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정용석이 10년전에 출판한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와 거의 대동소이한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그 당시로부터 저는 피나는 노력을 통해, 정용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는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기에, 여기에 내용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의 참언을 그대로 요약만 하기에는 제 양심에 도저히 용납되지가 않아, 그에 대한 반박도 같이 기술하려고 합니다. 정용석의 주장은 검은 색으로, 반박은 파란색으로 적었으니 참고 바랍니다.
일단 먼저 정용석 주장을 약술하자면, 그는 소위 '대륙삼국' 설의 주창자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말 합니다. 그 증거로 삼국사기에는 지진이 났다던가, 여름에 서리가 내렸다던가, 메뚜기떼가 날아왔다던가 하는 기록이 많은데 한반도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반박은 10년 전부터 이미 많은 분들이 제기를 해 주셨습니다. 특히 정용석이 '한반도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고 주장했던 모든 기상 현상은 조선시대때도 자주 발생하는 일이었음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이쯤되면 창피해서라도 그냥 조용히 있을 법 한데, 정용석은 이번에는 "그렇다면 조선도 대륙에 있었던 모양이다" 라며 '대륙조선' 설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미 해로를 통해 동-서 교류가 활발해진 상태로, 중국 대륙 전체를 명, 청이 점유하고 조선과 일본이 그 동쪽에 존재했던 것이 서양의 기록에서도 확실합니다. (구태여 증거를 댈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이런 면에서 볼 때 정용석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책을 잘못 읽어놓고 그 몇줄을 기준으로 해서 인류 역사 전체를 완전히 새로 쓰자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용석의 정신 상태를 의심해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점이 있습니다. 차차 언급하기로 하고, 책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중국대륙의 거대한 제국 고구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중국에 여러번 사신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반도와 중국은 수천리나 떨어져 있다. 수천리나 떨어진 나라에 사신을 파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구려는 중국의 북조와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였다. 또한 남북조의 각 나라들은 고구려 왕의 관작을 앞다투어 올려줄 정도였다. 그것으로 볼 때 고구려는 서안과 낙양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제국이었음에 틀림없다.
->수천리가 떨어졌다고 해서 대체 왜 사신을 파견할 수 없다는 걸까? 그런 식으로 따지면 고구려가 대륙에 있다고 해도 남조와는 여전히 수천리가 떨어지게 되어, 사신은 갈 수 없다. 이야기를 살짝 돌리면, 정용석이 주장한 원리에 따르면 파르티아의 사절이 로마로도 갈 수 없다. 이라크 지방에서 이탈리아까지는 한반도에서 중국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멀기 때문이다. 헝가리왕이 파견한 사자가 로마 교황청에 갈 수 없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러한 외교 사절은 모두 수천리 거리를 잘만 오갔다. 여기서 현장 삼장이 불경을 구하려고 얼마나 먼 거리를 갔는지, 그런 얘기까지는 할 필요도 없겠다.
정용석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 왕조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아 이 나라들은 모두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그리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역이 사실이라면 중국의 왕조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어진다. 존재하지 않는 나라와 외교를 벌였단 말인가?
정용석이 늘 인용하는 삼국사기에는, 진덕여왕때 김춘추가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군사와 마주치는데, 이 때 배를 타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정용석의 주장대로라면 신라와 중국 사이에 바다 따위가 있어서는 안되며, 물론 배도 타서는 안된다.
정용석은 신비한 사람이다. 그는 아마도 육지에서 움직일 때는 배를 타고, 바다위에서는 걷는 모양이다. 그러니 수천리는 고사하고 몇 걸음이라도 갈 수 있겠는가?
2. 흑치상지와 남생의 무덤은 낙양에 있다. 이것으로 보아 백제는 중국 대륙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백제 국호의 뜻은 백가제해(百家濟海)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바다를 건넜다는 말은 전혀 없다. 산동지역인 제(齊)와 해주(海州)에 나라를 세웠다는 뜻임에 분명하다.
->흑치상지와 남생은 둘 다 당나라에 항복 한 뒤 그 땅으로 가서 벼슬을 살다가 죽었다. 신, 구 당서에 아주 잘 나와있는 내용이다. 이것은 마치 마르크스 무덤이 영국에 있다고 해서 독일은 브리튼섬에 있었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10년전부터 정용석은 이런 공격을 수없이 받았지만, 마치 귀가 밀랍으로 봉해지기라도 한 것 처럼 전혀 대꾸를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그가 계속 이런 책을 출판하는 행위 자체에 모종의 속셈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자기 주장이 실로 잘못되었으며, 반박하는 글만 써도 엄청나게 자세해진다는 사실을 지난 10년간 매우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똑같은 주장을 담은 책을 쓴다.
일단 이런 책을 쓰면 팔리기 때문이다. 정용석은 소위 "강단 역사학자들" 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주장은 모두 옳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그들의 밥줄이 끊어지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 역사학자들이 아니라 정용석에게 해야 할 말이다.
덧붙이자면 "백가제해" 의 '재해' 는 정확히 '바다를 건너다' 라는 뜻이다. 제(齊) 땅과 '해주' 라니 개그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3. 당나라가 백제를 칠 때 김춘추는 우이도 행군 총관이라는 벼슬을 받고 김유신은 고구려 공격때 양하도총관이라는 벼슬을 받는다. 이것은 모두 중국 동부 지역의 지명이다. 또 당나라의 소정방은 5월 26일(또는 6월 18일)에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하는데 7월 10일에 부여에 도달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또 당나라 군대가 서해 바다로 이동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중국에서 외국사람에게 주는 벼슬 이름 가운데는 명목뿐인 것이 많았다. 백제가 대방고지를 고구려에게 빼앗긴 뒤로도 백제왕들은 대대로 대방군공이라는 책봉을 받았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받은 벼슬 이름은 우이도와 하남도로 행군하는 당나라 주력군의 지도부에그 두사람 이름을 넣어준 정도 의미밖에 없다.
소정방의 출발 날짜를 5월 26일, 또는 6월 18일이라고 한 것은 정용석의 파렴치한 행위의 일면을 보여준다. 5월 26일이면 5월 26일이고 6월 18일이면 6월 18일이지 '또는' 이라는게 대체 무엇인가?
삼국사기를 정확히 읽으면, 여기에서 5월 26일은 소정방이 출발한 날짜가 아니라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군이 출발한 날짜이다. 소정방이 당고종에게 명을 받은 것은 3월이고, 6월 18일은 소정방의 군대가 산동반도의 항구 도시인 내주에서 배를 타고 떠난 날짜다. 그리고 소정방이 거느린 전선(戰船)이 천리에 뻗쳐 바다를 건너왔다고 떡하니 쓰여 있다. 바다로 이동했다는 말이 없다니, 거짓말도 이런 거짓말이 없다.
삼국사기는 오늘날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 책으로, 누구나 그 원문과 해석을 확인 할 수 있다. 정용석은 놀랍게도 자기가 읽고 싶은 글자만 읽는 재주를 보이지만, 그게 거짓임은 누구라도 확인 할 수 있다.
4. 경주는 인구 100만의 거대한 도시였다. 지금의 경주를 보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황룡사에는 9층 목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낙양에도 그런 것이 있었다.
->정용석은 신라의 수도 경주가 중국의 낙양이었다고 우긴다. 황룡사는 7세기 중반에 세운 절이고, 낙양의 9층 목탑이라는 것은 6세기 초 북위때 세운 것이다. 시기적으로 130년이나 떨어져 있지만 정용석은 그 두가지가 같다고 우긴다. '9층' 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찬 물 더운물을 못 가리는 것이다.
경주의 인구가 100만명이라는 말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이다. 실제로는 17만호(80만명 정도)라고 나오는데, 숫자를 좋아하는 한국의 재야들은 100만명이라고 쓰기를 더 좋아한다. 그런데 같은 책에는 고구려 인구가 100만명(21만호)이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경주의 인구와 고구려 전체 인구가 같았단 말인가?
삼국유사에 실린 숫자들은 신빙성이 없는 것이 많다. 당연히 다른 기록에 나오는 숫자와,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를 대조해 가면서 사료비판을 해야 한다. 물론 정용석은 사료비판이라는 것은 전혀 하지도 않는다. 그냥 여러 책을 펼쳐보고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믿을 뿐이다. 정말로 믿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5. 신라의 수도 금성은 둘레가 55리나 되는 거대한 성이었다. 경주가 금성이라고 우기려면 먼저 이런 성터라도 찾아놓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성은 한반도에 없다. 그런데, 낙양과는 잘 일치한다. 최치원이 토황소격문을 쓴 곳도 낙양이었다.
->한양 성벽과 수원성이 불과 100년만에 사라지는걸 보고서도 저런 말이 나올까? 산성이 아닌 한 큰 도시 주위의 성벽이 땅 위에 보존되어 있기는 매우 힘들다. 경주에 산재한 수많은 고분, 황룡사터, 땅만 파면 쏟아져 나오는 신라 유물과 안압지를 펐을 때 쏟아져 나온 수많은 출토품도 정용석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그런 걸로는 부족하다" 한 마디면 끝이다.
정용석은 낙양이 경주라고 말한다. 경주가 동경(東京)이라고 불리고 낙양은 당나라때 동도(東都)라고 불렸다는데서 착안한 '발칙한 아이디어' 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일본의 도쿄도 낙양이겠다. 삼국사기에서 확인되는 경주 근처의 성만 6개로, 일반적으로 산을 끼고 작은 규모의 성을 쌓는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낙양 주위엔 그런게 없다는 건 더 말 할 필요도 없다. 덧붙여 낙양성의 둘레는 55리가 아니라 70리였다.
(여기서부터는 12월 23일에 추가해 넣음)
6. 삼국의 이상기상 현상
삼국사기를 보면 (음력)여름 4월에 서리가 내리고 초가을인 7월에도 내려서 곡식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10개월 이상 서리가 내렸던 것이다. 이런 기후는 대륙의 스텝기후이다. 즉, 삼국은 스텝기후대에 속해있는 중국대륙 북쪽에 위치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천재지변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 왜냐하면 전근대시대에는 재이설(災異說)이라는 것이 있어서, 특이한 기상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정치가 잘못되고 있음을 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삼국사기에 '날씨' 나 '기상' 에 관한 얘기가 실렸다는 것은 그런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특이한 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왕이 전쟁하고 벌 준 일 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날씨까지 적을 턱이 있는가!
정용석은 삼국시대에 이런 저런 기상현상이 있었다고 예를 들고 있지만, 같은 해에 일어난 일은 하나도 없다. 이를테면 저 '여름 4월의 서리' 라는 건 457년에 일어난 일이고, '초가을 7월에 서리' 라는건 509년에 일어나는 식이다. 52년이나 떨어져서 일어난 일인데 정용석은 마치 저런 일이 매년 되풀이되는 것 처럼 말하고 있다. 저런 식으로 하면 세계 어느 기후대엔들 못 갖다붙일까?
한가지 예를 들어볼까? 본인이 중학교 다니던 때, 4월달에 갑자기 눈이 내렸던 적이 있다. 마침 월요 아침 조회를 하느라 전교생이 운동장에 서 있다가 눈을 펑펑 맞고 혼비백산해서 교실로 뛰어 들어갔었다. 우리나라의 겨울 첫눈은 보통 11월에 내리는데, 간혹 10월에 내리는 때도 있다. 정용석 식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1년에 6개월이나 눈이 내리는 놀라운 나라인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아마 시베리아 어디쯤인 모양이지?
조금 더 해보자.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여름 6월에 눈이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리 추운 동네라도 여름에 눈이 내렸다니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우리는 일본이 지구의 남반구에 있어서 여름과 겨울이 북반구와 반대인 지방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정용석의 논리라는건 이런식이다.
7. 삼국시대의 기후는 어떠했는가?
(전반부에는 앞 챕터에서 했던 기후 얘기를 조금 하다가, 곧 지리 이야기로 넘어간다.)위도가 같으면 기후도 비슷해야 하는데 옛 기록에 의하면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 두 지방인 경산과 하양을 가리켜 한쪽은 따뜻한 곳, 한 쪽은 추운곳이라고 하는가 하면 평안도 벽동은 음력 7월부터 추워져 다음해 4월에야 따뜻해진다고 기록했다. 동절기가 10개월이나 지속되는 곳은 북위 55도 이상의 툰드라 지역이다. 진주와 동래는 큰 고을이라고 하는데 어이없는 일이다. 의주는 낙랑을 분할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경주 인근과 평양 근처에도 의주가 있어야 한다.
->정용석의 책에는 특징이 있다. 그건 바로 어디에서 인용했는지, 원래는 어떻게 쓰여있었는지 원문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원문을 공개하면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게 들통이 나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쪽에 사는 사람들을 기준을 삼으면 평안도와 경북 내륙은 겨울이면 상당히 추운 곳이다. 기온이 정확히 몇도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단순히 '춥다, 덥다' 로만 얘기하면 앞 항목에서 쓴 것 처럼 세계 어느 기후대에도 못 갖다붙일 곳이 없다.
이것은 '큰 고을' 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정확히 인구가 몇 명, 생산량이 얼마라고 얘기하지 않는 이상 크다/작다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조선 최대의 도시인 한양이 인구 10만이던 시절에, 경남에서 일종의 환락가를 조성하고 있던 진주와, 왜관에서 무역이 행해지던 동래는 당시 사람들 기준으로 충분히 큰 고을로 불릴수 있다. 이런 사실은 역사를 조금만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안다. 화개장터를 큰 장이라고 불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일부러 이런 것을 쓰고 있는 게 낭비로 느껴질 정도이다.
정용석은 책의 앞에서는 고구려가 중국 북부에 있다고 했다. 평양은 섬서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또 툰드라 기후대에 있다고 한다. 물론 중국 섬서성에는 툰드라 기후대 같은건 전혀 없다. 정용석의 책 내부에서도 이러한 모순은 허다하다. 하지만 그는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신에 문제가 있어서일까? 의도적으로 모른척 하는 것일까? 본인은, 정용석이 의도적으로 모른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낙랑 얘기만 해 보자. 낙랑군의 영역은 현재의 황해도에서 압록강 인근까지를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낙랑을 분할해서 의주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정용석은 이런 말 전혀 하지 않는다. 얼토당토 않게 경주를 끌어다 붙이기까지 한다. 아마 신라왕이 '낙랑군왕' 으로 책봉받은 걸 보고 옳다구나 하고 지어낸 말인 것 같은데, 원래 '낙랑군왕' 의 작위는 고구려왕이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구려와 당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만큼 악화된 후에 고구려왕의 작위를 폐하고 신라왕에게 주었던 것이다.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독자는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몰라서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8. 연안해류와 백제 멸망의 미스터리
(앞에 나왔던 얘기들의 반복)소정방은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바다를 건너 왔다는 말은 없다. 또한 그 군대는 13만명이나 되었는데, 판옥선이나 정크선을 차고 대륙 동안의 걸프스트림 해역을 통과했다면 거의 모든 배가 침몰했을 것이다.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당태종은 요수를 건너 백제를 공격하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백제와 당나라 사이에 바다가 없었다는 증거이다. 또 소정방은 삼년산군에서 고종의 조서를 받고 단 이틀만에 의자왕을 압송하여 장안에 도착한다. 이것은 백제와 장안이 이틀 거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다를 건넌 얘기와 배 탄 얘기가 삼국사기에 떡하니 나온다는건 앞에서도 얘기했다. 한편 정용석은 놀랍게도 배로 황해를 건널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도에서 마다가스카르까지 정크선 보다 훨씬 작은 카누를 타고 항해하던 사람들은 대체 무엇일까? 정용석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원래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라비아인들이 입고 있던 인도 직물 옷도, 그린란드의 바이킹 촌락 유적도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 이스터섬에는 알고보니 원래 사람이 살지 않았던 모양이다. 애초에 건너갈 수 없는데 어찌 사람이 살았겠는가? 아마 모아이가 이스터섬의 원주민이었던 모양이다.
태종이 '요수를 건너 백제를 공격하겠다' 운운은 신당서와 구당서에 같이 실려있는데, 구당서 기록이 좀 더 자세하다. 그 내용인즉, (백제와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신라사신 법민(후일 문무왕)에게 한 말)"왕(백제 의자왕)이 만약 전진을 멈추지 않는다면 짐은 법민이 청한대로 그와 더불어 결전할 것을 막지 않을 것이며, 고구려가 (백제를)돕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만약 고구려도 이 명령을 받지 않는다면 즉시 거란과 여러 번국을 시켜 요택을 건너 쳐들어가게 할 것이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복을 구하고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하라"
신당서에서는 이 말을 요약해서 적었는데, 몇 글자가 빠져 있다. 어쨌든 원래는 저런 말이다. 요수를 건너 공격하겠다는 대상이 고구려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정용석은 그런 것, 말 하지 않는다.
의자왕이 이틀만에 장안까지 갔다는 말은, 당연한 얘기지만 물론 거짓말이다. 삼년산군에서 고종의 조서를 받은 사람은 소정방이 아니라 신라 무열왕이다. 이 때가 9월 28일로, 이보다 앞서 9월 3일에 소정방은 이미 당으로 귀국해서 9월 30일에 장안에 도착한다. 여기에는 황해를 건넌 3일간의 항해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중국은 황하와 양자강을 운하로 연결하고 내륙 수운이 짜여 있어서 이정도 속도가 나왔다. 물론 정용석의 주장에 따르면 애초에 대운하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도 그럴것이, 황하와 양자강 주위는 백제땅이고 낙양은 경주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대운하는 대체 무엇일까? 아마 낙양 근방의 개미들이 힘을 모아 판 모양이다.
9. 임나일본부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해협을 건너려면 고도의 항해술이 있어야 한다. 일본인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로 올 수는 없다.
->황해를 못 건너는게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대한 해협도 못 건넌다고 한다. 정용석이 건널 수 있는 물은 대체 무엇일까?
이 대목을 자세히 읽어보면, 정용석이 임나 일본부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게 절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있기는 있었는데, 중국 대륙에 있었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0. 화산 폭발이 잦았던 신라의 토함산
신라의 토함산은 화산이었지만 지금 경주의 토함산은 화산이 아니다. 신라의 선덕여왕이 모란을 국화로 삼아 궁정에 번식시켰는데, 낙양에는 모란이 많이 피어있다.
->토함산이 화산이라는 가당찮은 얘기는 오래전부터 격렬하게 공격을 받았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인데, 정용석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계속 했던 말을 또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문영님(http://orumi.egloos.com)이 잘 정리해 주셨다.
정용석이 토함산을 화산이라고 보는 근거는 진평왕 31년의 "봄 정월에 모지악 밑에 있는 땅이 탔는데 너비가 4보, 길이가 8보, 깊이는 다섯자나 되었다. 10월 15일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는 기사와 무열왕 4년에 "동쪽 토함산의 땅이 탔는데 3년만에 그쳤다." 는 기사이다. 정용석은 저 "너비 4보, 길이 8보, 깊이 다섯자" 의 구덩이가 토함산 분화구라고 주장한다. 세상에 저런 작은 분화구도 있나?
저 사건은 오늘날 포항 앞바다 인근에 천연가스 층이 있다는게 알려지면서, 대충 지하 가스의 분출이 아니겠느냐고 생각되고 있다. 화산 폭발이라니 당치 않다. 저 비슷한 일은 물론 조선 시대에도 몇 번 일어났다.
정용석은 여기서 또 낙양이 경주라고 한다. 이번에는 한다는 얘기가 "모란이 많이 피어있다" 이다. 물론 그 낙양 주위에는 화산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러고보니 일본의 효고현에 히메지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도 모란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더라. 일본에는 화산도 많지, 아마?
11. 격렬한 지진대에 속했던 삼국은 강역은 어디인가?
삼국시대에는 지진이 많았다. 신라는 55회, 고구려는 19회, 백제는 14회나 되었다. 삼국은 격렬한 지진대 위에 존재했던 것이다. 장안에서 낙양에 이르는 유라시아지진대에 삼국이 위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유라시아 지진대라는건 좁게 잡으면 환태평양 주위가 고작이고 넓게 잡으면 아시아 전체가 다 유라시아 지진대이다. "장안에서 낙양" 이라니 가소롭다.
이문영님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1401년에서 1482년까지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된 지진만 89건이다. 그런데 신라는 992년동안 55건... 당연히 피해가 큰 것만 골라서 썼겠지.
참고로 대한민국에서는 연간 30회 정도 지진이 발생하고, 96년과 2005년에 진도 4~5의 지진이 육지에서 발생했다. (해양에서는 한 해에 두세번씩은 일어난다.) 정용석이 요즘 사람이기에 다행이지 후세에 태어났더라면 대한민국도 낙양에서 장안 사이에 있었다고 하고 다닐 판이다.
12. 해일 피해로 본 삼국의 위치
선덕왕 4년, 동해의 물이 서로 부딪쳐 파도가 20장(60m)이나 치솟았다. 이런 해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화산 폭발에 의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해일 피해는 거의 서해한에서 발생했다. 화산 지형은 동해안에 있는데 해일 피해는 서해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의 위치를 한반도라고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이다.
->해저 화산이 그렇게 자주 폭발하면 불안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까? 화산 폭발급 해일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저것 하나뿐이다. 선덕왕도 아니라 신덕왕(神德王)때 일이다.
정용석은 여기서 조선을 들먹이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고 하며, 그 증거로 삼국의 날씨가 안 맞는다느니, 지진이 있었다느니, 토함산이 화산이라느니 했다. 하지만 찾아보니 그런 기록은 조선왕조 실록에 다 나오는 것들이었다. 그러자 정용석은 "그렇다면 조선도 대륙에 있었던 것 같다" 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서해안의 침수 피해는 보통 조석간만 때문이다. 이런 일은 굉장히 자주 일어나서, 이미 16세기에 한백겸이 조석 간만이 생기는 원인을 찾으려고 시도했을 정도이다. 정용석은 바다 해(海)자만 나오면 죄다 해일이나 쓰나미로 보이는 모양이다.
조금 더 쓰자면, 10년전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라는 책에서 정용석은 각종 역사서에 나오는 바다 해(海)자는 "아주 넓은 평원" 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미 양서(梁書)부터 백제, 신라로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나오고, 삼국을 가리켜 "바다 구석에 있다" 는 식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삼국을 어떻게든 대륙에 집어넣고 싶은데 바다를 건너가야 있다고 나오니, 바다를 육지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말그대로 정용석은 "바다가 바로 평원" 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용석의 이 '평원' 이라는건 앞서도 얘기했지만 놀랍게도 걷거나 말을 타고 횡단하는 평원이 아니라 배를 타고 횡단하는 평원이다. 역사서에는 사신이나 군대가 배를 탔다고 분명히 나오니까. 이쯤되면 "배 선(船)자는 사람이 타는 배라는 뜻이 아니라 발이 아주 큰 사람이 신는 신발을 뜻하는 것이다" 라는 말도 나올 법 한데, 아직까지 그런 얘기를 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13. 사람까지 잡아먹게 한 삼국의 가뭄
14. 신라와 백제가 다르게 경험한 홍수
한반도는 좁으며 편서풍대라서, 백제에 홍수나 가뭄이 들면 반드시 신라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냐 한다. 하지만 삼국의 기록을 보면 한쪽에서는 홍수가 났는데 다른 쪽에는 그런 기록이 없고, 오히려 반대로 한쪽에서는 가뭄이 들었는데 다른 쪽에서는 홍수가 나는 일이 많다. 이것은 삼국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 13, 14는 합쳐서 한 챕터라고 봐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도 이미 지난 10년간 정용석은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조선왕조 실록을 찾아봤더니 그런 기록이 굉장히 흔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다음 인용문을 살펴보자.
(세종 15년 8월 4일조)“금년에 곡식들이 평안도에는 물론 감수되고, 경상도에도 가물어 말라붙고, 경기에는 홍수로 벼가 쓰러졌다고 하나, 금년의 수재 한재는 갑진년에 비하여 좀 덜한 모양이 다. 태종께서 풍양 이궁(豊壤離宮)에 계실 적에 내가 문안하러 가는데 홍수로 인해서 두어 밤을 지나서야 겨우 갔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금년에는 반드시 흉년든다고 하더니 그 뒤에 다시는 비가 과히 오지 않아서 벼가 곧 며칠 아니 되어 무성하게 되었고, 다만 몹시 저습한 곳만 좀 감소될 뿐이었으니, 사람의 말만으로는 그 풍흉을 꼭 알지 못하겠다.”
평안도와 경상도에는 가뭄이 들었는데, 경기도에서는 홍수로 벼가 쓰러졌단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치수시설과 저수지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에는 이런 일이 굉장히 흔했다. 사실은 요즘에도 드문일은 아니다. 2004년에는 경북에 폭설이 내렸는데 호남에는 안내렸고, 2005년에는 반대로 호남에 폭설이 내렸으나 영남은 잠잠했다.
하나만 예를 더 들면, 1959년에 대한민국에는 놀라운 기상현상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6월에는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서 농민들이 서로 논에 물을 대려고 난투극을 벌였고, 8월 초에는 경북에 갑자기 홍수가 났다. 그러다가 8월 중순에는 다시 가뭄이 들어 4개 수력 발전소가 발전을 중지했다. 클라이막스는 9월 17일에 내습한 태풍 사라호로, 영남 일대가 초토화되다시피했다.
자, 만약 이 때 한국이 경기, 호남, 영남의 삼국으로 갈라져 있었다면 경기도의 역사에는 "사람들이 서로 드잡이 할 정도의 가뭄" 이, 영남의 역사에는 "집이 떠내려가고 산이 무너지는 홍수" 가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또 후세에 정용석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외칠것이다.
"한반도는 좁은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대한민국은 중국대륙에 있었던 게 틀림없다."
라고.
15. 메뚜기떼와의 전쟁
한반도는 강수량이 많고 먹을것이 풍부하여 메뚜기떼가 발생하지 않는다. 메뚜기가 떼를 지어 날아드는 경우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은 물론 고려, 조선시대에도 메뚜기떼에 의한 대규모 피해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삼국이 스텝기후대에 있어야만 모든 것이 설명된다.
->삼국시대는 물론이고, 고려, 조선때까지 메뚜기 피해는 전부 곡식이 익어서 한창 추수를 할 때인 음력 7,8월에 일어났다. 다시 말하면 이 동네의 메뚜기는 먹을게 다 떨어져서 집단으로 날아다니는게 아니라, 들판마다 먹을 게 잔뜩 있으니까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것이다. 정용석은 물론 그런 건 전혀 언급도 하지 않는다.
10년전 정용석이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를 썼을 때, 그는 한반도에는 아예 메뚜기 피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금새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그의 무식이 낱낱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제 그는 조선까지도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한반도에는 메뚜기가 없다' 를 '한반도에는 메뚜기떼가 없다' 라고 슬그머니 한 글자를 더 넣었다.
정용석은 나이가 좀 되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 농촌에서 자랐을 가능성도 큰데, 벼 이삭마다 메뚜기가 붙어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꽹과리를 두드리며 쫓으러 다니는 걸 보지 못했을까?
하기야 정용석은 있는 것도 없다고 하고 없는 것도 있다고 하는 사람이다. 자기 눈으로 봤다고 그 장면을 실제 상황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정용석이 삼국의 위치라고 주장하는 곳은 낙양에서 장안으로, 툰드라 기후대로 계속 바뀌기는 하지만 스텝기후대의 북중국 어디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숙지하고, 대망의 마지막 항목을 보자.
16. 낙타, 물소, 공작이 자생했던 삼국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신이 일본에 갔을 때 선물한 물품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공작, 물소, 낙타, 앵무새까지 들어있다. 한반도는 이런 동물들이 자생할 수 있는 땅이 아니다. 건조 스텝 기후지역에서 아열대 기후대까지 광대한 강역을 아울러야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계속 북중국이라고 했다가, 드디어 아열대까지 갔다. 공작이나 물소는 아열대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런 동물들이 꼭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자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고려사를 보면, 고려때는 확실히 낙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용석은 고려도 스텝기후대에 있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낙타가 없다. 조선 시대때는 일본에서 코끼리를 선물한 적도 있다. 이걸 보면 일본은 인도가 아니면 아프리카 어디에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6번 항목에서 일본이 남반구에 있었다는 사실을 정용석식으로 논증했으므로, 인도는 아니고 아프리카에 일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북아시아 기후와 맞지 않는 이런 신기한 선물들은, 당연히 중국이나 돌궐을 통해 수입한 것들이다. 정용석 식으로 얘기한다면, 300년 뒤에 누군가가 나타나서 "서울 시내에 스타벅스가 많았다" 는 기록을 보고서 큰 깨달음을 얻어 "대한민국은 남아메리카에 있었다" 라고 주장 할 수도 있겠다. 커피 원두는 남아메리카에서 나니까.
조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알 수 있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정용석은 놀랍게도 이런 동물들이 모두 "토산물" 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일본서기의 어디에도 이것들이 토산물이라고는 쓰여있지 않다. 아니, 그것보다 우선 물소처럼 큰 동물을 토산물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정용석을 발광하게 만든 오직 한 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본인은 이것 때문에 일본서기 원문을 뒤지는 수고까지 했다.
"...그런고로, 포로 가운데 정공과 보통의 두명을, 군대용 나팔과 활, 투석기 등 열가지 물건을 비롯하여 토산물과 낙타 한 필을 바칩니다."
갑자기 포로는 왜 주고, 군대에서 쓰는 물건은 왜 주는 것일까? 원래 이 사건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대패한 직후에 일어난 일로, 고구려 사신은 일본에 가서 승리를 자랑할 겸 전쟁에서 노획한 물건을 선물로 준 것이다.
따라서 저기 쓰여있는 토물(土物)은 앞에 나온 것들과 분리되어 쓰는 말이며, 토물과 낙타 한 필 사이에 글자가 없이 병치되어 있으므로 낙타가 토물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그럼 이번에는 정용석의 해석을 보자.
"낙타를 비롯한 토산물 10여종을 바쳤다.(수나라의 포로까지 바침)"
일단 보면, 이번에는 없는 글자를 만들어 내기까지 하지는 않았다. 낙타도 있는 말이고, 토산물도 있는 말이고, '비롯하여' 도 있는 말이고, 수나라의 포로도 있는 말이고, 10여종이라는 말도 나와있다.
그런데, 정용석은 해석을 굉장히 이상한 순서로 해 놓았다. 원래 문장은 (1)수나라의 포로와, (2)10여종의 물건을 (3)비롯하여 (4)토산물과 (5)낙타를 바쳤다 인데, 정용석은 이 순서를 (5), (3), (2), (4), (1) 로 해 놓았다. 그러다 보니 엉뚱하게 '비롯하여' 가 '낙타 한 필' 을 수식하게 되어 버렸고, 여러가지 선물 중의 하나로 독립되어 사용된 '토산물' 이 '10여종의 물건' 을 수식하는 바람에 수나라 군대로부터 노획한 각종 군수 물품들은 모조리 '토산물' 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왜 이런 괴상한 해석을 했을까? 그거야 물어 볼 필요도 없다. 정상적으로 해석하면 아무런 이상한 점도 없고, 그렇다면 자신은 책을 쓸 수가 없게 되고, 책을 쓸 수 없으면 밥줄이 끊기기 때문이다.
첫댓글위 글의 필자는 질문 답변 사이트에 내가 기고한 [구오대사에서 고구려 위치]를 보시는 것이 좋겟습니다 그리고 모든 분께 드리는 말슴인데 海는 지나대륙의 강을 이르는 말이고 짠물 바다는 鯨海로 나옵니다 대륙조선이 수긍되지 않아 발생되는 오해가 엄청 크다는 것을 위 글을 읽고 다시 한번 느기게 되는군요,,,/ 신라는 홍수가 나는데 백제가 같은 기간에 가문다는 것은 대륙에서 나 가능한 일 입니다 정용석 님의 주장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첫댓글 위 글의 필자는 질문 답변 사이트에 내가 기고한 [구오대사에서 고구려 위치]를 보시는 것이 좋겟습니다 그리고 모든 분께 드리는 말슴인데 海는 지나대륙의 강을 이르는 말이고 짠물 바다는 鯨海로 나옵니다 대륙조선이 수긍되지 않아 발생되는 오해가 엄청 크다는 것을 위 글을 읽고 다시 한번 느기게 되는군요,,,/ 신라는 홍수가 나는데 백제가 같은 기간에 가문다는 것은 대륙에서 나 가능한 일 입니다 정용석 님의 주장에는 무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