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고 향기롭게 길상사 -
요즘 돌아가는 세태를 보고있노라면 많은 것들이 원래 태동한 뜻과 의미인 본질주의(本質主義)를 잃어버린 듯 하다.
특히 민중을 가장 먼저 앞세워야 하는 정치나 종교가 더욱 그렇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새벽녘의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다.
길상사는 송광사의 말사로 송광사의 옛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곳은 군사정권시절 밤의 정치가 이뤄진다는 우리나라 3대 요정중 하나였던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감명받아
자신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두고 그가 사랑했던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며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만들어진 사찰이다.
그가 내 건 조건은 단 한가지였다고 한다.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이었다.
온갖 분내가 나던 팔각정은 그에 바람대로 세상을 향해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종소리의 시원인 범종각으로 변했다.
동이트기 전 말갛게 쓸린 흙길을 걸어 법정스님을 모신 진영각으로 향했다.
산속에는 나무와 바위사이로 돌집들이 드믄드믄 자리하고 있다.
가야금과 장구소리가 요란했던 곳이 지금은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진영각 뜨락에 묻힌 법정스님을 향해 두손모아 합장하고 수의 한 벌도 준비하지 말고 입고있던 옷 그대로 떠나보내라던 그의 검박한 삶의 실천적 종교에 대해 생각해봤다.
침묵의 방을 거쳐 길상사 중심사찰인 극락전을 지나 관세음보살상 앞으로 곧장 향했다.
극락전에서 멈추지않고 관세음보살상 앞으로 바로 온 이유는 여느 절집에서 볼 수 없는 길상사가 추구하는 본연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상이라고 하지만 그의 얼굴과 형체는 기존의 관념에서 완저히 벗어나 천주교 마리아의 모습을 빼닮았다.
그도 그럴것이 관세음보살상을 만든 조각가 최종태 작가는 천주교 신자로 카톨릭의 마리아상을 다수 조각한 인물이다.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폐지를 줍는 노인이나 절간에서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에게 무료급식봉사를 하는 봉사자들 모습으로 우리곁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화(華)하는 것은 부처의 모습일 수도 있고 마리아의 모습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뜻을 감히 인간의 편견으로 재단해서 판가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모습으로 서있는 관세음보살상은 화(和)하는 세상의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관세음보살상 외에도 길상사에는 종교적 화합의 의미를 가진 것이 있다.
지장전 아래 성북동을 밝히고 서 있는 길상사 칠층보탑이다.
이 보탑은 인근에 있는 성북성당과 덕수교회가 손잡고 길상사에 무상으로 기증했다고 한다.
기독교,천주교,불교가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의미가 깃든 탑이다.
칠층보탑 중간에 지혜와 용맹을 상징하는 암수 사자 네마리가 기둥역할을 하고 부처를 지키고 서있다.
사자 네마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두마리는 입을 다물고있다.
의미없이 바라보면 그저그런 석물에 불과하지만
이 사자의 입을 통해 종교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한번쯤은 천천히 들여다 볼 일이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가에 대한 물음이 종교의 근원적 발원이고 의미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끝이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법이다.
그걸 깨우치기 위해 우리는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다.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는 시작의 의미를 갖고,입을 닫고 있는 사자는 끝을 말한다.
사람이 태어나면 입을 벌려 날숨과 함께 생을 시작하고 죽으면 마지막 들숨으로 입을 닫는다.
생성과 소멸의 이치를 깨달으면 탐진치에 대해 초연해질 수 있다.
비단 사자의 입이 아니더라도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에 들어서면 근육질의 사천왕 중에 입을 벌리고 있는 밀적금강과 입을 닫고있는 나라연금강이
객을 맞는다.
이 역시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아'와 '훔'의 의미로 기독교의 알파와 오메가 교리와 상통한다.
시작과 끝의 근원인 무시무종(無始無終)을 깨닫는 일은 요원하지만 3대 요정인 대원각이 스님들의 정진하는 공간으로 변한 길상사를 보면서 진흙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연화사상 하나를 건져 걸망에 담아서 내려왔다.
흙탕물이라도 흙이 가라앉으면 맑은 물이 되고 구름이 태양을 가려 어둠이 와도 구름이 걷히면 밝은 세상이 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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