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이 이순신장군 동상을 광화문에 건립한 이유와 목적과 비전과 예언.
세종로의 李舜臣(이순신)장군 동상과 야스쿠니신사 앞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 益次郎)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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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진의원님을 처음 만났을 때 태극기 지도자 등장, 조원진 "할 수 있다"
1. 아베총리와 일본 국회의원들이 야스쿠니신사에 참여한다고 하면 세계가 난리납니다.
야스쿠니신사는 최고 강성했던 일본제국의 군국주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제국이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을 때 항공모함 9대를 보유했고, 미국은 8대 뿐이었습니다.
그 중에 4대는 제2차 대전에 참전하여 대서양에서 작전 중이었고, 태평양에는 진주만에 4대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대한 독립군들은 작대기 총으로 산발적으로 항일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빨치산 독립운동 아주 웃기는 일이지요!).
그러니 당시 식민지 상황에서 독립정신을 살아있었지만 무장독립운동은 아주 미약했고,
이렇게 강포한 압제 하에 친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일본제국은 八宏一宇(팔괭일우, 전 세계를 일본의 지배 아래 넣는다는 개념) 이념의 군국주의로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태평양을 피로 물들었습니다.
현재 일본은 그 때의 강성을 회복하고 싶고, 모든 나라들은 일본제국의 침략에 분노를 터트리는데, 그 중심에 야스쿠니신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 앞에 유명한 동상이 서 있습니다.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원훈 중 하나인 오무라 마스지로(大村 益次郎) 즉 일본제국 군대(육사)의 아버지라고 추앙을 받는 인물입니다.
원래 야스쿠니신사는 오무라 마스지로가 창설한 일본 육사 자리였기 때문입니다.![](https://t1.daumcdn.net/cfile/cafe/99E4F0335A3337D208)
사진 1 : 야스쿠니 신사 앞에 오무라 마스지로 동상(옛날 사진),
사진 2,3 : 현재 사진(뒤에 야스쿠니신사 문이 보임),
사진 4 : 칼을 찬 동상 모습(눈썹이 아주 특이),
사진 5 : 동상 모델이 된 오무라의 얼굴 모습, 특이한 눈썹이 희자.
2. 국부 이승만박사가 건국한 대한민국의 정기를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박정희대통령은 광화문에 이순신장군 동상 건립을 추진했습니다.
드디어 1968년 4월 27일 제막식에 참석했는데, 충무공 탄생 바로 전 날입니다.
원래는 5m 높이로 계획이 되었는데, 박정희대통령은 “더 키우라”라고 지시해서 6.5m가 되었습니다.
당시 동상 하나를 건립할 놋과 구리를 제대로 구하기 어려운 개발도상국에서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이순신장군이 엄위한 모습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일본 수도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 바로 앞에 서 있는 군국주의의 아버지, 일본 군대의 아버지 바로 “오무라 마스지로”입니다.
박정희대통령의 비전은 이순신장군과 국부 이승만대통령의 정신을 이어받아 일본제국을 제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상을 건립할 때에 김용식외무장관이 박정희대통령에게 물었습니다.
사진 6 : 세종로 광화문의 이순신장군 동상, 오무라 마쓰지로를 압도하고 제압하는 강력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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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8 : 동상 제막식을 마치고, 충무공을 우러러 보시는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국부 이승만박사 때에 주일대사를 지낸 김용식씨가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이미 국부에게 똑같은 질문을 국부에게 했습니다.
그래야 북한을 완전히 제압하는 북진자유평화통일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확히 30년과 20년 후 88올림픽을 성공시키고,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일본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국부의 손녀이며 박정희대통령의 딸이신 박근혜대통령을 통해 일본을 서서히 압도하고 제압하기 시작했고,
* 그럼 과연 聖雄(성웅) 이순신장군이 준엄하게 내려다보며 제압하는 오무라 마스지로(大村 益次郎)은 일본에게 있어서 어떤 인물인가?
1. 육군은 프랑스식, 해군은 영국식, 군사제도를 도입하여 군국주의 일본제국의 근대군대 창설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인물입니다.
그의 후계자로서 문신을 대변하는 외교파 이토 히로부미와 쌍벽을 이루는 무신 군부파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있습니다.
이토가 안중근의사에게 저격을 당하자 곧바로 한일합방을 실행한 강경파입니다.
아리토모는 스승의 구상에 따라 사관학교를 창설하고, 징병제를 확립하여 강력한 군국주의 일본제국 군대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평생 동지이면서 동시에 경쟁 관계인 있는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안중근의사에게 암살을 당하자 귀족원의원으로 전격적인 1910년 한일합방을 단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 사학계에서는 이토에 우호적인 면도 있는데, 이토는 국제관계에 신경을 쓰면서 조선을 살살 발라먹자는 문관이고,
야마가타는 단 번에 요절을 내자는 무관의 차이일 뿐입니다.
사진 9 : 오무라 마스지로의 수제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암살을 당한 평생 동지이며 경쟁자인 이토 기념비에서 1910年(명치 43년).
사진 10,11 : 고향 야마구찌(山口)에 있는 아리토모 기마상, 오른쪽 사진 오른쪽 하단부터 시계 방향, 1)요시다 쇼인과 12수제제자들(두번째 줄 첫번째가 이토, 그 다음이 야마가다 아리토모). 2)아리토모 기마사, 3)이토 동상, 3)쇼인 신사를 참배하는 아베수상.
2. 1869년 명치유신 성공 직후 국방장관 격 효우부 타이호(兵部大輔, 병부대보, 즉 국방장관격) 마스지로가 암살을 당하자마자(46세) 일본 역사상 최초로 서양식 동상으로 야스쿠니 신사 앞에 세웠습니다.
1882년 메이지 정부는 그의 동상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조각가 오쿠마 유지히로(大態氏廣)를 설계자로 임명했습니다.
오쿠마는 이 영광스러운 일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유럽의 조각을 배우기 위해 유학까지 갔다 왔습니다.
일본 역사상 최초 서구 스타일의 청동 동상을 완성하여 1894년 현재의 자리에 건립했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이 일본육사에서 공부를 했다고 친일파라는 것은 모함 왜곡이며,
당대 조선의 최고 엘리트였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이러한 중요한 일본제국 역사를 알기 때문에 이순신동상을 건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동상 건립은 동북아시아 역사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의 깊은 통찰이 있어야만 세울 수 있는 탁월한 국가 지도자의 안목과 혜안과 실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국부 이승만박사는 1만년 한반도 역사와 세계사적 위인입니다.
박정희대통령은 허드슨연구소의 허먼 칸박사가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함께 인정한 당대 아시아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사진 12 : Hudson 연구소 Herman Kahn박사
여기에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중국의 등소평을 추가하여 아시아 4대 지도자로 인정합니다.
해방 직전 당시 조선의 최고 엘리트였던 박정희청년이 문경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을 때
일본인들에게 수치와 수모를 당하자 복수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일본군 소위계급장을 달고 문경에 왔을 때에 읍장 교장 경찰서장 등이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습니다.
박정희청년은 동경제국법과대학보다 더 입학이 힘든 일본 최고의 엘리트들만이 들어가는 일본 육사에서도 공부를 했습니다.
육사 중에서도 수학을 해야 하는 최고 엘리트들이 지원하는 병과가 포병과 공병인데(일반 병과는 2년, 포병 공병은 3년 공부),
역시 포병에서도 Top 클래스를 유지하여 일본 엘리트들도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1등 했으나 조선인으로 자존심이 상해 3등 수여했다는 설).
육사졸업 후 연대장 부관으로 복무 중 1년 만에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사진 13 : 그런데 모 신문사에서 박정희를 친일파로 왜곡하기 위해서 특종으로 보도한 박정희 일본군 사진은 철모 쌍안경 일본도를 갖춘 야전군 연대장 모습입니다.
6.25동란 중 국부께서는 밴플리트장군과 함께 국군의 현대화를 위해 정식 포병대대가 편재된 시범 정예사단으로 제9사단을 재창설할 때에
사단장은 장도영준장(6사단장에서 잠시 부임)이었고, 참모장은 일본 육사 포병 출신 박정희대령이었습니다.
사진 16,17 : 1951년 9월 14일(금) 경기도 연천 최초 포병대가 편제된 정예 제9사단 시범 훈련 때
훈시(우리도 할 수 있다, 좋은 장비만 공급해 주면 인민군 중공군 소련군 다 물리칠 수 있다)하시는 국부와 밴플리트장군, 이 때 박정희대령이 국부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사진 18 : 철모에 쓰여진 "Can Do"와 국부께서 9사단 장교 병사들과 환담. 이후 9사단는 최정예사단으로 백전백승 부대가 되고, 백마고지전투에서 승리하여 백마부대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아래 왼쪽 병사의 철모에 그려진 마크가 초기 9사단 마크입니다.
사진 19,20,21 : 너무나 자랑스럽고 기뻐하여 천진난만하게 웃으시는 국부와 아들과 같은 밴플리트장군.
사진 22,23 : 무더위에 훈련 참관 후 휴식
1953년에는 보병장교 대령들 중에 탁월한 인재를 선발하여 포병장교를 임명했습니다.
이 때 박정희대령이 수석으로 선발되어 국부께서는 준장으로 진급시켜 미국 포병학교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사진 24 : 대한민국 최초 포병사령관 프로그램으로 장군으로 진급하여 미국 유학 중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서 여행 중인 박정희준장과 이상국대령.
사진 25 : 1955년 유학을 마치고 포병학교 교장
지금도 대한민국의 이순신장군 동상과 일본의 대결,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 세습 우상 동상과의 대결은 치열하게 계속 되고 있습니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최후의 역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진 26 : 1953년 1월 3일 일본 방문.
국부 이승만박사. 왼쪽부터 머피 주일미국대사, 오카자키 가쓰오 외상, 요시다 시게루 총리,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국부께서 한일회담을 서두르지 않은 이유는 일본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인물이 나올 때까지는 안된다.
일본 식민지 하에서 일본인 스승에게 배운 자들이 그들과 회담하면 수세에 몰린다.
결국 1964년 일본인들이 국부 이승만박사 다음으로 제일 두려워하는 박정희대통령 때 한일회담 성사.
1958년 경 김용식 주일공사가 임무를 마치고 국부에게 질문함.
"언제 일본을 따라잡느냐?" 30년 후(1988년)
1968년 이번에는 외무장관 때 이순신장군의 동상을 건립하신 박정희대통령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 분이기도 합니다(이 때 박정희각하의 대답은 20년 후, 1988년).
사진 27 : 1961년 5.16 무혈군사혁명을 성공시키고, 22일째 6월 8일 혁명위원회 박정희소장이 국부 이승만박사의 모교 배재학당과 우남회관을 방문하여 장용하교장과 사열을 받고 훈시(이 때 10년 전에 국부에게서 들은 "우리는 할 수 있다(CAN DO)"는 연설과 함께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국부와 같은 훌륭한 인재들이 되라)하시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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