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라를 지금 여기서 사는 길
- 몸과 관계의 복음화, 작은 천국 만들기
1열왕 17,1-6; 마태 5,1-12 /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2024.6.10.
인류가 생존을 위해 도구를 사용하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문명이 인류의 생존에 미친 가장 큰 영향 중의 하나가 수명이 길어졌다는 현상일 것입니다. 불과 백 년 전에만 해도 예순 살을 넘겨 사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기에 환갑잔치를 마련해서 축하를 하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환갑 잔치를 동네 이웃을 초대하던 까닭은 나라에서 강제하는 부역도 예순 살이 넘으면 면제가 되기에 잔치를 벌여 이웃에게 두루 알리는 부역 졸업 신고의 의미도 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선 섭생(攝生)이 좋아졌습니다. 잘 먹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영양 상태가 개선되니까 면역력이 강화되어서 수명이 길어졌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의료기술도 발달해서 수명 연장에 기여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죽을 수도 있었던 치명적인 질병들의 징후들을 미리 발견하고 치료도 할 수 있을 만큼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지금은 인생 백세 시대라고 부를 만큼 수명이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술이 발달했다고는 해도 생명의 노화 현상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길어진 수명만큼 이를 감당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나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즉, 질병이 가져다 주는 고통에다가 만만찮은 의료비와 간병비를 조달해야 하는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가족으로부터도 사실상 버려져야 하는 사회적 소외감을 느끼면서 백세까지 고생하며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자식을 키우는 데에만 온통 인생을 희생하다시피한 지금의 노인 세대들은 자신들의 길어진 노후를 준비할 시간적이고 정신적이며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더 힘듭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 백세 시대가 행복한 장밋빛 인생을 가져다 주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불행을 초래한 이 인생 백세 시대의 문제, 수명 연장 사태의 과제는 문명을 발달시킨 원인 중에서 두 손으로 만들 수 있었던 도구가 아니라 두뇌로 해결해야. 합니다. 사람의 두뇌는 이성의 능력만을 발휘할 수 있는 신체 부위가 아닙니다. 이성의 능력에 더해서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계시의 빛을 수용할 수 있는 영성의 능력도 발휘할 수 있는 신체 부위입니다. 마음이 가슴이 아니라 두뇌에 있기 때문인데, 과연 어찌해야 두뇌에 있는 마음의 영성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에 그 열쇠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선 인생의 목표부터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백세를 넘겨 사는 것이 목표입니까? 아무리 몸이 고통스럽고 외롭고 힘들어도 무조건 오래 살기만 하면 좋은 것입니까? 그것은 불행한 말년이지 행복한 마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우 서른 세 살까지만 사셨어도 인류의 구세주가 되셨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목표이자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복음을 듣고자 모인 많은 군중과 당신을 따르고자 모인 제자들 앞에서 인생의 목표를 여덟 가지 참된 행복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슬퍼하는 이들, 온유한 이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자비로운 이들, 마음이 깨끗한 이들, 평화를 이루는. 이들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까지 인생을 참된 행복으로 채워서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제시하셨습니다. 인생의 가치는 수명과 같은 길이가 아니라 행복과 같은 내용에 있고 따라서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질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고 또 권장하신 이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은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삶에서 체험하신 내면의 비밀을 밝혀주신 계시입니다. 그렇게 하늘 나라의 참행복을 사시다가 서른 셋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믿는 이들에게 발현하심으로써 그 참행복을 누리는 영원한 삶을 살고 계시고,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발현하시어 하늘 나라의 참행복을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장담하셨습니다. 실로 영원한 생명이란 그저 오래 사는 육신 수명의 문제가 아니며 현세와 내세를 막론하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삶의 질을 한껏 높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참된 행복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일정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조건을 예수님의 삶과 엘리야의 활동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과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치셨으면서도 당신을 믿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치셨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인생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그분은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하여 살아가셨습니다. 순도 100%의 삶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시고 하느님의 기운에 의지하여 사신 분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참된 행복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그래서 진복팔단의 말씀은, 단지 희망사항이 아니라 당신께서 살아가시던 아주 내밀하고 귀한 비밀로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바알신’ 우상을 숭배하던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사백 오십 명도 넘는 거짓 예언자들과 당당히 맞서 싸운 예언자였습니다. 그 싸움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우상숭배자였던 왕비와 왕에게 쫓겨서 요르단 강 시내에서 숨어 지내며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을 하기도 했고, 멀리 시나이 반도에 있는 호렙산으로까지 피신하기도 했으나, 어떤 처지에 놓이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철저하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느님도 아닌 것이 하느님 행세를 하는 우상에 대해서나, 이 우상을 우상인지도 모르고 섬기는 헛된 풍조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서 싸웠기 때문에 하느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처신하면 하느님께서 철저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이 점을 확실하게 믿어야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시키기 위한 싸움이 필요합니다. 몸과 마음을 일시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쾌락이나 그 유혹에서 단호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소중하지만, 그 소중한 몸과 마음을 더욱 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영혼이기에, 영혼의 사정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생활해야 합니다. 진복팔단을 살아가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주는 교훈에 따라서, 세상에서 하느님을 가리고, 하느님 행세를 하는 우상숭배에 맞서는 싸움이 필요합니다. 그 우상이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나 사회적 지위든, 또는 오래 살고 싶어하는 건강이든지 간에 하느님 아닌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서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게 되면, 우리의 몸이 면역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게 되어 건강해지고, 따라서 우리의 마음도 튼튼해집니다. 건강한 몸과 튼튼한 마음으로 지녀야 할 기본 자세가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진복팔단을 이룩할 수 있는 가치관입니다. 이 가치관에 따라 살게 되면 몸과 관계의 복음화가 아울러 가능해집니다. 이제 진복팔단에 계시된 행복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행복은 청빈의 덕행을 실천하는 데에서 이룩됩니다. 이는 단지 자기가 가진 재물을 근검절약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진 재물을 더 가난한 이들과 나누려는 관계적 지향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모든 재물은 모든 사람이 골고루 나누어쓰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본시 모든 재물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나보다 재물이 더 필요할 만큼 가난한 이들의 곤궁한 처지와 그 고통과 소외감에 공감하는 지향이 있어야 가진 재산에 만족하기도 쉽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재물을 어떻게 쓰는지를 보면 그가 정말 하느님을 믿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슬퍼하는 행복은 공감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고통을 당하여 불행하게 된 이들의 마음과 처지에 공감할 수 있어야 인간입니다. 이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사이코패스(psychopath), 즉 반사회적인 괴물로 취급받습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이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능력이 하느님을 믿는 능력의 뒷모습입니다.
온유한 행복은 하느님께 온유한 사람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하느님과 온유하게 소통하는 사람들끼리도 역시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행복입니다. 공동체를 이룰 만한 사람들의 수효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 세 사람이라도 마음을 모아 예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분은 그런 기도를 모두 들어주시겠다고 장담하셨습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행복은 오로지 하느님의 의로움만을 애타게 바라고 추구하는 덕행을 낳게 되는데, 목마름의 괴로움을 비유하는 이 표현은 가난도 배고픔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부를 낳습니다. 이렇게 사는 의인들이 가난하고 배고프면서도 흡족해지는 까닭은 이 세상에 의롭게 처신해야 할 일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인들이 서로 알아보고 교감하며 의로움을 위해 힘을 합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안에서 성령의 기운이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운 행복은 자비를 입기도 하고 베풀기도 하는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푸신 일이야 치유와 구마(驅魔)의 기적을 일으켜 주실 때마다 자비를 베푸셨으니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함께 복음 선포 활동에 전념하셔야 했던 그분께서도 자기들의 재산으로 그 일행을 도운 여인들의 자비를 입으셨습니다.(루카 8,1-3 참조)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은 장정 열 세 사람으로 이루어졌고 별다른 생계수단도 없이 복음을 선포하며 팔레스티나 도처를 유랑하셔야 했는데, 그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수발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니, 그 여인들의 자비로운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자선을 베푸는 데 그치지 않고 용서를 베푸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수많은 사람들을 용서하신 예수님께서는(마태 26,28; 루카 23,34 참조) 제자들에게도 용서함으로써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6,12.14-15; 18,21-22.35 참조)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음으로 해서 구태여 세상의 재화에 목을 매달리듯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크나큰 용서를 자비로이 체험한 이들은 자기 이웃이 저지른 자잘한 잘못에 대한 원한이나 분노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행복은 죄를 끊고 육신의 더러움을 모두 씻고서, 믿음과 의로움을 실천하여 쌓는 행실로 하느님 마음에 든 사람이 누리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바르게 행동하며 그렇게 하고자 생각하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을 봅니다. 성령이 충만했던 스테파노는 유다 최고 의회 의원들의 분노를 사서 돌에 맞아 죽기 전에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사도 7,55)고 했습니다. 바르게 행동하며 그렇게 하고자 생각하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마음이 하느님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행복은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몸소 보여주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모든 일에 질서가 잘 잡혀 있는 이 평화의 나라에는 다툼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평화이십니다. 그러므로 불화와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문제를 풀어내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이 평화가 완전히 정착되기 전에도 마음의 평화를 가능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 분쟁과 다툼을 일삼고 있는 현실에 실망하지 말 일입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행복에 대해서는 첫 번째 행복과 마찬가지로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더 직접적인 선언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말씀을 통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태 5,11-12)고 덧붙이실 정도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셨습니다. 진리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들어야 했던 의인들에게 그에 맞갖게도 하늘에서 큰 상을 주시겠다는 커다란 보상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천국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복음화시켜서 천상적인 축복이 깃든 작은 세상을 이룩하십시오. 이 작은 세상을 이룩하는 일이 하늘 나라를 지금 여기서 사는 길입니다. 우리의 몸과 인간 관계를 복음화시켜야 교회도 세상도 복음화시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