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v58GNa_S9MI?t=85
‘진주라 천리 길’ 노래에 대한 소고
오늘 친구에게서 받은 카톡을 열어보니 진주 유등축제 전야제 불꽃놀이를 영상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영상에
사용된 음악이 ‘진주라 천리 길’이란 노래인데 노래를 부른 가수는 김용임이었다.
나는 노래를 듣고 나니 아쉬웠다.
어릴 때 유성기로 듣던 그 목소리도 아니고 노래 중간에 삽입된 대사에서 느끼던 애절한 멋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 노래를 처음 부른 가수가 남인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릴 때 유성기로 듣던 카랑카랑한 그 노래가 생각이 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찾아보니 처음 노래를 부른 사람은 이규남(李圭南, 1910∼1974)이란 가수였다.
가수 이규남은 1910년 충남 연기군 남면 월산리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윤건혁이었고, 가수로서의 예명은 임헌익이었다. 이후 본격적 활동을 펼치면서 이규남을 쓰게 되었다. 불러진 명칭이 셋이었다. 간혹 같은 사람을 두고 혼돈 하는 일도 발생하곤 했다.
이규남은 음악에 대한 밑바탕이 견고한 사람이었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30년 일본의 도쿄음악학교 피아노과에 입학해 클래식을 전공했다. 그리고 성악도 함께 수학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성악을 공부하던 사람이 대중가수로 방향을 바꾼 경우가 더러 있었다. ‘사의 찬미’를 불렀던 윤심덕을 비롯해 채규엽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윤심덕의 경우는 경제적 곤궁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대중가요를 불렀는데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김용환, 정재덕, 김안라, 김정구, 김정현 등도 성악과 연주 활동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다가 결국은 화려해 보이는 대중음악으로 방향을 수정해 성공했다.
여자 가수로서 일찍이 이름을 떨친 사람은 왕수복이었다. 왕수복은 평양기생 출신이다. 자신의 출신 기반에 대한 자과감에서 헤어나지 못 하다가 성악가로서의 길을 모색해 성공함으로써 열등감을 벗어난 인물이다.
이규남 역시 성악에서 대중음악으로 진로를 바꾼 가수다. 그런데 이규남에 대한 자료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북한으로 납치되어 끌려갔기 때문이다.
이규남이 일본에 유학한지 3년 째 되던 해에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와 서울에 머물며 성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정을 불태웠다.
1932년 이규남은 일본의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조선보를 통해 몇 곡의 노래를 본명으로 취입했었는데, 당시 그의 노래들은 대개 서양풍의 세미클래식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규남의 가슴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성악에 대한 열망을 억제하지 못 하고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에 가서는 바리톤 분야에서 성악을 수련했다. 이때 일본의 콜럼비아레코드 본사에서는 이규남의 음악적 재주를 남달리 주목하고 음반 취입을 권유했는데 경제적으로 곤궁한 처지에 있었던 그는 이를 즉시 수락하고 ‘북국의 저녁’, ‘선유가’, ‘황혼을 맞는 농촌’, ‘찾노라 그대여’ 등이 수록된 2장의 SP음반을 발표했다. 이러한 이규남의 활동과 존재는 자연스럽게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계에도 알려졌다.
이후 이규남은 빅타레코드사의 전속 가수로 활동하면서 많은 곡을 취입했다.
홍남파(1898-1941)는 유독 이규남을 아꼈다. 그가 이규남에게 많은 곡을 주었다.
1941년 이규남은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겨서 ‘진주라 천리 길’(이가실 작사, 이운정 작곡)을 발표해 크게 히트를 했다.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대사)
진주라 천리 길을 어이 왔던가?
연자방아 돌고 돌아 세월은 흘러가고
인생은 오락가락 청춘도 늙었어라
늙어가는 이 청춘에 젊어가는 옛 추억
아 손을 잡고 헤어지던 그 사람
그 사람은 간 곳이 없구나!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며 옛 노래를 불러본다
‘진주라 천리 길’ 전문
이 노래는 사연이 있다.
나라의 주권을 잃고, 군국주의 체제의 시달림 속에서 허덕이던 식민지 백성들은 이 노래 한 곡으로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서러움과 눈물을 삼켰다.
이규남은 식민지시절 일본 유학의 학비를 벌기 위해 진주의 재래시장에서 유성기 음반과 바늘을 팔았다.
작곡가 이면상이 진주에 왔다가 이 광경을 보았고, 서울로 돌아가서 그 이야기를 작사가 조명암에게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명암은 즉시 노랫말을 지었고, 이면상이 바로 곡을 붙였다. 이 노래를 이규남이 불러 취입했다.
그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 ‘진주라 천리 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노래는 분단 이후 줄곧 금지곡 목록에 들어있었는데, 그 까닭은 작사자, 작곡가, 가수 모두 북한으로 올라가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규남은 북으로 납치되어 북한 정권에 이용당하게 된다.
애절한 가락과 여운만큼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마다 진주 남강과 주변 공원에는 화려한 빛과 물과 유등이 어우러진 유등축제가 열린다. 그 화려함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우리나라 경향 각지는 물론 외국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서 보고 감탄한다.
진주하면 생각나는 상징적인 두 단어가 있다. 촉석루와 남강이다.
이념을 떠나 예술로서 승화된 명곡을 기념하는 ‘진주라 천리 길’의 흔적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남강 둑이나 강으로 가는 길목 어디엔가 이 노래의 가사를 새긴 조촐한 노래비라도 하나 세우게 된다면 진주시민들로서는 자긍심이 충만해지리라고 여겨진다.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