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방송일시 2011년 2월 28(월) ~ 3월 4일(금)
기획 : 류재호
촬영 : 이연배
구성 : 강윤희
연출 : 김한태
제작사 : 미디어 소풍
광역시라는 타이틀 아래 화려하고 번화한 도시의 이미지로 알려진 대구.
하지만 이 '달구벌, 큰 언덕'은 놀라운 경제발전의 성과뿐 아니라
유구한 역사의 흔적부터 소소한 삶의 이야기까지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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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표된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이 가장 많이 출토되는 지역'이란
연구결과를 뒷받침하듯, 대구의 도심 한가운데에는 고대의 유적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근대에 들어서며 대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쌓았던 옛 대구읍성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오늘날의 동성로, 북성로, 서성로, 남성로가 들어서며
골목마다 수많은 역사의 흔적을 품은 채 발전을 거듭해왔다.
국채보상운동의 시작, 학생 항일운동의 중심지도 바로 대구의 길 위였다.
한국전쟁 피란 예술가들의 창작적 공간이 되기도 한 우리 역사의 '큰 언덕' 대구.
오랜 시간이 흘러 그 수많은 역사의 흔적 위에서,
대구인들은 삶터를 일궈가며 또 다른 역사를 새로이 쓰고 있다.
대구의 오랜 옛이야기와 골목마다 가득한 삶의 소리.
21세기 대구의 초상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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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장터, 삶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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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이라 하면 으레 '시골'을 떠올린다. 대구가 광역시라는 타이틀 아래
무려 140여 개의 전통 재래시장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놀라운 것은 개수뿐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경상도를 관할하던 경상감영이 자리했기에 대구는 예로부터
행정의 중심이자 물류의 집산지로 자연스레 수많은 시장이 발달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대구의 재래시장들은 우리네 삶과 역사를 가득 품고
저마다의 특별한 '분위기'를 가지게 되었다.
쪼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350년 전통의 약령시.
수백 년 동안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 러시아에서까지 약재들이 들어와
골목을 빼곡히 채웠으니 그야말로 국제적인 한약재 유통의 거점이었다.
골목뿐 아니라 사람의 역사도 길다.
구순이 넘은 노모와 함께 100년을 거쳐 약전골목을 지켜온 한약방에서는
'약령시 100년 산 증인'의 옛이야기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인근의 염매시장은 약령시가 생기면서 인근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곳이다.
약령시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절로 머물면서 일제강점기 때는
한국, 일본, 중국의 도매상까지 드나들어 '대구의 신장'이라 불렸을 정도라고.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생계를 위해 시장상인들을 대상으로
떡을 해다 팔던 골목이 그대로 시장이 되어버린 떡전골목.
한국전쟁 중 미군부대에서 배출된 깡통들로 생활용품을 만들었던 것이
그 시초가 된 한석거리까지. 수십년 세월에
저마다의 이야기가 가득한 대구의 시장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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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달구벌에 흐르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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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밑이 어두울지 모른다.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지만 대구에는
놀라울 정도로 오래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불로동에 자리한 211기의 무수한 고분군.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저 어린 시절 술래잡기를 하던 친근한 놀이터였다.
하지만 이 고분군은 이후 꾸준한 발굴과 복원 작업으로
지금은 동네의 자랑이자 고대 대구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적지가 되었다.
산과 물이 가까워 읍락이 들어서기 최적이었던 불로동에
삼국시대, 토착민들이 정착하였고 그 중 지배 세력들이 묻힌 무덤이
바로 1,600여 년의 시간 동안 마을을 지켜봐온 이 고분군인 것이다.
가족사진의 배경은 항상 이곳이었던 달성공원에도 역사는 숨어 있다.
가로수 한가운데로 우뚝 솟은 흙길. 가족들과 손을 잡고 대구를 내려다보던
이 길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토성인 달성토성이다.
고대의 달벌국을 지키던 토성은 이제 주변에 공원이 세워져
대구 시민들의 '추억'을 지키고 있다.
요즘 대구의 골목투어가 젊은이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단순히 감상에 잠겨 걷는 것이야 어느 동네에서나 가능하지만
근대의 문화유산들이 가득한 골목을 걸으며 배우는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여자들은 가락지를 내어!'
나라 빚을 갚고 외세의 그늘에서 벗어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서상돈의 고택.
대구의 학생들이 태극기를 품에 안고 비장한 마음으로 걸었을 구십 개의 계단.
현재의 사람들은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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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희망을 짜다, 꿈을 일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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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시작된 대구의 섬유산업은 많은 대구인의 노력으로
부단한 발전을 이루어 7, 80년을 거친 우리나라 경제 부흥의 밑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경제성장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말보다도,
대구의 여자들에게는 그저 어렸던 아가씨에게 일자리를 내어주고
어려운 시절에 아이를 먹일 수 있었던 고마운 '삶터'로 기억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굴곡을 지나 많은 변천을 겪기도 했지만
아직도 섬유하면 대구라는 공식은 여전하다.
섬유 생산부터 완제품까지 '논스톱'으로 이루어지는
대한민국 유일한 지역이 바로 대구이기 때문이다.
규모는 작지만 대구의 영세 섬유업체들을 다른 지역과 비할 수 없는 것은
이들 역시 젊은 시절을 섬유산업과 함께 보내왔기 때문.
몇십 년을 쌓아온 자신들만의 노하우로 뽑아낸 질 좋은 원단 중 일부는
시장으로 나와 누구든 손쉽게 구해볼 수 있다.
한강이남 최대의 섬유시장인 서문시장.
2005년에 있었던 큰 화재로 인해 많은 가게가 인근 지역으로 이전했지만
여전히 서문시장 2지구는 대구 섬유시장의 대명사로 불린다.
가정에서부터 쇼핑몰, 업체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원단과 부자재를 찾기 위해서 이곳에 들러 늘 북적이는 곳.
방식은 한국적, 디자인은 세계적! 요즘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천연염색과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수한 질로 승부하는 침구류 골목 등.
때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때로는 새롭게 태어나며
대구의 섬유산업은 세기를 넘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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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골목길 따라 예술이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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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
한국전쟁 당시 한 외신이 대구를 표현한 한마디였다.
전쟁 당시 많은 예술인들은 대구로 피란을 내려와
향촌동의 다방과 거리에 모여 '피란예술'을 꽃 피웠다.
눈앞을 가르는 탄환도 그들의 예술혼을 꺾을 순 없었던 것일까.
이제는 비어버리고 다른 가게가 들어서기도 했지만
당시 향촌동 골목을 가득 메웠던 다방에서는 가난했던 화가 이중섭이
담뱃갑 은박종이에 그 유명한 '은지화'를 그리기도 하고,
이름만 대어도 알 법한 시인들의 출판회가 열리기도 했다.
거창한 미술관이나 회관이 아닌, 이 향촌동 골목이
전란 당시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자 창작공간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렀어도 향촌동에는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
번화가에서 이어진 골목에 자리한 <하이마트>.
이 오래된 클래식 음악 감상실에서는 여전히 음악이란 이름 아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가 가진 음악과 지식을 나눈다.
아흔을 넘긴 이창수 옹이 60년 넘는 세월을 매일같이 지켜온 <녹향>.
손님이 많이 줄어 한때는 존폐의 기로에 서기도 했지만
이 유서 깊은 지역 문화공간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1,500회를 훌쩍 넘긴 <녹향 연주회>가 열리는 날.
돌이켜 보면 양명문이 이곳에서 가곡 <명태>의 시를 선물하기도 했고
이중섭에게 그림을 그리라며 은박종이를 건네기도 했었다.
선율 깊은 음악을 따라, 때로는 옛 기억을 찾아
사람들은 오늘도 그 시절 '폐허'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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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조선시대, 대구에 깃든 외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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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해 대구에 터를 잡고 살았던 외국의 두 장수가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다른 나라에 삶의 터를 잡는다는 것이 쉽지 않는데,
마치 전설 속 이야기 같지만 실재하는 우리나라의 한 역사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중국의 원군으로 왔던 풍수지리가, 두사충.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설 것을 미리 예견하여 한국으로 귀화한 그는
이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도와 풍수지리로써 미리 진을 치는 등 전쟁을 돕기도 하였다고.
임진왜란 중에 조선에 귀화한 또 한 사람, 김충선 장군.
사야가라는 일본 이름을 가졌던 그는 1592년 일본의 선봉장 자격으로
조선에 상륙하였지만, 곧 명분 없는 전쟁은 불가함을 깨닫고는
한국으로 귀화하여 오히려 일본과 맞서 싸우며 조선을 지키고자 했다.
이 두 사람이 같은 시대, 대구라는 땅에 정착해 살았다는 사실은
아직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진 않았다.
하지만 두사충의 후손들은 잊지 않고 매년 선조의 묘를 찾아
제를 올리고 조상의 공을 기리며,
김충선의 위패를 모신 녹동서원에는 국적을 떠나 평화를 외쳤던
그의 인성에 감복한 많은 일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구를 마치 자신의 고향처럼 사랑하며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은
서양에도 있었다. 1897년, 미국인 의사 존슨과 선교사 및 그 가족들이 대구에 정착해
미국약방과 제중원을 세워 이 지역 최초로 서양의술을 전파하였다.
서로 다른 문화와 문화가 만나 대구의 진일보를 이뤄내던 현장.
바로 이곳, 대구에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