼쪽 산등성이로 올라가면 운주사 유적군의 정점을 이루는, 유명한 와불을 만나게 된다. 이런 석탑과 석상을 돌아보면 이곳이 한국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만하다. 현재에는 20여기의 석탑과 100여기의 석상이 남아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변 주민들이 이곳의 석탑이나 석상 등을 가져가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했다고 하니 원래는 지금보다 훨씬 수량이 많았을 것이다. 곳곳에 남아있는 파편에서도 석탑·석상림으로 불러도 될 굉장한 유적이었음을 읽을 수 있다. 천불천탑은 안되더라도 수 백기가 계곡을 가득 채우며 석탑·석상숲을 이루었을 원래의 유적군을 볼 수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 유례가 없는 모양·배치 석상은 흔히 석불(石佛)이라는 명칭으로 일괄해서 부르고 있으나, 정확한 명칭이 아닌 것 같다. 불상도 모습이 있지만, 보통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석탑은 불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불교 신앙과 관련 없어 보이는 탑도 적지 않다. 실패 모양의 탑, 항아리 모양의 탑, 자연석 그대로 쌓은 탑 등이 그 예다. 운주사 유적을 불가사의로 이끄는 가장 대표적 유적은 왼쪽 산등성이에 있는 13여m 길이의 와불(臥佛)과 그 아래쪽 산허리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북두칠성 형상의 석판이다. 계곡 평지 탑열 중심에 있는 석조불감과 석탑의 탑신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들 또한 마찬가지다. 와불은 부부를 함께 새긴 부부불로 보이는데, 남편불은 앉아있는 좌상이고 아내불은 서 있는 입상인 채로 누워있다. 누워있는 모습도 머리쪽이 낮고 다리쪽이 높아 그야말로 벌렁 누워있는 꼴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통상적인 와불이라고 할 수 없다. 북두칠성 형상의 석판을 사찰 내에 배치해 놓은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고, 그 규모 또한 엄청나다. 원반형 석판의 규모는 평균 지름이 3m, 평균 두께는 35㎝ 정도이다. 그 중에는 4m 지름에 50㎝ 정도의 두께를 가진 것도 있다. 게다가 이 칠성바위 한쪽에는 7층의 탑까지 세워져 있어 바위들이 뭔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만들어졌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불감(불상을 모시는 감실) 내부에는 중앙 부분에 판석으로 된 벽이 있어 공간을 이등분하고 있고, 각각의 공간에 석불좌상이 있다. 석불을 이처럼 불감 안에 모신 경우는 우리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 불감 북쪽에 있는 원반형 탑도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탑이고, 불감 남쪽으로 있는 탑의 탑신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도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 해상왕 장보고 추모 유적? 이런 유적들이 오늘날 최대의 불가사의로 남아있는 이유는 그 내력을 밝혀주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기록문화 정신으로 볼 때 이는 매우 유별나다 하겠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그저 단편적으로 유적을 소개하는 것일 뿐이고, 그나마 직접 답사해 확인한 것이 아니라 인근 주민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를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운주사에는 다른 어떤 유적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설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석탑이 각 천개씩 있다. 또 석실이 있어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 동국여지지에는 "운주사는 천불산 서쪽에 있다. 사찰은 오래 전에 폐허가 되었다. 계곡 좌우에는 크고 작은 석불·석탑이 많은데, 이를 천불천탑이라 한다.…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때 조성되었다고도 하고, 혹은 고려 때 승려 혜명이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와서 조성했다고도 한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의 공통점은 도선 국사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운주사에 관한 설화들이 대부분 도선국사를 주인공으로 해 전개되는 현실과는 다른 점이다. 운주사 유적에 대한 설화로는 도선국사가 신라 말 '새로운 세상을 오게 하기 위해' 또는 '산천비보를 위해' 창건했다는 설이 가장 일반적이며, 신라 말~고려 초에 능주 지방 호족세력의 후원으로 건립되었다는 설과 민중들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설, 이민족 건립설 등이 있다. 이런 기존의 설에 더해 최근 운주사 유적은 신라 말기의 해상왕 장보고를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소설가인 최홍씨는 최근 펴낸 '한국의 불가사의 천년의 비밀 운주사'라는 저서를 통해 운주사는 청해진 잔존세력이 중심이 되어 조성한 장보고 추모 유적지라고 주장했다. 다양한 모습의 석상군은 당시 신라인들과 함께 활동하던 외국인들을 표현한 것이고, 와불이라 불리는 와상은 장보고 부부라는 것. 그리고 유적 전체는 배의 형상이고, 산허리의 일부 탑은 장보고 선단의 주요 무역거래 품목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유적을 남긴 선조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