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점점 부드러워지니 산의 빛깔도 그에 맞추어서 바뀝니다. 붉은 빛 대신에 산 본연의 빛깔로 점점 채색됩니다. 그리고 그 능선과 골을 가르는 선도 부드러워집니다. 정말 산에서의 요 느낌 때문에 이렇게 집에서 멀리 왔나 싶습니다. 동네 산에서도 이런 느낌이 있는 곳이 있다면 매일 오를 것 같습니다.
잠시 뒤를 돌아봅니다. 사실 계속 동쪽으로 해를 바라 보고 걸어야 하기 때문에 앞에 있는 피사체는 모두 역광이 되고, 뒤의 피사체는 빛을 받아 본연의 빛이 살아 납니다. 그래서 어쩌면 사진 입장에서 보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걷는 역방향 길나섬이 훨신 나은 선택지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지난 대화종주 때는 워낙 구름 속에 가려져서 모든 것이 곰탕이었습니다..
마침내 벽소령에 도착했습니다. 아침 시간이 8시.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1시간이 늦어졌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풀어 보겠습니다. 암튼 이곳에서는 간식을 먹어야 합니다. 사실 지난 화대종주 때 계획했던 10킬로 당 간식 한번 룰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이번 길나섬이었습니다. 10킬로 즈음에 먹을 만한 곳을 찾을려면 분명 있었겠지만 컴컴한 와중이었고 또한 전날 저녁에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출발했기 때문에 10킬로 즈음을 통과 했을 때 그리 간절하지는 않아서 그냥 통과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목표를 두고 계획적인 종주를 해야 한다면 이 룰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벽소령 대피소에도 이제 태양 빛을 받아서 앞 봉우리가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간식먹기 딱 좋은 환경의 벽소령 대피소입니다. 그런데 이곳의 약간 문제점은 식수입니다. 식수를 뜨려면 아래로 한 200미터 정도 내려가야 하고, 이 마저도 식음불가라고 안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앞서 있는 연하천대피소에서 물을 보충한 이유입니다. 연하천 대피소에는 수질에 대한 불량 걱정도 없고 물도 풍부합니다. 그리고 수원지도 바로 대피소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샘텅입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대피소입니다. 그런데 이곳도 텅텅 비어 있습니다. 동계 시즌이 되더니 대피소 운영을 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하~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대피소는 운영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주방에 있었습니다. 주방 겸 식당. 그 안에서 보골보골 음식이 준비되고 있었고,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나는 빵인데.. 갑자기 그곳에서 밥 준비를 하는 분들이 부러웠습니다. 물론 그 음식을 이고지고 갖고 와야 하는 어려움은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만한 값어치를 충분히 하는 장소에서의 식사 아닐까 싶습니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만난 화대 선수들도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아침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저와 화대 개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되도록이면 가볍게~ 모드였는데, 이네들은 화대는 화대고, 먹을 것은 먹고…. 그네들 가방에서는 아침거리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음~ 제네들이 진짜 선수들이네 하는 생각이 자연히 들었습니다. 화대라는 거대한 목표도 즐기고 또한 먹을 것도 잘 먹고~… 역시 젊음이 좋습니다.
간식 (빵)을 먹고 또 발걸음을 재촉해 봅니다. 벽소령 대피소에서 세석 대피소까지는 거의 7킬로 입니다. 그런데 길이 그리 터프하지 않습니다. 특히 벽소령 대피소를 나와 초반 1~2킬로는 지리산에도 이런 길이 있나 싶을 정도로 젠틀한 북한산 둘레길 같은 길이 이어집니다. 지리산 주 능선 전체적으로 흙을 밟을 수 있는 정도는 느낌상 20~30% 정도도 안될 것 같습니다. 대부분 돌길이고 너덜길입니다. 그래서인지 흙길을 만나면 저의 입에서 저절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벽소령 대피소 앞쪽의 길도 그 중의 한 부분입니다.
아침 햇살을 받아서 탐방로 차단목의 그림이 멋집니다. 어느 목장 길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조릿대 사이로 난 길은 보통 젠틀합니다. 특히 덕유산 종주로의 무룡산에서 동엽령까지가 그렇습니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빛춥니다. 벽소령에서만 만날 수 있는 정돈된 돌담길입니다.
초 겨울 정취가 무릇나는 걷기 좋은 탐방로입니다. 정말 황송할 정도로 지리산 종주로에서 거의 만나기 힘든 편한 길입니다.
돌길도 만나고 힘들길도 있지만, 세석까지의 길이 그리 힘든 편은 아닙니다. 걷다보면 그리고 옆으로 흐르는 풍경을 즐기다보면 어느 덧 세석 대피소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석대피소에는 연하선경이라는 또 다른 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하선경을 기대하면 힘차게 걸어 봅니다. 지난 화대 종주때 구름 속에 가려져 있던 비경…. 오늘은 구상 나무를 마음껏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만나는 가지런한 돌길. 이 돌길은 선비샘이 코 앞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벽소령 대피소에서 간식을 먹기 위해서 물은 반 정도 소비했지만, 아직은 물을 채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선비샘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곳에는 늘 산객 몇 명은 있었는데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선비샘에 도착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잘 놓여진 바가지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럼 당연히 한 입 먹고 가야겠지요? 그래서 물을 반쯤 비웠습니다. 다 마실까 하다가 반쯤 남겨 둔 이유는 나오는 물의 양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거의 방울방울 떨어지는 수준입니다. 요즘 건조함 때문에 비가 오지 않아서 지리산 특히 선비샘 부근은 대체로 건조해서 물이 풍부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 화대 선수건 아니면 누구건 조금 있으면 또 산객들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이기 때문입니다.
선비샘에서 바라보는 앞산은 가히 명품입니다. 산을 구성하고 있는 등뼈와 갈비뼈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모습입니다. 산은 분명 무생물인데, 생물과 별 다름이 없습니다. 산의 형세를 보니 결국 세상의 모든 것들은 매 한가지이며 서로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에서 참 많은 것을 보고 배웁니다.
지리산에서 이런 돌길은 점잖은 축에 속합니다. 누군가인지는 모르지만, 돌을 엉기성기 잘 엮어서 근사한 돌계단을 만든 것 같습니다.
팀방로를 계속 보아가며 천왕봉으로 향하지만, 이런 밝고 맑은 날씨에는 눈이 자꾸 풍경으로 향합니다. 이 즈음부터 고사목도 간간히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천왕봉이 보이고 그리고 천왕봉까지 걸어야 할 능선이 주욱 펼쳐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천왕봉은 제일 끄트머리에 우뚝 솟아 있고, 그곳까지 하늘금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천왕봉, 제석봉, 촛대봉이 보입니다. 천왕봉까지 거의 다 왔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공존하는 딱 그런 위치입니다.
칠선봉도 지납니다.
뒤도 가끔씩 돌아봅니다. 설악산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봉우리 중간 중간 심어져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멋집니다.
단풍이 별로 곱지 않았음이 느껴집니다. 깨끗한 모습의 단풍 대신 붉은 점이 알알이 박혀 있는 낙엽의 모습입니다. 벽소령을 지나며 바람은 한참 부드러워지고 봉우리 끄트머리가 아니면 별로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왕봉에 가까워 질수록 바람이 잠잠해져서 다행입니다.
긴 데크 계단…. 이제는 계단 오르는데 선수 다 되었습니다. 지난 대화 종주 때 이곳을 내려가면서 이 긴 데크 계단을 어떻게 올라? 하면서 놀라고 내려갔는데, 그 반대 방향으로 오르면서 별로 어렵지 않게 올랐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아파트 상가 건물의 비상구 계단을 한 층 오르기도 힘들고 버거운데, 설악산이든 지리산이든 데크 계단은 쉽게 오르는 것을 보면 무슨 이유가 있는 듯 싶습니다. 저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이제 단풍이 보입니다. 비록 아직 강한 햇살에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울긋불긋 물든 산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고도 7~800미티 하단에는 아직 단풍이 잔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도 700~800미터.. 이때부터 마구 머리를 굴려 봅니다.
이쪽에도 단풍이 간간히 보입니다. 조금씩 희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단풍을 자세히 보고 싶었는데 마침 전망대 옆도 지납니다. 사실 전망대는 아니고 열린 공간입니다. 추락 금지 경고 표지판이 있습니다.
겹겹이 산의 모습, 그리고 그 산 옆으로 단풍이 든 모습… 정말 한시도 눈을 땔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탐방로 옆으로 흐르는 풍경을 구경하다보면 벽소령 대피소와 세석 대피소 사이의 6~7 킬로 길이 어렵지 않게 지나갑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간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어떤 구간도 다 좋아하지만..
탐방로가 아침 햇발에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드디어 연하선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얼마만에 이렇게 깨끗한 모습을 보는 것일까요? 6개월 뒤에는 진달래와 철쭉으로 가득하겠지요?
멀리 천왕봉도 빼곰하게 보입니다. 앞쪽의 구상나무들이 싱싱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연하선경은 진득하게 즐기기로 했습니다. 그렇다고 탐방로에서 조금 벗어난 세석 대피소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탐방로에서 연하선경 전체를 관람 아니 관찰 아니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잠시 뒤를 돌아보고…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는 횟수가 예전보다 자주있습니다. 앞만 보고 가지 말고 뒤도 틈틈히….
연분홍과 자줏빛 진달래와 철쭉이 없어도 이렇게 싱싱하고 진초록의 구상나무가 연하선경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정말 멋진 풍경입니다.
다시 봐도 좋고… 지난 화대종주 때 구름 속에 있던 연하선경이라서 그 아쉬음을 다 날려 보내고 보상 받는 기분입니다. 어차피 그때나 지금이나 진달래와 철쭉이 없기는 매 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디 다른 곳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눈에 자꾸자꾸 이 풍경을 넣어 둡니다.
세석 대피소 지붕이 빠꼼하게 보이고….
촛새봉으로 오르는 탐방로. 그 뒤로 구상나무가 우뚝 서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 거리는 지명들… 한 7~8년 전에 하동 삼성궁에 갔을 때 그곳에 있는 누군가 저에게 지리산 천왕봉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되요~ 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아 그래요? 그럼 조금 산보하면 올라갈 수 있어요? 이렇게 철모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삼성궁, 청학동과 연결되는 곳이 바로 이 세석대피소라는 것을 두 해 전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거림하면 그때의 생각이 물씬 납니다. 아 그리운 그때 그 시절… 지리산에 대해서 일자 무식이었지만, 그때 철모르던 시절도 그리운 때입니다. 아고~ 저도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ㅠㅠ
연하선경을 보고, 또 세석 대피소도 보고 또 보고…. 가까이서도 보고 멀리서도 보고…. 보고봐도 질리지 않습니다.
이런 간판도 있네요. 제가 기억이 가물가물… 이런 간판이 있었던 적이 없었 던 것 같은데… 간판도 조금 새것인 것 같고요. 연하 선경, 세석 평전이 그리 힘든 고도의 길은 아닌데 누군가 이곳에서 유명을 달리 하셨나 봅니다. 촛대봉으로 오르기 전에 저도 잠시 뒤를 돌아보고 한숨을 쉬어보고 오르기 시작합니다.
잠시 이곳의 생태 환경 및 보존에 대한 안내를 하는 전망대를 스치고…
세석 대피소가 포함되어 있는 연하선경의 다른 쪽도 보고….. 세석 대피소의 지붕이 보일까 하는 각도 입니다.
촛대봉입니다. 늘 이곳 역시 3~4명이 모여 있던 곳이었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네요. 저도 오를까 말까 하다가 그냥 오르지 않고 이곳에서 천왕봉만 가늠하고 가기로 했습니다.
천왕봉과 그곳까지 가는 길이 주욱 펼쳐집니다. 천왕봉 뒤로 중봉 끄트머리도 쬐금 보입니다. 오늘은 중봉 즉 대원사 방향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오늘 날씨도 좋고 하니 중봉 및 써리봉에 가서 풍경이나 진하게 구경하고 대원사로 하산할까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세 가지 이유로 일단 접기로 했습니다.
첫째는 중산리 버스를 미리 예약했기 때문입니다. 예상보다 어렵고 빡빡해서 취소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빨리 버스에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2% 여지는 남겨 두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숙제를 말끔히 하는 것도 좋지만, 조금은 여지를 남겨 두어야 다음번의 발걸음을 또 이어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다 좋다고 다 따지 말고 그냥 몇 개는 남겨 두기 센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분명 오늘보다 저 멋진 날 천왕봉 중봉과 써리봉을 이어갈 날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주광 밝은 날에…
고사목이 자태를 뽐내며 무리를 이루고 서 있습니다. 고사목이지만 멋집니다. 아니 고사목이라서 더욱 멋집니다.
정말 톡 건드리면 푸른 물이 쭈르르륵 흘러 내릴 것 같은 푸른 하늘 아래에 우뚝 서 있는 고사목
조금씩 천왕봉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 갑니다. 마음이 즐겁습니다. 이제 끝이 조금씩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버스 터미널이 길나섬의 종착 지점이지만, 체감적으로는 천왕봉이 종점이라는 생각입니다. 왜냐면 그곳부터는 하산 길이고 그건 컨트롤만 잘 하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영신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바윗길이 참 부담이 되어였는데 이젠 데크 계단길이 놓였나 봅니다. 영신봉은 낙남정맥 분기점이라 추억거리도 있답니다. 세석에서 거림지킴터까지도 거리가 만만치않지요. 종주길에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면 정말 반갑지요. 수고하셨습니다^^*
세석 평전의 구상나무가 온전히 보존 되고 있어 반갑습니다.
기온 상승으로 한반도에 구상나무가 모두 말라 죽어 가는데,
세석 평전에 심어놓은 구상나무는 아직은 그래도 잘 자라고 있네요.
몇 년전에 못 보던 고사목들이 더 많이 보이는군요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하면 그래도 안도의 한숨이 나오지요.
날씨가 좋아 장터목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도 멋지게 다가왔겠지요.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