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의 정신은 저항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의 기득권자였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왕에게 저항했습니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부패한 카톨릭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저항자들은 기득권자를 몰아낸 후, 그 기득권의 자리에 오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기득권자들이 유대인들을 압제할 때, 하나님은 사사를 세워 그들을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사사들은 자신의 임무가 끝나면 자신의 원래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이 다시 지배하시게 하였지, 기득권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다른 나라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하자 주님은 근심하셨습니다. 실제로 주님이 아닌, 사람이 기득권을 보장받게 되자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요한칼빈의 개혁정신도 저항에서만 끝나고 자신의 본분을 지켰다면 빛이 났을 겁니다. 제네바 성시화 운동은 세상을 주님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서 시작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정치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 법규를 위반한 자를 처벌 혹은 처형하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며, 그 의도는 퇴색하고 말았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해서, 성경은 부익부 빈익빈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레위기의 희년사상과 선지서에 나오는 고위관료들을 꾸짖는 내용 등을 볼 때, 우리 기독교는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저항의 자리를 지켰느냐 기득권의 자리를 가지게 되었느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스탈린과 모택동과 김일성은 민중을 수탈하던 지주로부터 기득권을 빼앗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빈 자리에 자신이 올라 또 하나의 기득권자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다 처형했고 전쟁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왕으로 세우려는 시도를 끝끝내 거절하셨고, 이에 배신감을 느낀 군중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기득권의 자리에 사람이 없으면,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을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그 왕좌에 주님이 좌정하고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기에 겸손할 줄 압니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인이 저항자의 자리를 넘어서 기득권자가 되어 있는 사례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는 춘천 성시화운동, 서울 성시화운동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성시화운동은 일견으로는 지역사회를 주님이 다스리게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종교가 정치를 장악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바리새인 사두개인으로 변질되는 일입니다.
둘째로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반대하는 일입니다. 비록 소위 이단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긴 하지만, 그런 데까지 참견하고 간섭하는 것은 어찌 보면 기득권자들의 갑질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폭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역기간보다 더 긴 복무기간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우리와 생각은 다르더라도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째로는 성소수자에 대해 반대하는 일입니다. 소수자를 정죄하고 몰아붙임으로써 자살까지도 유도하게 된다면, 그것은 주님이 원치 않는 일입니다. 동성애가 좋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나, 그런 소수자들을 기득권자들이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기독교는 탄압받는 종교지, 탄압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Protestant 들은 무엇에 대해 저항해야 할까요? 우리는 국가와 사회와 기독교 안에 자리 잡은 기득권과 인간의 욕심에 대해 저항해야 하겠습니다. 국가가 민주주의에 역행해서 독재를 행할 때, 거기에 대해서 저항해야 하겠습니다.
이 사회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가 심화될 때, 거기에 저항해서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를 사유화해서 세습을 하고 공금을 유용하고, 주님의 교회가 아닌 목사의 교회를 만들려고 할 때, 거기에 저항해야 하겠습니다.
저항이란 것은, 전쟁과 살상을 하고 싶지 않으니 제발 다른 방식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젊은이들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별로 적절한 것이 아니란 걸 자신도 알지만, 그래도 동성에게 끌리는 그 마음을 제어하지 못해 괴로와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항은 약자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에게 하는 것입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것은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넓은 길입니다. 하지만 약자의 편에 서서 저항하는 것, 충분히 강자가 될 수 있어도 저항자의 자리를 견지하고 기득권은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 이것은 아무나 쉽게 갈 수 없는 좁은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크리스찬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