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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를♤배우며 스크랩 호남해안의 시적 형상화
시와사랑 추천 0 조회 27 12.07.20 10:3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호남 해안의 시적 형상화

 

-바다, 섬, 갯벌, 어촌의 삶을 중심으로-

 

노 창 수 (시인?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바다 갯벌 또는 생태

 

자연은 인간에게 섭리대로의 삶을 요구한다. 특히 바다는 인류보다 더 오래전부터 존재했었기에 원시시대부터 인간에게 가장 자연적인 삶을 요구하는 샤머니즘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바다와 갯벌은 어촌민들이 삶을 유지하는데 자원 제공의 소통적 역할을 한다. G.바슐라르에 의하면 바다는 “어머니”에 비유되고, 바닷물은 생명체를 지켜주는 “기적의 우유”로 상징된다. 이처럼 바다와 갯벌은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존재에게 유기적 또는 무기적 영양과 질서를 보시(布施)하여 생태계의 힘을 돋운다.

예로부터 호남은 해안을 굽이굽이 돌아 수억년의 흙과 바닷물과 소금의 삭힘에서 자아나온 천혜의 갯벌 지역이다. 그 굴곡을 지나면서 무한한 힘을 얻기도 한다. 남도의 끈질긴 미학이 배출되어 나오는 곳. 그러니까 ‘곡신불사’(谷神不死)를 말한 노자의 이론이 맞아떨어지는 곳이랄까. 남도 갯벌을 만들어내는 바다 연안의 계곡들은 그 ‘곡즉전’(曲卽全) 사상의 도달점이다. 자신의 품에 뭇 생명체를 기르는 그 자궁의 원초적인 포태성을 아울러 지닌다. 이른바 C.융이 바다와 갯벌을 ‘여성 이미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다는 두려움을 주는 노도를 일으키다가도 어느새 자애와 넓은 포용력으로 돌아가는 것도 모성의 원형적 의미다.

지금 뒤늦게야 이 “바다와 갯벌”이 큰 화두가 되고 있다. 그것을 나오게 한 것은 인간이 저지른 ‘오염’과 ‘파괴’에서 비롯된 죄악 때문이다. 자기 죄에 스스로 놀래는 ‘도둑놈 제 발 저린’ 격이랄까. 당장 우리 식탁을 위협하고 일상의 삶에 해악을 미치기 때문이다. 최근 국제적으로 불거진, 독도 영유권 문제, 세계 해양 박람회 유치, 200해리 수역 적용, 그리고 국내 문제로 맞딱뜨린, 해양 자원 보존에 관한 법률, 난개발로 빚어진 갯벌 살리기 작업 등 바다와 갯벌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간다.

이제 실감할 수 있겠다. 사는 일상과 좀 떨어졌다고 해서 바다가 무관심의 대상이 아님을. 결국 코 앞 당면한 문제가 바다와 갯벌의 존재 가치를 깨달으라고 명령해 준 셈이다.

유엔은 21세기를 ‘해양의 시대’로 정한다. 인류사에서 해양의 시대가 아닌 적은 별로 없지만,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그래서 하나의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중세 후 바다 지배로 다투던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등도 지배권을 쥔 차례대로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국가 번영에 바다가 미치는 힘이란 이렇듯 막강한 것이었다.

 

2. 해양문학의 발판 또는 역주(力走)

 

바다와 갯벌을 소재로 원초적인 삶을 표현하는 ‘해양문학’은 환경적 배경이 아니고도, 그 발현의 역사만 보더라도 거의 호남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간 해양문학은 문단의 무관심과 무시로 거의 빛을 보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심지어 문화적으로 지방주의, 지역주의를 배격하고 사치주의적이거나 포스트모더니즘인 도시권 작가들이 한때 ‘지방문학’ ‘촌놈문학’이라 하여 멸시와 조소를 보낸 적도 있었다.

‘해양문학’과 ‘갯벌문학’에 논의되는 소재와 주제들은 주로 잉태와 죽음의 속성을 함께 포란하는 그 이중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바다는 지구상에 남아있는 마지막 보고(寶庫)다. 그리고 호남의 바다와 갯벌은 남도의 끝없는 곡신(谷神)의 자취다. 특히 남도 음식에서는 갯벌의 진가가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 갯벌의 진가란, 남도와 서해를 잇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생태를 가진 바다와 갯벌이 만나는 ‘점이적 공간’이어서 여기서 나오는 갯벌의 물산이 풍부하고도 특별한 맛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송수권 시인은 『남도의 맛과 멋』(창공사, 1996)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남도 정서를 두고 ‘자산어보’(玆山漁寶)의 물목인 흑산도, 목포, 영산포를 잇는 영산강은 홍어의 지릿한 맛을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도 했는데, 그 맛이 바로 ‘점이적 공간’이 베푸는 맛이다.

남도가 자랑하는 바, 갯벌은 끈끈한 갯내음과 끈적이는 서해풍이 묻어나는 곳이다. 머드 팩을 위시한 화장품과 의약품 개발, 갯벌의 생태 체험 등 천연 갯벌을 상품화하는 프로젝트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전라도만의 명품인 바다와 갯벌과 소금은 각종 채소와 해물을 맛으로 변화시킨 ‘미각의 띠’를 지닌다. 갯벌과 소금에 의해 발효된 것을 식탁에 진열하면 바로 남도의 밥상이 된다. 호남인의 기질이 타 지역과 차별화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식문화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세대가 바뀔수록 바다의 가치는 상종가를 치고 있다. 바다를 둘러싼 국가 경쟁이 격화되면서 세계는 해양 체계 구축을 서두른다. 바다가 인간에게 건강과 영양소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보고로 신비하고도 풍부한 연구감을 제공해 주는 이유에서다.

굴곡의 연안이 많은 호남의 바다와 갯벌은 오래부터 남도민의 터전이었고 거기 생활하는 문화 또한 갯벌과 밀접한 것이었다.

바다와 갯벌문학에 대한 뿌리는 호남의 해양민요라고 할 수 있는「어로요」(漁撈謠), 「봉죽타령」등 ‘구비노동요’(口碑勞動謠)에서 찾을 수 있다.

해상왕 장보고의 청해진을 거점으로 활약했던 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등도 적극적인 해양 국가였음을 표징하며, 그 발원지가 호남의 바다로, 오늘날 ‘바다의 날’을 설정한 동인이 되기도 했다.

국문학에서도 「공후인」(??引)「구지가」(龜旨歌) 등 해양문학을 시초로 호남의 가사, 시조, 호남의 표해가사 등 다양한 장르로 잔 가지를 뻗으며 발전했던 남도의 전통이 있다. 고유문학이 호남의 해양문학으로 출발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호남의 해양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거북선의 제작 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업 등 세계 제1위의 해운 산업국 위업을 달성해가는 중이다. 하지만 해양문학 연구면에서는 선진국에 크게 뒤진다. 문학작품도 갯벌문학, 어촌문학, 해양문학이 그만큼 수준 높게 창작되어야 하는데, 우선 작품이 질적으로 열세다. 어촌, 섬, 갯벌의 시는 양적으로 풍성하지만 대체로 음풍농월식 표현이 태반이어서 진정한 독자를 거느리지 못한다. 이러한 면을 보강하여 문학적, 정신적, 산업적 측면에서 해양 선진국으로 발돋음해야 할 과제가 압박해온다.

 

3. 호남의 해양시 또는 모태

 

물은 창조의 힘과 파괴의 힘, 두 가지 대립 요소를 지니며 순환한다. 빗물은 하강하기가 바쁘게 대지로 스며든다. 지하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고 내는 강과 바다를 이룬다. 김영랑 시인이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라고 노래한 그 강물의 귀결지는 바로 바다이다. 강물은 “내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이며 “은결을 도도며” 항상 바다로 향한다.

이처럼 바다는 모든 물의 귀항지다. 문학에서 바다는 ‘탄생’ 또는 ‘재생’이라는 신화?원형적 의미로 통한다. 비유하자면 결국 문학도 물의 회귀처럼 ‘해양문학’으로 귀의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 고전문학이나 신문학사에서 해양시의 시초로 바다가 시적 소재로 등장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최남선의 신체시 「海에게서 少年에게」와 「바다위의 勇소년」은 남성적 화자가 물질문명에 대한 동경을 바다를 통해 성취하고자 한다. 진정한 의미의 현대시에서 바다가 예술적 승화를 보여준 것은 김영랑의 「바다로 가자」와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남도 시단이 한국 해양문학 발전에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양시의 개척에도 큰 공헌을 했음을 의미하는 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바다와 갯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만큼 호남의 해양문학도 여기에 터한다. 우선 이 글에서는 시인들이 소재로 썼던 바다, 섬, 갯벌, 생태, 어패류를 중심으로 김영랑, 최정웅, 허형만, 곽재구, 최하림, 장효문, 송수권, 김선태 등의 시의 면모를 살펴본다. 그들이 추구한 바다, 섬, 갯벌 생태에 동화되거나 현실을 비판하는 서정에서 드러난 형상화 과정과 이미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 김영랑의 「바다로 가자」

 

바다는 미지의 삶에 대한 약속된 일의 터전이다.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던 때 김영랑 시인이 장래 삶을 위하여 “큰 바다로 가자”고 외친 것은 그의 포부가 남다름을 말해 준다. 강진만을 바라보는 구강포에서 그는 “큰 하늘과 넓은 바다”를 보고 출렁이는 감정을 “마음대로 가졌고” 상상했기 때문이다. 곧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는 자연의 유일 사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바다로 가자 큰 바다로 가자

우리 인제 큰 하늘과 넓은 바다를 마음대로 가졌노라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바다 하늘 모두 다 가졌노라

옳다 그리하여 가슴이 뻑은치야

우리 모두 다 가잤구나 큰 바다로 가잤구나.

우리는 바다 없이 살었지야 숨 막히고 살았지야

그리하여 쪼여들고 울고불고 하였지야

바다 없는 항구 속에 사로잡힌 몸은

살이 터져나고 뼈 튀겨나가고 넋이 흩어지고

하마터면 아주 꺼꿀어져 버릴 것을

오! 바다가 터지도다 큰 바다가 터지도다.

(영랑?용아시비건립위원회편,『영랑?용아시선』,세운문화사, 1970. p.44-46)

 

시는 일제 압제로 억눌린 우리 바다를 되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바다에의 당당한의 포부를 장려하는 것이다. 특히 “가슴이 뻑은치야”, “우리는 바다 없이 살았지야 숨막히고 살았지야” 등 남도 사투리로 강조하듯 바다 찾기에 힘을 쏟아온 민중적 삶을 묘사한다. 일제로 인해 “바다가 없는 항구 속에 사로잡힌 몸”으로 바다를 억지로 잊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그 소유를 “바다없이 살었지야”라고 확인하기도 한다. 화자는, “바다 없는 항구 속에 사로잡힌 몸은/ 살이 터져나고 뼈 튀겨나가고 넋이 흩어지고/ 하마터면 아주 꺼꿀어져 버릴 것” 같았는데, 바라보니 그만 바다가 “터진” 것이다. 그가 이전 “허리띠 매는 시악시 마음실 같이”, “내 가슴 속에 가늘한 내음” 같은 주로 여성적 시를 표현한 것과는 좀 대조적이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전개한다. 그가 갈구하는 것은 민족이 일제의 사슬을 벗고 바다 깊이 깔린 산호와 진주가 있는 우리의 큰 바다를 소유하자는 데 있다. 당시 국토는 물론 바다도 나눠지고, 멀쩡한 섬들이 오욕의 사슬에 묶여 있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큰 바다는 우리에게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는 그런 바다가 식민지에 부대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우리 큰 배타고 떠나가잤구나”라든가 “툭 털고 일어서자 바다가 네 집이라”라고 인내와 격려를 동시에 권면한다. 화자는 바다는 잃었으나 바다를 통한 희망은 잃지 않아야 하는 의지를 강조한다.

이 외에도 갯벌을 중심 소재로 쓴 「뻘은 가슴을 훤히 벗고」, 바다를 비치는 환상적 달빛을 노래한 「황홀한 달빛」도 있다.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파’를 형성한 광산 출신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 가없이 펼쳐진 모래밭에 그리움을 싣는「너의 그림자」도 바다에 대한 동경과 진취성을 표현한 작품이다.

 

4. 섬 시인들 또는 삶의 비극

 

섬은 사람들의 생활에 가장 친환경적 접촉이다. 숲과 계곡과 뻘과 물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대부분 섬에 대한 시를 한 두 편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바다와 갯벌, 섬 어촌의 시에는, (1)섬 자체를 묘사하는 방법과 (2)섬에 몸담고 있는 현재 사람들의 삶을 서사하는 방법, 그리고 (3)섬 안에서 지나온 역사적 삶을 서술하는 방법 (4)섬의 생태 환경을 묘사하는 방법 등이 있다.

이 장에서는 섬과 어촌에 대한 많은 시를 창작한 시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 네 가지 측면에서 필자가 대표적이라고 생각한 남도 시인들의 작품을 살피기로 한다.

 

○ 최정웅 시집 『갈매기의 노래』『어부의 노래』『다도해의 어침』

 

대표적인 해양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해양시’와 ‘섬시’를 쓰고 있다. 여수 출신답게 대부분의 시에 바다와 섬과 갈매기를 등장시킨다. 섬에서 일하는 어부들의 어로 모습, 섬의 아름다운 환경은 물론, 어촌 주민들의 애환을 따뜻한 애정으로 담아낸다. 그의 시집은 ‘바다를 소재로 한 시집’이라는 부제를 붙여 해양 시집임을 표방한다. 『갈매기의 노래』(한림, 1995)는 그의 대표적 해양시집이다. 이후 시집『어부의 노래』(아동문예사, 1981)가 있고, 최근 제4해양시집으로 『다도해의 아침』(열린문학, 2006)을 상재한 바 있다.

그의 시에는 섬의 어로(漁撈) 묘사를 통해 삶의 건강함을 보여주거나 아름다운 섬의 풍경을 그리며, 이를 기반으로 서정성과 서사성의 깊이를 함께 연역해 내고 있다. 바다와 섬을 노래하는 일에 지속적 노력을 쏟겠다는 그의 각오에서 해양 시인의 칭호를 붙여도 좋다고 본다.

그는 시집 『갈매기의 노래』의 자서(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섬 주민에 대한 애정관을 적고 있다.

“섬 사람들의 생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태풍이라도 몰아오면 섬 생활은 지옥을 연상시킨다. 바다에서 해난 사고로 숨지는 섬 사람들과 어부들의 슬픈 얘기를 수없이 보고 들었다. 바다는 내게 있어서 거대한 시의 소재이다.”

이러한 자서 기록과 비교하여 그가 내세운 대표작「낙월도의 겨울」을 보자. 이 시는 앞의 (2)의 유형에 속한다.

 

겨울 밤바다

순정 같은 흰옷을 입고

여자들이 사내들을 기다리는데

지난 여름 태풍 속에 바다로 간 사내들은

아직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는다

바다에서 숨진 사내들의 넋일까?

허기진 갈매기들이

바닷가를 맴돌며 울음을 토해낸다

눈보라가 몰려오는 낙월도 바닷가

가슴에 등불 하나 켜고

여자들이 바다로 간 사내들을 기다린다

사내들이 밟고 올

수평선 끝까지 밤바다를 밝히고 있다.

(최정웅,『다도해의 아침』열린문학사, 2006. p.34)

 

해난 사고로 사내들을 잃은 낙월도 아낙들의 비극이 담담한 필치로 엮어져 있다. 결국 숨진 “사내들이 밟고 올 수평선 끝”이란 무엇인가. 그건 아낙들의 “기다림”과 일치하는 환상이다. 조바심에 찬 “기다림” 하나로 섬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기에 낙월도의 현상적인 비극상이 더 생생하게 전해진다. 섬과 어민의 슬픔과 비극까지도 “기다림” 같은 사랑으로 승화해간다. 지금까지 발간된 시집에는 모두 이와 같은 어촌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고 지금도 줄기차게 ‘해양시’에 몰두하고 있다.

 

○ 최하림의 「소록도 시편」

 

목포 출신의 최하림 시인은 십수 편의 ‘섬’을 주제로 한 시를 썼다. 특히 소록도에 관한 시편을 연작으로 발표하였는데, 현실에 대한 리얼한 묘사가 돋보인다.

버림받은 나환자들이 고통과 죽음 그리고 억눌림으로 살아가는 현실의 비극적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 「소록도 시편 5」도 역시 객관적인 서술 방법으로 고난의 역사를 현상적으로 추적 묘사하고 있다.

 

시간이 날기를 멈추고 잠시 혼몽 속을 헤맨다 추억은 죽음보다 빛이 조금 생생하다 이 시간이면 달이 떠올라 문둥이들이 산과 내를 건너와 지었다는 움막이 기둥만 남긴 채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인다 바람 속에 서까래가 삐걱이는 소리 아직 들리고 이륜차 바퀴가 모래에 묻혀 구르고 바퀴들은 비실재의 시간 속에서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연발하며 돌아간다 해안은 여전히 푸르다 죽은 자들의 역사를 알리는 상형 문자가 물위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최하림,『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문학과지성사, 1999. p.51)

 

이 「소록도 시편 5」는 자신의 병상 체험 때 ‘소록도’를 기행하며 바라본 나환자들에 대한 연작시의 부분이다. 그가 본 소록도에는 “남쪽 길을 걸어가면 반복해서 들려오는 소리”를 묘사한 「소록도 시편 2」가 있고, “사람들은 밭으로 나가 호미날을 고랑에 박을 때마다 흙 내음이 쏟아지며” 그때 “햇볕은 목숨처럼 맨 흙을 감싸는”「소록도 시편 4」의 모습대로 파인더에 비친 초점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나환자들의 몸을 빌려 세상의 울음과 신음 소리를 화자가 대신 듣고, 그리고 그들이 하나 둘 저세상으로 떠난 때를 새기듯, 솔바람 속에 흩어진 비극적 생을 화자의 가슴에 절대적인 끌로 새겨 판다.

그 절대성은 “문둥이들이 산과 내를 건너와 지었다는 움막이 기둥만 남긴 채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인다”는 진술에서 더 사실적이다. 뿐만 아니라, “바람 속에 서까래 삐걱이는 소리”의 음산한 분위기라든가 “비실재의 시간 속에서” 모래 묻혀 구르는 “이륜차의 덜커덩덜커덩 소리”, 그리고 “죽은 자들의 역사를 알리는 상형문자”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죽음의 장사 풍경은 더 절대적이다. 이러한 사실을 독자에게 알게 해 주는 화자의 당위까지도 절대적이다. 이렇듯 그는 소록도라는 현실 상황을 고통에 겨운 몸부림으로 절대와 당위의 자세로 끌어내어 기술한다.

 

○ 장효문의 「소록도」

 

최하림의 「소록도 시편」이 소록도의 비극을 서정적으로 그렸다면, ‘소록도’ 소속 도서인 고흥군 도양읍 출신 장효문의 「소록도」는 일제의 굴곡을 견디어온 사람들의 참상을 역사적으로 서술한다. 자신 곁에서 소록도를 지켜본 시인의 의식답게 민중적 정서를 서사적으로 드러낸다. 이 시는 섬, 어민의 역사적 진실을 서사하는 (3)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향토색을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꾸준히 천착해온 시인이다. 그래서일까.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굴종하지 않는 소록도의 저항을 서사적으로 추구해나간다. 그러나 그 한의 울림은 서정적이다.

 

잔디밭에 앉아서

나무들을 바라보노라면

반 백년이 넘도록

두 발을 땅 속에 묻고 서서

햇살로 살아가는 삼식이 진형이

준구들이 얼굴이 보인다.

이들은 구름처럼 살다가 이곳에 내려와

공원을 만드는 일꾼이 되어

이름 모를 섬들을 찾아다니며

어깨에 바위와 흙을 실어 나르며

옆구리에 칼을 차고 채찍을 내려치는

곶감보다 무서운

와까모도의 일꾼이 되어

(중략)

채찍은 춤을 추듯 너울거리고

앞서 가던 목도꾼이 쓰러지고

쓰러진 시신을 밟고 넘어서

앞으로만 가는 목도꾼이었다.

잔디밭에 앉아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바라보노라면

공원에 잔디가 입혀질 때쯤

목도꾼인 삼식이 진형이 준구들은

나무의 뿌리 밑에 편안히 누워서

나무로 살아가는 전설이 되었다. (소록도 8)

(장효문, 『신의 눈물』청사, 1985. p.78)

 

잔인한 와까모도의 “춤을 추듯 너울거리는” 채찍을 맞고 사람들은 참혹하게 죽었지만, 나무로 변신하여 “반 백년이 넘도록 햇살로 살아가며” 버티는 민중과 민족 정서를 회복시키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인이 서술하는 소록도 공원이란 결코 경치 좋은 풍광은 아니다. 일제 시대 조선의 나환자들이 강제 노역이란 피고름진 온몸의 희생물을 치르고서야 조성된 무덤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공사의 총 지휘자이자 고문을 담당했던 와까모도라는 인물로부터 느끼는 것은 분노보다도 차라리 무서움이다. 삼식이, 진형이, 준구들의 숨죽인 호흡들이, 참고 삼키는 그 차분한 광경이, 치를 떠는 것보다 더 무섭게 압득되어 온다. 수용소의 나환자들에게 칼과 채찍으로 노역을 시키며, 인권을 참혹하게 짓밟는 발광이 시인의 펜 끝에, 한 땀씩 밟는 침착한 수의 점묘법이듯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시는 푸른 공원 잔디밭의 비밀로 감추어진 폭력의 역사를 진실한 햇볕 세계로 등장시키고 있다.

화자는 역설적으로 “뿌리 밑에 편안히 누워서 나무로 살아가는 전설”이라고 말했지만, 이 나라 나환자들이 겪은 씻을 수 없는 오랜 수모이자, 사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위악적 진실이다.

 

○ 허형만의 「고하도」(高下島)

 

순천 태생의 허형만 시인은 역시 바다를 바라보는 목포항에서 시인 생활을 오래한 까닭에 남도의 섬에 대한 시편을 자주 쓰는데, 「고하도」「죽도에서」「삼학도」등은 그 일환으로 씌어진 작품이다.

그는 「유달산에 타오르는 횃불」에서 “목포여 그대/ 뻘밭 속에 고개 박은/ 처참한 갈대를 보았는가/ 유달산 두리두리/ 옹기종기 숨막힌 가난을 보았는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목놓아 울음 울던/ 어두운 선착장, 뻘바닥”이라고 그가 몸담고 있는 현재의 목포를 노래했다. 목포를 과거의 시선으로 돌아가 ‘수난의 땅, 고난의 땅, 역사의 땅’으로 노래한 것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고하도」는 섬의 모습을 그리는 (1)의 유형이다.

 

흔들리고 흔들리는 게

어찌 파도뿐이랴

오늘도 타오르는 남녘바다

고하도 용머리 앞에 서면

흔들리는 파도보다

내 영혼이 먼저 흔들리나니

우리네 뜨거운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저리 깊고 깊은 서러움 다스릴

우리네 신명나는 꽃밭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다. 하염없이 밀려드는

바람 속에서도

한사코 사그러들지 않는

한 줄기 빛나는 등불이여

어디에 있는가.

(공무원문학회편,『다도해의 아침』(연간집), 1993. p.33)

 

‘고하도’의 감정이 “그리움”이란 서정에 차용되어 있다. 시인은 “산다는 것은 그리움으로 흔들린다는 것”이라는 아포리즘으로 압축적 개념에 도달한다. 고하도를 사랑했기에 그런 그리움을 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고하도에서 “흔들리는 게/ 어찌 파도뿐이랴”라고 한 대목과 “흔들리는 파도보다/ 내 영혼이 먼저 흔들린다”에서 고하도와 화자의 감정일치를 보게 됨은 단순한 정서상의 의미가 아니다. 고하도를 오랫동안 깊이 사랑한 품격으로만이 볼 수 있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고하도에서 느끼는 “우리네 사랑”이란 “깊고 깊은 서러움 다스릴 신명나는 꽃밭”이 되거나, 결코 “하염없이 밀려드는 바람 속에서도 사그라들지 않는 등불”이 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가 고하도를 사랑한 이유, 그리고 고하도와의 일체적인 “흔들림”을 리듬화한 이유는 모두 자신의 오래 삭힌 묵은 정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옛 고하도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는 그 찾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시의 시종을 어둡게 한다. 고하도에 대한 삭히운 정서가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과 고독감을 거듭 방사하며 묻고 있다. 화자는 지금도 “우리에게 신명나는 꽃밭”의 진정한 소재를 묻고 있다.

 

○ 곽재구의 「전장포 아리랑」

 

곽재구 시인은 천성이 남도 시인이다. 그는『포구의 기행』(1999, 열림원) 같은 책을 써서 항구를 여행하며 아름다운 서정을 캐려한 적도 있지만, 이 시도 우수의 감성과 전통적 역사성과 서정성이 비극적으로 육화되어 나온 슬픔의 서정시다. 그 유형은 (1)과 (2)와 (3)을 혼합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랑 전장포 앞 바다에

웬 눈물 방울 이리 많은지

각이도 송이도 지나 안마도 가면서

반짝이는 반짝이는 우리나라 눈물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우리나라 사랑 보았네

재원도 부남도 지나 낙월도 흐르면서

한 오천년 떠밀려 이 바다에 쫓기운

자그맣고 슬픈 우리나라 사랑들 보았네

꼬막껍질 속 누운 초록 하늘

못나고 뒤엉긴 보리밭길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멸치 덤장 산마이 그물 너머

바람만 불어도 징징 울음 나고

손가락만 스쳐도 울음이 배어나올

서러운 우리나라 앉은뱅이 섬들을 보았네

아리랑 전장포 앞바다에

웬 설움 이리 많은지

아리랑 아리랑 나리꽃 꺾어 섬 그늘에 띄우면서.

(곽재구,『전정포 아리랑』, 민음사, 1985. p.34)

 

화자가 “전장포 앞 바다”에서 본 것은 우리나라의 한 많은 정서, 그러니까 “우리 나라의 눈물”, “사랑”, “보리밭길”, “앉은뱅이 섬들”이다. 모두 한 많은 아리랑의 노래처럼 구슬프게 밟고 온다. 시를 읽으면 우리에겐 “웬 눈물방울”이 많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가난하고 쫓기고 자그마하고 사랑하는, 그래서 우수의 정서로 ‘전장포’ 바다를 본 오랜 감정, 그 응얼임의 엮음이다.

사유와 고뇌와 철학을 내면의 정서로 딛고 시어의 울림을 배치한 다도해 섬.「전장포 아리랑」을 읽으면, 마치 섬과 섬 사이를 흐르는 유장한 바다 물결처럼 비극적으로 살아온 우리의 한이 리듬지어 다가온다. 그래 우리 민요 한 소절을 따라 부르는 기분이다. 시에는 남도의 많은 “앉은뱅이 섬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안마도’나 ‘낙월도’ 보다도 모르는 무인도 같은 섬들이 아리랑 고개를 넘으며 흘리는 눈물처럼 방울방울 나열되어 있다. 설움이 많아 끊일 듯 끊일 듯 하다가도 이루어지는 언어가 구성지게 돋아난다. 그래, 남도의 바다를 잇는 섬과 섬의 점과 같은 슬픔이 우리의 것, 그곳은 섬에서 나고, 자라고, 죽은 이들의 슬픔 그 한이다. 그 운율이 오늘도 전장포 화자의 넋을 타고 떠다닌다.

 

5. 갯벌의 시인들 또는 생태 무한성

 

송수권 시인이 지적한 바와 같이 ‘남도정신’은 ‘뻘의 정신’의 귀착지다. 토속적인 가락과 토대를 이루는 자연의 소리와 심상은 대숲(대의 정신)에서 황토(황토 정신)로 그리고 뻘밭(뻘의 정신)으로 변화해온 바, 그 종착점이 바로 ‘뻘밭’의 미학이라는 것이다. 왜 뻘인가. 이곳에 살을 붙이고 살아가는 생명체와 각종 어패류들이 구가하는 끈질긴 생명력의 시학이자 영원히 죽지 않을 그 방부제 같은 시학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뻘은 무생물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영원한 생명체이다. 거기에 온갖 생명을 배태하고 키우는 모성의 본형이 자리한 때문이다. 특히 남도의 뻘을 사랑하며 내놓은 시인의 뻘과 같이 끈끈한 시편에서 살아있는 뻘의 쫀득거림을 보자.

 

○ 송수권의 「뻘물」과 「대역사」(大役事)

 

송수권 시인은 스스로를 남도의 언어와 정서와 가락을 형상화하는 시인으로 자칭한 바 있다. 그렇듯 그는 천성적으로 남도 가락과 정신을 지니고 태어난 시인임을 많은 평자들이 가름해온 터다. 이는 최근에 발간한 그의 정년 퇴임 문집『송수권 시 깊이 읽기』(나남출판, 2005)에 모아진 바 있다.

송수권 시에 드러난 ‘질퍽한 뻘’이 풍기는 ‘냄새’는 비로소 ‘살 냄새’와 혼융한다. 평론가 박윤우의 지적대로 “끓는 서해 바다의 뻘냄새의 발견은 국토 육체성의 정점” 아니 모체의 내성이라고 할만하다.

이 질퍽한 뻘내음을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 아니라 밤꽃 흐드러진

페로몬 냄새 그보다는 문클한

이 질퍽한 뻘내음을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야

열 몇 살 가슴 두근거리던 때 이야기지만

들찔레 소복히 피어지던 그 언덕에서

나는 비로소 살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여자도 낙지발처럼 앵기는 여자가 좋고

그대가 어쩌고 쿡쿡 찌르는 여자가 좋고

하여튼 뻘물이 튀지 않는 꽹과리 장고소리보단

땅을 메다 치는 징소리가 좋아요

(송수권,『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 시와시학사,1998. p.37)

 

뻘밭 세계란 농익을대로 농익은 채 제 몸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둔중하고도 당당한 생명의 세계다. 시인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그 깊이에 즐거이 빠져들고자 한다. 지금까지 찾지 못한 진정한 소리, 그 “징소리”를 발견하는데, 뻘밭에 서면 그 소리는 우리의 청각을 타고 자연스럽게 각인된다. 그는, 뻘 속에서 사는 “낙지발처럼 앵기는 여자”나 남자를 “쿡쿡 찌르는 여자”, 그리고 “뻘물”이 튀거나 “땅을 메다 치는 징소리”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 한국인이자 토종 남도인이다. 남도에 어디든 볼 수 있는 소박하고 구성지고 조금은 뚱뚱하고 건강한 “뻘”의 여자다. 그 여자는 남도 삶을 사랑하는 남도 여자다. 그녀가 풍기는 ‘맛과 멋’이 절대적인 깊이를 지녀 육신을 흔들고 깨우는 ‘징헌 소리’ 같은 “징소리”를 발산하듯 섹슈얼하고도 육감적인 여성으로 상징된다. 그래서 화자에게 뻘이란 ‘곡신’의 남도를 뭉게고 질펀하게 드러누운 여성의 원형질로 묘사된다.

그의 또다른 뻘의 시 「대역사」를 보자.

 

너는 서해 뻘을 적시는 노을 속에

서 본 적이 있는가

망망 뻘 밭 속을 헤집고 바지락을 캐는 여인들

한쪽 귀로는 내소사의 범종소리를 듣고

한쪽 귀로는 선운사의 쇠북소리를 듣는다

만 권의 책을 쌓아올렸다는 채석강 절벽

파도는 다시 그 만 권의 책을 풀어 흘러

뻘 밭 위에 책장을 한 장씩 넘긴다

(송수권,『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 시와시학사,1998. p.21)

 

서해의 ‘노을’이 드리운 뻘밭은 단지 하루를 종료하는 몸짓으로만 읽혀지지는 않는다. ‘뻘밭’이란 영원성을 갈구하는 부활의 이미지로 더운 가슴을 덮쳐온다. 그래서 “만다라 같은 불립문자로 타는” 시간. 화자는 아스라한 뻘밭에 비치는 서해 낙조가 “대역사를 이루는 시간”임을 발견한다. 그 황혼 빛은 뻘을 부풀려 키우고 돌아와 “내소사 넉살문 연꽃을 만개”하게도 한다. 또 “회나무 가지를 치고 오르는 청둥까치도 불립문자”로 태우는 곳도 섬세하게 눈짓한다. 그때 주문처럼 화자가 “쉬어라 쉬어라 잠시 잠깐”이라고 외운다. 그 사이, 정말 “해는 수평선 물밑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하루에 귀의하는 낙조와 영원에 귀의하는 뻘밭의 조화가 시의 중심을 관통한다. 그러나 시의 종착은 거기 끝나지 않는다.

화자가 소유한 뻘의 눈은 “만권의 책을 풀어 흘러 뻘 밭 위에” 내놓고 읽는 ‘만다라’의 적강을 다시 시작하며 노를 젓는 것이다. 결국 존재의 무한성, 뻘의 무한성이 책(시)의 가치를 들어 올리는 성단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김선태의 「쭈꾸미」

 

바다와 갯벌에 사는 각종 어패류를 글감으로 시를 쓰는 경우가 현대 시인에 올수록 많아지고 있다. 그 예를 김선태의 「쭈꾸미」와 이시영의 「바다의 시위」를 중심으로 살핀다.

강진 출신의 김선태 시인은 현재 목포에서 갯벌 시를 탐구하거나 이를 직접 쓰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 중에서 각종 남도 산지의 어류를 시에 소개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쭈꾸미」,「숭어」 등이고 이는 (4)유형에 속한다.

 

쭈구미라는 연체동물이 있다

낙지의 사촌쯤 되는 이놈은

자승자박의 바닷물고기이다.

이놈을 잡는 일은 너무 쉽다

줄에 소라껍질을 매달아 놓으면

은신처로 알고 들어가 걸려드는데

문제는 문단속을 잘한다는 것

혹시 남에게 들켜 잡아먹힐까봐

펄을 뭉쳐 입구를 꽉 틀어막다보니

퇴로도 없이 잡히고 만다 바보같이

‘나 여기 들어 있소'자수하거나

‘눈 가리고 야옹'인 셈이다 하여

입구가 막힌 소라껍질 속에는

틀림없이 쭈꾸미가 들어 있다

어부는 옛날 처녀 보쌈해오듯

그냥 걷어 오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는 지나치게 문단속 잘해

폐가망신 당한 사람들이 있다.

(김선태「쭈꾸미」,《월간 현대시》 2007. 5월호)

 

‘쭈꾸미’는 남도의 갯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보통 낙지과의 ‘연체동물’이다. 이 시의 화자에 의하면, 쭈꾸미는 스스로 죽기로 “자승자박한 놈”으로 판정되는데, 놈은 자기를 잡으러 오는 줄도 모르는 채 “문단속만 잘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이놈을 잡는 일은 너무 쉽다”고 자신해버린다. 즉 쭈꾸미를 낚음에 “줄에 소라껍질을 매달아 놓으면” 쭈꾸미가 자기가 숨을 “은신처로 알고 들어가 걸려 든다”는 것이다. 놈은 남에게 들켜 잡아먹힐까봐 펄을 뭉쳐 입구를 꽉 틀어막다보니 퇴로도 없이 잡히고 만다”는 것, 그야말로 “자승자박”하는 꼴이지 않은가. 그렇듯 놈은 “눈 가리고 야옹”인 셈으로 “입구가 막힌 소라껍질 속에” 들어가 안심하고 있지만, 이때 어부는 옳다구나 하고 “처녀 보쌈해 오듯 그냥 걷어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너무도 쉬운 쭈꾸미잡이가 아닌가.

쭈꾸미의 이렇듯 어리석은 피신을 두고 화자는, 사람들의 삶에 비판의 송곳을 가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지나치게 문단속 잘해 폐가 망신 당한 사람들이 있다”고 비유적으로 풍자한다. 전반부의 쭈꾸미잡이를 길게 서술한 대목을 벗어나, 여기서 비약과 전환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시적 묘미를 살리고 있다.

그러나 쭈꾸미가 어리석게 숨는 바를 일러주어 이른바 쭈꾸미잡이를 권장하는 식의 단순 말하기는 아니다. 시의 메시지란 따로 있다. 첫째, 쭈꾸미의 일상처럼, 자신을 은신과 보장만 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 그 어리석음을 풍자함으로써 생태계에 위협을 가하는 인간들이 결코 무위함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서설(序說)임을 역전하여 알리는데 있다.

쭈꾸미를 전혀 힘들지 않고 많이 잡았다는 어부의 무용담은 사실 부질없는 행위이가 아닌가.

 

○ 이시영의 「바다의 시위」

 

구례 출신 이시영 시인은 바다와는 관계가 적은 지역 태생이지만, 그는 최근 간행한 시집 『은빛 호각』(창비, 2003)에 실린「바다의 시위」,「조개의 죽음」,「남해」,「사나이들의 바다」등을 통해 바다와 갯벌에 관련된 시를 상당수 발표하고 있다. 조금 형태가 다르지만 그의 시를 (4)유형으로 분류해 본다. 그가 보는 바다는 이외로 ‘꼬막’ 속이나 ‘다금바리’ 배 속에 있다. 온 힘으로 바다를 지키려는 생명체의 노력을 시적 의미로 장치하는 게 특징이다.

 

꼬막들이 반찬가게에 와서까지 입을 꼬옥 다물고

푸른 바다를 토해내고 있다. (「바다의 시위」)

추운 겨울 아침, 숙수(熟手)의 억센 손아귀를 빠져나온 다금바리 한 마리가 피 묻은 시멘트 바닥을 쿵쿵 뛰며 처절히 반항하고 있다. 놀란 숙수가 다가가 거대한 아가미에 칼끝을 대자 바다를 가르며 솟구쳐올랐을 격렬한 꼬리지느러미부터 서서히 잠잠해진다. (「남해」)

(이시영 시집 『은빛 호각』창비시선230. 2003. p.129, p.66)

 

꼬막과 갯벌은 공생관계다. 그래, 좌판에 잡혀온 꼬막은 “반찬 가게에” 올 때까지 ‘바다’를 머금어 “입을 꼬옥 다물고” 있다가 화자가 보는 순간 “바다를 토해” 낸다. 꼬막이 바다 갯물을 토해내는 것은 사실 싱싱한 바다의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 짧은 시 속에 꼬막이 질긴 생명, 바다를 지키려는 앙징맞은 안간힘이 숨어 있다. 그걸 놓치지 않고 전달하려는 게 화자의 임무다. 이 시의 주인공이란 “바다의 시위”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꼬막’이 아니라 바로 꼬막의 입을 통해 참았다가 나오는 “푸른 바다”이다. 따라서 ‘바다’와 ‘꼬막’의 동시적 위상을 높여주되 ‘바다’ 그것도 아직은 “푸른 바다”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푸른 바다”를 남획하는지 시의 이면을 들여다 보는 수도 있다.

「남해」에서는, “숙수(熟手)의 억센 손아귀를 빠져나온 다금바리”가 살려고 “처절히 반항”한다. 그러나 능숙하게 “아가미에 칼을 대자 서서히 잠잠해”지는 것이다. 버둥치는 것을 포기하고 죽는 ‘다금바리’는 바다 자신이다. 시는 숙수와 같은 사람들로 인하여 팔팔함을 죽여 생명의 댓가를 치루는 바다를 상징하고 있다.

예로 든 시인과 작품 말고도, 해양시, 갯벌시는 더 많았다. 아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현재 생산되고도 있었고, 선정 작품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 끝으로 이 글쓰기에 대한 무서움증이 닥쳤다. 하지만, 논자에 따라서는 관련된 시인과 작품을 더 확장하여 소개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변명 같은 여유를 지니기로 했다.

필자의 열람 수준을 넘어가버린 시인들로는, 해남 출신 고정희의 「간척지」, 장흥 출신 소설가 한승원의 시로「바다-열애일기19」「포구에서 -연가9」, 나주 출신 김해성의 서사시「남해의 북소리」, 진도 출신 천병태의 「나배도 소식」, 여수 출신 박보운의 「여수항」「어선 덕수호의 항진」, 이성관의 「우리들 가슴에도 섬 하나씩 있다」, 무안 출신 박형철의 「보길도의 아침」 등도 눈여겨 볼만 했지만, 결국 지면 사정이 힘겹게 이들을 밀어냈다.

 

6. 나오며, 갯벌 또는 개발의 저항

 

본고를 쓰면서, 당돌하게도 바다를 소재로 한 시, 갯벌의 시, 그리고 섬 어촌의 시, 뻘에 사는 어패류를 소재로 한 시를 고구하기 위해서는, 한 생을 보듬고 죽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바다가 인간의 삶에 희망적 또는 가치적으로 구원한다는 것은 역사를 거슬러가지 않더라도 자명하다. 바다의 연안에 살 내음을 섞고 있는 어민들도 실질적 소득 외에 풍요로운 정서와 삶을 보장한다.

김지하 시인은 「동아시아의 바다와 해양문학」의 세미나에서 앞으로 생태 보존은 바다 살리기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는 ‘국토 균형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무수히 많은 갯벌을 죽이는 대형 사업들을 막하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범죄는 참여정부에 와서 더 많이 자행되고 있고 다른 환경 파괴는 더 많아 극에 달한다. 각 지자체의 수익을 위한 골프장 건설, 새만금 간척사업, 혁신도시 건설도 그 주범에서 외예가 아니다. 해남 고천암 공사, 광양만 공사, 순천만 간척 사업 등 지역 개발의 미명으로 저지른 바다와 갯벌에 대한 오염과 환경 파괴 실태는 수없이 많다. 우리나라 곳곳은 바다와 갯벌에 대한 만행이 도를 넘어 우리 땅은 처참하게 이지러지고 변형된지 오래다. 개발독재와 언론의 합작인 ‘지도를 바꾼다’는 말은 얼마나 살육 짓을 거듭함에 붙여진 허울의 말인가. 한국은 세계에서 오염 천국으로, 그 중 바다 오염이 수위를 차지한다. 온갖 공사와 육지의 오염 하수로 찢겨지고 더럽혀진 갯벌의 시체, 시멘트 구조물과 기름 유출로 말미암은 능욕들은 이제 치료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아, 피곤한 국토와 바다. 회복이 너무 멀다.

바다와 갯벌에 대한 생태적 믿음과 그 정신력을 복원하는 문제는 이처럼 시급하다. 지금 시점에선 바다, 섬, 어촌, 갯벌문학에 대한 재탐구와 근본적인 시적 형상화가 요구된다. 시인들이 바다와 섬을 마냥 평화롭게만 노래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비극이 가슴을 친다. 시인은 그래서 어촌의 평화보다는 오히려 그 속에서 처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폐해진 삶을 조명하는지도 모른다.

국가 발전은 바다를 다시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2001년 인도가 수산해양부를 신설했고 일본이 이번에 해양기본법을 만들었으며, ‘해양굴기’(海洋屈起) 즉 미래는 “바다에서 일어선다”를 외치는 중국도 내년 해양기본법을 통과시켜 해양정책 총괄기구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이미 1996년 해양수산부를 발족해 바다 중시에 앞장섰다는 사실은 고무적이지만 후속 실천을 정부와 대통령이 보여주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거꾸로 유구한 바다와 천혜의 갯벌을 쓰레기와 기름으로 오염시키는 것도 부족하여 국가나 장사꾼들의 건설 난립 등 생명체를 직?간접으로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 국토는 만신창이가 되어 결국 그 피해를 바다와 갯벌이 떠안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우리가 죽어서 돌아가야 할 곳은 고향 땅이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바다다. 그만큼 바다는 현재와 미래 삶에 충실하는 곳이다. 삶의 가치를 높이고 끈끈한 인정이 솟는 곳, 바로 바다와 갯벌의 터전이다.

‘해양문학’과 ‘갯벌문학’이라는 내용과 형식의 형상화는 그리 중요치 않다. 보다도 바다와 갯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기반 조성에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와 관건임을 명심해야 할 일이다. 바다 갯벌에 관한 시인의 고발정신과 탐구는 그런 의미에서 책무적 위상이다. 우리의 삶이 곧 바다이자 갯벌의 삶에 연장된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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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창수 약력

 

○ 전남 함평 출생, 문학박사,《현대시학》시 추천(1973), 〈전남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9), 《시조문학》시조 천료(1991), 《한글문학》평론 당선(1992) 등으로 문단에 나옴.

○ 한글문학상(평론,1994), 한국시비평문학상(평론,1998), 국어운동표창(2003, 한글학회), 광주문학상(2003, 시조), 현대시문학상(2005, 현대시문학) 등을 받음.

○ 시류문학회 회장 역임, 현재 죽난시사회 회장, 광주문인협회 부회장,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회장

○ 시집 :『거울 기억제』(1990), 『선따라 줄긋기』(2003), 『배설의 하이테크 보리개떡』(2003), 시조집 : 『슬픈 시를 읽는 밤』(2003) 외 다수,

논문 「한국 현대시의 화자연구」외 약 400여 편이 있음.

○ 전남대·조선대·호남대·광주여대 강사, 현재 광주여자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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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7.21 16:31

    첫댓글 잘 있었다...쫄길쫄깃 맛난 바다가 급 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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