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계셨더라면…"
- 박용식 신부-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스테파노와 마리아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초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아들이 하나 생기고부터는 차츰 신앙심이 약해지더니 급기야 냉담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들 장래를 위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맞벌이에 나섰고, 아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으며 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줬습니다.
아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잘못하는 것조차도 예뻐 보였는지 잘못을 고쳐주지도 않았습니다. 맞벌이하느라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돈으로, 물질로 보상해 주려는 듯 온갖 것을 다 사줬습니다. 자신들이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았던 것을 자식에게서 보상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평일이면 직장에 나가느라, 주일이면 아들 데리고 놀러다니고 아들이 갖고 싶은 것 사주러 다니느라 주일미사에 참례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신앙은 뒷전으로 밀려나 예수님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아들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돈도 제법 모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다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인생을 살아갈 의미도, 일을 할 이유도 사라졌습니다.
부부는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고 동반자살을 생각하던 중 우연히 장애인시설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시설에서 장애아들과 몇 시간을 지내면서 생애 처음으로 엄청난 것을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중증 장애아들은 말을 못하고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표정은 한없이 밝았고, 얼굴에는 천사 같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기 아들은 왕자 같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밝은 표정보다는 늘 불만에 싸여 투정만 부렸는데, 부모도 없는 이 천덕꾸러기 장애아들이 어떻게 이토록 행복해 보일까?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내 아들은 주님이 누구신지도 몰랐고 우리 부부도 주님을 떠난 지 이미 오래지 않은가!'하고 부부는 생각했습니다. 죽은 자식에게 주님 사랑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아쉬웠고 그 동안 주님을 떠나 산 것이 한없이 후회스러웠습니다.
부부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돈 때문에 맞벌이 하느라 집을 비우지도 않았을 텐데, 엄마가 집에서 기다렸더라면 아이가 사고지점에 가지 않고 학교에서 곧장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주님을 그렇게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주님께서 혹시 사고를 막아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사고를 당했어도 주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 있을 텐데. 주님이 계셨더라면 내 아이가 죽지 않았을 텐데…."
부부는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설의 장애아 중 한 아이를 데려와 양자로 삼아 세 식구가 온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가 한 절규입니다. 평소 예수님이 사랑하던 가족 중에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보니 이미 장례를 치른 뒤였습니다. "주님께서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하는 마르타에게 예수께서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시고 죽은 라자로를 살려주십니다. "당신을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는 말씀을 바로 그 자리에서 당장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셨더라면 라자로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님이 즉시 달려가셨더라면 라자로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안 계셔서 라자로가 죽었지만 죽은 후에라도 주님이 오심으로써 라자로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 주님이 계셨더라면 우리가 그동안 겪은 불행은 당하지 않을 수 있었고, 불행을 당했더라도 주님이 함께 계신다면 그 불행에서 벗어나 오히려 행복해 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주님이 계셨더라면…." 이 말을 열 번쯤 중얼거려 봅시다. 내 삶에 주님이 계셨더라면, 내가 주님 뜻대로 행동했더라면 현재 상태와 달라졌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주님이 계셨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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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고 싶습니까?
-최인각신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이유
벌써 사순시기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머리에 재를 얹으며 다짐했던 회개와 보속의 삶이 얼마나 잘 진행되고 있는지 다시금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순 제5주일을 맞으면서 교회는 우리에게 죽은 이를 무덤에서 일으키겠다고 선언하시는 주 하느님의 말씀(제1독서), 죽어 무덤에 묻힌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의 모습(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을 통하여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제2독서)을 들려주며, 죽음을 넘어선 생명의 주재자이신 하느님을 묵상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으면, 주님께서 찾아오시어 우리의 무덤을 열고, 우리를 무덤에서 끌어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준은 부활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생명이며 부활이신 주님을 믿다가 죽으면, 그분이 죽음의 무덤까지 찾아와 다시 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알리려 애를 쓰신 분은 예수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신앙이 별로 깊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서 복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해 주시며,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시고, 기적을 베푸시며, 죽은 이를 살리신 것은 우리가 현세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과 군중에게 그렇게 하신 것은, 지상의 여정에서 우리가 잘 먹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기보다는, 예수님을 구세주이시며 하느님으로 믿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병을 고쳐주시고, 죽었던 이를 살려주시는 등 이 지상의 삶을 잘살게 해주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통해 배불리 먹고, 병을 치유받고,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이 지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를 묵상하며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우리를 믿음의 자녀,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믿도록 가르치셨는데, 무엇을 믿도록 가르치셨는지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이 오늘 복음에 잘 나타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말씀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을 것은 ‘부활이요 생명인 당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믿으면 부활과 생명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신은 누구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 나오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는 말씀, 즉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실 때 사용하시던 어법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고백할 때, 이 어법(나는 ∼이다)을 자주 사용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나는 생명의 하느님이다.’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뚱딴지같은 소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예수를 믿으면 먹을 것이 나오고, 돈이 생깁니까?’ 혹은 ‘그 사람이 생명을 주고 죽지 않게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을 생명의 하느님으로 믿는 것은 허구이며 바보짓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받아들이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와 다른 길을 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구원자이며 하느님이십니다. 이 믿음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시기 위해, 그 어디나, 아니 무덤까지 찾아오시어 살려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누리시렵니까? 아니면 뚱딴지같은 소리로 치부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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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캠퍼스에 그려지는 영혼의 붓질
-권철호신부-
꽃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나 모아진 봉우리로 말을 걸어오고 초록은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대지를 서서히 물 들여 갑니다. 봄은 그렇게 우리 마음에 꽃씨를 뿌리고 연초록의 붓질로 밑그림을 그려가지만 마음의 캠퍼스 한 곁에서 솟구치는 애잔함만큼은 어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연초록의 붓질도 봄의 토양 속에 자리한 뭇 생명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일겁니다.
봄은 그렇게 생명이란 단지 살아 숨 쉬는 이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의 손길 위에 놓여져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아마도 사순절이 영원의 캠퍼스에 그려지는 영혼의 붓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사랑하시던 나자로를 다시 살리십니다. 죽은 나자로의 부활이 단순한 기적으로만 다가오지 않음은 흔하게 볼 수 없는 예수님의 눈물과 더불어 나자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인간에게 죽음은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의 영원한 박탈이며 동시에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의 영원한 상실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앞에서는 영원한 단절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더욱이 사랑하는 이들 마음 속에서는 영원한 단절이란 있을 수 없음을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 나자로의 부활입니다.
우리 신앙이 성인들의 통공을 말하고 하늘과 땅, 죽은 이와 산 이의 통교를 믿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이들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이 생명인 것처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느님의 바다에 담겨질 때, 우리 사랑의 원천적인 기회 박탈은 없으리라는 믿음이 우리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밀물이든 썰물이든 바닷속에 머무는 한, 물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생이든 죽음이든 하느님의 손길 위에 자리하는 한 영원한 생명의 바다에 자리합니다. 해서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들 하지만 죽음보다 더한 것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그분을 떠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참 신앙이고 참된 믿음이기도 합니다.
연초록의 붓질로도 다 지울 수 없는 뭇 생명의 흔적처럼 죽음조차 영원히 묻어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임을 알기에, 오늘도 우리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캠퍼스에 그려지는 영혼의 붓질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물감이 되어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이지만 아름답게 채색되어지는 우리이기를 기도합
니다.‘절실한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내일 죽을 것처럼 기도하라’는 말처럼 간절함으로 두손끝이 모아지는 사순절입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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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어떤 유명한 사원에는 금으로 만든 엄청난 크기의 불상이 있다고 합니다(안 가봐서 어딘지 모릅니다). 그 크기가 3미터나 되며, 무게가 2.5톤이나 된다고 하니 어마어마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상 앞에는 작은 흙덩이가 담긴 상자가 놓여있으며, 그 옆에는 이 흙덩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답니다.
1957년, 태국 정부가 방콕 시내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사원을 철거하게 되었지요. 승려들은 우선 사원 안에 있는 흙으로 만든 불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불상을 옮기던 도중, 압력에 의해 흙에 균열이 생겼고 설상가상으로 장대비까지 쏟아지는 것입니다. 황급히 불상 위로 천막을 쳤지만 이미 불상의 흙이 많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지요. 승려들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바로 그때 흙이 흘러내린 불상 안에서 밝은 빛이 반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흙더미 안에 숨겨진 거대한 황금으로 만든 불상을 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수백 년 전 미얀마 군대가 태국을 침공했을 당시 황금 불상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태국의 승려들이 불상의 표면을 진흙으로 덮었던 것이었지요.
만약 이 불상을 옮기지 않았다면, 또한 옮기더라도 장대비를 맞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황금 불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상을 옮기게 되는 뜻밖의 일과 갑자기 쏟아진 뜻밖의 비를 통해 조상님의 귀중한 유물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는 뜻밖의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 뜻밖의 일을 통해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불평과 불만을 간직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 뜻밖의 일들을 통해서 더 큰 은총과 축복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라자로의 죽음이라는 뜻밖의 일에 당황하는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다른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요. 마르타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죽음에서 다시 살린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으며, 마리아는 늦게 오신 예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함께 있었던 유다인들 역시 눈 먼 이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이 왜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하지 못했느냐며 원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믿음이 없는 그들을 향해 하느님의 영광을, 즉 라자로의 부활을 보여주십니다.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가 말하듯,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그대로 실천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 있다면 하느님의 영광이 어렵고 힘든 이 순간,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분명하게 내 앞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에 큰 힘을 얻으면서 오늘도 주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걸림돌은 외부가 아니라 마음에 있다(에릭 웨이언 메이어).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자유에 대하여
-신대원 신부-
주님의 친구인 라자로가 병이 들어서 앓다가 마침내 죽었습니다.
그는 죽음마저도 없애시는 주님을 만나지도 못한 채 죽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라자로의 죽음을 보면서 울고불고 생난리를 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친구를 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죽음에 묶인
사람을 외면해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죽음 속에 머물러 있는
라자로를 불러내시고,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라자로를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자유의 몸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해방은 사람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고, 자유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은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자유는 사람들이 진리, 곧 참된 행복만을 누리도록
어둠, 거짓, 죽음, 사기, 술수 등에서 풀어주는 ‘참된 해방’의 다른 이름입니다.
또 이 해방과 자유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이유이고 목적이며, 이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최고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오늘 누구에게 자유를 베풀고, 누구를 해방시켜 주었으며,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까? 혹시 자유를 준다고 하면서 오히려
‘옭아매려고’ 하지는 않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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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다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의 말씀에 우리 삶을 맡기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라자로를 되살리는 기적을 통해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 이심을 보여주십니다. 그 기적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는다는 것’ 은 예수님이 기적 자체로 존경받거나 찬양받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11, 14 이하 참조), 이 기적이 장차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게 될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11, 46 – 54)
예수님은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 후에야 ‘사랑하는’ 친구를 찾아가는 데, 슬퍼하는 마르타한테 당신이 ‘부활이며 생명’ 이심을 알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17 – 27절) ‘부활이요 생명’ 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라는 8장 12절의 말씀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 자신을 계시하는 것으로, ‘인간은 나를 통해 부활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기준은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그분께 믿음으로 응답한다면, 그 사람은 그분과 지속적인 관계 안에 머묾으로써, 이미 이 지상에서 ‘영원한 생명’ 을 소유하게 됩니다. (5, 24 참조) 라자로의 부활은 장차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서 장엄하게 드러나게 될 이 진리를 사람들한테 가르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어서 마르타한테 ‘너는 이것을 믿느냐 ?’ 라고 물으시는데, 이는 기적이 ‘믿음’ 과 관련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르타는 이미 요한복음 1장에 소개된 예수님의 칭호들을 사용해서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메시아(1, 41), 하느님의 아드님 (1, 49; 10, 36 참조),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 (1, 27; 30)이신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마르타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시기 위해 무덤 앞에서 다시 가르칩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4절에서 라자로의 질병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 이라고 하신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증명합니다. 이 기적은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이시며, 인류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기 위해 하느님이 보내신 분임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영광이 극적으로 드러나게 될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기 전에 먼저 준비 자세로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41절) 기도하십니다. 눈을 들어 올린다는 것은 성경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상징합니다. 그분은 감사로 기도를 시작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1절) 오늘 화답송은 예수님 기도의 영적 배경을 이룹니다.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시편 130, 1 – 2) 이 기도 후에 죽었던 라자로가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옴으로써, 하느님이 무덤을 파헤치고 당신 영을 불어넣어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환시를 보리라는 에제키엘의 예언이 실현됩니다. (에제 37, 12 – 14) 나아가 이 기도는 라자로를 살리는 일과 관련된 것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이 장차 겪어야 할 죽음의 공포에서 그분을 살리시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신뢰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굳이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신 것은 기적을 행하기 위해 아버지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도, 군중이 들으라고 크게 기도함으로써 그들을 회개시키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분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버지가 아들을 보냈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데’ (요한 11, 42)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앞으로 그 기적뿐 아니라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친교를 증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을 위한 예수님의 이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서 더욱 길고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묵상 (Meditatio)
라자로를 살리는 기적과 예수님의 기도는 ‘부활이요 생명’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이 신앙 체험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로마 8, 11) 모든 인간을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기도 (Oratio)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시편 13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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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로야, 이리 나와라!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사랑하는 나자로를 살리시는 얘깁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주님은 나자로와 생명을 맞바꾸십니다.
나자로를 살리는 대신 당신은 죽게 되시는 것입니다.
나자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눈엣가시 같은 주님을 죽이기로 작정을 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그런 것이라지만 누구를 위해 누가 죽는다는 것,
이것이 쉽게 이해되는 것입니까?
나를 위해 누가 대신 죽는다면,
대신 죽지는 않아도 나를 살리다가 누가 죽는다면
미안해서 내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러니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 죽음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죽을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는 어떤 일 때문에 수원을 다녀왔습니다.
전철을 타고 가는데 늘 있는 풍경과 또 마주쳤습니다.
노인이 타셨는데 젊은이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앉은 줄에 저 말고 다 젊은이였는데,
어떤 젊은이들은 휴대전화로 무언가를 보고 있고,
어떤 젊은이들은 게임을 하고 있고,
어떤 젊은이들은 음악을 들으면서 연신 음료를 먹고 있고,
연인들은 손잡고 서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젊은이 중 사랑할 줄 아는 사람 하나도 없다는 것이 슬펐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제가 일어나 자리를 내어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네가 자리를 앉으시는데
미안한 표시는 없고 고맙다는 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냥 쑥 않고는 그만입니다.
저를 쳐다보지도 않아서 어떤 눈인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안해 할까봐 옆으로 비켜서 있던 제가
정말로 고맙지도 미안하지도 않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분 앞으로 가서 섰습니다.
미사 가방을 들고 있었기에 혹시 미안한 마음에 그 가방이라도
당신 무릎에 놓으라고 하는지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 씀이 하나도 없었고 저를 의식하지도 않았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럴지라도 어른들은 사랑을 알 거라고,
그래서 미안해하고 고마워할 거라고 저는 생각을 했는데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 노인네를 보고 더 슬펐습니다.
그리고 더 생각해보니 그들이 너무도 불쌍했습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받을 줄 모르기에 사랑할 줄도 모르는 그들.
사랑을 받고도 그것을 사랑으로 느끼지 못하니
사랑을 받고도 미안하지도 않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그들.
이것보다 더 큰 장애나 불능이 어디 있습니까?
일생 그런 식으로 사랑을 못 느끼며 산 인생,
일생 그 사랑의 미안함과 감사함을 모르고 산 인생,
그래서 받은 사랑을 나누며 살지 못하는 인생은 얼마나 딱합니까?
이런 딱한 인생의 우리에게 주님께서 사랑의 빛을 주셨습니다.
나자로를 살리며 돌아가시는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태워야지만 빛을 내는 촛불처럼
사랑 없는 우리의 어둠을 밝히시고
우리를 사랑 장애로부터 구출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외치십니다.
“나자로야, 이리 나와라.”
사람들에게 이르십니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오늘 우리에게도 사랑 없는 죽음으로부터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장애에서부터 해방되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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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길
-전광진 신부-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언젠가 우리 모두를 영원히 살게 할 것입니다.
물론 살다 보면 이런저런 어려움을 참 많이도 겪게 됩니다. 그럴 때
지치고, 우울해지고, 마음과 육신의 병도 얻게 됩니다. 인생살이의 고달픔이라
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꼭 같은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불안하고 흔들릴 때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청은 주님 마음을 더욱 쉽게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간절히 기도하면 언젠가는 우리도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용기를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때때로 너무나 힘겹고 무겁게 느껴지겠지만,
예수님께 의탁하며 지고 가는 인생의 십자가는 마침내 승리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다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고,
로마인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그 모든 굴욕을 이겨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를 구원할 승리의 십자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이기양 신부-
라자로가 죽게 됐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한 11,4).
덴마크의 실존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이 성경 구절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 제목을 따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는 병'은 과연 무엇일까요? 철학가는 절망이라고 답하고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곧 회개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망의 끝인 죽음에서도 살아나는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에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기적을 세 번씩이나 행하셨는데 죽었던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는 기적(루카 7,11-17),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사건(루카 8,40-56)이 그것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부활 사건이 오늘 복음인 라자로의 부활입니다.
죽어서 사흘이나 지나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서도 생명을 불러오시는 예수님께서는 생명과 죽음의 주재자가 당신임을 드러내시며 신자들에게 사순시기의 절정인 수난과 부활을 준비시켜주십니다. 신자들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는 예수님을 말씀을 확신하며 부활신앙을 살아갑니다. 부활신앙은 죽어야만 이루어지는 먼 훗날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우리 생활 속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현실인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산다는 것은 마치 이런 것입니다.
아침마다 호루라기를 불며 자전거를 타고 두부를 팔러 다니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두부를 팔아서 하루하루를 사는 분이었지요. 주부들은 매일 같은 시간에 지나가는 할아버지의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필요한 만큼의 두부를 사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루라기 소리가 마을 초입에서 갑자기 끊어져버리더니 뭔가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깜짝 놀라 주부들이 나와 보니 자전거는 내동댕이 쳐져있고 두부는 흙바닥에 쏟아져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한 주부들은 땅바닥에 흩어진 두부를 주워서 자신들이 가져갈 만큼씩 봉투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들 평소에 내던 두부 값의 두 배를 할아버지에게 건넸습니다. 땅에 흩어진 두부가 그 마을에서 팔릴 양보다 많았기 때문이었지요.
예상치 못한 주부들의 행동에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습니다. 다음날부터 이 마을에 들어와 두부 파는 일은 할아버지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멀리서 그 마을을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고이고 기쁨으로 설레었지요. 아침에 두부를 실으며 가장 신선하고 따뜻한 두부가 이 마을에서 개봉되어 팔리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부활신앙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요?
남들은 다 잘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하는 일마다 잘 안되나 하며 절망 속에 있거나 또 누구는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다니는데 우리 아이들은 실패만 하니 차라리 이런 세상 그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깊은 절망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부활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실패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아서 위태로워진 가정에서도 새롭게 가족의 화목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 대학에 실패한 자녀에게 살아온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희망을 심어주어 더 크게 일으켜 세우는 부모, 이런 사람이 부활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사는 신자들은 절망하거나 비난하는 말로써 사람을 쓰러뜨리지 않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도 격려와 희망의 따뜻한 말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이 부활신앙을 믿는 신자들의 소명인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내 주위에서 어렵고 힘든 상황이 일어나고, 실의에 빠진 이웃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어려운 이웃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삶을 꾸준히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바로 부활을 사는 산 증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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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체험
-오상선신부-
<형제 여러분,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로마서 8, 8-9)
우리는 육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되고자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 신심생활, 기도생활, 애덕실천생활
이 모두는
한마디로 <영성생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참 어렵게 느껴진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사시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사시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사시기만 하면
죽은 라자로가 살아나고
죽은 예수가 살아나 부활하듯이,
우리도 다시 생기를 얻어 살아나게 된다.
이게 우리의 부활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부활은 바로 이것이다.
1.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데 치중하라>고 하신다.
정말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영적인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처럼
선행을 해도 보이지 않게 해야 하고
자선을 베풀어도 남이 모르게 해야 하고
기도를 해도 골방에 들어가서 해야 하고
단식할 때도 단식하는 표시를 내지 말고...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삶은 육적인 삶이다.
현실의 삶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몰고 간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영적인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데 충실해야 한다.
집안에서도 남이 잘 보지 않는 곳을 깨끗히 해야 한다.
어느 집에 가면 화장실과 세탁실, 창고 등을 살펴보면
그 집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그만큼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2.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그렇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먼저 우리 속을 깨끗하게 비워야 하는데
그 작업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벌써 수많은 육적인 것들로
우리 속을 가득 채워놓고 있다.
욕심과 집착 등은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영적인 것)을 집어 넣으려 해도
들어갈 자리가 없게 된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체를 모시고
열심히 애덕을 실천해도
여전히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점을 되돌아봐야 한다.
지금 내 속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가?
단식 후에 보식으로 음식물을 섭취하게 되면
속속들이 내 몸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내 속이 맑게 깨끗하게 비워져 있을 때
나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래서 생기를 얻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래야 참 부활을 맞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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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늘은 잘 보이지 않는 곳이 어디인지 살펴보자.
내 안에서는 얼굴보다는 옷으로 감추어진 어느 곳,
방이나 거실에서는 그냥 보이는 곳보다
남이 안보는 곳
내 삶의 부분들 안에서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더 치중해 보자.
또
내 속을 들여다보자.
내 속이 비워져 있는지
쓰잘데 없는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지...
그리고 쓰레기통을 정리하듯
비워내자.
이것이 판공성사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때
영이 열리리라.
영의 방문에 소스라치리라.
<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외치게 되리라.
그때
<부활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체험할 수 있으리라!
라자로처럼...
우리 안에 사랑의 영으로 부활을
-배광하 신부-
지금 여기에서
사순의 막바지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말씀을 오늘 듣게 됩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 남유다 왕국이 유배에 끌려가 모진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다시 무덤을 열어 살려 주시겠다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이나, 우리 모두가 죄 때문에 죽지만 그 죽을 몸을 그리스도의 영께서 다시 살리시리라는 바오로 사도의 희망의 말씀이나,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 기적의 말씀이나 모두 다시 살아남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결국 살아있을 때 거듭되는 부활의 체험이 죽음 뒤에도 부활을 가능케 함을 배우게 됩니다. 지금 여기, 살아있는 현재의 자리에서 체험 되어지는 부활의 반복된 삶이 끝 날에도 부활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연쇄 살인범 유영철에게 아무 이유도 원한도 없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4대 독자인 아들까지 잃은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님은 살인범 유영철을 용서합니다. 용서를 넘어 그를 양아들로 삼아 때때로 유치장에 면회를 가 위로하고 감옥 안에서 필요한 것을 사라고 영치금까지 넣어 줍니다. 살인마 유영철도 다시 살았고, 용서해준 고정원 형제님도 깊은 원한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부활은 무덤에 묻힌 썩은 뼈에 살이 붙어 걸어 나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내 자신의 아집과 고집과 이기심의 껍질을 깨뜨릴 때, 진정한 부활이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분노와 울분과 체념의 나락에서 다시 일어나 믿음의 희망으로 살아갈 때에 부활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의 크고 작은 도움으로 쓰러진 형제들이 기쁨으로 다시 일어설 때 그도 나도 부활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생활을 바꾸고 열정적인 기쁨으로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그 같은 부활이 현재의 삶 안에서 거듭될 때 끝 날에 반드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시작은 여기에서부터입니다. 부활은 죽은 뒤에야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현재를 부활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채근담’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새벽 꿈에 갓 깨어 세상 만물 조용한 시간, 우리들 깨어날 때이다. 이때를 타서 잠시 자신의 내면을 살피시라. 그러면 비로소 깨달으리니, 이목구비 모두가 내 마음을 얽어매는 장애물이요, 정욕, 욕심 전부가 내 본심을 해치는 방해물임을.”
이기심과 욕심의 세상적 미몽에서 깨어남이 진정한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시편의 옛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사람이란 그 세월 풀과 같아/ 들의 꽃처럼 피어나지만 / 바람이 그를 스치면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에 머무르고/ 당신의 의로움은 대대에 이르리라”(시편 103, 15~17).
우리의 죽을 육신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이같이 끝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자들이 부활을 살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반에서 거듭 확인되고 우리에게 ‘들으라’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고달픈 우리 인생의 여정에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함께 동행 하시겠노라는 희망과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저 유명한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약속인 것입니다. 그 같은 희망과 사랑 안에 사는 삶이 부활의 시작입니다.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부활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 11).
결국 사도의 말씀은, 우리 안에 사랑의 영께서 계셔야 우리 또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6).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 주님의 현존을 믿고 그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때, 부활을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헨리 데이벗 소로우’는 신학자 ‘해리슨 블레이크’에게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우리가 생의 이 짧은 시간을 긴 시간의 법칙, 영원의 법칙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영원의 시간 속에 살아야 하는 부활의 참된 법칙은 하느님 사랑 안에 사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는 삶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주님께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은 부활의 영원한 삶으로 연결됩니다...............◆
라자로의 부활사건
-허 성 신부-
“부활과 생명에 동참 일깨워”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마르타에게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하고 물으셨고, 마르타가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돌을 치우게 하신 후에 『라자로야, 나오너라』하고 큰 소리로 외치시자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 나는 라자로가 살아서 밖으로 나왔다고 하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을 오늘의 복음은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
몇 년 전에 낯선 세 자매가 나를 찾아와서 예수님은 거짓말쟁이라고 항의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자기네 부모님들은 딸만 넷을 낳아 다들 결혼을 시켜서 뿔뿔이 헤어져 사는데, 그 중 막내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시켰지마는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영안실로 옮기려는 것을 못하게 말렸는데 영안실로 들어가면 냉동을 시키기 때문에 부활하는 데에 지장이 될 것 같아서였단다.
그러나 병원 당국에서는 시신을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으니 집으로 옮기라고 하여 집으로 옮겼단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본당의 연도회 회원들이 찾아와서 염하려고 하여 꽁꽁 묶어 놓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없을 것 같기에 그것도 못하게 말리고는 라자로를 살리시기 전에 마르타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네들도 믿겠으니 제발 막내 동생을 살려 달라고 며칠 동안 금식을 하면서 철야기도를 언니들 셋이서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동생의 시신은 자꾸만 썩어가서 어쩔 수 없이 연도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다고 하신 예수님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그들을 우선 위로한 다음 『당신네의 막내 동생은 부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삶으로
내 말을 듣던 그들이 갑자기 어리둥절해 하기에 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누에를 보십시오. 뽕잎을 먹으면서 기어 다니며 살 때에는 얼마나 징그럽습니까? 그러나 그 징그럽던 누에가 얼마 후에는 입에서 실을 뽑아 자신의 관을 짜고 죽음의 상태인 번데기가 되지 않습니까?
누에가 죽음의 상태인 번데기가 되어 고치 속에 갇혔다는 상태만을 본다면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지마는 그 과정은 보다 높은 부활의 삶인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되는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번데기가 되기 전의 누에는 징그러운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기어 다니며 뽕잎이나 먹고 살았지만 번데기의 과정을 거쳐서 부활하여 나비가 된 다음에는 화려한 날개로 창공을 날면서 꽃을 찾아 다니고 꿀을 빨아먹지 않습니까?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더 차원이 높은 부활의 삶으로 옮겨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니까 그들의 어둡고 굳어졌던 얼굴들이 밝아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우리 모두 손을 잡고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올린 다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들 갔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에 그 기적 자체만을 목적으로 행하시지 않고 그 기적을 통해서 더 큰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셨음을 알 수 있다. 라자로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은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고 계심을 가르치시고자 하셨다.
라자로의 부활은 엄밀히 말한다면 부활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부활한 다음에는 사도신경의 내용대로라면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야만 되는데 라자로는 부활한 다음에 얼마간 더 살다가 다시 죽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라자로를 소생시킨 주님의 더 큰 뜻은 당신 자신이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시므로 믿음을 가지고 당신께로 와서 당신의 부활과 생명에 동참하도록 우리 모두를 깨우쳐 주시는 데에 있었다고 하겠다................◆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
-서공석 신부-
요한복음서는 기원 후 100년경에 기록된 초기 교회의 명상록입니다. 이 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는 다른 복음서들에서 주제들을 택하여 명상하는 식으로 엮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 9장은 시각장애인 한 사람을 등장시켜, 예수님이 그의 시력을 회복해 주시자, 그가 예수님에게 “주님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력을 얻어 새롭게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이 요한복음서 10장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당신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목자라는 사실을 부각시켜서 앞으로 일어날 수난에 대해 독자들을 준비시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바로 그 다음 장인 11장입니다.
착한 목자가 자기 양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듯이, 예수님은 라자로를 살리고, 당신 스스로는 죽음으로 가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는 과정을 장황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서 나오는 것이 유대 최고회의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서 11장은 라자로를 살린 예수님은 그 일 때문에 당신의 목숨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라자로를 살린 오늘의 이야기는 사람 하나를 살린 기적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이 기록되기 약 70년 전에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죽음이 지닌 의미를 명상합니다.
그러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어떻게 살아 계시고 그분 죽음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역사 안에 흔히 일어나는 무죄한 자의 억울한 죽음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고, 그것이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고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기 전에 “비통한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그분이 라자로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오늘의 복음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리고, 당신 스스로는 죽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렸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들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 안에도 있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어린 딸을 살린 이야기가 마르코, 마태오, 루가 복음서들 안에 있고,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린 이야기가 루가복음서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자료로 삼아 라자로를 살린 오늘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태오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라고 질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답하시기를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진다”(11,5)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고, 초기 교회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요약하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런 자료들을 가지고 오늘의 이야기를 구성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주인공의 이름이 ‘라자로’인 것도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루가복음서에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16,19-31)가 있습니다. 그 예화에서 가져온 이름입니다. 루가복음서에 따르면 부자와 라자로 두 사람은 죽어서,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안으로 갔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어 이 사실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자기와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오늘의 복음 이야기에 라자로를 등장시켜 죽었던 라자로가 실제 살아서 돌아왔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삶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수난사를 시작하면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 그동안 세상에서 사랑해 온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끝마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어졌다”(19,30)는 것이었습니다. 끝까지 당신 사람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같은 실천을 하겠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실천들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오늘의 복음에 마르타가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실천 안에 주님, 곧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요한복음서 공동체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듯이,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하여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면, 우리도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 부활하여 살아 있다는 초기 교회의 믿음이 반영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려 합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권력을 얻어서 우리의 생명과 삶의 질을 보장하려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보장해 주시는 생명을 찾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에서 그 생명의 이야기를 읽어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는 비통해 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실천이 당신 목숨을 대가로 요구하는 일로 이어지더라도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분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어주고 쏟아서 이루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에서 우리 생명과 삶의 질을 보고 배우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사랑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흐른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라자로를 부활시킴으로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요한11, 25-26) 하셨다. 신자생활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거기에 동참하는 삶이다.
1. 예수님이 행하신 마지막 기적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 가장 사랑 받던 제자 사도 요한이 쓰신 복음서이다. 그는 예수님의 가장 사랑 받던 제자이며, 십자가의 죽음을 지켜본 유일한 제자이며, 주님께서 당신의 모친을 자기 대신 돌보도록 맡겨주신 제자였다. 요한 사도는 당신의 복음서 안에 7개의 기적을 소개하였다. 라자로의 부활은 그 마지막 기적이다.(물론 가장 큰 기적 중의 기적은 예수님 자신의 부활이지만.)
베다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조그마한 언덕을 넘으면 있는 가까운 마을이다. 예수님이 자주 왕래하던 곳이며, 라자로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였다. 이런 모든 사정이 이 기적의 사실성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라자로의 부활은 "예수, 그분은 누구신가?"하는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는 사건이며, 이 기적으로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당신의 죽음을 재촉한 계기가 되었음도 사실이다.
2.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자연과학적인 교육을 받은 우리들에게 모든 기적 사건들은 다 믿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복음은 어떤 설명도 없이 목격자들의 말을 명료하게 전할뿐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본대로 전한다."는 식이다. 사실 모든 기적은 그 현장을 비데오로 촬영을 해서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적을 기적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열려있지 않는 이에겐 어떤 증거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런 불가사의한 일도 하느님께서는 가능하다."는 믿음이 없는 이에겐, 설득력은 커녕 오히려 "무슨 쇼를 하고 있나!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는구먼!"하는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기적에 익숙된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는 기적이란 바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보는 것이요, 참 예언자이며 하느님이 보내신 분임을 증명하는 신분증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시며 그를 살리시기 전에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이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요한 11,42) 하고 말씀하셨다.
3.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 하며 라자로의 여동생 마르타 까지도 절망적으로 생각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나오너라."하시는 한마디 말씀으로 그를 다시 살리셨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적(神的) 권능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이셨다.
예수님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을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부활하셨다. 라자로는 그 뒤에 다시 병들어 죽어야 했지만, 예수님은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새로운 존재가 되셨던 것이다. 우리는 라자로의 부활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역사 안에 딱 한번 있었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와는 무관한 사건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분의 부활하지 않았다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요한 11,25-26) 하신 말씀을 어떻게 믿겠는가?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이 참 신앙인 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 사도 바오로의 설명을 들어보자. "예수를 북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로마 8,11)고 하신다.
깊이 묵상해볼 말씀이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하느님 아버지)의 성령을 따라 살면, 우리 안에 계신 그 성령의 힘으로 우리들도 살리신다는 말씀이다. 돌감나무에 단감을 접붙이면 단감이 열리듯이 "같은 영(靈)으로 살면, 같은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6,56) 하셨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처럼 우리는 주님과 한 생명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는 길이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사순 시기(빠스카 준비시기)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철저히 내어줌으로써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은총의 시기이다. 예수처럼 사랑하기 위해 죽자. 그래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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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양승국신부-
슬픔 중에서 가장 깊은 슬픔은 아마도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일 것입니다. 멀쩡하고 든든하던 아들, 여러 자녀들 가운데서도 가장 다정다감하던 아들, 나이 드셔서 그나마 가장 큰 낙(樂)이요, 유일한 의지처였던 효자를 잃고 슬퍼하는 한 자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들을 앞세웠다는 죄책감과 상심으로 자매님 일상생활은 거의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득 채워진 쓰레기봉투를 내다버리러 나가다가도 갑자기 아들 생각이 나면 슬픔에 겨워 주저앉아 우십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쓰레기봉투를 냉장고에 넣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아들 없는 이 세상, 어머니에게 더 이상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국적 연합군처럼 포위해오던 갖은 과로와 스트레스,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건강에 과부하가 걸린 것도 모르고,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죽기살기로 뛰어다니던 아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한 순간에 세상을 하직한 아들의 얼굴이 생각날 때 마다 자매님은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한 인생이 제대로 활짝 펴보지도 못한 채 요절한다는 것은 너무도 잔혹한 일이지요. 특히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오빠 라자로를 먼저 떠나보내고 애통해 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슬픔을 보십니다. 먼저 떠난 라자로는 예수님에게도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오랜 시간 동고동락을 같이 했던 절친한 친구 같은 존재였습니다. 친구 라자로의 부재에 예수님께서도 눈물흘리십니다.
오빠와 사별로 인해 망연자실해 있는 마리아와 마르타를 바라보는 예수님 눈망울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기운이 하나도 없이 겨우 서 있던 자매를 바라보던 예수님 마음 역시 찢어질 듯이 아파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향해 생명의 말, 구원의 말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오늘 라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결핍, 우리의 나약함은 하느님의 자비를 요청하는 원동력입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상처는 하느님의 사랑을 불러오는 바탕입니다. 우리의 슬픔, 우리의 눈물은 하느님의 구원을 가져다 주는 도구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우리 감정을 하느님 앞에 감추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한계와 비참함을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고 그분의 손길, 그분의 도움을 간청하는 자세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 아주 소중한 요소입니다.
때로 하느님 앞에 울고 싶을 때는 원 없이 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너무도 충격적 일 앞에서 "하느님 당신이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을 다 겪게 하십니까?"하고 외치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런 일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따지면서 "도대체 이게 뭐냐"고, "제발 좀 길을 열어주시라"고 간청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너무나 울어 눈물조차 말라버렸을 때, 목소리가 잠겨올 무렵, 가만히 뒤에서 우리 어깨를 감싸주실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 눈에서 영원히 눈물을 거두어가실 분, 결국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떠나야 할 존재란 것을 깨우쳐 주실 분, 이 세상 그 누구도 주지 못할 따듯한 위로를 주실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음산하고 어두운 죽음의 장소인 무덤을 향해 이렇게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라자로야, 그대 자신을 옥죄고 있는 죄와 악습의 사슬을 끊고 나오너라!" "라자로야, 그대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살아왔던 질병과 죽음의 굴레를 던져버리고 나오너라!"
온 몸을 뒤덮고 있는 더러워진 수의를 그대로 걸친 라자로는 비틀비틀거리면서 겨우겨우 동굴 밖으로 걸어나옵니다. 심연의 죽음을 떨치고, 질식할 것만 같은 짙은 어둠을 뒤로 하고 걸어나옵니다.
죽었던 라자로의 소생 기사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결정권을 쥐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란 사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욱 기쁜 일은 예수님께서는 먼 훗날 우리 생이 마감하는 그 순간, 우리를 부활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보배로운 기능, 슬픔
-예수회 이재욱 신부-
나는 어른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별로 없다. 그것이 어찌 나만의 이야기랴! 오랜 세월 유교적 풍토와 군사문화의 영향을 받아오고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남성 중심적인 풍토가 강하게 지배해 온 한국 사회에서 자라난 남성이라면 대부분 그러하리라. 남자는 무릇 강해야 하기에 눈물을 보이면 안 되고, 더구나 남들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나약함의 상징이라는 관념이 어릴 때부터 주입되어 형성되어 온 것 같다. 그러기에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차라리 슬픈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마비시켜 온 것 같다. 그것이 정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수도생활을 하며, 또 나중에 상담심리를 배우면서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복음 이야기에서 우리는 감정이 온전히 살아 있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에서 솟아나오는 비통한 주님의 눈물이 마침내 힘찬 음성으로 울려 퍼진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은 매우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참 인간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는 것 같다.
흔히 신학적으로 고통은 죄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면 사랑 때문에도 고통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면 사랑 때문에 생기는 무죄한 이들의 눈물과 고통에는 세상의 죄를 씻는 구속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자식을 사랑하는 모든 어머니의 눈물이 그렇듯이 말이다.
감정은 주님이 주신 영혼의 보배로운 기능 중의 하나다. 이성이 감정에 압도당하는 것은 미성숙함의 문제겠지만, 한편 감정이 제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은 마치 한 바퀴가 빠진 채 굴러가는 자동차와 같다. 나의 감정은 살아서 온전히 기능하고 있는가?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고, 아플 때 아파하고, 정의롭게 화가 나야 할 때 화를 내는지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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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박요한 영식 신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시던 말씀이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지만 사람이 되셨습니다(요한 1,1.14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느님 백성을 죽음의 무덤에서 끌어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머무는 사람을 보시면 눈물을 흘리십니다.
기원전 6세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며 불의를 일삼던 하느님 백성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로 모든 것을 잃고 남의 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일어난 결별의 동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에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없는 남의 나라에서 유배살이하는 그들은 살아 있지만 죽은 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누가 그들을 죽음의 골짜기(시편 23편 참조)에서 끌어올릴 수 있겠습니까?
바빌론 유배는 사람들의 눈에 불행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멸망과 불행을 통하여 구원과 행복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 개개인에게 당신의 내적 영을 부어 주시고 모든 이가 당신의 규정에 따라 충실히 걸어가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에제 36,26-27 참조). 당신 백성에게 당신의 기운을 불어넣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불행 중에 몸살을 앓고 있는 자녀들을 못 본 체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운을 받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서러운 나그네살이를 하고, 라자로가 깊은 잠에 빠졌듯이 삶의 고뇌를 거쳐 가야 합니다. 삶의 고뇌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보잘것없고 약할 뿐더러 죽은 시체에 불과한 자들에게 새 영을 넣어 주십니다. 주님은 고통의 길을 영광의 길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손발이 베로 묶여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던 라자로에게 죽음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도록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에게 죽었던 라자로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라”(요한 11,44)고 명령하십니다. 죽은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힘든 인생길을 걸어가도록 그를 돕는 것은 주위 사람의 몫입니다.
나의 모든 선입견으로 다른 사람을 꽁꽁 묶어 움직이지도 보지도 못하게 했던 과거의 행실을 버리고 그를 풀어 주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선입견에서 내가 먼저 해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나는 죽음의 올무에 잡혀 있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합니까? 죽은 라자로를 위해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그의 딱한 처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시고, 당신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나를 보고 또 우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예수께서 두 번 우셔서야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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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자락에서
-안 병철 신부 -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 분노가 담긴 절규에 가까운 마르타의 외마디 탄식이, 되돌려놓을 수 없는 죽음의 차가운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랑도 우정도 그 어떤 인간적인 친분도 죽음 앞에서는 더 이상 힘쓸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다니! 죽음 앞에서 큰소리칠 자 누구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 과연 누구입니까? 그렇다면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죽음이란 것이 이렇게 우리 모두를 절망의 끝자락으로 내몬다면 우리에게는 과연 희망이란 없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은 라자로 소생 이야기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가 없을 것 같은 그러한 질문에 명쾌한 답을 줍니다. 그 답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생명의 주관자로 믿는 데서 찾아집니다. 물론 믿는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마리아, 마르타도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32)라고 말할 정도로 오빠의 죽음 앞에서는 실망과 좌절의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구심과 주저함의 참담한 순간을 겪어 내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생명의 주관자로 맞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죽은 라자로를 되살린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몸소 사시게 될 그분의 부활을 예표(豫表)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흘려야 했던 고통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두 자매의 가슴을 짓누르던 깊은 절망과 좌절을 몰아내고 그들의 마음 속에 희망의 불을 밝혀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자로가 다시 얻은 생명은 일시적으로 지속되게 될 한시적인 생명에 불과합니다.
그 반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을 믿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살게 될 영원한 생명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불멸하는 생명의 힘’(히브 7,16)은 세례의 은총을 통해 이미 우리의 마음 안에 심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지금 그 생명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어떠합니까? 매순간이 의구심과 의혹으로 점철되고 두려움과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고통의 연속이 아닙니까? 게다가 그 불안의 끝자락에 죽음이라는 거대한 걸림돌이 우리의 희망을 가로막고 서 있으니 탄식은 갈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처럼 의구심과 두려움 때문에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갈등의 지평선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희망을 받쳐 주는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진정 퇴색치 않는 희망을 안겨 주어 절망의 끝자락이 좌절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살아가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지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바로 지금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고 청합니다.
-심흥보 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다시 살려주시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주님은 죽은 다음에서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각자는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 하고 싶었던 고귀한 뜻과 이상이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건실하고 또 이웃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상과 뜻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직 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이상과 뜻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가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낙인을 찍는다 해도 또 우리 자신도 멀리 떨어져서 돌아가지 못할 것처럼 느낀다해도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길로 우리를 되돌이켜 주실 수 있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39)하고 말씀드렸지만, 주님은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고 말씀하십니다. "돌을 치워라"(39)하신 주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이루실 수 있는 주님의 권능을 믿고 청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들어보십시오. "라자로야 나오너라."(43)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우리를 막고 있는 모든 악습과 허물 그리고 세상의 장애를 없애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주님은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를 모든 장애로부터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44)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고 청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가 청하고 바라는 것을 들어주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주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걱정하거나 조바심 내지 말고 꾸준히 그리고 진지하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그것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주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십시오. 세상이 우리를 향해 무어라고 하든, 또 내가 설사 주님의 뜻을 이루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고 불가능하게만 보일지라도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일러주시고 보여주시는 길로 걸어나가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모든 장애를 없애주시고 새 인생의 빛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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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묵상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이 나이 먹도록 가장 가까이에서 죽음을 지켜본 것은 3년 전 아버지의 영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다른 지인들의 부음을 듣거나 빈소를 찾아서는 그 순간 잠깐 가슴이 먹먹하고 삶이 부질없음을 느끼는 정도였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말로만 듣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갑작스럽게 떠나신 게 아니어서 옆에서 지켜보는 내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크게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죽으면 다 끝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죽음도 삶의 연장이고 우리가 모르는 다른 형태의 삶으로 이어질 거라는 기대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만큼 ‘죽음’이란 단어가 그토록 절실하게 제 마음을 꽉 채운 적도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다른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느낌이었으니까요.
누구한테나 공평하게 돌아가는 죽음 앞에 어느 장사가 당해 내겠습니까? 죽음이 무서운 것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어느 작가가 그러더군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에 죽어 ‘셔올’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친히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어주십니다.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일곱 번째 표징입니다. 이 표징은 일곱이라는 숫자에서 드러나듯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가장 완전한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가족을 사랑하셨다면서 정작 라자로의 소식을 들으시고는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시다가(6절)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에야(39절) 그 가족에게로 가십니다. 그것도 얼마 전 돌에 맞으실 뻔한 일로 유다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8절), 말리는 제자들을 뒤로한 채 앞장서 가십니다.
늑장을 부리신 것도 위험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4절)
라자로가 죽었는데, 죽을 병이 아니라니요? 여러 차례 예수님의 마음은 산란해지고 북받치십니다. 라자로의 죽음이 애통해서라기보다는 이토록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죽음의 세력에 화가 치미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당도하셨을 무렵 그의 육신은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흘이나 되었으니 그는 확실히 죽은 사람입니다. 생명을 잃은 몸은 썩기 마련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우리도 부패하여 본모습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아직 라자로를 살리기도 전인데 미리부터 예수님은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올리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41절) 예수님은 무조건 아버지 하느님을 믿으셨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하면 항상 들어주신다는 온전한 신뢰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참 신앙이란 이런 것이라고 본을 보여주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 죽음을 건너뛰지 못하셨으면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십자가상 죽음이 단순한 생명의 소멸이 아님을 미리 내비치신 듯합니다. 점점 죽음으로 가까이 가심을 예감하시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을 비장한 각오도 단단히 하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11절) 무덤에 묻힌 라자로를 깨우러 가십니다. 편견·무관심·악습·상처·두려움의 무덤에 갇힌 우리를 흔들어 깨우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절) 믿음은 무덤에서 사람을 일으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많은 유다인들이 이들 자매를 찾아와 위로하였습니다(1819절). 그들은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이 일로 많은 유다인들은 믿음을 갖게 되었고(45절) 제자들의 믿음 또한 풍요로워졌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곧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그분이야말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고(27절) 부활이요 생명이심을(25절)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이 그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 일로 신앙과 불신앙이 판가름납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여전히 마음이 완고하여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결심을 합니다.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은 곧 맞이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앞당겨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에는 아버지를 모신 성당 근처로 이사 와 아버지와 한 본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곧장 아버지께 달려갑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막연하기만 하던 영원한 생명과 부활이 조금씩 피부에 와 닿습니다. 육신을 뛰어넘는 생명, 죽더라도 살고 살았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그 무엇, 봉안당을 사이에 두고 저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교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어느 날 문득 돌이켜 보니 아버지께 하소연했던 일들이 많이 해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고비를 탈 없이 잘 넘긴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하느님 가까이에서 백을 쓰시나 봅니다.
아직은 풀어야 할 일들이 좀 남았습니다. 아버지께 또 도움을 청합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42절) 사순절 막바지에 접어들어 새 생명을 얻을 준비를 합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