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에디터 ・ 2018. 5. 20. 7:49
[김규순의 풍수이야기] 2012년 7월호
사진 중앙에 검은 비석의 우측이 이예신부부의 묘지이고, 좌측은 둘째아들이자 이항복의 아버지인 이몽량부부의 묘지이다. 멀리 보이는 산이 주산인 죽엽산으로 회룡고조형의 자리이다. 사진 좌측에 백사 이항복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보인다. 백사의 무덤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죽엽산(601m)은 행정상으로 포천시 소흘읍에 속한다. 죽엽산 남쪽 능선에 세조의 광릉이 자리하고 있으며 150만평의 자연수림을 간직하고 있다. 죽엽산은 육산으로 후덕하며 왕기가 가득한 산이다. 세조이후 조선은 세조의 후손이 다스렸음이 이를 증명한다. 왕릉은 대체로 후덕한 산에 조성한다. 이는 군림하는 군왕이기보다는 백성을 돌보는 부모의 입장을 내포한 것이다. 후덕한 죽엽산을 오르면서 세조와 함께 백사 이항복도 그려보자.
글 사진 | 김규순
두분의 정부인사이에 이몽량의 묘가 나란히 있고 아래로 보이는 상석은 애첩의 것이다. 애첩의 묘는 작고 나즈막한데 꽃으로 덮혀 뚜렷하지 않지만 상석이 묘가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는 사람을 사랑한 증거이다. 그 당시에 누가 애첩의 무덤을 자기 무덤 아래에 만들어주라고 유언을 했겠는가.
경주이씨의 큰 줄기를 만든 이예신
죽엽산에서 북쪽으로 산줄기가 뻗어가다가 ‘너베기(광촌동)’에 이르러 머문 추산(楸山)에 경주이씨 이예신의 묘와 이몽량의 묘가 있고, 건너편 능선에 이항복의 묘가 있다. 이예신의 후손에서 정승이 6명, 대제학이 2명 외에도 많은 판서를 배출하였다. 보잘 것 없는 가문에서는 한 명의 판서를 배출하기도 힘든 상황인데, 조선 후기 400년동안 이어진 가문의 번성을 이루어 놓은 토대는 바로 이예신이었다.. 경주이씨 문중에서는 이항복의 명성이 드높아서 백사의 정기로 후손이 발복 받았다고 하지만, 할아버지 이예신의 풍수적인 혜안이 경주이씨의 상서공파가 빛을 발하게 했다. 백사는 할아버지의 유택으로 죽엽산의 정기를 받았다. 죽엽산의 산줄기가 보듬어 안은 곳을 정하여 한 평생을 보내면서 내공을 길러 좋은 자리를 찾아 자기의 자리를 마련했음이다. 이예신은 후덕함을 좋아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선택한 산도 후덕하다. 우리나라에는 산악숭배사상이 있다. 산의 성정이 그 곳에 사는 사람이나 묻힌 사람의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사진의 우측에 이항복과 정경부인 안동 권씨의 묘가 쌍분으로 정면으로 보이고 또 다른 정경부인 오씨의 무덤이 우측에 있다. 사진의 좌측 기와집 뒤로 보이는 묘역이 백사의 조부모와 부모의 묘역이다.
죽엽산의 정상에서 이어져 내려오다가 용의 머리가 좌측으로 틀어서 다시 죽엽산을 바라보는 꼴이니 죽엽산에서 발원한 물을 받아먹는 형상이어서 복이 면면히 이어지는 곳이다. 그의 비문에 <옥이 산속에 감춰져 있고, 난향기가 골짜기에 그윽하다. 덕을 속에만 품고 세상에 베풀지 못했으나 마침내 좋은 경사가 있으리라 추산이 우뚝한데 꾸불꾸불하다가 반듯한 곳에 이군의 혼이 살고 있구나. 풍양 조인규 지음> 비록 풍수적인 표현이 없지만, 그 보다 차원이 높은 언어로 후세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정경부인 금성오씨의 무덤이다. 금성오씨는 부실이었으나 왕명으로 직첩을 받아 정경부인이 되었다. 조선에서는 부실이 정부인이 된 사례는 논개, 정난정 그리고 금성오씨가 전부이다. 금성오씨는 북청 유배지에 백사를 수행하여 성심을 다하여 수발하고 북청에서 상여를 운구하여 포천까지 따라오고 6년간 여막살이한 절행이 알려져 정경세의 주청으로 정경부인의 직첩을 받았다. 그의 아들 기남은 예조판서를 지냈다. 죽엽산을 너머 한양에 있는 자식들을 바라보고 있는 어미의 심정이다
백사의 증조 이성무는 5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인신(仁臣)은 파주에, 둘째 의신(義臣)은 평택에, 셋째 예신(禮臣)은 포천에, 넷째 지신(智臣)은 장단에, 막내 신신(信臣)은 제주에 둥지를 틀었다. 이예신의 고향은 평택 진위면이다. 지금도 평택에 많은 선조들의 묘가 모여 있다. 고향을 떠나 다른 지방에 정착하는 이유로 지방관직을 받아서 정착하거나, 정치적 이유로 고향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예신이 어떤 연유로 포천에 정착하였는지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장가를 간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하나의 산에 빼어난 곳이 서너군데 있지만, 죽엽산의 줄기가 감싸안은 금현리가 생리와 지리가 우수한 곳이다. 이예신은 가장 마음에 드는 추곡(楸谷)에 정착하였으며 추산에 자기의 무덤을 만들게 하였다. 이곳은 예로부터 자손이 번성하게 되는 곳이라고 전해졌는데 실제로 이항복 이후로 자손이 번창했다.
죽엽산에서 바라본 포천 가산면 금현리. 우측 능선 중간에 이항복과 조부모의 무덤이 있다. 죽엽산에서 발원한 물을 거두어들이는 회룡고조형이다. 멀리 보이는 산은 왕방산이다.
이항복과 정경부인 안동 권씨의 묘가 쌍분이다. 안산이 옥대를 이루고 있으나 조산의 기개가 약하다. 백사의 무덤은 뒤를 의식해서인지 앞으로 나간 모습이다.
고택의 주심도리와 서까래가 썪어서 허물어지고 있다. 후원에서 바라본 필운고택은 거의 폐옥이다. 현재 소유주는 재미교포이며 문화재로 지정하여 복원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필운동 백사고택
임진왜란을 슬기와 지혜로 국난을 극복한 백사 이항복(1556-1618)은 한성부 서부 양생방(지금의 필운동)에서 이몽윤의 여섯 아들 중에서 넷째로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7대를 이어가며 살았다. 필운(弼雲)이란 북두칠성의 좌보(左輔) 우필(右弼)에서 유래한 것인데, 오른팔처럼 임금을 보필하는 것을 필운이라 한다. 필운은 이항복의 호이기도 하다. 필운대 부근에는 영의정 권철과 아들 권율이 살았는데, 후에 권율장군은 이항복의 장인이 된다. 백사가 살았던 집은 아직도 필운동 88번지에 남아 있다. 배화여자대학교 올라가는 우측에 오랜 기와집이 있는데, 오랜 세월의 여파로 무너져 내리고 있어서 위엄은 사라지고 없다.
*솟을대문은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대문으로 사대부의 위엄을 상징한다. 좌우로 있어야 할 행랑채 대신에 현대식 건물이 서있다.
필운고택을 위에서 내려다 본 사진이다. 거의 폐가 수준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 서촌에 남아 있는 한옥은, 대부분 평민스타일의 20세기 초 건물이지만, 필운고택은 전형적인 사대부의 전통적인 한옥이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 1950년대까지 소유한 기록이 있다.
필운대라고 붉은 색의 암각글씨는 이항복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우측 사각형의 암각글씨는 현손 이유원의 글이다. 현재 배화여자대학 뒤편에 남아 있다.
*필운고택의 후원에 서 있는 노거수 회나무는 수백년의 세월을 인고한 증거이다.
백사의 9대손 영의정 귤산 이유원(1814-1888)의 백사선생구제중수기(白沙先生舊第重修記)를 보면, 백사선생이 회나무 두 그루를 손수 심었다고 하는데, 백사고택의 후원에 한 그루가 아직 그 자리에 서서 옛 일을 기억하고 있다. 백사선생의 구택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건재하였다고 한다. 아마 예전에는 넓었던 집터가 이리저리 쪼개어져 행랑과 광이 없어지고 후원도 쪼그라들고 있다. 고택 바로 옆으로 공간도 없이 붙어서 빌라와 다세대 주택들로 에워싸여 오성대감이 거처하던 집으로써 단아함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쓰레기가 쌓여있어서 우리의 역사의식의 현주소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무관의 벼슬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다
백사의 할아버지 이예신(1446-1536)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을 닦은 이름 높은 선비였다. 그의 남다른 내공은 아들 이몽량(1499-1564)은 우참찬(종1품)에 오르고, 손자 이항복은 영의정에 올라 오성부원군이 되는 초석이 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무관(無官)의 벼슬인 독립운동가를 50여명 배출하여 명문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한 것이다. 한일합방이 되자, 백사의 10대손 이유승(형조판서)의 아들 6형제가 망명길에 오른다. 네째 회영(1867-1932)이가 건영(1853-1940), 석영(1855-19340, 철영(1863-1925), 시영, 호영(1875-1933) 등 형제들을 설득하여 큰 형을 비롯한 전 가족이 가진 재산을 팔고서 60여명의 가솔이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산리대첩의 승리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독립군이 주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광복 후 성재 이시영(1867-1953)만이 귀국하여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광복이 되기 전에 만주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는 정승보다도 더 귀하고 힘든 무관(無官)의 벼슬자리이다.
풍수에 아무리 신출귀몰한 재주가 있다고 해도 10대손까지 좌지우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이예신의 풍수지리적인 선택은 후손들에게 삶의 방향을 정해주려는 노력으로 봐야 한다. 활을 쏠 때 1도만 어긋나도 과녁을 맞추기 어렵다. 풍수학의 메카니즘은 몇 백 년이 지나도록 후손들에게 삶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살아가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향리에 묻힌 선비로써 이예신은 평생을 통하여 닦은 내공으로 길지를 선택하였다. 다만 그러한 내력을 자손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을 뿐이다. 뿌리는 보이지 않게 존재하며 자기가 하는 일을 꽃이나 열매가 미처 알기도 전에 마무리한다.
* 종로구 신교동 6-22 우당기념관에 있는 이회영의 흉상
사람은 산을 닮아간다.
후덕한 산에 살면 부자가 나고, 가지가 많으면 자손이 번성하고, 산이 높고 뾰족하면 문장가가 나오며, 산이 암석이면 명장이 나오고, 산이 기암괴석이면 특출한 자손이 나온다. 산이 산이 험악하면 악행하는 자손이 나오고, 산의 바위가 천하면 비천한 자손이 나오고, 산이 배반하면 조상덕이 없고, 산이 낮고 기운이 없으면 집안이 쇠퇴하고, 산이 힘이 없으면 후손이 비루하게 된다. 예로부터 인걸지령이라 했듯이 내가 닮아가고 후손이 닮아갈 땅을 찾아서 살아볼 것이다. 그래서 유독 한민족에게 산악숭배사상이 있었다. 산에 기대어 사는 사람은 바로 그 산의 정기를 받아 그 산의 성정처럼 살아간다고 믿었다. 산은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키워드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산을 잃어버리고 있다.
경주이씨를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부른다. 갑이란 천간의 첫 번째 글자이므로 첫 번째라는 의미를 갖는다. 삼한갑족이란 대한민국 최고의 가문이라는 뜻이다. 경주이씨의 면면을 보면, 고려왕조에는 성리학자 익제 이제현(1287-1367)이 목은 이색의 스승으로, 우리나라 성리학의 큰 줄기로 우뚝 서 있다. 그 외 현대사를 장식한 인물로도 대통령 이명박, 국회부의장 3명 (이민우, 이상득, 이용희), 장관 12명, 국회의원 18명을 배출했고, 대장 2명, 중국군 육군중장 이상정, 경제계에서는 호암 이병철 삼성회장, 종교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써 도교의 도사 이중약(고려), 최초의 천주교인 순교자 이벽(조선), 대종교의 맥을 이은 이규채, 일제강점기에는 벼슬길이 매국노가 되는 길이므로 무관(無官)의 벼슬인 독립운동가를 50여명 배출했는데,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에 파견된 보재 이상설이 있고, 구국시인 이상화도 경주이씨이다.
(도움말 주신 분: 백사공파 종손 이상욱, 상서공파 부회장 이상길)
이예신의 배우자가 전주최씨로 새겨져 있다. 궁금한 점은 좌윤 풍양 조인규가 쓴 비석에 배우자의 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배위는 현감 최경남의 따님이다. 최씨는 곧 제학 흥효의 손자이다.>에서 최흥효는 구양순의 서체로 유명한 영천최씨가문의 사람이다. 영천최씨 대종회에 확인한 결과 최흥효는 영천최씨가 맞고 전주최씨와는 관련이 없다고 한다. 인터넷상으로 떠도는 <영천최씨가 전주최씨에서 분적했다>는 설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했다. 증손녀는 전주최씨인데 증조부가 영천최씨라면 이상한 일이다. 경주이씨 찬성공문중에서 확인해 주시기를 바란다.
[출처] 포천_죽엽산의 정기를 발굴한 이항복의 할아버지 이예신|작성자 지오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