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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山 西部地域의 歷史와 文化
일송 한 길 수
역사유적 탐방은 호기심이 왕성할 때 현장을 찾아야 실감이 나고 그 현장내용이 오래 기억되면서 감동이 깊지만 나이 들어 지팡이에 의지하며 현장을 살펴보고 설명을 들어보았자 그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가 없어 개미 바위 지나듯, 인도 원숭이가 고궁 지붕을 지나듯 하여 가슴이나 손바닥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2017년 10월 27일 오늘은 광진구 시우회 운영위원들 25명이 광진구와 우호도시 결연을 한 익산시의 한 사회복지시설을 찾아가 위문을 하고 겸해서 익산 서부지역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고 문화현장을 직접 답사하기로 한 날이다.
08;00 정각에 구의동 옛 방지거 병원 앞에서 관광버스가 출발했다. 박병국 회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이인호 사무국장의 오늘 행사에 대한 안내가 있었다.
경부고속도로로 달리다가 논산-천안고속도로 바꿔 차령터널을 지나면 왼쪽으로 한말의 풍운아 김옥균 선생의 집터가 나온다. 전국에서 밤 생산지로 유명한 정안휴게소에서 잠간 숨을 돌리는데 익산 국화축제에 참가하는 익산향우회 권영근 사무처장과 이리여고 총동문회장을 역임하신 유순임 여사를 우연히 만났다.
“우리향우회 행사에 불참하고 어디를 가시느냐?” 고 묻기에 익산시 용안에 있는 불우 아이들이 있는 시설을 방문하고 우리도 국화축제에 참석 할 것이라고 했더니 그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우리들은 논산 벌을 가로지르는 길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친다. 그러나 논산과 강경은 한민족이 살아온 역사, 감춰진 이야기가 있고 많은 역사 유적이 있는 곳이다.
논산은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한반도의 단전부위에 위치한 중요한 힘의 원천지로서 선사 시대부터 조상들이 정착하여 온 곳으로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다.
충청남도 논산시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강경은 북쪽의 평양, 경상도 지방의 대구와 함께 조선시대 3대시장의 하나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곳으로 1900년대 초 까지만 하여도 함경도 원산항과 더불어 우리나라 2대 포구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아마도 강경이 금강을 끼고 있기에 물자운송이 용이하여 전라도와 충청도의 물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북적거리게 되면서 커다란 시장이 형성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일찍부터 논산을 제치고 은행이 여기에 있었고 금융조합과 전당포가 있었으며 전통 있는 강경상업학교가 개교되었다. 또한 읍도 논산보다도 먼저 되었고 경찰서와 검찰 법원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 유명세를 알만하다. 강경시장에서는 일반물자 외에 서해안에서 잡아온 수산물을 거래하면서 수산물의 보관처리 방법의 하나로 염장과 발효과정을 거친 젓갈을 판매하게 되었는데 강경읍내에는 강경의 대표적인 특산물인 젓갈을 홍보하고 판매 촉진하기 위하여 2004년에 개관한 강경젓갈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강경의 명물 옥녀봉은 논산 8경 중 하나로, 송재정이라는 정자에서 강경읍내와 금강을 조망 할 수 있는 최적지이다. 옥녀봉 정자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거칠 것이 없이 훤하고, 논산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부여와 익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고, 평야와 금강이 조화를 이루고 저 멀리 노령의 연봉이 배경처럼 서 있어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한다.
옛날 이 산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아주 맑았고, 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었으며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이 있어 경치가 더없이 좋았다고 한다. 때문에 옥녀봉은 달 밝은 밤에 하늘나라 선녀들이 이 산마루에 내려와 경치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맑은 강물에 목욕을 하며 놀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옥녀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옥녀봉 봉수대는 전북 익산 봉화산의 봉수를 받아 황화산성, 노성봉수로 연락을 취하던 곳이다. 송재정 바로 아래편에는 국내 최초의 침례교회 예배당 터가 자리하고 있어 교회 관계자들의 성지순례지로도 유명하다.
맨 처음 우리가 도착 한 곳은 강경을 지나 익산시 망성면에 있는 사적 318호인 화산성당 일명 나바위 성당이다. 우리가 도착 하니 익산시청에서 기획예산과장 조창구씨와 기획계장 김재준 외에 담당 직원인 조은지가 와서 우리들을 맞이했다.
성당의 사목회장이신 김택영씨가 앞장서서 우리들에게 설명 해 준 내용은 이러했다.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는 화산(華山)이 있는데 이는 산이 너무 아름다워 우암 송시열이 붙여 준 이름이다. 화산의 한쪽으로는 금강이 굽어 흐르고 또 한쪽으로는 은진과 충청도로 펼쳐지는 광활한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언덕이다. 이 산의 줄기가 끝나는 곳 깎아지른 절벽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이를 ‘나바위(羅巖)’라고 한다. 이 산 기슭의 바위에는 마애3존불을 조각한 곳이 있어 물을 이용하는 뱃사공들의 무사안녕을 빌던 곳인데 지금도 부처님 상이 남아 있다.
이곳은 세곡을 실어 나르는 나루터였고 정부미 창고가 있었는데 나암창(羅巖倉) 또는 황산창(黃山倉)이라 하였다. 성당이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나바위 성당은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조선 헌종(憲宗) 11년 1845년에 중국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하던 중 배가난파선이 되었기에 간신히 페레올주교, 다블뤼신부와 함께 황산나루터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6년에 지은 건물이다. 김대건 신부 일행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베르모렐(Vermorel,張若瑟,1860~1937, 요셉) 신부가 1897년에 본당을 설립하고, 1906년에 성당 건물을 신축 완공하였으며 화산 정상의 김대건 신부 순교비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에 세워졌다. 성당 내에는 전통 풍습에 따라 남녀의 예배석이 칸막이 기둥으로 구분되어 있고 성당 내 제대 감실 안에는 김대건 신부의 목뼈와 다블뤼 신부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1908년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계명학교를 세워 학교에 가지 못한 젊은이들을 가르친 일도 있고 1949년에는 시약소를 설치해서 농촌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진료도 실시한 일이 있다.
이곳 화산에서 강경 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황산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에 유학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이곳에 사계 김장생은 임의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우암 송시열은 팔괘정을 지어 후학을 길렀다. 또한 송시열은 팔괘정 뒤편 암벽에 청초암, 몽계벽이라는 글씨를 새겼으며 화산 서쪽 바위에도 화산이라는 글씨를 썼는데 지금도 뚜렷이 남아있다고 한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특설 매장에서 이곳 방문 기념으로 어리굴젓 1병을 사가지고 다시 승차하여 담당직원 조은지의 안내로 용안읍내를 향하여 달려갔다. 가다보니 읍내 못미처 왼쪽에 있는 [삼세 오충렬사]에서 제사가 있었는지 참례자와 학생들이 열을 지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삼세오충열사는 3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순절한 해주오씨(海州吳氏) 五忠臣의 유적이 있는 곳이어서 우리들도 참례를 하여야 마땅하나 시간의 제약으로 그냥 지나치자니 자꾸 뒷덜미를 잡는다.
이곳에는 오응정(吳應鼎)과 그의 아들 욱(稶)과 직(稷), 그리고 직의 아들 방언(邦彦)을 배향하여 사충사(四忠祠)라 하였으나 근년에 오응정의 아들 동량(東亮)을 추향하여 오충열사(五忠烈祠)라 부르고 있다. 오응정(1548∼1597)은 이곳 용안출신으로 자는 文中, 호는 완월당(翫月堂)이다. 조선 선조 7년(1574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에서 치적(治積)을 쌓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순천부사 겸 총 병부 문안사(順天府使兼總兵府問安使) 전라도 우방어사(全羅道右防禦使)가 되어 어모장군(禦侮將軍) 욱, 동량과 더불어 丁酉再亂 때 남원성(南原城) 전투에 참전하여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게 되자 화약더미 속에서 세 부자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오응정의 차남 오직(1574∼1619)은 광해군 때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康弘立) 막하의 우영천총(右營千摠)으로 요동 심하 전투에 출전하였으나 강홍립이 후금 군에 항복하자 격분하여 적과 끝까지 싸우다가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방언(1588∼1637)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청군과 싸우던 도중 인조가 굴욕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한강에 투신자살하였기에 나라에서는 이를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7년(1681)에 충열사를 세웠다.
우리는 용안 읍내를 살짝 비껴나서 사회복지법인 중도원 장애영유아 거주시설인 [맑은집]에 도착했다. 이곳은 원불교 재단에서 운영을 하고 있는데 원불교 성직자인 빅용민 원장을 위시하여 사무국장과 직원들이 함께 우리들을 맞이했다.
우리가 준비해 간 기념품을 정리하여 맑은 집 앞에 쌓아놓고 인계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다음에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맑은집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가서 차 대접을 받고 현황설명을 들었다,
[밝고 맑고 훈훈하게]라는 원훈으로 2007년 3월 9일 개원한 이 시설은 장애영유아의 행복한 삶과 사회통합이라는 비전을 제시하여 현재 37명의 영유아가 생활하고 있다.
맑은집, 밝은집, 훈훈한집등 3개동의 건물이 있는데 맑은 집에서는 귀여운 영유아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밝은 집에서는 중증장애인들이 이용하고 있고 훈훈한 집에서는 지적 장애가 있는 성인들이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계간으로 [누리 in]이라는 소식지를 발간하고 있으며 지난해 3월 개원 10주년기념으로 [우리두리 하나된 세상]이라는 책자를 발간한바 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슬라이드로 아이들의 생활상을 소개해 주었다. 어떤 어린이는 장차 택시 운전을 하겠다는 희망을 발표하는가 하면 어떤 어린이는 면허증을 따서 호텔주방장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는 자도 있었다. 지금부터 작은 꿈이라도 가지고 자란다면 언제인가는 그 희망이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한다.
여기에서 필자에게 덕담한마디 하라고 해서 간단하게 한 말씀 남겼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누구든지 맨주먹만 쥐고 나온다. 그 알몸으로 태어난 사람이 천차만별로 변하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의 능력과 끈기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오늘 이러한 시설에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 중에서 장군이 나오고 박사가 배출되고 억만장자가 나올 것은 뻔하다. 그것은 그러한 것을 목표로 전력투구하여야 한다. 감나무 밑에 앉아서 입을 벌려보았자 입안으로 감은 떨어지지 아니한다. 그렇게 되려면 엄청난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 이런 시설에 있다고 조금도 기죽지 말고 많은 노력을 한다면 틀림없이 이곳에서 훌륭한 인재가 배출될 것을 의심하지 아니한다.”
[우리두리 하나된 세상]에 게재되어 있는 이순자 밝은집 원장의 다음과 같은 글이 우리의 심금을 울렸다.
“2007년 3월의 어느 날밤, 주인 없는 커다란 건물 안에 희미한 불빛 사이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상처입고 가족에게마저 버려진 작은 생명들 하나하나가 전국 각지에서 이곳으로 모여들어 새로운 둥지를 틀었습니다. 이들을 돌보는데 밤새 열 때문에 물수건으로 온 몸을 닦아주던 일, 기저귀를 갈고 있는데 따뜻한 물줄기(오줌)가 선생님의 얼굴을 때린 일, 30분 넘게 수유했는데 한 번에 콱 . . . . 품어내고는 곤히 잠든 일 . . . . . .”
우리들은 99칸 3부잣집이 있는 유명한 함라 마을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이 마을은 함라산을 주산으로 하고 부를 가져온다는 와우산이 마을전체를 감싸고 있어 예로부터 부자가 많은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그때의 영화는 간곳이 없지만 그 흔적인 돌담과 가옥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김육 불망비는 조해영 가옥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의 건립 년대는 조선 효종10년 1659년으로 영의정 김육(1580~1658)이 사망한 이듬해로서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여러 차례 건의하고 유언으로까지 임금에게 간절하게 당부한 김육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일종의 선정비이다.
비의 전면에는 중앙에「영의정 김공육경요보민인덕불망비」라 새겨져 있으며, 이수에는 양각으로 무늬를 조각하였는데 전면 중앙에는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으며 주변을 이무기의 몸체가 감싸고 있다. 이수의 후면 중앙에는 국화무늬가 있고 주변에는 구름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이라.>
근대 최고의 명창이라 불리는 임방울의 호남가(湖南歌) 중 한 구절이다. 우리가 흔히 함열하면 지금의 함열읍을 생각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임방울이 지칭하는 함열은 지금은 3부자 집 돌담길로 유명한 함라(咸羅)의 함열리를 말한다.
호남선 철도공사를 할 때 함열의 부자들이 자기 땅을 침범한다고 중앙에 올라가서 다른 곳으로 찻길을 돌려달라고 로비를 했는데 찻길이 뚫린 함열은 열차가 서는 정거장이 생김으로서 읍으로서 한때 익산군청의 소재지 이었으니 빛나는 번영과 영화가 그곳으로 가 버렸다.
함라의 함열은 역사적으로도 깊이가 있는 고장이다. 조선 5백년 동안 현청(縣廳)소재지로서 관아가 이곳에 있었으며 1895년(고종32년) 함열군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익산군 함라면으로 되었으나 현재는 익산시 함라면이라 이르고 있다.
이곳 관아지에는 동헌(東軒), 내아(內衙), 책실(冊室), 향청(鄕廳), 장청(將廳), 객사(客舍), 현사(縣舍), 향교(鄕校)등이 있었으며, 현감아래 6방(吏戶禮兵刑工房)이 지방행정을 수행하였다. 함라 노소의 함열현 선생안, 호남읍지, 함열현지에는 1453년(단종 1년)이후 이곳에 부임한 현감의 명단이 기록 보관되어 오고 있다.
이렇듯 깊이가 있는 고장 함라의 함열리는 부자도 많았는데 문화재로 지정된 조해영, 김안균, 이배원 가옥이 그 증거로 남아있다.
한 마을에 서로 붙어있는 이들은 모두 만석꾼 집안으로 집 규모 또한 90칸이 넘었다고 하니 훈김이 나는 마을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간다.
마을입구에 있어 제일먼저 눈에 띄는 조해영 가옥
조해영 가의 본관은 임천(林川)인데 지금의 부여군 임천면을 이른다. 조해영의 13대조가 함열에 자리를 잡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조 씨 집안이 부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조 씨 집안이 부자가 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이다. 조해영의 고조부 부터 시작한 부(富)는 증조부 조한기(1903년 사망)에 이르러 3만석 거부(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조한기는 사천군수에 이어 정읍 군수를 지내며 선행을 많이 베푼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읍 군수 재직 시 재난으로 군청 건물이 없어졌기에 사재를 출연하여 건물을 짓고, 흉년으로 백성이 굶주리자 사재 500석을 나눠주기도 해서 조정에서는 정읍 군수의 품계를 올려주고, 정읍군민들은 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때부터 조 씨 집은 ‘정읍집’이라는 택호(宅號)가 정해진 것이다. 조한기의 아들이자 조해영의 증조부인 조준식(1926년 사망)은 구한말 중추원 의관 벼슬을 했다.
큰아들 조해영은 아버지 조용규(1882~1953)로부터 1만석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조용규가 자식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자상속에 많은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인다. 조해영의 아버지 조용규는 서울에다 집을 장만하여 자녀들을 교육시켰다. 서울에 있는 가옥역시 대단했다고 한다. 12대문 집인 이 집은 탁지부대신을 지낸 이용익 대감이 살았던 건물로 종로구 당주동에 소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조해영 家(전라북도문화재자료121호)는 조해영의 할아버지가 안채와 양옥채를 지을 당시 궁궐을 짓던 당대 최고 목수를 불러들여 3년에 걸쳐 건물을 완성했다고 한다.
매사냥을 위한 사람도 고용했다고 한다. 순창사람인 박종근과 같이 살면서 사냥을 했는데 조해영의 아버지는 매를 동원해 사냥에 나섰고, 조해영은 5연발 엽총을 가지고 사냥에 나섰다고 하니 조 씨 家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다. 만석꾼답게 창고의 규모가 무려 100평에 달했다고 하나 지금은 이 건물도 헐렸다.
전쟁이후 가세가 급전직하하여 생계가 더욱 곤궁해지자 영화를 자랑하던 12채의 집마저 뜯어 팔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고 조교영은 밝혀 안타까움을 호소하고 있다.
정부는 전국 10개의 돌담길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그 가운데 한 곳이 조 씨 家를 비롯한 함열리 3부잣집 길이다.
만석꾼의 영화를 자랑하던 집들은 일부는 헐리고 폐허가 되어있는데 노란 모과열매와 주렁주렁 열린 감이 그때의 영화를 대변하는 듯 애처롭게 매달려있었다.
김안균 가옥.
이집은 들어가 볼 수는 없다. 후손들이 외지에서 살고 있어 대문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이 집의 건축 년대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규모를 보면 대지가 2,318평에 건평만 188평이 되어 전북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가옥(家屋)이라고 한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조나 꾸밈 일부에 일본 건축 수법이 섞여 있는데 조선 후기 양반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집으로 당시 주택 구조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안채에도 기둥을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장대석, 주춧돌 등을 희고 매끄러운 화강석을 마치 기계로 연마한 것처럼 깨끗하게 다듬은 뒤 사용해서 품위가 있는데 행랑채 끝에 旌門(정문)이 있다. 또한 이 가옥이 1920년대에 지어진 만큼 우리나라의 전통적(傳統的)인 상류가옥이 이 무렵에 어떻게 변천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면에서도 강릉의 선교장(船橋莊)과 더불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배원 가옥도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한다.
이 집은 현 관리자의 조부인 이배원이 1917년에 지은 것으로 그는 함라면의 대표적인 부농 중 하나였다. 필자의 마을에도 이배원의 소작농이 많았고 도조를 감리하는 마름집도 두 집이나 있었고 이배원의 막내아들 집태의 유모도 우리 마을에 살았다.
이 집은 세 집중에서 가장 먼저 지은 집(1918년, 大正7)으로 김안균 家와 조해영 家의 모델로 작용하였으며 평면의 구성에서도 서로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건립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주위의 토석 담장만이 남아있다.
사랑채는 내부가 개조되어 원불교 교당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안채는 입식부엌으로 개조하여 활용하는 안방을 제외하고 비교적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옛 노래에 "화무는 십일 홍이요, 달도차면 기우나니" 라는 가사처럼 이곳 3부자 집을 보노라니 옛말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라 경찰지서 뒤편에 있는 [황토 가든]이라는 음식점에서 오리백숙을 제공하는데 늦은 점심이라 그러는지 맛있게 들었다.
다음에 들린 곳은 웅포면에 있는 숭림사라 하는 유서 깊은 사찰인데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단골로 소풍가는 곳이었다.
숭림사 보광전(崇林寺 普光殿)은 보물 제825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숭림사는 고려 충목왕 원년(1345년) 선종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전할 뿐 그 후의 변천은 확실하지 않다. 보광전 중수기에 의하면 조선 순조 19년(1819년)에 중수되었다고 하며 다포계 양식으로 건립된 맞배집이다.
건물 안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안치하였는데 복장기문에 의하면 조선 광해군 5년(1613년)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조성연대가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다. 불상 위에는 용과 구름이 조각된 섬세한 닫집(보개)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들은 보광전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일로 웅포면 입점리에 있는 고분박물관으로 향하였다. 우리들은 금강을 따라 내려가는데 왼편에 한국에서 제1크다는 베어리버 골프장을 지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골프전문대학교도 설치하여 이 일대를 골프왕국으로 건설한다고 대대적인 나팔을 불고 난리를 치더니 웬일인지 지금은 조용하다.
필자가 소싯적에 이불속에서 큰 꿈을 그렸던 내 고장 熊浦는 일명 [곰개]라고 하는데 옛날에 물자의 운송수단이 오로지 수운에 의지했기에 크게 번창하여 5곰개라 하였다고 한다. 충청도의 한산, 강경을 비롯 함열, 임피 지방에서 장꾼들이 몰려들어 전국의 시장 중에 다섯 번째를 차지했을 정도로 번성 했었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 눈을 뜨게 하기 위한 교육시설로 이미 1905년경에 부용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일직 개화의 눈을 떴는지 알만하다.
이곳에는 해창, 고창 등의 세곡과 물류창고인 농산물의 집하시설이 있었고 이를 운반하는 배가 있었으며 서해에서 잡아온 해산물이 모여들어 크게 파시波市가 열리는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곳이었다. 선주가 있었고 거간꾼이 있었으며 여인숙이 있었고 난장을 열었다. 마을에는 정초에 큰 굿을 하는 해신당이 있었고 군산에서 강경까지 물자와 사람을 운송하는 여객선인 [연봉환], [행운환]등 두 선박이 있어 교통이 편리했다.
우리가 도착한곳은 필자가 태를 묻은 입점리라는 마을인데 여기에 역사 고분전시관이 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역사유물의 최초 발견 동기에 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필자의 외가로 조카뻘 되는 고등학교 학생이 하루는 칡뿌리를 캐려고 뒷동산에 올라가서 칡을 캐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어디서 토끼 한마리가 뛰어 오더니 칡을 캐는 위쪽 구멍 속으로 쏙들어갔다. 이를 본 학생이 이제는 칡 캐는 건 그만두고 토끼를 잡으려고 토끼가 들어간 구덩이를 파는데 생각지도 않은 금동관이 나왔다. 깜작 놀라서 이를 집으로 가지고 가지도 못하고 짚더미 속에 감추었다가 엿장수에게 팔려고 하였다. 이 내용을 숨기고 속으로 꿍꿍 앓다가 할 수 없이 부모님에게 고백한 뒤 관계당국에 신고를 하니 중앙에서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인 김정기 박사팀이 와서 발굴에 착수 했던 것이다. 이때 궁골과 어래성 터 등 추가 발굴 대상지 문제로 필자와 김정기 박사와는 몇 번 전화통화를 한 일이 있다.
입점리 고분은 사적 제347호로 1986년과 1991년 두 차례에 걸쳐 조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총 21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입점리 고분의 대표적인 무덤은 입점리 86-1호분과 98-1호분으로 토끼가 안내한 86-1호분은 아치형 천정을 하고 있는 굴식돌방무덤으로 내부에서 금동관대, 금동관모, 금동신발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다음으로 98-1호분은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구덩식 돌곽 무덤으로 내부에서 금동제 귀걸이 2점과 목걸이, 팔찌 등에 사용된 옥623점 그리고 토기 3점 등이 수습되었다.
입점리 고분은 토착무덤인 구덩식 돌곽 무덤과 중앙묘제인 굴식돌방무덤이 같은 자리에서 확인되고 있어서 고분을 통해 익산지역이 백제 중앙세력권 내로 흡수 편제되는 과정을 추정 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입점리 고분은 5세기 중엽 익산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유력한 세력집단의 무덤으로서 익산지역의 백제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필자 3형제가 비용을 부담하여 우리 마을 입구 정자나무 밑에 건립한 만수정萬壽亭이라는 정자 앞에 잠간 차를 세우고 필자의 생가를 모두가 차내에서 바라보았다.
마을은 숲속에 가려져 자세하게 볼 수는 없으나 고창 인촌리 김성수 선생의 생가처럼 현무 주작이 뚜렷하고 앞만 트이고 3곳이 산으로 둘러싸인 포근한 삼태기 형의 마을이다.
우리가 탄 버스가 필자가 3년간 통학한 편도 12km 길로 가더니 모교인 [임피중학교]옆을 지나는 지라 이를 바라만 보면서 도착한 곳은 원광대학교 박물관이었다.
원광대학을 세운 원불교는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에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20여 년의 구도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탄생한 종교이다.
길용리 영산성지 내에는 대종사의 생가, 기도터인 삼밭재, 마당바위, 대각을 이룬 노루목,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든 정관평 방언탑 등이 있다.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도착 했더니 교내 행사가 있어서 일찍 문을 닫았다고 출입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안내자인 조은지 시 직원이 내용을 설명하여 가까스로 30분만 관람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곳 박물관은 연건평 6,109㎡에 총 소장품 1만 8,000점의 전용 박물관이라고 한다. 1968년 익산지방의 역사 문화적 중요성과 문화유산의 보존 및 발굴 교육 등을 담당할 전문기관의 필요성에 따라 세워졌다고 한다. 1968년 1월 도서관 4층에 20평 규모의 작은 전시관과 274점의 유물을 갖추고 문을 연 뒤 1987년 6월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박물관으로 성장하였다. 주요 소장품은 옹기, 도자기, 생활민속품, 무속 및 불교미술, 자수 등 3,500점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옹기전시실, 선사 백제실, 통일신라 고려 조선 도자실, 생활민속실, 무속실, 서화 기증 유물실, 불교미술실 등이 있다.
우리들이 관람 중에 4시가 되어 문을 닫는다고 아우성을 치기에 관람하다가 중간에 내려왔다.
마지막 코스로 오늘 개막하는 1000만송이 어양동 국화축제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무리 왔다 갔다 해도 버스를 세울 곳이 없었다. 조금 늦게 왔더니 다른 차 들이 틈만 있으면 머리를 비집고 들어가서 세우는 통에 우리 차가 주차를 못하게 되니 할 수 없이 우리는 그냥 상경하는 수 박게 없었다.
우리를 안내해 준 조은지 주무관을 차에서 내리도록 한 뒤에 우리들은 일로 북쪽으로 내 달렸다.
논산평야를 지나면서 필자가 논산평야에 얽힌 기막힌 이야기를 해 주었다. 후백제의 견훤이 큰 아들 신검에게 감금당한 금산사 미륵전을 뛰쳐나와 왕건에게 항복한 뒤에 왕건군의 앞잡이가 되어 큰 아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궤멸시킨 곳이 바로 이 논산평야이다. 승전한 왕건은 기분이 고조되어 연산에다 개태사를 건립하여 자기의 영정을 봉안하여 영세불망 기념토록 했다. 반면에 홧김에 00질 한다고 자기가 세운 나라를 망친 일이 후회가 된 견훤은 속이 뒤집혀 죽었기에 연무대 앞산에 묻어 주었다.
또 하나의 비극은 백제의 계백장군이 부인과 자식들을 자기 칼로 죽이고 나서 5.000 결사대를 이끌고 이곳 논산평야(황산벌)에 진을 치고 신라의 김유신 군을 맞이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5,000명의 결사대가 모두 몰살을 당하였으니 백제의 흥망은 이곳에서 결판이 났다. 그래서 피 흘린 현장인 황산의 발치에는 계백 장군의 한스러운 무덤이 있다. 그래서 이곳은 조상들의 흘린 피가 논산 벌을 덮은 곳임을 명심하여야 한다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18;30이다. 광진구 시우회 운영위원들의 오늘 행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서울 [시우문학] 제9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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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운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