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단상(斷想)
강승택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르고 늦바람이 용마름을 벗긴다더니 광풍도 이런 광풍이 없다. 평생 가정과 일밖에 모르던 여자가 트로트 광풍에 갇혀 헤어날 줄을 모른다.
아내는 24시간 녀석을 끼고 산다. 잠을 잘 때나 화장실에 갈 때 심지어 샤워할 때조차 곁에 두지 않으면 허전해 못 견딘다. 어느 날 밤에는 코까지 골아 가며 자고 있기에 슬그머니 쥐고 있던 유튜브의 스위치를 꺼준 적이 있다. 순간 얼마나 격렬하게 반응하던지 나는 그만 데인 손 거둬들이듯 황급히 녀석을 내주고 말았다. 좌견천리, 앉아서 천리를 본다지만 과연 아내는 자면서도 노래를 듣고 감상하는 신통함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요즘 공중파 방송을 통해 등극한 어느 남자 가수에 대한 아내의 관심이 도를 넘었다. 티브이는 물론 유튜브 동영상까지 그가 나온 프로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또 본다. 이럴 때 아내의 얼굴은 구름 위에 떠 있는 소녀의 얼굴처럼 행복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그러다 혼자 보기 아까운 장면이라도 등장하면 나에게까지 감동을 강요하는데 이럴 때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당신처럼 멋대가리 없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오금을 박기도 한다.
일찍이 이런 아내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일제 강점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대중가요가 부침했어도 온전히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없는 사람이다. 평소 애절한 가사와 곡의 분위기에 취해 내가 그토록 노래하고 다녀도 번번이 귀를 막던 사람이 어느 날, 한 젊은 가수의 구성진 트로트 요술에 꽂혀 정신을 못 차리다니 이런 불가사의가 없다.
무릇 세상사 모든 일이 증상이 있으면 원인이 있는 법. 대체 아내의 이 같은 변신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나름대로 곰곰 생각해보면 낌새가 전혀 없던 건 아니다.
어느 날 아내는 말했다. 살아온 세월이 허무하다고. 한 번도 자기의 삶을 산 적이 없다고.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한마디 보탰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살지는 않을 거라고. 이 말을 듣는 순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아내의 모든 후회가 나로부터 비롯됐다는 자책에 심장이 멎는 서늘함을 느꼈다.
생각하면 아내만큼 희생으로 점철된 삶을 산 경우도 흔치 않으리라. 능력 없는 남편 뒤치다꺼리와 아이들 뒷바라지야 그렇다 쳐도 없는 살림 일군다고 평생을 일 속에 파묻혀 지냈다. 변변한 취미생활 한번 못해보고 세상 나들이 못한 채 갇혀 지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가슴속에 일렁이는 신산함이 어찌 작을 수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내도 늙는구나 하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트로트는 우리 정서에 꼭 맞는 노래다. 어두운 골목길, 귀갓길의 사내가 조금 전 마신 술의 취기를 빌려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것이 트로트요 이별한 청춘 남녀가 사랑의 아픔을 풀어내는 것도 트로트를 통해서다. 기쁠 때나 슬플 때 우리 곁엔 늘 트로트가 있었다.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요즘 트로트를 들으면 힐링이 된다고 한다.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을 수 없다.
이제 바라기는, 이왕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으니 모든 시름을 노래에 담아 날려버릴 수 있게 되기를, 그래서 나의 마음의 짐도 덩달아 가볍게 되기를 나는 간절히 빈다.
첫댓글 강선생님 그 가수가 누구예요?
저희집에도 뉴스는 일절 안 보고 트로트 프로만
보는 여자 한명 있어요.
글쎄요, 누굴까요? 영원한 숙제로 남겨 두기로 하지요. ㅎ
젊었을 때는 잘 모르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노래 가사가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오게 되지요.
그래 그 노래에 취해 사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맞습니다. 나이 들면서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 감사합니다.
트롯이 대단하기는 대단하지요. 우리집만 그런 줄 알았는데...
조용필이나 이미자의 트롯은 정말 감동이지요. 그런데 요즈음은 가사든 멜로디든 너무 감각적으로 흘러
깊이감을 주지 못하는 트롯도 있는 것 같아요.
강선생님의 좋은 글 감명깊게 읽고 갑니다.
집집마다 난리네요. 트로트 하나가 남편 열 몫은 하고도 남는 거 같습니다 ㅎ
트롯 광풍이 선생님 댁까지 몰아쳤군요. 두 분 사시는 모습이 참 편안해 보여 보기 좋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어찌 보면 유치하게 사는 것도 같고...그런 것에 작은 의미를 두며 글이란 걸 쓰고 있습니다. ㅎ
강선생님!
가정에서의 두분의 모습을 마음껏 상상하면서 동영상을 대하듯 읽었습니다.
노래방에 들른지가 수십년인 것 같은데,
기왕 말 나온 김에 사모님께 제안해 보시고,
성사되면 소생도 초대해 주소서.
그 많은 대중가요 가락 중에 가장 한국적인 멜로디!
거칠 것이 없었던 산상(山上)에서의 지난날이 그립습니다.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공개된 자리에서 이 선생님과의 일화를 말씀드리기는 그렇습니다 만 山上에 울려 퍼지던 이 선생님의 淸淨했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제 귀에 쟁쟁 합니다. 이 해 가기 전 반드시 자리 한번 마련토록 하겠습니다. 충성!
혹시..임영웅? 누구래유~ 사모님 심정을 헤아려주시는 자상한 모습이 그려집니다.^^ 저도 생전 관심없었는데 훈아 오빠에게 반했어요~ 영원한 오빠에요. 공연 갔는데, 한 곡 부르고 나니 열혈 할머니들이 "오빠!!" 하고 마구 소리치셔서 깜짝 놀랐는데 담에 가면 저도 그러려구요. 잘 읽었습니다.^^
맞어유, 임영웅...어젯 밤에도 밤새 영웅이 틀어놓고 자서 미치겄시유.
훈아 오빠는 지도 겁나게 좋아하는데유. 지안님 잘 계시지요? 만년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