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지션 2017년 가을호 블라인드 시 읽기 시평>
인식론
창문을 닫으면
태어나도 안 태어나진다
조그만 생각들이 기어다니는 벌레
감정바이러스에 감염된 감기
밖에 닿으면 번식하는 머리와
기침하는 가슴 속
휘파람새를 받아 적으면
새의 부리가 뚫은 구멍 속이 흘러나간다
그러니까 방을 닫고
미리 안 태어난다
복숭아 살을 퍼먹으면 달콤해진다는 착각
슬픔을 단단히 뭉쳐 물고 있으면
참아지는 복숭아씨앗이 된다
무엇이 무엇을 물고 있으면
무엇이 무엇을 흘린다
닫은 눈은 시력을 물고 뱉지 않는다
입술이 이빨의 힘을 뱉지 않는 것처럼
눈이 눈의 힘을 흘리고 나면
더러워지지 않는 시력을 안심한다
밖을 데려와 심으면
안이 만든 밖이 쑥쑥 자라난다
자물쇠의 구멍 안에서
만화경처럼 늙어간다
창을 열고 바깥으로 들어가면
창밖의 숫자만큼 틀린 그림이 태어난다
휘파람새가 미류나무이파리처럼 지껄여서
생각에 열이 난다
머리칼을 움켜쥔 손 밖으로
넘치는 나를 따라 도망가서 안심이 될지도 모른다
언젠가 흘린 나들이 모여
강력한 방을 뱉을지도 모른다
인식론 수업
에피스테메
너의 눈은 투명색, 투명색을 뚫어져라 보는 나는 힘이 빠지고, 나중에는 내가 낯설어진다, 잠자리를 열어젖히며 냉큼 뛰어들어, 내 잠속을 다 차지해버리고 길게 눕는, 목표를 다 이룬 잠 밖은 절벽이네, 습관적으로 뛰어내리는 절벽, 내가 절벽을 끌어내릴지 모른다고, 너는 금방 또 따라붙는다, 우리는 지치는 법 없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망갔다와도 누가 누굴 쫓는 건지, 오래되면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물을 수 없지, 매일 갖다버려도 발목을 잡는, 나는 내가 희미해질 때, 너를 액자에 넣어 내 몸 안에 걸어버릴 것 같아, 이제 다시 못 쓰게 된 내 마음속에 먼저 가서 집짓고 살래? 너를 못에 걸고 밖에 나온 나는, 손바닥으로 눈 가리고 뒤돌아서, 하나둘셋, 몇까지 생각을 세고나면, 생각은 말개져서 어디로 가나
프로네시스
커튼을 연다 관객은 몇 겹씩 덧바른 나를 데리고 와서 내 앞에 있다
관객이 데리고 온 나를 나는 알아보지 못해 쓸 데를 모르게 자란 이목구비를 머리에 구겨넣으면 사막의 장면에서 푹푹 빠지며 없어지는 말이 되어가는 머리
커튼에는 왜곡을 위한 불온한 출현이 매번 등장한다
에포케
대상이 내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도무지 모를 때 대상의 복판을 열고 들어가면 중단된다
허물어지는 감각을 등뼈로 받쳐 세우고 쭈뼛 서는 머리끝을 쓸어 넘길 거야 대상을 채굴하는 손톱 판 자리를 또 파고 또 파고 정신이 투신하지도 분열되지도 않게 멈춰있게 한 방울의 피도 섞이지 않은 심장을 파야 입술의 모호한 주름이 이빨에 금을 긋지 흰 이를 드러내고 대상이 악당의 웃음을 보일 때
심장에 박힌 이빨을 낱낱이 세면
복판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
필라멘트
빛이 떤다
발광체는 타자를 켜고 자신을 끈다
켰다 껐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들
복숭아꽃 피는 카페의 유리벽 안에서
우리가 만났다 헤어지면 너는 죽는다
다음 만날 때까지 나는 널 죽이고 있는 중
진리
심층부의 이름은 미안함 억지를 써서 이 세상에 데려다놓은 것들에 대해
눈이라는 통로로 배출되어 기화하는 관념의 물질
무지라는 어딘가로 흡수되어
불감하는 물질의 관념
액자의 못이 빠지고도 너는 어딘가에 뻔뻔하게 걸려 있다
대상의 존재방식
나는 물의 방식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의 방식으로 둔다
플라스틱의 둥근 컵은 플라스틱의 둥근 방법으로 나를 담는다
나는 가스레인지에 올려진 둥근 은색냄비를 벗어나지 못하고
끓어서 소멸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불꽃의 방향으로 뒤척이는 물의 소멸은 자유로운가
세모의 컵과 네모의 컵에
포기하지 않고 물이 담긴다
컵이 없어질 때까지
에피스테메와 프로네시스
정체를 지워버린 마음은 단순하다, 마음의 물질을 움직이는 두려운 생각의 힘이다.라고 하는 진술은 어디에 들어있는 침묵인가
침묵은 입술 안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머리카락 속이 침묵을 끌고 가고
눈동자 속이 끌어들이고
콧잔등 아래에서 얌전하다
침묵은 목젖 아래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손톱 끝이 숨겨놓고
발가락 끝이 배꼽 안이 위장과 쓸개가
심장 속이 데리고 있어서
북그린란드의 빙정이 모조리 녹아서 주르륵- 자오선을 타고 남극의 바닥까지 흘러내려도
침묵은 그런 것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 것 안에 들어있거나 들어있지 않은
어떤 상태다
정말 침묵은
너의 방향으로 기화하고 있는 거니?
질문, 창조적 인식론
왜 안팎의 틈은 점점 더 벌어질까
그 틈에 무엇이 들어와 살까
침묵의 눈꺼풀에 번지는 시각의 성분과
같은 틈일까 다른 틈일까
생일파티
등장인물은 죄다 무표정이다. 멍한 창밖으로 눈알을 던진다.
사이키Psyche 불빛이 휘젓는다. 번쩍이는 조명이 프시케Psyche라니...
출생은 싸늘해져서 케익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발라먹은 생선가시 같은 속눈썹에 눈을 찔린다.
영리한 시선의 침몰은 축제 후를 파악한다.
돌아갈 수 없는 저곳이 되어버린 장소에서 서늘한 소리가 난다
탄생을 소진하는 고요함이 이곳의 결말에서 도돌이표를 본다.
저곳과 이곳이 동시에 일치되고 결합된다.
모래 위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 지느러미 같이
돌아갈 수 없는 저곳의 충분함을 눈에 담는 이곳
지속되는 파국의 진행에 어떻게든 해보고 싶지만 방아쇠를 쥔 손가락의 사력은 끝난다.
손가락은 도돌이표의 로고스를 진술할 뿐이고 반복의 로고스는 여름 오후에 풍선껌을 부는 얼굴일지도 모른다
눈은 볼 뿐이고 보는 자에게 보일 뿐이다. 눈이 최초로부터 최후의 순간까지 담아내며 (투신되지 못한 채)투입되어 섞인다고 하지만
이것은 감행이다.
발사하지 못한 총알의 눈이
붉게 얼룩진 케익에 흰 피를 뿌리며 문을 향해 기어간다.
돌의 경전
예기치 않은 글자를 몰아쉬며 굴러간다. 다녀온 돌의 절벽을 만나러. 커다랗고 조그맣고 삐죽삐죽하고 이끼가 미끌거리는 바위길을 디디며 내려간다 발목에 물을 끌고. 올라가는 길은 뒤에 묻어 있고 누군가 와치유얼백! 하고 소리친다. 뒤돌아보는 일은 조심해야 하므로 뒤돌아보지 않고 내려간다. 왜 갑자기 누워버렸는지 모르게 누운 나무 한 그루를 본다. 잎새들로 칭칭 감겨 누운 새가 된 나무. 나무속에서 비어지는 초록색 몸을 보았으나 아무 짓 하지 않고 내려간다. 비어져 나오는 것은 무서워, 초록의 무자비란 그런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길게 끌고 온 제 몸을 끊고 벌떡 일어선 벼랑이 나타난다. 무모한 발목이 나타난다. 이곳의 끊김에서 저곳의 이어짐이 되는 발목. 어떤 발목을 신을까 고민하는 사이 구르던 돌이 멈춘다. 시간의 망부석이 생기는 순간. 길은 오래전에 멎었는데 아닌 척 여기까지 왔구나 절벽이 돌의 바닥을 접어올린다. 돌은 미리 다녀간 돌이 된 채 하염없이 앉아 다시 내려올 돌을 기다리고 있다. 아킬레스건을 죽죽 찢는 물소리가 흘러온다. 어디까지 가야 이 길이 길이 아니었단 것을 알게 될지 모르는 채
필라멘트 눈
시계바늘에 묻은 검정색깔을 탁탁 털고 현관문을 열면 일찍 깬 해에서 달려나온 빛의 시체들. 발바닥보다 먼저 곤두박질쳐서 발밑에 드러눕는다. 혹시 잘못 눈뜬 건 아닐까. 다시 죽은 척 눈 감을까. 깨진 꿈의 조각에 금이 간 속눈썹이 떤다. 너무 많은 시체들을 지나왔어. 잠의 알 수 없는 처음과 끝의 관습에 빠져 죽어간 초침의 간격들.
새벽에 눈을 뜨면 오후 쪽으로 기울어진 마당이 흰 종이꽃의 관을 돌리고 있었다. 흰 꽃들이 관을 메고 어~화, 어허이~ 마당을 태엽처럼 감았다. 감아도 감아도 끊없이 펼쳐지는 마당. 형광등이 긴 머리칼을 풀고 튀어나와 관을 따라 허수아비춤을 추었다. 빛과 허수아비들이 넘쳐나는 빙글거림들. 어지러워 빙빙 빛을 속이며 자라던 속눈썹의 키.
아침은 미리 죽은 오후를 모르는 척 눈을 뜬다. 눈을 떠서 죽음에 눈감는 눈 속으로 뛰어내려 자살하는 태양. 깨진 빛의 피를 묻힌 문이 등 뒤에서 닫힌다. 닫힌 문에 사로잡힌 시계와 동공의 공동을 남겨두고 관이 번쩍 사라진다.
<시평>
철학적 인식과 시의 간극
박남희
1.새로운 시와 비시(非詩)의 간극
시창작 강의를 하다보면 종종 시를 해석하려는 행위를 거부하고 시는 해석할 필요가 없는, 다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시에 어떤 해석도 거부하는 것이 시에 대한 가장 올바른 방법임을 역설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써 오는 시들을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을 쓴 것인지 몰라서 본인에게 무엇을 쓴 것인지 물어보면, “시를 꼭 해석해야 하나요?”라는 질문만 돌아온다. 무엇을 썼는지 물어보면 자신도 설명하지 못하는 시를 써놓고 개성적인 시로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은유적인 시에 비해서 환유적인 시들은 기의보다는 기표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시의 이면에 숨을 뜻을 캐 들어가는 것이 불필요한 경우도 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나 이승훈의 비대상시, 오규원의 날이미지 시, 이수명의 아방가르드적인 환유시, 김참의 환상적 환유시 등은 시인 나름대로의 이론이 바탕이 되어서 시적 당위성을 얻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시라는 장르를 어떤 테두리 안에 가두어두지 않고 나름대로의 시적 논리로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시적 새로움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기존 시의 문법을 혐오하면서 소통 자체를 무시하고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시를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의욕의 과잉은 종종 시적 불통이나 비시(非詩)를 낳게 된다.
필자가 이 글의 서두에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번의 블라인드 시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시란 과연 어떤 시인가?”, “난해시와 비시의 경계는 어디인가?”, “철학적 진술과 시적 진술의 경계는 어디인가?”하는 질문이 필자의 뇌리를 불쑥 치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들을 바탕에 깔고 이번에 소개되는 블라인드 시들을 읽어보자.
2.「인식론」:인식하기와 인식 허물기로서의 시
블라인드 첫 번째 시「인식론」은 무엇의 인식론이 아니라 그냥 ‘인식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러한 제목의 의도는 잘못된 기존의 인식을 문제 삼아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법을 제시하려는 쪽에 비중이 실린다. “창문을 닫으면/태어나도 안 태어나진다”는 첫 구절부터가 그렇다. 시를 쓸 때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인식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한 ‘낯설게 하기’ 역시 대상을 낯설게 표현함으로써 기존의 관습적 인식 태도를 넘어서서 새로운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려는 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창문을 닫으면/태어나도 안 태어나진다”는 표현은 기존의 인식을 허무는 파격이 있다. ‘인식론’이라는 이 시의 제목을 염두에 두면 여기서의 ‘창문’은 생각 또는 인식의 창문일 것이다. 시인의 진술이 당위성을 가지려면 ‘태어난다’는 행위가 일상적 의미의 생명의 탄생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감각인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유의 개연성은 2연의 “조그만 생각들이 기어다니는 벌레/ 감정 바이러스에 감염된 감기”같은 표현을 통해서 확보된다. 4연에서 화자는 “복숭아 살을 파먹으면 달콤해진다는 착각”을 넘어서기 위해 ‘복숭아’에 ‘슬픔’이라는 관념을 덧입힌다. 그리하여 “슬픔을 단단히 뭉쳐 물고 있으면/참아지는 복숭아 씨앗이 된다”는 진술이 시적인 당위성을 얻는다. 6연의 “닫은 눈은 시력을 물고 뱉지 않는다/입술이 이빨의 힘을 뱉지 않는 것처럼”에서 ‘닫은 눈’은 1연의 창문을 닫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이러한 시인의 진술은 인식의 창문을 닫으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는 데에 있다. “밖을 데려와 심으면/안이 만든 밖이 쑥쑥 자라난다”는 표현은 인간이 대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인식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들어가면/창밖의 숫자만큼 틀린 그림이 태어”나서 화자를 열 받게 한다. 하지만 화자는 “언젠가 흘린 나들이 모여/강력한 방” 즉 생각의 방을 탄생시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상의 사유를 종합해 보면 이 시는 ‘인식론’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시적 차원에서 확장시켜 본, 실험성이 드러나는 시이다.
3.「인식론 수업」:철학적 개념과 시적 진술의 간극
두 번째 시 「인식론 수업」은 ‘에피스테메’, ‘프로네시스’, ‘에포케’, ‘필라멘트’, ‘진리’, ‘대상의 존재방식’, ‘에피스페네와 프로네시스’, ‘질문, 창조적 인식론’ 등 여덟 개의 소제목 시들이 모여 전체 시를 이루고 있다. 이 시는 ‘인식론’이라는 같은 소재를 제목 안에 포섭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분석한 시 「인식론」과 같은 맥락에 놓여있지만, 시적 상상력이나 제목과 내용의 관계는 확연히 다르다. 우선 ‘에피스테메’라는 개념을 제목으로 삼고 있는 맨 앞의 시를 읽어보면 제목과 내용의 접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어로 ‘안다’ 또는 ‘인식한다’는 어원에서 유래된 에피스테메(episteme)는 본래 그리스의 고대 철학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사용되었던 말인데,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아리스토텔리스는 실천적 목적에 제약을 받지 아니하는 원리 및 원인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말이 본격적인 학문 용어로 활성화 된 것은 푸코에 와서이다. 푸코는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를 '에피스테메'라고 불렀다. 푸코는 이 개념을 사용해 르네상스, 고전 시대, 근대, 현대를 분석하여 각 시대마다 지식체계가 단절되어왔음을 말하면서 지식의 연속성을 주장한 기존의 학문적 태도를 비판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에피스테메’는 특정한 시대의 학문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그 시대의 지식에 구조적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원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에피스테메’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사랑하는 관계인 너와 나의 엇갈리는 관계를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투명한 너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나는 힘이 빠지고 스스로가 낯설어진다. 투명색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색을 잘 읽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어긋날 수밖에 없는 단초로 보인다. 나는 잠을 원하고 너는 그러한 나의 잠자리를 끌어내어 사랑을 원하는 관계로 보이는데, 이 시의 화자인 ‘나’는 “내가 희미해질 때, 너를 액자에 넣어 내 몸 안에 걸어버릴 것 같아”서 자신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너’에게 “이제 다시 못 쓰게 된 내 마음 속에 먼저 가서 집짓고 살래?”라고 반문한다. 이러한 내용의 시를 ‘에피스테메’라는 제목과 연결시켜서 추론해보면 ‘에피스테메’가 각 시대마다 달라지듯이 사랑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는 것이니 사랑에 너무 절대적인 기대를 갖지 말라는 정도의 추측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 시를 쓴 시인의 생각과 필자의 생각이 같은 것인지 와는 상관없이 이 시는 독자에게 매우 불친절하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인식을 소제목을 달고 연작시처럼 써 놓은 시「인식론 수업」은 철학적 개념을 시에 접목시켜서 개성적인 시세계를 보여주려는 의욕은 좋으나 그것이 미처 객관적인 미학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개인화되어 있어서 시가 불투명하게 읽히는 단점이 있다.
4.「생일파티」:인식의 창으로서의 눈
이 시를 읽어보면 사이키조명이 현란하게 비추는 곳에서 생일파티가 열리는데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표정하고 분위기는 점점 싸늘해진다. 화자는 주인공인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지만 “발라먹은 생선가시 같은 속눈썹에 눈을 찔린다.” 그리하여 그 곳에는 ‘탄생을 소진하는 고요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 결말은 “돌아갈 수 없는 저곳”과 ‘이곳’ 사이의 도돌이표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돌아갈 수 없는 저곳’은 둘이 만나기 이전의 저곳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지만 이러한 해석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총’ 역시 ‘눈빛’일 것이라는 추측은 할 수 있지만, ‘방아쇠를 쥔 손가락’이라는 표현으로 인해서 표현의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인 “발사하지 못한 총알의 눈이/붉게 얼룩진 케익에 흰 피를 뿌리며 문을 향해 기어간다”는 진술 역시 눈이 붉게 충혈되어 케익에 ‘흰 피’ 즉 눈물을 뿌리며 문을 향해 기어가듯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지만, 표현이 정확하지 않아서 그저 아련하게 느껴질 뿐이다.
5.「돌의 경전」:돌의 절벽에서 돌을 기다리는 돌
“예기치 않은 글자를 몰아쉬며 굴러”가는 주체는 돌이다. 이 돌이 가는 곳은 ‘다녀온 돌의 절벽’이다. 아마도 돌로 표현되고 있는 주체는 또 다른 대상과 함께 언젠가 ‘돌의 절벽’에 다녀왔을 것이다. 그런데 ‘돌의 절벽’에 이르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그리하여 주체인 돌은 “커다랗고 조그맣고 삐죽삐죽하고 이끼가 미끌거리는 바위길을 디디며 내려간다”. 가다가 그 옆에 드러누워 있는 나무를 본다. 제 속의 초록색을 비우며 점점 무채색이 되어가는 나무를 보며 ‘초록의 무자비’ 즉 죽음의 무자비함을 읽는다. 드디어 돌은 절벽에 이른다. 그 절벽을 건너려면 “이곳의 끊김에서 저곳의 이어짐이 되는 발목”을 신어야 한다. 돌은 고민하면서 구르는 동작을 멈추고 ‘시간의 망부석’이 되어 “하염없이 앉아 다시 내려올 돌”을 기다린다. 여기서 ‘돌의 절벽’은 사랑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인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지 불명확하다. 다만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면 돌로 표현되는 두 사람이 다녀 온 곳이라는 점에서 ‘이별’을 의미하는 것처럼 읽힌다. 시를 굳이 해석해야 하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시를 읽는 평자의 입장에서는 의미를 무시하고 시를 읽기는 어려운 일이다.
6.「필라멘트의 눈」:고정관념의 시체를 넘어서는 법
이 시는 처음부터 모호하다. “시계바늘에 묻은 검정색깔을 탁탁 털고 현관문을 열면 일찍 깬 해에서 달려나온 빛의 시체들”이 도대체 무슨 상황의 묘사일까 궁금해진다. 이 구절을 꼼꼼히 다시 읽어보면 대체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에 들어온 화자를 맞이하는 식구들의 어이없는 표정이 연상된다. 죽을죄를 지은 화자는 “발바닥 보다 먼저 곤두박질쳐서 발밑에 드러”누워 실눈을 떠서 분위기를 살피고 다시 죽은 척 눈을 감는다. 화자는 “잠의 알 수 없는 처음과 끝의 관습에 빠져 죽어간 초침의 간격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야 한다는 기존의 잠의 관습에 반기를 들고 있다. 2연의 “새벽에 눈을 뜨면 오후 쪽으로 기울어진 마당이 흰 종이꽃의 관을 돌리고 있었다.”는 진술은 화자가 새벽이라고 느끼고 일어나는 시간이 이미 오후임을 암시해준다. 화자는 시간의 인습이라는 관을 돌리며 춤을 추는 종이꽃의 모습을 통해서 기존의 인습을 장사지내는 코스프레를 한다. 시인이 식구들의 눈빛을 ‘필라멘트의 눈’으로 은유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눈이 이미 낡은 것이라는 전언으로 읽혀진다. 이상의 독법으로 시를 읽으면 전혀 읽히지 않는 불통 시는 아니지만 이 시 역시 독자에 대한 배려가 충분해보이지 않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번에 이글의 텍스트가 된 블라인드 시들은 기본적으로 인식론이라는 개념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필자는 이미 포지션 2016년 겨울호에서 강병길의 시를 개념시槪念詩(conceptional poem)의 범주에서 논한 바가 있다. 이번의 블라인드 시들 역시 이런 범주에서 평가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개념시라기보다는 인식에 초점이 맞추어진 철학적 실험시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이번 시들은 철학적 제목으로 ‘너’와 ‘나’의 관계에서 오는 어긋남과 사랑을 연작시처럼 표현하려는 의도가 보이지만, 표현이나 진술이 부정확하고 너무 주관적이어서 새로운 시를 보여주려는 신선한 시인의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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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이불속의 쥐』,『고장난 아침』이 있으며, 평론집으로『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다.
*포지션 가을호 블라인드 시읽기 텍스트의 주인공은 2013년 최치원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계간 <시산맥>으로 등단한 전비담 시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