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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적벽부’(새로읽는 고전:89)
◎마음 비우면 ‘부자’가 되리라/가을 달밤 장강에 배를 띄우니 “저 물과 저 달이 바로 나이거늘”/
이제 곧 한가위 ‘적벽부’나 한수
동아시아의 문인들이 가장 즐겨 다룬 소재는 무엇이었던가.통계를 잡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아마 술과 달일 것이다.서양문학의 두 뿌리를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라 잡았을 때 아폴론이 바로 태양을 의미하는 것과 날카로운 대비를 이룬다고 보면 그리 틀린 진단은 아니겠다.
해와 달의 대조는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문명적 상징에 다름아닌 것이다.지금부터 9백여년 전인 1082년의 어느 하루,동아시아라는 달나라의 한 문인이 읊은 달밤의 정취가 세월의 단절을 넘어 아직도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물론 그것은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라는 천하의 명문을 통해서다.
오뉴월 더위가 물러나고 추(秋) 칠월도 보름을 넘긴 이튿날,기망(旣望)이다.황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동파는 그 달을 즐기는 일을 잊을 리 없었다.마침 부근 강가에 적토(赤土)와 암벽이 수려한 곳이 있어 뱃놀이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술을 마련하고 손을 불러 강에 배를 띄웠다.청풍이 소슬하게 불고 달은 휘영청 밝았겠다.술잔을 들어 권커니 잣거니 몇 순배가 돌자 주흥이 도도해지면서 절로 노랫가락이 좌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어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마침 좌중에 피리를 잘 부는 손이 있어 피리소리가 흥을 돋우면서 은은히 울려퍼지는데 소동파가 듣자하니 곡조가 흥에 겨운 것만은 아니었다.원한을 품은 듯 그리움을 펴듯,우는 듯 호소하는 듯 하면서 외로운 뱃전에 울려퍼지는 것이었다.술자리를 마련한 동파는 옷깃을 여미고는 피리 부는 손에게 그 까닭을 물을 수밖에.그러자 피리를 불던 손이 답하기를 “‘달빛이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난다’(月明星稀 嗚鵲南飛)는 구절은 조조(曹操)의 시구가 아니옵니까”
손은 바야흐로 예전의 ‘적벽대전’을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옛적 오나라 손권(孫權)의 장수인 주유(周瑜)가 위나라의 조조를 쳐부수던 적벽의 옛일을 회고한 것도 지당한 일이라.강가 저 건너편으로 그 적벽과 흡사한 광경이 펼쳐져 있거늘.싸움에 임하여 강에 당도한 바,절경을 앞에 놓고 창을 내려놓은 다음 시를 지어 경관을 읊은 것이 어찌 영웅다운 행동이 아닐손가.하지만 지금 그들 두 영웅은 간 곳이 없고,강건너 적벽만이 남아 그들을 떠올리게 할 따름이니 어찌 인생무상이 아닌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피리 불던 손은 인생이란 본시 창해일속(滄海一粟)이라,장강의 무궁함이 부럽기만 했던 것이다.하지만 소동파가 누군가.송대 문인의 정점에 소동파가 자리하고 있다 함은 그가 단순히 글재주를 농간하던 인물이 아니라 그의 세계를 보는 눈높이야말로 가위 천고의 일품이기 때문이 아닌가.
동파는 넌지시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의 한 구절을 끌어들여 공자의 가르침을 떠올린다.‘흐르는 물이 저와 같아서 주야를 가리지 않는도다’(逝者如斯夫 不含晝夜).그리고는 흐르는 장강 물을 바라보며 손에게 이렇게 한 수 가르친다.물은 줄었다 늘었다 하는 모양새가 변화하기를 무상키도 하건만 불변하는 만물의 본체(本體) 입장에서 보자면 물(物)과 아(我),곧 객관 사물과 주체가 무한한 생명에 뿌리박고 있지 않은가.
그리 본다면 장강의 무궁함이 무엇이 부러울 게 있는가.하늘과 땅 사이에 터잡고 있는 일체가 제각기 주인이 있어 실로 나 개인의 소유일 수 없나니.터럭 한 자락도 취할 것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강 위를 부는 맑은 바람과 산중의 밝은 달이 있어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눈으로 마주치면 빛을 발하는 법이라.아무리 취해도 막을 자 없으며,아무리 쓴다 해도 다함이 없거늘.이를 두고 조물주의 무진장한 창고라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물과 아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청풍과 명월이 바로 내것이 아니면서도 온전히 내것일 수 있는 까닭은 내가 바로 청풍이고 명월인 탓이 아닌가.사심을 떠난 경지에 이르면서 지공무사(至公無私)의 경지에 다다르면 자연과 하나가 되면서 주객의 이분법 장벽을 훌쩍 뛰어넘게 되는 것이다.
소동파가 손에게 들려준 대답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묘리란 자명하다.탐욕을 버리고 개아(個我)를 넘어서는 것이 그것이다.나아가 ‘무소유’를 통한 ‘충만’함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적 합리주의란 실은 이른바 타자를 제 이익에 맞게 취하고 재단하여 억지로 동일하게 만드는 탐욕에 기인한 것임은 이미 탈현대의 여러 사조들이 누누이 지적하고 있는 바가 아닌가.
이제 곧 한가위다.멋진 달밤을 맞아 독자들이여.소동파의 ‘적벽부’를 한번 읊조리는 것도 멋지지 않겠는가.
한가위 달이 두둥실 떠오르면 가족과 단란(團欒)의 정을 나누는 것도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네 고유의 정분을 나누는 방식이 아닐까마는,이번 한가위에는 새로운 염원을 달에 빌어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다.그런 점에서 북송 때 소동파라는 한 문인이 내세운 바 있는 ‘쓰임새를 절검함으로써 취함에 분수를 기하라’(節用以廉取)는 견해나 ‘널리 이익만을 탐하는 무리’(廣求利之門)를 흰눈으로 흘겨보는 소동파의 눈길이 케케묵은 낡은 소리일 수만은 없음도 물론이다.
<유중하 연세대 중문과 교수>
◎소동파는 누구/삼부자가 당송팔대가 “훌륭한 목민관” 명성
소식(蘇軾·1037∼1101)은 북송의 문인으로 지금은 쓰촨성(四川省)에 속하는 미주(眉州) 미산(眉山)출생이다.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황주(黃州)에 유배되었을 때 그 인근의 동파라는 곳에 설당(雪堂)을 짓고는 동파거사로 호를 지었다.
아버지 소순(蘇洵),아우 소철(蘇轍)과 더불어 ‘삼소(三蘇)’라 일컬어지며,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이들 삼부자가 함께 이름을 올릴 정도로 문장에 뛰어난 집안 출신이다.아울러 서예와 회화에도 탁월한 성취를 이뤄 가위 전통 문인의 완전한 상을 구현한 인물로 일컬어진다.1069년 처음으로 벼슬에 들었으나 당시 신종(神宗)은 왕안석(王安石)이 주동이 된 변법(變法)을 채택했는데,소식은 거기에 반대하여 구법(舊法)을 주장했다.
중국 각지를 떠돌면서 유배생활을 하거나 지방관리를 지내면서 도처에 그의 족적을 남긴 바 있는데,특히 항주(杭州)에서 재직하던 시절 그곳 절경의 하나인 서호(西湖)에 쌓은 제방을 소동파의 이름을 따 소파(蘇坡)라 이름지은 것은 유명한 일화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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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전적벽부(前赤壁賦) :달밤 뱃놀이
적벽부를 지을 당시 소동파 나이 47세(1082년)로 황주로 귀양와 있었다.
마침 친구인 양세창(楊世昌)이 소동파를 방문하자 밤에 뱃놀이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나 소자(蘇子)는 소동파(蘇東坡) 본인을 가리키고, 손님인 객(客)은 양세창을 이른다.
적벽부는 조조의 대군과 오나라의 대군이 일전을 치룬 적벽대전을 회상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였다. 소식은 자신이 뱃놀이 하던 황주의 황강현 성밖이 적벽대전이 벌어진 장소로 잘못아 알았으며 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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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부(赤壁賦) 전문 해석
임술년(1082년) 가을 7월 16일에 나는 손님과 더불어 배를 타고 적벽 아래에서 노닐었다.
맑은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 않았다.
잔 들어 손님에게 권하고 <시경>의 명월 시를 읊으며 요조장을 읊고 있으려니, 조금 있다가 달이 동산 위에 떠올라 두성과 우성 사이를 배회하는데 휜 이슬이 강물을 가로지르고 물빛은 하늘에 접해 있다.
한 조각 작은 배가 가는 대로 맡겨 아득히 너른 바다를 흘러가노라니, 하도 넓어 허공에 의지한 듯 바람을 탄 듯 멈출 곳을 모르며, 두둥실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 돋아 신선 세계에 오르는 듯하니,
매우 즐거워 술 마시고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하기를: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아대로
물속에 비추인 달그림자 치며
반짝이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네
아득히 먼 이 내 생각이여
하늘 한쪽에 있을 아름다운 임 그리네
손님 중에 퉁소를 부는 자가 노래에 맞춰 화답하니 그 소리 구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 실낱같은 가냘픈 여운이 끊이지 않는다. 이 소리 들으면, 으슥한 골짜기에 잠긴 교룡도 춤을 추며 외로운 배의 과부도 눈물지으리.
나는 근심스레 옷깃을 여미고 고쳐 앉아 손님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그리도 슬픈가?"
손님은 말했다.
"달이 밝으니 별이 드문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삼국시대 조조의 시가 아닌가?
서쪽으로 하구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을 바라보니 산천이 서로 얽혀 울창하여 검푸르도다. 이곳이 바로 조조가 주유에게 곤란을 당했던 곳이 아닌가?
바야흐로 형주를 격파하고 강릉으로 내려와 물결을 타고 동쪽으로 갈 때에 배는 천 리에 꼬리를 물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었네. 술 걸러 강가로 나아가 창을 빗겨들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한 세상 영웅이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더구나 나와 그대는 물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물고기와 새우를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하며,
한 조각 작은 배를 타고서 술 바가지와 술동이를 들어 서로 권하니, 천지 간에 하루살이가 부쳐 있는 것이요, 아득한 창해에 한 톨의 좁쌀이로세.
우리네 생이 잠깐임을 슬퍼하고 장강이 끝없음을 부러워하며,
날아다니는 신선을 끼고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서 길이 마치려 하지만 대번에 취할 수 없음을 아노니.
여운을 슬픈 바람에 부치노라."
나는 말했다.
"손님은 저 물과 달을 아는가? 흘러가는 것이 이렇지만 일찍이 다 가버린 적이 없으며, 차고 기우는 것이 저렇지만 끝내 사라지거나 더 커지는 일은 없다. 변하는 쪽에서 보면 천지가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변하지 않는 쪽에서 보면 만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무엇을 부러워하겠는가. 또한 천지 간의 온갖 것들은 물건마다 다 주인이 있으니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터럭만큼이라도 취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강가의 맑은 바람과 산야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색이 되어,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하지 아니하니, 이는 조물주의 무궁무진한 곳집이요. 나와 그대가 함께 즐거워할 것이로다."
손님이 기뻐하여 웃으며 옷과 잔을 씻어 돌아가며 마시니 안주가 다 떨어지고 술잔과 쟁반이 낭자한데,
배 안에서 서로 더불어 베고 깔고 누워서 동방이 이미 훤함을 알지 못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