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있었다.
대단한 사건이라면 사건이고 역사라면 역사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한 가지만으로도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고구려 영양왕이 신라
진평왕을 만났다든가, 그 진평왕이 백제 무왕을 만났다면, 만난 이듬해에
다시 치고박고 했다 하더라도 만난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티부이 화면에 비치듯이 김정은부터 그 측근들까지 시종 웃음 띤 얼굴이었고
분위기를 여는 발언들을 이었으나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들은 아마도 국제적인 고립을 벗어나 경제적인 도약을 이루려는 願望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이라고 어찌 핵이 하나의 위협용은 될 수 있어도
핵 전쟁 돌입이란 바로 자멸임을 모를까.
지금까지의 핵 실험의 성과를 바탕으로, 핵포기를 경제적인 실리
로 바꿀 기회가 언제일지 암중모색해왔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그 물실호기의 정권이 바로 문재인 정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평창 동계올림픽
이 적기라고 알았다. 그동안 여러번 북을 향해 애절한 구애의 맨트를 날린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자연스러운 화답 형태로 방향선회를 기도 하였고 그것은 일단 성공적이었다.
벼량끝에서 방향 선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저께 언론에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을 보고 국정원장이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나왔다. 그동안의 노심초사 극도의 긴장이 풀리면서 쏟아진 눈물이었으리라.
우리 정부에서도 이번의 정상회담을 위해 당무자들의 말할 수 없는 노력을 하였겠지만
그점 북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날 김정은과 시진핑이 회담한 사진은 노동신문에 60컷트를
실었는 데, 이번의 남북정상 회담 사진은 61컷트를 실었다는 데서도 그들의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의 헛점도 용납하지 않는 주도면밀을 엿볼 수 있다.
북이나 남이나 간에 경호 문제 또한 당무자의 노심초사를 어찌 필설로 형용하랴.
나는 티부이 화면을 보면서 문득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할빈 역두에서 안중근 의사의 몇 발의 총격이 초대 조선통감 이등박문과 러시아 재무상
코코흐체프 간 만주를 갈라 먹기 위한 회담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그 사건은 당시의 세계에 얼마나 쇼킹하였을까. 나는 남북 정상회담의 중계를 보며 일이 틀어지
려면 극우 청년이나 극좌 청년이 뛰어들 수도 있을 것이리라 생각하며 엉뚱한 상상으로 조마조마하였다.
혹시 모를 어떤 정신 나간 한 사람이 장난감 총이라도 들이 댔다면 세상은 또 얼마나 시끄러웠을 것인가.
국정원장의 눈물은 그 모든 우려에 대한 안도의 것이었으리라.
듣기는 이야기로는 북한도 이제 전날보다는 많이 시장도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중고교를 다녔다고 하니, 감수성 예민하던 청년기를 서구에서
보낸 셈이다. 그렇다면 그의 깊숙한 내면엔 자유스러운 서구에의 향수가 있으리라.
살벌한 군국의 화약내보다 젓소의 풀 뜯는 그 등너머로 들리는 목가적인 노래가 너무도
아련한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으리라.
아아, 남북이 이제 군사 대결을 끝내고 잘살기 경쟁에 돌입한다면 그
얼마나 바람직할 것인가.
너무 성급한 기대는 금물이지만 봄이되면 영변의 약산으로 그 김소월의 진달래를 보러 가고
가을이면 김삿갓이 구월마다 갔다는 황해도 구월산으로 가보는 일이 어쩌면 실현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사람들아, 이제 아프리카의 콩고나 아프칸의 불우한 사람을 돕는 그 정성을 이제
압록강이나 백두산 밑의 북한 거지 떼에다 정성을 쏟아보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