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석포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합류하는 서울 성동구 응봉동 한강변에 있는 조선 시대의 작은 나루였다. "동국여지승람" 에 입석포는 두모포 상류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두모포는 지금의 옥수동 한강변 동호대교 북단에 있었던 포구를 가리킨다.
한강변의 큰 바위들이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듯하다고 하여 입석포라 불렸으며, 우리말로는 선돌개라 하였다.
뒤로는 응봉이 높이 솟아 있고, 강변 곳곳에 기암이 있어 경치가 뒤어났던 곳으로 예부터 많은 시인 목객들이 찾아와 풍광을 예찬했다.입석포는 천연의 낚시터로도 이름이 높았다.조선 초기 성종(재위 1469~ 1494) 때 성종의 형 월산 대군을 비롯하어 강희맹, 서거정, 이승소, 성임 등의 문신들이 한성의 아름다운 풍경 열 개를 정해 한도심영이라 칭하고 그에 관한 시를 남겼는데 한도십영 중 하나가 바로 입석조어( 한강 입석포에서의 낚시)이다.
입석포 앞 한강에는 저자도라는 섬이
있었다.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라 블렸던 이 섬은 절경을 자랑하는 유명한 명승지로 유람객들이 많았다고 한다. 저자도에는 고려 말의 문신 한종유의 별장이 있었고, 조선 세종은 이 섬을 둘째 딸 정의공주에게 주었고 공주의 아들 안빈세가
물려받았다. 1930년대만 해도 길이 2kM(동서)에 달했던 저자도는 1970년대의 강남 아파트 건설 때 무분별한 골재 채취로 지금은 형태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다. 입석포 동남쪽으로는 뚝섬과
광나루를 연결하는 드넓은 살꽃이벌(전관평)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어 그 풍치 또한 뛰어났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입석포는 강 너머 지금의 압구정으로 건너가려는 행인과 저자도 유람객들, 입석포에서 낚시와 경치를 즐기려는 이들로 북적었으며, 여인들은 입석포의 입석(선돌, 선바위)에 치성을 들이고, 아이들은 놀이터로 삼았다고 한다. 입석포의 수려했던 경관은 국철 1호선 경원선 철로 아래에 문혀 버렸다.
● 응봉산
응봉은산이 높지 않으나 경관이 빼어나고 임금이 사냥할 때 이곳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기도 해 매봉 또는 응봉( 매봉우리)이라 불리기도 했다. 조선 태조가 살곶이벌에서 매사냥을 즐기기
위해 측위 4년(1 395년)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을 한강 위 의 지금의 응봉 기슭에 설치하였다.(응방 : 고려와 조선 시대에 사냥에 쏠 매를 사육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부기구).
응봉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하기 전에도 동교에서 매를 놓아 사냥을 했던 곳이고,그 후 태종, 세종 도 이곳에 나와 매사냥을 즐겨했다.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00여 년간 151회나 매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고서에도 나와 있다.
암반층의 지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척박한 환경에서되 잘 자라는 개나리가 주종을 이루는 산으로,매년 4월이 되면 응봉산 일대에 개나리꽃이 피어 장관을 이룬다.
4월 1일부터 4월 10일경에는 산 전체에 노란 개나리가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기 때문에 1997년부터 성동구에서는 개나리 축제 한마당을 열고,이에 따라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 글짓기 대회, 사진 전시회, 노래 자랑, 먹거리 장터 등이 열린다.성동구에서 여는 이 한마당문화축제는 서을의 영물이다. 응봉산은 독서당길을 따라 왕십리를 거쳐 응봉동과 금호 4가의 고개에 있어 한강을 굽어보고 있다.
산 정상에는 팔각정이 있어 한강의 야경을 불 수 있으며, 건너편에는 달맞이봉이 있다. 또한 응봉산 자락에는 암벽 등반 시설이 있어 체력증진과 여가선용도 할 수있다.
● 쌍호정과 조 대비 생가 터
쌍호정은 조 대비의 아버지인 풍은부원조만영의 집이었다.1960년대까지는 집의 일부가 남아 있었고 사람들도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도시개발사업으로
업어졌다.
조만영은 글 친편와 사귀기를 좋아해 오늘날 옥수동 한강변인 동호에 쌍호정을 지어 강의 풍취를 즐겼는데, 순조 8년(1808년) 12월 6일 조 대비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그 날 밤에 호랑이 두 마리가 정자의 앞뒤 문을 지켰다고 하여
쌍호정이라고 하였다.조 대비(1808~1890)는 철종이 자녀가 없이 세상울 퍼나자 대왕대비로서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고종으로 앉힌 풍윤의 여걸이었다.
조 대비의 성가의 규모는 무척 커 대비가 어렸을 때 글을 읽던 독서당이 북쪽 뒤 높은 곳에 1958년까지 남아 있어서 대지의 넓이를 가능케 한다.생가 동쪽에는 음상한 노송이, 그 옆에는 조그마한
정자인 쌍호정이 있었다고 한다.(조 대비: 신정 왕후,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비
로서 헌종의 어머니이다.)
● 두뭇개ㆍ동호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을 옛적에는 두뭇개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산천 조에 "두모포가 도성 동남쪽 5리쯤에 있다." 라고 한 바로 그 마을이다. 양주 땅에서 흐르는 중랑천이 도성 안을 서쪽에서 동족으로 흐르는 청계천 물과 함쳐진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꺾여 마을 앞 저자에도 못 미쳐서 강 본류와 합수하는 형국이므로, 두 물이 흐르는
두물개가 되고 다시 그것이 변하여 두뭇개, 한자어로 두모포라 하였다.
강 가운데를 저자도가 막고 있으므로 물살이 급하지 않고 물결은 항상 잔잔하였다. "동국여지비고" 산천 조에 "두뭇개가 도성 동남쪽 10리에 있는데 동호라고 한다." 라고 한 대로 두뭇개 앞 강 을 일명 동호라고 하였다. 용산 앞을 흐르는 공산강을 남호, 마포 앞을 흐르는
서강을 서호라고 불렸듯이 경강 구간에서 이 세 곳은 아름다운 강호로 손꼽었다. 경강의 동쪽에 있는 호수 곧 동호 가에는 낚시터로 유명한 입석포가 있었고, 언덕과 논밭과 백사장으로 이루어진 저자도는 고려 때부터 별장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