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왕실문화의 특징 보여줘
역대 유명한 시인묵객들의 시심을 자극해
다산 정약용의 ‘상심낙사賞心樂事’ 이룬 곳
세속을 잊고 마음의 평온 찾는 명소로 남아
수종사의 대웅보전
운길산 중턱에서 보이는 수종사 경내와 양수리, 북한강 전경
◇국가 명승의 수종사, 왕가의 원찰로 남아=봉선사 말사이기도 한 수종사(水鍾寺)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雲吉山) 자락에 위치해 있는 사찰로 대한민국 명승 제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유수종산기(遊水鍾寺記)에 따르면 수종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 샘에서 물이 돌 틈으로 흘러나와 땅에 떨어질 때 종소리가 난다고 해서 이름붙여졌다고 한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지역을 한눈에 관망할 수 있는 전망이 좋은 지점에 위치하여 예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예찬을 받았다.
운길산에 있는 수종사는 봉선사의 말사이다. 사진은 수종사 일주문.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용강 위의 산에 있는 묵은 절이여, 오솔길 꼬불꼬불 푸른 숲으로 들어간다. '옛날 영운의 지나감을 자주 맞이했거니, 지금은 도리어 원공의 이야기가 막혔다(龍江上山古伽藍, 細經崎嶇入翠杉, 憶昔屢邀靈運過, 至今猶阻遠公談)'라며 ‘수종사 윤선로(禪老 노승을 뜻 함)에게 보낸다’라는 시에서 수종사의 경치를 극찬했다. 수종사는 한강을 수로(水路)로 오르고 내릴 때 바라다보이는 곳에 위치하여 도성에 드나드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을 찾았던 명소이다.
수종사 경내로 들어가는 불이문
수종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5층 석탑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재가 있어, 사찰의 연혁과 함께 그 역사적 의미도 확인할 수 있다. 수종사의 주요 문화재로는 사리탑과 오층석탑이 있다. 사리탑은 1439년에 건립되었고, 1459년 세조(1417~1468)의 명으로 절이 중창되었고, 1493년에 왕실 여성들의 발원으로 5층석탑이 건립되었다. 이후 1890년 혜일(慧一, 1890~1965) 스님이 고종(1852~1919)으로부터 8천 냥을 하사받아 절을 중창하고, 1891년 다시 4천 냥과 금과 비단 등을 시주받아 사존불(四尊佛)을 개수하였다. 이로 보아 수종사는 왕실 관련 사찰으로 판단된다.
부도(왼쪽)와 사리탑 5층 석탑(오른쪽 끝) 등 수종사의 보물들. 보물 제 1808호 팔각오층석탑에서는 금동석가좌상 등 불상 13개구가 발견됐다. 보물 제 2301호 수종사 사리탑에서는 정혜옹주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조선 초기 양식에, 왕실의 안녕 기원과 불심 배어있어=수종사가 품은 문화재에는 독특한 면이 있다. 우선 보물 제1808호로 지정된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이 있다. 이 탑의 기단부는 불상대좌(佛像臺座)의 양식이고, 탑신부는 목조건축의 양식이며, 상륜부는 팔작 기와 지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석탑의 1층 옥개석에서 불감(佛龕)과 불상(佛像), 2층 옥개석에서 금동불상 9구, 3층 옥개석에서 금동불상 3구 등이 발견됐다.
수종사 5층 석탑에서 나온 불상 (불교중앙박물관 소장)
이 석탑에서 나온 ‘금동석가불좌상’의 발원문에는 성종(1457~1494)의 장수와 덕을 찬양하고 왕가의 안녕과 부귀, 소원성취를 기원하며 옛 불상을 중수하여 탑에 안치하였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조선 전기 왕실발원의 탑 봉안 불상군 중에서 유일하게 명문과 발원문이 발견되어 의미가 크다.
수종사 5층석탑에서 나온 불상들 (불교중앙박물관 소장)
다음으로, 보물 제2013호인 ‘남양주 수종사 사리탑’이 있다. 이 사리탑은 정혜옹주(貞惠翁主)의 사리탑이다.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 부부의 시주(施主)로 세워졌다. 왕실과 관련된 조형물로써 왕실에 소속된 장인이 파견되어 설계 시공되었다. 상하 높이와 좌우의 너비가 적정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외관이 안정되고, 세부적으로는 장식적이고 섬세한 표현 기법과 함께 조선초기 대표적인 양식이다.
성종의 딸인 정혜옹주 사리장엄구(불교중앙박물관 제공)
이 사리탑에서 나온 수정사리병(水晶舍利甁) 등 사리엄장구, 14과(顆)의 청백 사리 등은 불교 문화재 중 사리엄장구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으며, 조선 개국 이후 정식으로 출가하지는 않았지만 불심이 깊은 일반 신자의 부도란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수종사에서 바라본 북한강
◇조선 문인들의 시심(詩心)을 자극해=수종사의 뛰어난 경관은 많은 문헌에 기록이 전하는데, 역대 이름난 문인들의 시심을 자극한 것이다. 조선 전기 최고의 문호로 알려진 서거정부터 김종직, 신익성, 임숙영, 이항복, 김창협, 정약용, 이만용, 박문규 등 남양주에서 살았던 문인들은 시문으로 남겼고, 겸재 정선의 독백탄(獨白灘), 정조 사위 홍현주의 수종시유첩(水鐘詩遊帖), 이건필의 두강승유첩(斗江勝遊帖) 등 문인 화가들이 그 빼어난 경관을 그려내었다.
수종시유첩에 수록된 정약용 선생의 발문. 정약용은 고향에 돌아와 당파가 다른 홍현주 등과 교유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이덕형(1561~1613)은 매일같이 수종사에 올라 강 건너 부용리에 묻혀계신 어머니의 무덤을 향해 인사드렸고, 이항복(1561~1613)은 친우를 그리워하며 수종사를 생각했다. 신흠(1566~1628)과 임숙영(1576~1623) 등은 권력의 폭압과 암울한 시대의 대안을 찾고자 수종사에 올랐다. 신익성(1588~1644)은 세속의 화려함에 감춰진 인간의 허상을 잊고 맑은 기운을 얻기 위해 수종사에 올랐고, 홍현주는 그림을 너무 좋아하여 그림같은 수종사의 정경을 담아내려 수종사에 올랐다. 정학연(1783~1859), 정학유(1786~1855) 형제는 수종사에 올라 부친의 정신을 일깨웠고, 초의 선사도 스승을 생각하며 수종사에 올랐다. 그러나 수종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사람은 단연 다산 정약용이다.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가 수종사와 운길산의 풍광을 그린 수종시유첩(개인소장).그림에는 좌측 하단에는 정학연, 정학유 형제와 초의선사가 수종사 올라가는 모습도 보인다.
◇정약용의 ‘상심낙사(賞心樂事)’, 기심(機心)을 잊게=다산 정약용에게 수종사는 공부방이고, 놀이터였으며, 활력소였고, 세상에 알리고 싶은 자랑거리이자, 고난을 이겨내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학문의 길에 뜻을 두면서부터 수종사에서 독서하고 공부를 하였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자 친우들이 모여 축하잔치가 베풀어진 곳도 수종사이다. 이처럼 수종사는 정약용의 고향을 대표하는 공간이다.
수종사의 범종각과 뒷편에 조선초기 심어진 은행나무 웅장한 자태로 서있다.
기나긴 고난의 연속이었던 유배시절 다산에게 수종사와 그 주변 경관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다산은 자신의 고향 친지들과 나라 사람들의 고난을 묵과하지 않고 자신의 일로 여기고 해결책을 찾았다. 그 결실은 500여 권의 저술에 담겨있다. 유배 18년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배경으로 다산의 말을 빌자면 ‘상심낙사賞心樂事’가 있었다. ‘내가 마음 속으로 하고 싶은 것, 가장 즐거운 일’로 풀이된다. 좀 더 쉽게 말하면 꼭 이루고 싶은 마지막 소원이라 할 것이다. 다산의 상심낙사는 고향의 절경을 직접 보고 가족과 함께 일상의 소소한 즐기는 것이었다. 다산은 ‘수종사의 눈 내린 풍광’이라는 시에서 ‘신선이 사는 선계와 같이 아스라하고, 백옥 숲과 은 병풍이 두른 듯, 하늘은 봉우리에 닿아 검어지고, 물은 여울을 만나 더 푸르네(風玄圃, 周遭玉樹銀屛, 天近峯巒似黑, 水逢湍瀨暫靑)라고 그리며, 눈 덮인 산과 배 꽃 만발해 하얗게 변한 수종사의 풍광을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꼽았다.
방문객이 차를 마시며 수종사의 솔바람과 차 향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삼정헌
이제 남양주에는 여기저기 배꽃이 하얗게 피기 시작한다. 다산이 그렸던 수종사와 주변 풍광도 하얗다. 봄이면 하얀 배꽃으로 물들고 겨울이면 눈 내려 은 병풍과 백옥의 숲으로 변했다. 물론 다산이 살았던 시절과 많이 달라졌으나, 저녁 무렵 석양빛을 받아 빨갛게 물들어가는 강가의 풍경과 수종사에서 바라다보이는 푸른 물결과 청정하고 광활한 정경은 다산이 말한 그대로이다. 예나 지금이나 수종사를 자주 찾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수종사에 오르면 어느덧 세파의 때를 벗고 기심(機心 세속적 욕망을 숨기고 있는 것)까지 잊게 하는 듯하다. 이제 다산 정약용이 말한 ‘세속적인 이해와 승패가 관계할 수 없는 운치’가 살아있는 수종사의 멋을 찾아보자.
김형섭 남양주시립박물관 학예사·문학박사
수종사의 담장 넘어 북한강과 양수리의 전경을 바라보면 200년전 수종사의 풍광를 즐겼던 다산의 마음에 동감할 수 있다.
김형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