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의쉼터' 걷기방 모임이 있었다.
한양대 전철역에서 방장을 비롯 우리 4인방, 호순 님, 사바위 님, 범초이 님 등 8명이 모였다.
로사 님과 다솜 님은 몸이 불편하여 좀 늦게 카페로 합류했고, 호테 님은 청계천 걷기가 끝나고
점심을 할 시간에 마장동으로 직접 왔다.
어제부터 내린 봄비가 아침까지 계속 내린다.
나이든 사람들이 우산 받혀들고 건강을 위하여 둘레길을 걷는다는 것이 청승 맞아 보여
비가 멎을 때까지 카페에서 좀 기다리기로 했다. 범초이 님이 2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늦게 온 벌로 커피를 샀다. 역시 범초이 님은 신사 멋쟁이다.
나 같으면 그냥 미안하다며 절 한번 꿉뻑하고 말았을 텐데.
그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렸지만 비는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가 주룩주록 내리는 것도 아니고 시간만 자꾸 흘러가서 더 기다리지 말고 걷기로 했다.
시작점은 한양대학고쪽 성동교에서부터 시작하였다.
한양대학은 전철로 지나다니며 보기는 했으나 이처럼 가까이 와 보기는 처음이다.
겉으로 보기에 학교 운동장은 이제 없어지고 그 자리에 건물만 들어선것처럼 보인다.
또한 학교 주위는 아파트로 둘러싸여 4차선 도로가 이젠 좁아 보인다.
우리는 성동교 밑으로 빠져나와 청계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 안 가서 살곶이다리가 나온다.
조선시대의 석조사리로 2011년 12월 23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현존하는 다리 중 제일 길다.
살곶이다리는 이성계와 이방원의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이셩계는 함흥으로 올라가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이방원의 등극을 부정하였다.
그 후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는 이성계를 맞이하기 위해
태종이 이곳 중량천 하류 한강가에서 천막을 치고 아버지를 맞이하였다. 이때 이성계가
이방원을 향해 활을 쏘았으나 맞히는데 실패하였다.
정확한 이유(중학교 역사선생님의 설명)는 천막을 칠 때 신하 한 사람이 이방원의 키 높이로
대들보를 설치하게 했고 이방원으로 하여금 이성계가 가까이 올 때까지 대들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성계는 날아가는 참새의 왼쪽 눈을 맞힐 만큼 명궁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까이 다가온 이성계는 아방원을 보게되니 분이 복받혀 활을 꺼내어 순식간에 활을 쏘았으나
그 신하의 말대로 그 대들보에 맞아 이방원이 화살에 맞는 변을 면했다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살꽂이 혹은 살곶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양대학교 뒤로 휘어져 굽이쳐 흐르는 천은 두 개로 갈라진다. 하나는 중량천이고 다른 하나는 청계천이다.
청계천 방향 한양대학교 뒷쪽 넓은 공터는 1960~1970년대만 해도 넓은 공터여서
그곳에 맨땅은 축구장으로 이용하기도 했고 경찰대의 대모군중 훈련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도 무슨 건설공사를 하느라 가설울타리를 쳐 놓았는데 우리 회원 중 누군가 그곳에 '쉬야' 볼 일을 보러 들어갔다.
우리는 도심을 향하여 걸었다.
모두 잘 걷고 있는데 몸이 불편한 다솜 님이 시환의 부촉을 받으로 뒤쳐져 걸어오고 있다.
천변 따라 오르면서 한양대학교의 경계와 만나는 곳은 사근동이라는 동네였다.
예전에 둥근 유류탱크가 있었는데 도심이 팽창됨에 따라 그 유류탱크는 없어지고 주택이 들어섰다.
그곳에서 나의 누이가 살아서 나는 그곳에서 군대 제대 후 2년 동안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재개발 되어 주택은 모두 없어지고 아파트와 높은 빌딩으로 채워졌다.
청계천 건너편 뚝방에는 가난의 대명사 뚝방촌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그 또한 말끔히 정리되어 아파트나 공장이 들어서 있다.
그 시절 뚝방촌에는 막걸리집도 여럿 있었는데 돈 없는 대학생들이 수업 끝나고
하굣길에 그곳으로 건너가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막걸리 집에는
술 딸아주는 예쁜 아가씨가 많았는데 우리들은 어린 대학생이라 해서 많이 이뻐해 주었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양은 양제기 술잔에 딸아 마시는 술은 그시절 멋진 풍류였다.
나도 향토장학금의 일부를 그곳에 많이 바쳤다. 그 옛시절의 추억이 그립다.
천변 따라 많은 꽃나무를 심어 놓았다.
개나리는 반쯤 피었고 벚꽃은 붉은 입술을 곱게 내밀었다. 머지않아 벌들은
사랑의 촉수를 꽃술 깊은 곳으로 집여넣어 달콤한 사랑을 나눌 것이다.
요즘 도심에 손바닥 만한 황토땅이 있으면 여인네들이 모여든다.
황톳길 밟기를 하기 위해서다. 이를 Earthing이라 부른다. 건강에 좋다하니 아주머니들이
살이 통통하게 찐 장단지를 내놓고 황톳길을 걷는다.
지자체에서 하늘 공중의 전철 교각 밑으로 1KM정도 길을 내어 황톳길을 조성해 놓았다.
그런데 우리 여친들은 황톳길이 관심이 없는가 보다. 개나리 벚꽃이 어울어진 곳이면
모델이나 되는 듯 포즈를 취하면서 시환을 불러댄다.
그러면 시환은 열심히 달려가 찍고 찍고 또 박아댄다.
얼마나 걸었을까? 1시가 넘었다. 배가 고프다.
우리들은 마장동에 맛있는 소고기를 먹기 위하여 부지런히 걷고 따라 왔는데
산행대장은 도심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기만 한다. 알고 보니 호테 친구와 신설동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신설동? 우리는 마장동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잖아? 음식점이 있는 마장동 정육점은 이미 지났다 한다.
하여튼 드디어 말쑥한 차림의 호테 씨가 나타났다. 벌써 2시가 가까워 온다.
이젠 밥 먹을 일만 남았다.
자세히 보니 그곳은 소나 돼지를 잡던 곳이 아니다. 번지수가 약간 다른 마장동이다.
하지만 고기 파는 음식점이 몇 군데 보인다. 그중 2층 건물 꼭대기에 '고기박사'라는 정육식당 간판이 눈에 띈다.
예수님께서 지나갈 때 나무에 올라서 예수님을 향해 큰소리로 자기를 알렸던 사람이 있다.
맞아, 자기를 알리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음식맛도 괜찮을 거야.
그집으로 가기로 했다.
시장이 반찬이다. 인솔자의 안내에 따라 주는 대로 먹으면 된다.
이런 때 맛있고 없고가 어디 있는가. 소고기 전골이 푸짐하다. 어찌 야채가 빠졌다.
상추 있으면 좀 달라고 했더니 전골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면서 하지만 손님들이 하도 친절하여
써비스하겠다 면서 한웅큼씩을 가져다 준다.
마장동 고기집에는 나름 나의 아픈 추억이 있다. 청량리 근처에 잠시 직장생활을 할 때다.
그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하숙집 50대 중년의 여주인은 인천 인하공대를 다니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
혼자 하숙을 쳐서 먹고 살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 집이 아니고
사랑채 3개를 전세 얻어 부엌이 달린 한 개의 방은 자기와 아들이 쓰고, 나머지 두 개는 하숙을 쳤다.
그러니 하숙생의 반찬은 한 달이 가도 고기 한 점 나오지 않는 검소한 밥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월급날이었다.
근처 마장동에서 돼지고기 안주에 막걸리를 먹고 있는데 문득 우리 하숙집 밥상 생각이 났다.
하여 술을 마시고 헤어지면서 돼지고기 서너 근을 사가지고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주었다.
하숙생들이랑 같이 먹자고. 그 이튼날 아침 밥상은 그런대로 돼지고기 볶음에 그런데로 괜찮았다.
그리고 이 정도의 반찬을 적어도 두세 번은 나오겠지 하고 기대를 했다.
그러나 잔득 기대했던 저녁밥상의 고기 반찬은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면 나오겠지 했는데도,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나오지 않았다. 그 한 번으로 땡이었다.
이후 월급날에서 몇 번인가 망서리고 돼지고기를 사들고 갔으나 첫번째와 같았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사들고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는데 옆에 앉은 사바위 씨가 내게 술잔을 내민다.
아주 좋은 약술이라며. 20년 전만해도, 술을 지고 갈래, 먹고 갈래 하고 물어 보면 먹고 가는 술꾼이었다.
이젠 소주 한 잠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가련하냐. 나이는 누구에게나 불쌍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래도 건배를 위해 반 잔 받아들고 우리는 건강을 빌었다. 소고기 전골은 소주 안주에 최고다.
그 술도 한 번에 마시지 못하고 여러 번 홀짝대며 마셨는데 이게 왠 일인가? 머리가 흔들린다.
어쩌란 말인냐! 고물이 다 된 내 머리를~~~
점심을 마치고 상류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근사한 판자집 2층 빌딩이 보인다.
그 건물 왈,'청계천 박물관'이라 불리는 건물이라 한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곳을 관람하기로 하고 가까이 가보니 판자집은 외모만 옛날 청계천에 있던 판자집을 흉내내어 지었고,
진짜 박물관은 도로 건너에 콘크리트 건물로 지었다.
서울시에 판자집의 역사를 위하여 이런 건물을 지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모두 떼몰려 갔다.
관람이 시작되었다. 무료다.
그러나 청계천의 역사라기 보다 서울시의 발전상과 특히 청계천 다리 철거과정을 통행로 따라 열거해 놓았다.
발상은 좋았으나 내용이 빈약했다.
그러나 청계천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한양에 있던 청계천이다. 이 하천을 조선시대에는 '개천 開川'이라고 불렀다.
개천은 평소에 물이 말라있는 '건천亁川'이었지만 비가 오면 쉽게 홍수가 나서 집과 다리가 떠내려가곤 했다.
이에 영조는20여만의 백성을 동원하여 57일간에 걸쳐 개천바닥을 퍼내는 공사를 지시하여 백성의 민원을 해소했다.
그때의 임금님은 지금 같지 않고 현명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갈 곳이 없는 피난민들과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온 사람들이
청계천 주변에 모여 판자촌을 이우어 살았다. 판자촌 때문에 자꾸만 더러워지고 위험해져
정화지구로 정하여 청계천을 정리해 나갔다. 그런 이유이세인지 청계천 뚝방 판자촌은 봄철이면 불이 났고
그런 일이 몇년에 걸쳐 발생했다. 한 번 불이 나면 그 자리에는 집을 짓지 못하게 했다.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은 살 곳을 찾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로 이사 갔는데
그곳 중 한 곳이 지금의 성남시이다.
그 자리에는 청계천을 덮어 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청계천 복개공사는 1958년~1977년까지 2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이후 청계천의 물길은 어두운 복개도로 밑으로 흐르게 되었고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될 때까지 볼 수 없에 되었다.
그래서 청계천은 복개도로 아래에 덮혀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 위로 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다니고
큰 상가와 시장이 발달하게 되었다.
청계천 변에 있는 '평화시장'은 전쟁에 지친 사람들이 평화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고 한다.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동대문 주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의류 시장이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동대문 시장이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전태일과 같은 봉제공장 노동자자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다.
청계천 봉제공장 재단사였던 전태일의 노력으로 노동자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청계고가도로가 낡아 보수작업이 한계에 이르게 되었고, 도심 교통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낡은 복개도로를 없애고 청계천 물길을 다시 살려서 도시환경을 새롭게 만들기로 했다.
2003년 7월부터 시작한 철거민 개보수공사는 2005년 9월까지 2년 3개월 동안 복개도로를 엾애고,
청계천이 다시 흐르게 하는 공사했다.
복원된 청계천에는 1년 내내 일정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한강물과 인근 지하철역 주변의 지하수를 상류로 끌어와 흐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서울 시민들이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휴식공간을 만들었다.
청계천에는 엣날 사람들이 사용했던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도자기, 엽전 등 다양한 생활용품들과
광통교, 수표교, 오간수문과 같은 옛다리들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광통교는 청계천 상류에 복원되어 있어 직접 볼 수 있다.
2005년 10월 1일, 드디어 청계천에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복원 후의 청계천을 청계광장에서 시작해서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다가 마지막을 한강으로 흘러들아 간다.
우리는 복원된 청계천을 거닐며 역사와 자연을 만난다.
청계천은 역사, 문화 자연상태 세개의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젠 서울 시민뿐만 아니라 국내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역사구간에는 복원된 광통교, 정조반치도 등 서울의 다양한 역사이야기를 볼 수 있다.
문화구간에서는 쇼핑뿐만 아니라 다양한 먹거리와 공연을 볼 수 있다.
자연생태구간은 도시 가운데 있는 자연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다.
우리는 짧은 시간에 코끼리 다리만 만져본 것처럼 설렁설렁 다녔지만,
한 가지 기억할 만한 것은 특히 우리 선배와 부모세대는 이런 판자집을 경험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판자집을 보면 마음이 울컥하고 먼 슬픈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청계천은 암울하고 못살았던 우리의 마지막 세대의 역사다.
현대에 태어난 세대들은 흑백 활동사진을 보는 것처럼 상상 속의 한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뼛속 시리게 앓아온 가난과 변화의 산물이다.
이 글의 일부는 박물관 자료를 참조한 글임을 밝힘니다.
모처럼 모현봉 대장 덕분에 좋은 청계천에 대한 역사를 다시 되새기게 되어
다리는 피곤했지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짧지 않은 글 읽어 주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첫댓글 지난 역사와 우리가 함께 살은 근대를 섞어가며
그 날 추억 키우는 장편 글 잘읽었네요 전 건성건성 걷기에만 치중했는데
범부님의 세세한 글 덕분에 알게됀 부분도 있어서 유익한 공감대 나눕니다^^
이성계와 이방원의 역사적 살곶이 다리였군여.
청계천과 중량천의 두갈래길~
덕분에 공부했네여.
초가집과 함석집 그리고 늘늘이 기와집이더니 연립과 빌라 아파트가 우후죽순 세워진 역사적 변천사를 모두 겪어봐서 실감 났어요~
범무님의 매력이 이곳에~
무심히 다녔던 곳을
덕분에 역사공부 잘했네요
아는만큼 보인다고
다시한번 가보고 싶네요
살곶이역에대한 일화도
화장실도 제대로 안된 청계천 판자촌
전태일의 희생 등등으로
지금의 아름다운 휴식공간으로
살아 났네요
범부님 글 자주 올려주세요
같이 함이 좋았습니다
범부형의 글을 읽고 많은것을
배웠다 살곶이다리의 야화,청계천의 역사 .범부형
개인의 지난 날의 추억담
참 글도 정갈하고 알기쉽게 잘도 쓰셨다
꼼꼼하고 박식한 범부형의 겸손함이 더 빛을 발하는 이유다
박식하고 겸손한 선배들 덕분에
명품카페란 이름 듣기에 손색이 없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과연 범부님의 장편 소설 멋지고 정이 넘 칩니다.
한자 한자 그날의 바자취 잘도 표현 해 주셨구만요.
잘읽고 다음에 또 뵐수 일을까 하는 마음에 조금 움추려 집니다.
항상 건강 잘 채기시고 멋지게 쉼터 에 머물러 좋은 글 많이 남겨주세요..
범부님의 진면목이 이제서야 ....
청계천에 얽힌 온갖 역사가 이글에 담겨 있습니다.
긴글을 읽으며 문장하나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범부님의 차분함과 해박함에 감탄합니다.
함께 못한 아쉬움을 이 글로서 해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문박사 다운 글이다 모임후기와 자서전을
읽은 기분이다
나타내지않고 글 사이사이
올린 사진도 잘찍었고
적소에 배치해 글의
의미를 더 살렸다 이런 솜씨를 숨기고 있었다니
이제 나이가들어
다 읽기가 벅찰 뿐이다~
어디를 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구랑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더니.
범부형 함께하니 이런 훌륭한 기행기가 탄생하는군요.
아는 만큼 보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하두 들어서 클리쉐한 표현에 역시나!를 반복하며
다시 함께하는 날을 기다립니다.
참 재미있게 잘 쓰셨어요. 그리고 부탁 하나.
호테 이름 뒤에 님자는 빼주세요.
Viva 범부형!
ㅎㅎ 청계천 의 마지막 세대 라 읽어 보니 청계천 의 역사 가 그대로 나열 되어
충분 히 이해 가 됨니다 그려 나도 서울 이주 후 중량천 변 에 살다 보니 중량천 의 한강 합류 부 와
청계천 의 하구 를 보고 싶었는데 이번 에 확인 할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기다 청계천 주변 역사 를
알게 되어 감사 하요 나도 혹시 기회 가 되면 부산 피난 시절 학고방 역사 를 좀 소개 해보면 어떨까
생각 해 봄니다 원래 동래군 서면 동면 북면 부산포 좌승대 초량 고관 ㅎㅎ 그리고 동래 온천 해운대 온천 등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