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 9개국 탐방
날짜:2011년 9월 7일 수요일~18일 일요일 11박 12일
여행국:루마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마케도니아,알바니아,몬테네그로,보스니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 세르비아에서 마케도니아 가는 국경선
직원이 올라와서 여권을 거두어간다. 국경선의 개가 정차선 차도 옆에 앉아 있다. 두 나라를 오가는 차량을 검사라도 하려는 걸까. 그런데 참으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세르비아 출국장을 통과하고, 마케도니아 입국장을 통과하는데 톨게이트 2개 거치듯 쉽게 넘는다. 이럴 때면 네 조국의 가슴 아픈 국경선이 떠올라 소슬하다.
* 마케도니아 입국
마케도니아 입국을 환영한다는 문구의 안내문이 국경선 철제 지붕에 걸려 있다. 그곳을 통과하여 마케도니아에 들어왔다. 깨끗한 도로와 고운 집들이 제일 먼저 시선을 끈다. 저 멀리 산자락 능선이 들녘을 보듬고, 너른 들녘 곳곳에 붉은 기와지붕의 민가와 우뚝 선 나무들이 한 폭의 수채화다. 알렉산더대왕의 고향으로 알려진 발칸반도의 마케도니아, 첫인상이 참 좋다.
* 마케도니아 휴게소
조금 달려가서 휴게소에 들렀다. 이 나라 사람들이 모여 있다. 중년 남자 몇 명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한국인 일행을 보고는 낯선 시선으로 바라본다. 발칸에는 한국인이 별로 살지 않아서 만나기가 어렵다.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궁금하듯이 그들도 우리에 대하여 매우 궁금한 것이다. 도로가 시원하게 뻗어 있다.
*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프예 도착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북부의 옛 영토다. 발칸반도의 중부로 즉 그리스, 불가리, 마케도니아의 3국에 걸친 지역이다. 마케도니아 인구는 200만명, 국토도 한반도의 10분의 1, 경상도 땅 정도에 불과하다. 유고연방으로부터 겨우 독립한 국가다. EU에 가입 하려고 했는데 그리스가 반대하여 무산 되었다. 그리스는 마케도니아가 1991년 유고연방 해체로 독립하며 국가 명칭을 ‘마케도니아’로 정하자 그리스의 특정 지역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이 나라는 1995년 ‘옛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이라는 잠정적 국호로 유엔에 가입했다. 스코프예는 마케도니아의 수도로 바르다르강 상류에 있고, 중부유럽과 아테네를 잇는 중요한 통로역할을 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 제일 큰 도시로 정치, 문화, 경제 및 학문의 중심지이다. 마케도니아 인구의 1/4이상, 60만명이 이곳 스코프예에 거주한다. 스코프예는 1963년 대지진으로 어수선한 도시였다.
마케도니아에 입국할 때부터 멀리 우람한 산풍경이 장엄하더니 그 산줄기가 스코프예 도심까지 이어진다. 마케도니아는 보통 해발 600~700m 고지의 영토다. 스코프예는 해발 300m에 위치해 있다. 도시에 들어서자 산정십자가가 오롯하다. 2000년 해발 1천 미터의 보드노 산정에 세운 밀레니엄 기념 동상으로, 당시 개신교계 대통령이 세운 철조물 십자가다. 알렉산더의 고향으로 유명한 땅 마케도니아, 스코프예는 수도인데도 애잔한 시골 정취가 서려 있다.
* 마케도니아 스코프예 마더 테레사 기념관
기념관 입구에 마더 테레사의 기도하는 동상이 서 있다. 테레사 수녀는 1910년 8월 26일 마케도니아 스코프예에서 알바니아계 부모 사이에 태어난 알바니아 사람이다. 헐벗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세계 최빈국 알바니아에게는 그녀가 희망의 등불이었을 것이다. 1929년 인도에 도착한 후 2년 후에 수녀로서 첫 서원을 하고 테레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테레사 수녀는 1948년 콜카타에서 빈민 구제를 위한 사랑의 선교단을 창설하고 1997년 선종 때까지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의 구호 활동에 헌신했다. 헐벗고 굶주리고 병약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으로 콜카타의 성녀로 불린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마케도니아는 60%가 정교회, 30%가 이슬람교인 나라다. 그래서 천주교인 마더 테레사는 안 알려졌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돌보다 간 여인은 사후 성녀 칭호 받았다. 그녀의 탄생지에 세운 기념관은 노벨 평화상 수상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아담한 3층 건물이다. 1층에는 교황과 함께 찍은 바티칸 시국의 사진이 걸려 있고, 2층 박물관에는 일생 동안 활동하던 그녀의 모습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3층은 그녀의 사진이 걸린 기도실이다. 자취로나마 위대한 삶을 살다간 한 여인의 향기를 체감할 수 있는 오롯한 공간이다.
* 마케도니아 스코프예 시가지
마더 테레사 기념관을 다 관람한 후 마케도니아 한국 교포 가이드를 만났다. 이 나라에는 한국 교민이 한 가족뿐으로 아내와 자녀 등 6명이 전부다. 지금 만난 교민 남자는 선교사이며 한인 회장이다. 바쁜 일정으로 좀 늦게 나온 것이다. 마케도니아는 한국과 수교 안 된 나라다. 우리나라는 쿠바, 시리아, 마케도니아 3국이 미수교국이다. 남한 1/4크기, 대구 크기의 도시다. 정비 진행으로 어수선한 도시다. 불가리아 점령에서, 오스만 투르크 지배, 그 후 세르비아 지배, 그리스와의 분쟁 등 많은 지배로 슬픈 역사의 국가다. 1차대전 후 유고연방에 흡수되었다. 스코프예는 산과 나무가 우람하여 상큼한 시가지다. 도로변에 예쁜 꽃까지 발칸의 낭만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자동차가 많지 않은 도심이다. 2011년에 건설한 바르다르 강 다리 양쪽 끝에 사자상이 우뚝 서 있다.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로 넘어온 것이다. 우체국 건물이 독특하다. 건물 높은 곳에 붉은 바탕에 금빛 태양을 그린 마케도니아 국기가 걸려 있다. 중세 유럽풍의 건물이 종종 보인다. 도심 시가지를 걸어서 마케도니아 광장으로 갔다.
* 마케도니아 광장
마케도니아 신시가지 광장에 들어서자 칼을 든 기마상이 하늘 높이 치솟는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쪼갤 듯한 포효다. 마케도니아가 고향인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기원전 323년)의 동상이다. 높은 받침대 아래에는 분수가 장엄한 물살로 솟구친다.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이 분무하는 물줄기 사이에서 받침대를 에워싸고 있다. 분수의 가장자리는 사자상이 지킨다. 흰색의 사무엘 동상도 있다. 1991년 9월 8일 독립기념의 날짜에 맞춰 금년 2011년 9월 8일 이곳 광장에 알렉산더 대왕의 청동 동상 제막식을 거행했다. 마케도니아의 큰 자긍심이 담긴 광장으로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 동상의 길이는 받침 부분을 포함해 총 22m 높이다. 무게가 30t이며 받침대 높이만도 14.9m다. 제작 비용은 1천300만달로 138억원 상당이다. 이웃 나라 그리스는 이 동상의 건립에 심하게 반대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의 조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감정싸움은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토가 현재 그리스 북부 지역과 마케도니아로 분할돼 있는 것에서 부터다.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의 민족인 슬라브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는 자신들의 역사라고 여긴다. 반면 마케도니아는 자신들이 옛 왕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들의 국가 상징으로 여긴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는 마케도니아가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독립을 선언했던 1991년부터 마찰을 빚고 있다. 당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가 국명을 마케도니아로 제정하자 그리스 북부 지역의 명칭과 같다며 반대했고 통상금지도 했다. 하지만, 두 국가는 16년이 지난 현재도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으며 마케도니아는 국제형사재판소에 그리스가 1995년 협정을 위반했다며 제소까지 했다. 그리스가 2005년 마케도니아의 EU 후보국 지정에 반발하고 2008년 마케도니아의 나토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반대한 때문이다.
알렉산더 동상 건립에 대한 마케도니아 내부의 비판도 있다. 경제적 문제가 가장 크다. 실업률이 31%에 달하는데 동상 건립에 거액을 쓸 여유가 없다는 이유다. 동상 건립이 그리스와의 타협 여지를 줄이고 유럽으로 향하는 마케도니아의 움직임을 퇴보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자유 시장, 정치 투쟁, 독립 등의 문제에 시달리는 마케도니아 정부가 이런 정체성 확립 정책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마케도니아의 총리는 스코프예의 공항과 고속도로, 경기장 등에도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붙였다.
마케도니아 광장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고 보는 것은 분명 이곳을 찾는 모든 이에게 큰 역사의 획을 하나 그어 주는 일이다. 광장 주변은 고층 건물과 여러 동상들, 바르다르 강의 스톤 브릿지 등으로 아름답다.
* 마케도니아 터키식 돌다리 스톤 브릿지
바르다르 강 위의 구시가와 신시가를 연결해 주는 다리다. 15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재건설한 터키식 돌다리 스톤 브릿지다. 이 나라에서 부르는 이름이 까멘로스뜨인데 돌다리란 뜻이다. 아치형으로 아름답다. 이 다리는 고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처음 만들었고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 보수하여, 1555년의 대지진과 1944년의 테러사건 등 여러 위험한 상황을 잘 견뎌온 스코프예의 상징물이다. 65만 명의 사상자를 낸 1963년 대지진 때에도 이 다리와 보드노 산의 칼레성만이 온전했다. 강변에는 마케도니아 애국자들 동상 4명이 서 있다.
마케도니아 시내의 기념비적인 이 돌다리를 건너면 현대적인 스코프예 신시가지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유적이 남아 있는 구시가지로 간다. 다리를 건너가자 키릴 문자 창시자 성키릴과 성메토디우스 형제와 키릴문자 창제에 공헌한 제자 2명의 동상이 있다. 마케도니아는 키릴의 고향이다. 키릴 문자는 슬라브권의 종교전파를 위해서 만들었다.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모두 키릴 문자의 뿌리는 동일하다. 조금씩 변형해서 사용하고 있다. 유사한 언어로 발칸은 다 통합이 가능하다. 발칸 전쟁 후 마케도니아 지도가 만들어졌다. 다리 건너에서 신시가지를 바라보니 마케도니아 광장 전경이 보이고 알레산더 대왕의 동상이 더욱 위용을 드러낸다.
* 마케도니아 스코프예 구시가지
마케도니아 구시가지는 옛 향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다. 가죽 제품 상가가 많다. 즐비한 상가들이 아기자기하여 풍경이 곱다. 집시도 노변에서 앉아 있다. 영화도 촬영하던 거리다. 말을 탄 중세의 용사가 뛰어 나올 것 같은 고풍스런 풍경이다.
* 마케도니아 터키식 목욕탕
발칸반도 최대의 터키탕인 다우트 파샤 목욕탕이다. 마케도니아 광장에서 터키식 돌다리 스톤 브릿지를 건너 구시가지를 조금 걸어서 온 곳이다. 부자나 귀부인이 이용하던 목욕탕이다. 이곳은 그 당시 번화가였다. 이 건물은 미술대학으로 사용했고 현재는 국립 미술관 갤러리다. 검은색의 여러 개 돔 지붕이 독특하다. 외형상으로도 건물이 단단해 보인다.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목욕탕이었던 곳의 지붕에는 아직도 증기가 나가도록 만들어 놓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돌을 갈아 만든 욕탕 기물과 벽을 타고 도는 물의 관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다른 방으로 가니 그림을 많이 걸러 두었다. 목욕탕 입구 벽면에도 그림이 걸려 있다. 세월은 흘렀어도 지배의 흔적은 남아 있는 유적지다.
* 마케도니아 동방 시장
발칸에서 가장 큰 도매시장이며 유럽 시장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옛날시장이다. 구시가지 고전의 골목을 따라 간 곳에서 드넓은 자락에 온갖 물건을 품고 앉은 동방 시장을 만났다. 터키의 그랜드 바자르 시장과 비슷한데, 이곳은 지붕도 없고 막아놓은 곳도 없이 오픈 된 공간이다. 이곳도 세계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 시장이다. 무엇을 사기 위해서라기보다 마케도니아의 정취를 느끼고자함도 있을 것이다. 물건의 질은 약간 떨어지나 값은 상당히 싼 것 같았다. 나도 손자의 장난감으로 자동차를 3개 샀다. 의류, 완구, 과일, 생활용품 등 즐비한 상가에 진열된 물건들을 눈으로 보는 것도 즐거웠다.
* 마케도니아 칼레성
동방 시장에서 걸어서 갔다. 가는 길의 보도블록이 고전적이다. 긴 성곽이 보인다. 둔덕 앞의 성문은 닫혀 있다. 성곽 앞의 뜨락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긴 역사를 말해준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의 칼레메그단 요새와 같은 곳이다. 불가리아 전성기는 11~12세기고, 세르비아 전성기는 13~14세기였는데 칼레성은 6세기에 성문법으로 유명한 마케도니아 출생의 유스티아누스 로마 황제가 축성했고, 1350년 두시안 왕조 때의 돌로 재건한 성이다. 이 성벽은 로마, 비잔틴, 오스만을 잘 견뎌왔다. 우리나라 남산처럼 스코프예 시가지에 있다. 높은 보드노 산자락의 해발 250m에 축조한 성이다. 보드노 산은 Mt. Water로 1962년 대홍수가 났을 때 바르다르강이 범람했는데 그 강물 구비의 높이가 이 지역에 선 산과 같아서 지어진 이름이다. 칼레는 요새란 뜻이다.
마케도니아는 아이 생산을 안 하려고 한다. 먹고 살기 어려워서다. 알바니아인들이 들어와 알바나아화 되어가고 있다.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가 여기서 돌싸움했다. 2002년 폭동이 일어났다. 알바니아 실업율 60%, 마케도니아 실업율 45%이다. 코소보도 알바니아화 되어 간다. 삼성기업이 들어오려고 하는데 그러면 한국과 수교를 맺어야 된다. 자동 분수의 분무로 목마른 나무와 잔디밭에 물을 준다. 파란 하늘과 칼레성이 아름다운 조화다. 이제 마케도니아 스코프예를 떠날 시간이다.
* 마케도니아 스코프예 출발
마케도니아, 이름에서도 갚은 역사의 향기를 발하는 이름이다. 그 수도 스코프예 시가지를 다시 거치며 떠날 준비를 한다. 모스크 첨탑이 나무 사이로 높이 솟구쳐 있다. 아까 걸어서 건넜던 바르다르 강의 스톤 브릿지가 보이는 강다리를 건너간다. 스코프 시내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순간마다 참으로 소중하다. 내가 낯선 나라의 땅을 밟고 서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여행의 큰 의미를 부여한다. 언제 또 이곳에 오겠는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머무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소중한 세계 여행을 하나하나의 점으로 엮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이다. 사진으로, 글로, 시로 열심히 저장하여 두었다가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곳에 보내기도 하고 먼 훗날 기력이 쇠잔해졌을 때 그런 소장 자료를 보며 나는 행복하리라. 오후 2시 30분경 오흐리드로 출발했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가는 길
오흐리드까지 2시간 30분 소요된다. 스코프예 시내를 벗어나자 보드노 큰 산이 들녘에 더욱 오롯하다. 마을의 붉은 지붕과 함께 여전히 옥수수밭이 출렁인다. 이제 옥수수밭이 안 보이면 이상할 것 같은 발칸의 정경이 뇌리에 박혀졌다. 이곳에는 노란 유채꽃과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파란 옥수수 잎사귀가 한폭의 수채화로 전개된다. 산을 두개 넘는데 아름다운 길이다. 도로는 점점 산으로 접어들고 있다. 아름다운 산녘이다. 민가가 보이는 도로변에 경찰차가 멈춰 있다. 토마토가 주렁주렁 매달리고 옥수수가 총총한 밭에서 일하는 농부도 있다. 다시 또 높은 고지의 산길을 오른다. 마케도니아의 우람한 산길을 오토바이가 질주하기도 한다. 다시 아담한 산마을 농토에는 노랗고 빨간 파프리카가 보이고 그 곁 비닐하우스 속에서도 파프리카를 재배하고 있다. 고지 농가의 모습이 아름답다. 마케도니아는 현대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나라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휴게소
휴게소 주변에 포도밭이 많다. 키 작은 포도나무가 여기저기 줄지어 서 있다. 달려왔고, 또 달려가야 할 산길도로가 길게 뻗어 있다. 우람한 산은 계속 따라오고 산마을이 곱다. 점점 해는 서녘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이곳은 추석이 없다. 내 조국 한국은 내일이 추석이다. 오늘밤은 오흐리드에서 잔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도착
오흐리드에 가까이 오자 산정에 사무엘성이 보인다. 산정 성곽이 둥글게 자리하여 아직도 역사를 전시한다. 오흐리드는 해발 700m 고지의 도시다. 1986년 요새와 더불어 마케도니아의 유일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도시다. 역사와 자연의 복합 문화유산 도시다. 선사시대부터 거주해 왔다. 인구는 8만 명이다. BC 148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아드리아해와 에게해의 관문 역할을 하는 군사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9~10세에는 키릴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기독교어를 슬라브어로 번역하여 종교 구심점 지역이었다. 오스만이 물러가며 마케도니아가 부상했다. 오흐리드 타운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역의 하나고 깨끗하고 아담한 도시다. 7-19세기에 걸쳐 고대 슬라브족의 수도원과 800여개의 비잔틴풍 성상이 있다. 소박하고 잘 정비된 거리에는 오래된 시장과 중세 수도원, 성당, 상가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오흐리드 도심을 걸어서 호수 쪽으로 갔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성클레멘스 동상
오흐리드 도심을 걸어가서 만난 끝 부분 호수변에 큰 동상이 있다. 성 클레멘스의 동상이다. 성 클레멘스는 키릴문자를 만든 성키릴과 성메토디우스 형제의 수제자 중 하나다. 최초의 슬라브계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했고 슬라브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집필했다. 성 나움과 함께 그리스어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마케도니아를 종교 구심점 지역으로 만든 성인이다. 동상의 크기만으로도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귀족마을 거리
마케도니아는 이름에서부터 오랜 역사의 향기가 풍긴다. 여기는 후기 비잔틴양식으로 유명한 호반의 도시,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귀족마을 거리다. 마케도니아는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나라다. 미지의 땅 발칸반도, 낯설고 오래된 풍경이 걸음을 부르는 거리다. 1991년 옛 유고연방에서 독립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정교와 이슬람교 등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특유의 분위기를 간직한 나라다. 좁다란 골목 바닥의 돌이 닳아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마을 입구 초입에서부터 오랜 역사를 전시한다. 집들이 위로 올라가며 커진다. 그것은 도로나 집을 망가트리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1층에 자리한 그 터전 위에 2, 3층의 평수만 늘려서 넓은 집으로 개조하여 산다. 외벽의 돌, 지붕, 창문 장식이 아주 고풍스럽다. 불편해도 감수하고 지켜나가는 문화유산이다. 집과 집 사이 작은 틈새로 오흐리드 호수가 보인다. 계속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귀족마을 거리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성소피아 대성당
오흐드리는 발칸의 성지다. 키릴 형제의 활동으로 그렇다. 정교회 성당, 교회가 365개나 있다. 구시가지 귀족마을 거리를 따라 성소피아 대성당에 갔다. 성소피아 교회는 11세기 초 불가리아 점령시대에 세워진 성당으로 마케도니아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의 큰 정교회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정통 정교회의 근간을 이루는 교리를 집대성한 교회다. 오흐리드는 3세기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으며, 10세기 무렵 제1차 불가리아제국 황제의 보호 아래 그리스도교 성당과 수도원들이 잇달아 건설되었다. 마케도니아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려 질 만큼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역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시대에는 모스크로 사용하기 위해 벽면의 11~14세기 프레스코화를 석회로 덧칠하였다. 1951년부터 복원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예수의 승천과 성모자좌상이 복원되었다. 벽돌과 붉은 지붕의 성당 마당에는 파란 잔디가 곱다. 개 한 마리가 서성이는 모습이 처연하다. 바로 위에는 카페와 아름다운 마을이 아기자기한 풍경이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변 마을 풍경
마케도니아의 보석이라 불릴 만큼 자연경관이 뛰어난 오흐리드 호수 주변 마을은 나무와 꽃으로 더욱 아름답다. 탄탄한 건물 벽면에 어촌 도구를 걸어둔 집도 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른 하객들이 언덕을 내려온다. 우리와 마주치며 서로에게 이방인으로 낯설지만 함께 바라보며 훈훈한 눈웃음을 선사했다. 마케도니아 오흐리드의 깊은 추억으로 저장될 것이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로마시대 극장터
오래된 문화 유적지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다. 로마시대의 유적지를 비롯해 정교회 사원, 최초로 설립된 슬라브 대학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호수변 언덕길을 다리가 아플 만큼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로마시대 극장터가 나온다. 원형 돌 계단식 좌석을 가진 넓은 광장으로 로마시대에 만든 야외 극장터다. 그 당시 인구가 1만 5천 명으로 추정된다. 현재 오흐리드는 도심 인구 6만 명, 전체 인구는 8만 명이다. 맨 위 돌계단에 앉아서 잠시 고대 로마의 한 사람이 되어 무언으로 흐르는 야외 원형 극장의 숨결을 흡입해 본다. 아래쪽에 설치된 무대가 있고 빙 둘러쳐진 벽면은 형상만 간직한 채 허물어진 곳이 많다. 아래 부분의 돌은 그 당시의 진짜 돌이고 위 부분은 복원한 것이다. 다듬지 않은 고풍스런 모습이 옛 향수를 자아낸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성클레멘스 성당
포도와 토마토를 정원에 기르는 아름다운 집 앞을 지나간다. 발코니에 고운 꽃 화분을 장식한 동화 속 같은 집을 지나간다. 성당 건너편 산정 요새 아래 언덕진 마을은 우람한 나무와 요정이 사는 듯한 아기자기한 집들로 절창이다. 성 클레멘스 성당은 1295년에 지었고, 1950년대에 발견되었다. 아까 호수변에 그의 동상을 보았다. 그리스 십자모양 평면 위에 작은 돌과 벽돌로 지은 건축물로 성모 마리아를 위해 세워진 교회다. 오흐리드의 수호자로 여겨진 성클레멘스의 유해를 안치하고 있어 성클레멘스 교회로 불린다. 클레멘스는 893년에 최초의 슬라브대학을 설립했으며, 슬라브 문학 작품들을 집필했고 그리스어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교회 안에는 중세시대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보수하는 모습이 보인다. 근처 언덕 꼭대기에는 터키의 모스크이자 여관인 4각형 건물도 있다. 이 건물은 9세기에 이 도시 최초의 슬라브인 주교였던 클레멘스와 관계가 있던 사람의 수도원이 있던 터에 세워졌다. 언뜻 보면 성당에 속한 건물로 보인다. 성클레멘스 성당은 우뚝 높은 지대에 있어서 푸른 하늘이 감싸고 있어 더욱 성스럽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요새의 잔해
오흐리드 구시가지는 언덕진 바위산 위에 있는데 바위에 해당하는 흐리드hrid에서 이 도시 오흐리드Ohrid가 이름 지어졌다. 바위산 정상에는 10세기말에서 11세기초에 축성한 요새의 잔해가 남아 있다. 당시 이 도시는 불가리아 차르의 수도였다. 트샤르 사무엘이라고 명명된 이 오흐리드성은 10세기경 수도사였던 트샤르 사무엘에 의해 축조되었다. 둘레가 3Km, 성벽 높이 16m, 10여 개의 망루가 있다. 오흐리드를 지켜주는 성채로 각광을 받았으나 현재는 요새의 잔해로 남아 있다. 성클레멘스 성당 건너편 산언덕 위에 성채가 길게 늘어서 있고 망루에 마케도니아 국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요새에 석양이 내린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변 마을 비경
오흐리드 호수변 마을은 아름답다. 집집마다 화단에, 또는 정원에 포도나 토마토 등을 재배한다. 주렁주렁 매달린 과일 풍경이 발칸의 서정으로 향기롭다. 로마시대 극장터를 지나 오흐리드 호수를 바라보며 조망하는 풍경은 더욱 비경이다. 아름다운 호수와 호수변 언덕의 붉은 기와지붕이 절창이다. 길가에 주차한 조그만 자가용이 시선을 끈다. 고운 꽃으로 장식한 집도 있고, 난로용 장작을 쌓아 놓은 집도 있다. 석양을 받으며 중세의 향수를 자아내고 있다. 우람한 산이 감싸 안은 호수에는 배도 떠 있고, 눈길을 두는 곳마다 수려한 명화로 뜬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성요한 카네오 성당
오흐리드 구시가지 언덕길을 한참을 걸어서 만난 성당이다. 성요한 카네오kaneo 성당은 호수 위 산정에 오롯하다. 아름다운 꽃들이 이방인의 걸음을 화사하게 인도한다. 카네오 마을 언덕의 이 교회는 오스만 제국 이전 13세기에 성경 요한복음의 요한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는데 요한에게 바쳐진 성당이란 뜻이다. 오스만 투르크 지배시에는 교회 내부의 프레스코화들을 회칠하여 이슬람사원으로 사용했다. 그 후 오스만 투르크가 물러가자 1964년 회칠을 제거하고 프레스코화들을 다시 복원하여 교회의 모습 되찾았다. 현재 교회의 내부는 나무 성화 등이 추가되어 더욱 좋아졌다. 주황색 벽돌로 단단하게 앉은 교회는 오흐리드 호수를 바라보며 절벽 위에 아슬하게 서 있다. 영화 ‘비포 더 레인’에도 나온 교회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웅장하고 거룩함을 느끼게 한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
성요한 카네오 교회에서 호수 쪽으로 가는 길을 따라 내려왔다. 그곳에서부터 오흐리드 호수의 아름다운 숨결을 느끼며 수변로를 걸었다. 어찌 이것이 호수일까. 바다라고 표현함이 옳은 정경이다. 아득한 길이와 광대한 폭의 호수다. 호수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나무판도 설치해 놓아서 그곳을 걸어 들어가니 코발트빛 물이 한가득인 호수의 낭만은 대단하다. 여객선과 어선이 한가로이 떠 있고 서녘의 산 그림자에 호수는 더욱 짙푸른 빛을 발한다.
휴양도시 오흐리드는 마케도니아를 대표하는 여행지다. 200만년 전 생성된 오흐리드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다. 마케도니아의 남서쪽 끝에 있으며, 발칸에서 가장 깊고 큰 호수다. 수심 280m, 동서 30Km, 남북 120Km의 바다처럼 거대한 자연구조 호수다. 1980년 오흐리드 지방의 역사건축물, 성채 요새의 잔해 등과 함께 오흐리드 호수에 살고 있는 희귀한 수생동물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호수 면적은 약 350제곱킬로미터고 1년 내내 얼지 않는 부동호수다. 송어, 장어, 잡어 등의 많은 어종이 살고 있어 호수 주변 마을은 어업하며 산다. 정기 여객선이 마을을 왕래한다. 진주 가공업도 발달했다. 포도재배 농가도 많다. 오흐리드 호수의 3분의 1은 알바니아에 속해 있고, 2/3만 마케도니아 소유다. 해발 695m의 산으로 둘러싸여 호수는 안온한 느낌이 들면서도 장엄하다. 거인이 하늘에서 던진 꽃이 호수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잘 가꾸어진 숲과 울창한 나무 사이로 야외 노천카페가 있다. 휘휘 늘어진 나뭇가지 아래 커피 한잔을 마주하고 호수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거나 사색에 잠겨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평화롭다. 해수욕장처럼 하얀 비치 의자와 파라솔을 구비해 놓아 이곳 사람들은 수영을 하며 호수와 함께 호흡한다. 저녁 무렵인데도 날씨가 덥고, 또 구시가지 마을을 많이 걸어서 열이 난 몸이라서 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호수는 매우 맑아서 물속 바닥의 돌멩이와 물고기들의 유영하는 모습까지 훤히 보인다. 오흐리드의 이토록 청정한 호수에 발목이라도 담가보자고 옷을 걷어 올리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무릎까지 담그며 오흐리드 호수가 품어주는 환희에 이국의 낭만은 가슴 깊이 배어든다. 바위산 언덕 마을을 돌며 아버지 닮은 장대한 형상을 바라보고, 바로 곁에 내려와 물을 보듬으며 어머니 같은 모성의 드넓은 품속을 체험하고, 이 찬란한 호수를 어찌 두고 갈까. 나의 고향은 대천 바다, 물을 보고 자란 유년의 회억이 지금 이 순간 한없이 출렁인다. 뜨거운 감성을 자아내는 잊을 수 없는 오흐리드 호수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 광장
오흐리드 호수는 시내와 접한 곳에 드넓은 광장을 이루고 있다. 마케도니아 국기가 높이 휘날린다. 잘 조성된 잔디와 꽃 화단이 호수와 함께 비경이다. 마케도니아를 성지로 이끈 성클레멘스 동상이 높이 서서 오가는 사람들의 평안을 지켜주는 듯하다. 즐비한 노천카페와 벤치에 앉아 모두가 흥겹다. 이방인도 시민들도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호수의 물은 광장 아주 가까이에서 출렁이고, 항구에는 배들이 정박해 있다. 해는 지고 석양에 젖어드는 호수는 꿈꾸는 낭만이다. 떠나야 할 시간인데 자꾸 뒤돌아보며 걸음을 늦추곤 한다. 이곳 마케도니아 오흐리드의 수많은 시민들이 가족과 함께 저녁 산책을 하고 있다. 광장의 길을 따라 숲길을 지나 오늘밤 유숙할 호텔로 왔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변 호텔 투숙
호텔은 오흐리드 호수 바로 곁에 있다. 그런데 방의 위치에 따라 전망이 다르다 하여 여행객 각자에게 룸키를 집도록 했다. 나의 남편은 다른 이들이 다 집어가고 난 후 마지막 남은 카드 하나를 집었는데 302호였다. 방에 들어와 보니, 호수가 눈앞에 전개되는 기가 막히도록 아름다운 전망이 전율로 다가온다. 캄캄한 호수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올라 수면 위에 황홀한 빛을 드리운다. 내일이 추석이다. 나는 두 손을 모아 한국에 있는 어머니와 두 아들과 손자를 위해 기도했다. 우리 부부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허락한 가족 모두에게 고마워서 눈시울이 젖는다. 그리고 우리 부부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사는 날까지 건강하기를, 더 많이 사랑하며 살기를, 그래서 세계 여행을 더 잘 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한가위 보름달에게 비원의 기도를 올렸다. 오흐리드 호수변 호텔의 밤은 그 어느 숙소에서보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2011년 9월 12일 월요일 알바니아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텔 주변 풍경
아침 일찍 일어나, 호수가 보이는 창가 식당에서 조식을 하고 지난 밤 어둠에서도 그토록 아름다웠던 호숫가로 나갔다. 새벽 여명에 눈뜨는 오흐리드의 광활한 호수는 어제 본 모습과는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왜 이곳이 마케도니아의 최고 휴양지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산녘에는 고운 집들이 아침 산공기에 젖어 영롱하고, 촉촉한 호수는 벅찬 환희로 자꾸 가슴속에 파고든다. 허락된다면 더 머물고 싶은 여행지다.
*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출발
휴양 도시 오흐리드를 떠나 알바니아로 간다. 50분 정도 가면 국경이다. 오늘은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로, 또 몬테네그로까지 3개국을 간다.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 수도 티라너까지는 255Km다. 그 다음 알바니아에서 몬테네그로까지는 4시간 소요된다. 소박한 도시 오흐리드 시가지를 벗어나자 발칸의 옥수수밭은 또 이어진다. 산과 들,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