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들이 자주 언급하는 몇몇 성경구절들이 있다. 그들은 그 성경구절들을 곡해하여 자신들의 영혼을 어두움에 방치하고 있으며 또한 기성교회 성도들을 미혹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문맥을 따라 잘 읽기만 해도 어느 정도 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데, 이단들은 한 단어 또는 한 문장에만 집착한다. 그렇게 오용되어 사용되는 성경구절들을 정리해 보았다. <편집자 주>
요즘 ‘성경에는 짝이 있다’며 신약과 구약을 넘나들면서 성경을 풀어준다고 하는 이들(또는 단체)이 적지 않다. 마치 퍼즐이라도 맞추듯 같은 단어를 여기저기서 찾아 독특한 해석을 이끌어낸다. 성경 자체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성경적(?)인 해석이라고 보이지만, 그 결론을 보면 왠지 석연치 않다.
성경을 연구할 때 신약과 구약을 폭넓게 바라보는 것은 지극히 권장할 만한 일이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소위 ‘짝이 있다’는 논리로 같은 단어만 찾아다니는 행위는 결코 올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단어는 그 속에 여러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 사람의 눈, 씨앗의 눈 등으로 여러 뜻이 있다. 따라서 그 단어가 사용된 문장을 통해서 ‘눈’이 무슨 의미인지가 정확히 드러나게 된다. 이것을 무시하고 단어만 쫓아다니면 정말 큰일 난다.
일부 이단들이 곡해하는 성경구절이 바로 이사야 34:16이다. ‘성경에는 짝이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 대표적인 성구다. 그 구절을 살펴보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이 구절만 보면 정말 이단들이 말하고자 하는 방식대로 ‘짝이 있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단자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자기들 방식대로의 성경해석을 해 댄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어느 이단 단체에서 말하는 ‘재림 예수’에 관한 논리다. 재림 예수는 공중에서 임하는 게 아니고 특정 사람들의 틈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듣기만 해도 ‘이단’임을 알게 된다. 물론 이단들은 처음부터 이러한 교리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 방식의 성경공부를 한 후에 성경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한다. 바로 성경의 짝을 찾아서 말이다.
사도행전 1:9을 공부할 때 나오는 이야기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구름이 예수님을 가렸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다. 이단자들은 이때 그 ‘구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을 받게 되면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성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할 때 그러한 질문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그 때의 구름은 자연 상태의 구름, 즉 하늘의 구름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단자들은 구름의 의미가 따로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짝이 있다’는 이사야 34:16을 사용한다.
그들이 말하는 ‘구름’의 짝은 히브리서 12:1이다. 살펴보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여기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는 구절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말해 ‘구름=증인들’을 뜻하는 비유적인 단어라고 말한다. 그럴듯해 보인다. 이것을 위의 행 1:9에 대입시킨다. 그럼 어떠한 결론이 나오는가? 이단들은 이렇게 해석을 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구름이 가리웠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자신들의 성경해석 방식을 자랑스러워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해석도 가능하게 된다. 행 1:11에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것은 예수 재림이 특정 신도들의 틈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교주가 바로 재림 예수가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예수 재림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것이 소위 짝을 찾는 성경공부 방식이다. 과연 옳은가? 만약 위의 방식이 맞다면 계 1:7의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성경구절의 이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말이나 당나귀처럼 생각하고 타고 다닌다는 말인가? 생각만 해도 정말 망측하다.
그렇다면 이사야 34:16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단자들이 잘못 사용했을 뿐이지 그들의 주장하는 것처럼 단어마다 짝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이는 이사야 34장 1절부터 잘 읽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무슨 내용인가? 하나님의 진노가 에돔에 임하게 된다. 에돔은 멸망당하는 나라의 대표로 표현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갈 때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민 20:14~21). 그래서 에돔은 황무하게 된다. 그 황무함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존오스월트, NIV적용주석 이사야, 성서유니온, 2007, pp.515-516). ‘사람은 살 수 없고, 동물들이 짝을 이루며 살게 된다’고 말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사람들은 코웃음을 친다. 이에 하나님은 ‘동물들이 짝을 이루며 산다’는 말로 에돔의 멸망을 강하게 선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사야 34:16의 ‘짝’은 하나님의 심판을 표현해 주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위의 내용은 특정 주석서를 참고하기 이전에 성경 본문을 문맥을 따라 잘 읽어나가기만 하면 어느 정도 그 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다양한 번역서를 참고해도 좋지만, 한 가지만 가지고도 충분하다. 전후 문맥을 따라 꼼꼼히 읽기만 해도 된다. 대부분의 성경 오해는 문맥을 따라 성경을 읽지 않고 특정 단어나 구에 집착해서 성급히 해석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시험’이라는 단어를 예로 살펴보자. 창세기 22장 1절에 그 단어가 등장한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시되”(개역개정).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고 말한다. 동시에 야고보서 1장 13절도 살펴보자. 여기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개역개정).
두 성경구절이 충돌한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시험을 하신다는 것인데 후자는 하나님은 시험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반대다. 어찌된 일인가? 어떻게 성경 안에 동시에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 수 있는가?
신약과 구약의 문제도 아니다. 방금 인용된 야고보서 1장 안에서도 같은 혼동이 일어난다.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하라’(1:5),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1:12) 등의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는다’(1:13)는 구절과 어긋난다. 인쇄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그럼 번역 문제인가? 역시 아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정답은 ‘문맥’이다. ‘시험’이라는 단어는 동일하다. 그러나 같은 단어라도 문맥의 흐름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되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이 영어성경 중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이다. NIV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을 테스트(test) 또는 트라이얼(trial)이라는 용어로, 사탄과 마귀에 의해서 행해지는 시험을 유혹이라는 의미의 템테이션(temptation)이라는 용어로 번역했다. 이러한 번역 원칙을 우리는 ‘역동적 번역’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NIV는 역동적 번역에 따른 대표적인 성경이다.
NIV에 따르면 창세기 본문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뜻이 된다. 또한 야고보서 본문은 ‘사람이 유혹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유혹하지 아니하시느니라’는 의미의 구절이 된다. ‘테스트’에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더 튼튼히 만들고 또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험(테스트)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약 1:2), ‘시험(테스트)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약 1:12)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유혹’(템테이션)에는 우리의 믿음을 파괴시키려는 마귀와 사탄의 계략이 숨겨져 있다. 그러한 시험(유혹)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성경은 신약과 구약이, 또는 각 성경끼리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를 통해 ‘예수=그리스도’ 등 기독교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소위 ‘짝이 있다’는 어쭙잖은 개념으로 성경을 곡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