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진 세종사이버대 교수 유학시절 만난 미국인 교수… 내 암산 능력 칭찬하며 '네가 우리과 톱이야' 격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갖게 해
첫 서울대 박사 김정호 '장애인이라 못 하는 게 아냐 노력하지 않기에 못 하는 것' 高1 담임의 따끔한 충고에… 방황 끝내고 정신 차렸죠
김영일 국립장애인도서관장 아무런 조건 없이… 목이 쉬도록 책 읽어준 맹학교 교사·교회 아주머니, 그분들 덕에 大入 치렀어요
이상재 하트 체임버 단장 밴드부 가입 권했던 선생님… 음악의 쾌감에 눈뜨게 해줘 주말마다 애들 연습시켜보니… 당신의 위대함 새삼 느낍니다
진창원 교육부 교육연구사 부족한 책 보내준 독지가, 그 책 읽어준 봉사자들… 그 후원자들 덕에 성공
어린 시절 소년은 수없이 기도했다. '제발 눈을 뜨게 해주세요.' 빛을 잃은 아이의 두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안 보이는 눈보다 가슴이 더 시커멓게 됐지만 기도의 답은 들리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뽀얀 눈가에 주름이 하나 둘 자리 잡은 그는 어린 시절 그렇게 울었던 새벽녘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때 눈을 떴다면 다른 아이들처럼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로 머물렀을지도 모릅니다. 시각장애인이었기에 더 노력했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한국 시각장애인으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주인공이자 한국계로는 처음으로 미국 백악관 차관보에 올랐던 고(故) 강영우 박사. 그는 열세 살 때 공에 맞아 세상의 빛과 작별해야 했다. 일찍이 남편과 사별했던 어머니는 아들이 실명(失明)했다는 충격에 세상을 떠났고, 얼마 뒤 그의 누이는 공장에서 과로로 숨을 거뒀다. 진정제를 한 움큼 집어넣고 생을 끝내려 한 적도 있었다. 이 모든 고통을 견뎌내기에 그는 너무 작고 어렸다.
그랬던 그를 빛으로 이끌어준 이가 있었다. 맹학교 자원봉사 선생으로, 제자 강영우를 만나 결국 그의 아내가 된 석은옥씨.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상처받은 강 박사의 영혼을 달래주며 곁을 지킨 것이 아내였다. 그는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는,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이라고 지칭했다.
강 박사의 모교이자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국립서울맹학교는 강 박사 이후 현재까지 국내외 박사 26명을 배출했다. 국내 시각장애 박사학위 소지자의 절반 이상이 이 학교 출신이다. 연세대 첫 시각장애인 교수로 장애인 권익향상에 힘썼던 고 이익섭 박사, 미국 미시간대 전산언어학 박사학위를 받고 실리콘밸리서 소프트웨어 전문가로 활동한 이대희 박사 등이 대표적이다.
눈앞을 지배하는 칠흑같이 까만 어둠에 묻히지 않고, 사회에 빛이 될 수 있었던 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배우고 싶다'는 내면의 목소리 때문이다. 또 그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 한 건 그들의 의지와 함께 눈과 마음의 버팀목이 돼 줬던 '선생님'이라는 존재다. 서울맹학교 출신 중 박사 학위를 받고 사회 각층에 진출한 5명에게 그들을 이끌어줬던 '빛의 선생님' 이야기를 들었다.
◇"네가 톱(top)이다"… 빛이 된 한없는 격려
오윤진(46) 세종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12세 무렵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지는 걸 느꼈다. 간단한 안과 시술을 받았는데, 시신경을 다쳐 앞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일종의 의료사고였다.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당시엔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 그렇게 힘들어하다가, 14세 때인가 강영우 박사님의 자서전 '빛은 내 가슴에'라는 점자 책을 읽게 됐어요. '아, 세상에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나같이 앞이 보이지 않아도 박사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유학 가서 박사가 되는 건 제 목표이자 삶의 희망이 됐어요. 어두운 터널 끝에 빛이 새어나오는 그런 느낌 있잖아요, 딱 그 기분이었어요."
대전맹학교와 서울맹학교를 거쳐 그는 중앙대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했다. 장애인이라고 원서도 안 받아주는 학교가 비일비재한 데다, 특례 입학도 없었던 당시 비시각장애인과 경쟁해 이룬 성과다.
맹학교 시절 방과 후 하루 세 시간씩 문제집을 읽어주고 공부를 도와줬던 대학생 봉사자들이나, 대학에 진학한 뒤 수업이 끝날 때마다 칠판 필기 내용을 다 불러주고 녹음해 주며 그의 공부를 도와줬던 같은 과 동기들, 수업 자료를 모두 녹음해 점자 노트를 만들 수 있게 해준 최경석 교수를 비롯한 몇몇 교수…. 모두 그가 잊을 수 없는 이다.
그중에서도 그에게 특히 힘이 돼 준 건 미국 피츠버그 대학 유학 시절 만난 게리 케스키(Koeske) 교수다. "사회통계를 가르쳐 주셨는데, 남들은 다 계산기 같은 걸 이용해 계산하는데 저는 그걸 다 암산으로 하니까, 그걸 엄청 예뻐해 주셨어요. 우리는 눈이 안 보이니까 어릴 때부터 모든 걸 암산해야 했거든요. 그걸 보시고는 남다른 재능이라며 치켜세워주시는데…. 매번 '네가 우리 과 톱(top)이다. 넘버원이다'라며 용기를 북돋아주셨어요. '미국 애들과 경쟁해도 이길 수 있겠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시각장애라는 신체적 장벽을 불굴의 의지로 뛰어넘어 ‘세상의 빛’이 되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힘들 때, 방황할 때, 외로울 때 곁을 지켜줬던 인생의 선생님이 함께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맨 왼쪽부터 김영일·김정호·이상재·오윤진·진창원 박사.
◇"장애 때문이 아니라, 노력을 안 해 성취 못 하는 것"
지난 2월 시각장애인으론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김정호(42) 엑스비전 테크놀로지 이사는 현재 시각장애인용 음성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국내 첫 시각장애인 판사인 최영 판사가 2008년 사법시험 합격 당시 이용해 화제가 됐던 화면 낭독 프로그램인 '센스 리더'를 개발한 회사다.
안암(眼癌) 때문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실명한 김정호 이사는 방황했던 사춘기 시절 자신을 따끔하게 채찍질했던 은사의 한마디를 잊지 못한다. "고1 들어 제가 좀 공부를 안 했거든요. 몸이 불편하니까, 그런 것에서 파생되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좌절 같은 것들이 반항으로 연결됐던 것 같아요. 그때 담임이셨던 권재임 선생님이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꿈을 꾸는 건 모든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실현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장애인이라 못 하는 게 아니라,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다.' 한 방 맞은 듯했죠. 정말 아팠어요. 제게서 가능성을 엿보시고는 수렁에 빠질 뻔한 저를 건져내기 위해 엄한 모습을 보이셨다 생각해요." 선생님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그의 가슴에 박혔다.
그 뒤 공부에 대한 열정을 다시 키웠다. '난 장애인이니까 안 될 거야. 어려울 거야' 등 자신을 미리부터 한계 짓고 스스로 제한했던 과거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물론 어려움 있어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분명 사회적 한계나 억압은 있고, 저희가 꿈만 꾼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무언가 성취하는 데 특히 중요한 건, 어마어마한 무언가가 필요한 게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갈 수 있는 의지를 키우는 것이죠. 꿈을 이루기 위해선 구체적인 실력이 뒷받침돼야 하고요. 그걸 선생님이 지속적으로 일깨워주셨죠."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회사를 창업해 경영 마케팅 일을 하고 있다. "그때 선생님의 조언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을 거예요. 어디서 무엇을 했을지…. 어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요. 마음의 장애를 극복하라는 그 한마디가 제 인생에 두 번 다시 없을 빛이 된 거죠."
◇"그의 목소리는 내 눈이 되었다."
2년 전 국립장애인도서관장에 부임한 김영일(45) 조선대 특수교육과 교수와 교육부 첫 시각장애인 공무원인 진창원 특수교육정책과 교육연구사(43)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들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은 '공부'였다. 김 교수는 "눈은 안 보였지만 대신 상상으로 세상을 그렸다"고 말했다. 그는 미 텍사스 주립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해서는 타임지 등 잡지 7권을 구입해 음성지원 프로그램으로 들을 정도로 '글 중독'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엔 학문에 대한 그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환경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점자 책도 많지 않았고, 가난한 살림에 많은 책을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진창원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아이들이 보던 성문기본영어가 시중에선 몇천원 정도였는데, 점자로 된 책은 2만원에서 3만원이었거든요. 겨우 먹고살 정도였는데 그렇게 비싼 책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죠."
하지만 이대로 좌절하란 법은 없었다. 맹학교 시절 아이들의 영특함과 공부에 대한 열정을 알아챈 교사들이 나섰다. 김영일 교수는 대학 입시를 준비했던 때를 떠올렸다. "논술을 준비해야 했는데, 수업 시간의 절반 이상이 안마 기술 등을 배우는 직업교육 시간이라 학업을 따라가기 어려웠거든요. 이길재 선생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남보다 매일 한두 시간 일찍 출근해 신문 사설을 매일 읽어주고 내용을 분석해 주셨어요. 조건 없이 그냥 자신의 시간을 내주신 것이죠. 또 교회 신도 아주머니들께서도 하루 두세 시간씩 돌아가면서 매일 제게 책을 읽어주셨어요. 다들 목이 쉬실 때까지 읽고 또 읽어주시고…."
진창원 박사는 "책을 모두 지원해준 후원자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옆 친구 책을 빌려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눈치 보여서 힘들었거든요. 하지만 독지가의 덕에 원하는 대로 책을 얻어 떳떳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됐어요. 또 선교 봉사하는 분들이 내 눈이 돼 틈틈이 읽어주시니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더라고요." 진창원 박사는 삼육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나처럼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17년간 서울맹학교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사람과의 어울림을 배우다
"열 명이 모이면 10이 아니라 100이 될 수 있다는 걸 가르쳐주신 선생님, 서로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호흡을 맞춰가며 무언가 만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쳐주신 나의 선생님께 한없는 감사를 느낍니다."
하트 체임버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단장인 이상재(46) 나사렛대 교수는 서울맹학교 시절 자신에게 처음으로 밴드부 가입을 권했던 최영식 선생님에게 많은 공을 돌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술래잡기를 하다 교통사고로 눈을 다쳐 시력을 잃은 꼬마 이상재가 음악이라는 신비한 세계에 눈 뜨도록 해준 분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번에 서울맹학교 100주년 기념식 예술 감독을 맡아 학생들과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갖는다. "주말마다 4~5시간씩 밴드부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악보를 일일이 읽어주다 보면 정말 목에서 피가 나올 것 같거든요. 처음엔 몇 마디 불러주는 데도 4시간이 걸렸어요. 아이들이 악보를 못 보니 파트별로 일일이 불러주면서 외워 따라 연주하게 하거든요. 이쪽 가르치다 보면 저쪽 파트 아이들은 배운 걸 모두 까먹고, 그런 걸 반복하다 보니 몸이 남아나질 않겠더라고요. 이 힘든 걸 최 선생님은 수십년간 하셨으니…. 제가 가르치는 입장이 돼 보니 선생님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는 거 있죠."
이상재 단장은 서울맹학교 졸업 뒤 중앙대 관현악과를 거쳐 미국 3대 음악대학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피바디 음악대에 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각장애인이 이 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는 이 대학 140년 역사상 처음이었다.
"박사과정 6년간 제가 홀로 버틸 수 있었던 건 음악이 주는 쾌감 때문이었거든요. 최영식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하모니의 힘을 믿어요. 선생님은 '이해받으려고만 들지 말고 이해하는 힘을 키우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어울림'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말씀하신 거죠. 장애아 중에선 뜻대로 잘 안 되니까 짜증을 더 부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런데 오케스트라를 하면서 함께할 수 있다는 걸, 이 사회에 함께 녹아들어 갈 수 있다는 걸 배우게 되죠. 서로의 얼굴과 연주 모습을 볼 수 없으니 호흡 맞추는 데 남보다 몇 배 시간은 걸려도, 곡이 끝나면 발을 다다다닥 구르는데 그 쾌감이란! 세상에 가장 빛나는 빛이란 게 있다면 바로 우리 아이들의 미소일 거예요."
첫댓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곳이라 아마도 불보살님께서 더 많이 계시나 봅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선생님의 힘은 위대합니다.
이세상의 모든 선생님들을 존경합니다.
모두 특별하시지요.
감사드립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