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아리랑대축제’ 장과, 문화재 탐방
靑山 손병흥
2024년 5월 봄날의 마지막 공휴일 날에, 올해로 어언 66회째를 맞이한, 영남루와 밀양강 일원에서 성대하게 펼쳐졌던, '밀양아리랑대축제' 장과, 문화재 탐방으로 ‘오연정’과 ‘월연정’ 및 ‘칠탄서원(칠탄정)’과, 이제 막 개장이 된 ‘선샤인테마파크’와 ‘오봉서원’ 등을, 시인과 출판인 및 지인들과 함께, 부산에서 승용차 편으로 출발하여 다녀왔다.
지난 1957년 영남루 대보수 기념 행사로 시작됐던 이 행사는, 23일부터 26일까지 4일간 '영남루의 꿈, 밀양아리랑의 빛'이라는 주제로, 국보 영남루와 밀양강 일원에서 성대하게 펼쳐졌으며, 이번 행사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밀양의 대표 축제로서, 특히 ‘정부 지정 문화관광축제 로컬 100’에 선정이 되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서 성장하고 있음을, 보다 더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더욱이 올해는 밀양의 상징인 영남루가, 60년 만에 국보로 재승격된 것을 기념하고, 아리랑의 예술적 가치와 정수를 느낄 수 있는,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과 공연을 선보이고 있었으며, ‘아리랑 주제관’은 아리랑의 정취와 다양한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자, 밀양아리랑의 역사와 아리랑 선율에 녹아있는 한(恨)과 아름다움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으며, 유물과 발간자료 등의 전시공간이자, 마치 아름다움을 가득 담은 다양한 아리랑 콘텐츠의 보물 창고와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축제의 백미인 저녁에 펼쳐지는 ‘밀양강 오딧세이’의 공연을 지난 먼젓번에는 관람을 하였지만, 때마침 봄비가 내리는 데다가 귀갓길을 종용하는 일행들 때문에, 이번에는 그러하지를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웠다.
제일 먼저 탐방했던 곳이자, 정면 다섯 칸에 한 칸의 누마루가 돌출되어있는 형태인 오연정은, 조선 명종 때 성균관 전적과 정랑을 거쳐, 예안과 김제와 울산 군수 등을 지낸 추천 손영제(鄒川 孫英濟, 1521~1588)가, 1580년대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별장으로,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추화산 기슭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그는 예안 현감으로 있으면서 퇴계 이황으로부터, 몸소 학문과 정치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고, 도산서원의 건립에도 사재(私財)를 기부하여 큰 기여를 하였다.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마을 이름을 모례(慕禮)라 하고, 앞의 냇물을 추천(鄒川)이라 하고서 자신의 호로도 삼았는데, '모례'는 '예안에서 입은 스승의 은혜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추천'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본받겠다'고 하는 다짐으로 정자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마치 큰 자라가 다섯 봉우리를 떠받치고 있듯이, 나라의 인재를 키우겠다고 하는 생각과, 그 의지의 뜻임을 지레 짐작할 수가 있다.
그 외에 오경(五經)의 하나로, 공자(孔子)가 편찬한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으로, 주(周)나라 초부터 춘추 시대까지의, 시(詩) 311편을 수록했던 시경에 나오는 말로, '경을 향한다'고 하는 뜻을 간직한 경행재(景行齋)와, 누각의 누마루에는 ‘영풍루’ ‘남벽루’ ‘빙호추월’ 세 개의 현판이 걸려져 있고, 그 뒤편으로는 목판을 보관하는 ‘연상판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정자가 임진왜란 때와 두 번이나 소실된 적이 있었고, 그 이후 1771년에 후손들이 중건을 했으며, 순조 때는 지역 사림에서 뜻을 모아 오연정 뒤편에 ‘모례서원’을 건립했으나,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고야 말았던데다가, 1936년에 다시금 중수를 하였다.
다음으로 답사한 밀양시 용평동에 자리한,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비경을 체험할 수 있는 유형문화재인 월연정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한림학사를 지낸 이태(1483∼1536)가 세운 정사(亭舍)로, 당시 월영사가 있었다가 폐사된 터에다가, ‘기묘사화’를 피해 귀향한 다음 해인, 1520년(중종 15)경에 ‘쌍경당(雙鏡堂)’이라고 편액(扁額)을 하였던 곳으로, 이곳 역시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33년(1757년)에 8대손인 월암(月菴) 이지복(李之復)이 쌍경당을 복원하였으며, 현재 이 일대 주변 일원이 명승지로 지정이 되어있다.
월연정은 가장 좌측인 남쪽에 있고, 동향을 하고 있으며, 정면 5칸과 측면 2칸의 5량(樑)구조로, 팔작지붕을 한 이익공계(二翼工系)의 건물로서, 가장 북측에 위치하면서 남동향을 하고 있는 월연대(月淵臺)는, 그 주위에 건립된 제헌(齊軒) 등과 함께, 모두 풍치 수려한 곳에다가, 한 무리를 이루어 정자의 기능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용호정(龍湖亭)은,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 1412~1473)의 덕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추화산(推火山) 아래에 지은 정자로, 1435년(세종 17)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과 집현전학사와 병조정랑, 지봉산군사(知鳳山郡事) 등을 역임하였고, 1456년 단종 복위를 꾀하던 신하들이 살해되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린 채 고향인 밀양에 은둔하였다.
밀양 용호정은 1775년도에 건립이 되었고, 1940년대 후손들이 기존의 낡은 건물을 헐고 중건하였으며, 출입문 격인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심경루(心鏡樓)는, 2층 누마루에서 용호정 앞마당으로 이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위헌(自慰軒)’과 ‘독락원(獨樂園)’ ‘수도헌(須到軒)’의 편액 및 시판들이 걸려져 있다.
아울러 밀양 칠탄산(七灘山) 아래 단장천(丹場川) 기슭의, 인적이 드문 호젓한 곳에 위치한, 경상남도 지정문화재인 칠탄서원(七灘書院)은, 임진왜란 때 밀양의 석동산(石洞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의를 떨친, 선조 때 울산판관(蔚山判官)과 영천군수(永川郡守)와 창원부사 등을 지낸 이후에는, 조정에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관(諫官) 벼슬과, 통정대부 상주목사 등의 상위 관직에 제수(除授)했으나, 당시 광해군 시절의 난세와 어지러운 정치를 뜻하는 난정(亂政) 시인지라 계속 부임(赴任)하지 않은, 오한 손기양 선생을 봉안하던 사당(祠堂)으로, 1844년 경내에 ‘청절사(淸絶祠)’를 세웠다가, 그 후 칠탄서원으로 편액을 하였으나, 고종 5년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이 되고, 후손들에 의하여 서원을 ‘칠탄정(七灘亭)’으로 편액을 하였으며, 1914년에 청절사가 있던 자리에, “칠탄서원유허비”를 세워 이를 기념하고 있다.
1743년(영조 19)에 진암서당(眞巖書堂)으로 건립하였다가, 1844년(헌종 10) 지방유림의 공의로 손기양(孫起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書院)으로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이 되었고, 그 뒤 1914년 유림에 의하여 다시 복원이 되었으며,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8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문루(門樓) · 내삼문(內三門) · 주사(厨舍) 등이 있는데,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고, 서재는 ‘벽립재(壁立齋)’로 편액 되어 유생 (儒生)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하였으며, 동재는 ‘죽강재(竹江齋)’로 편액이 되어 재원 숙소로 사용하였다.
오한 손기양(孫起陽, 1559~1617)이 광해군 때의 혼란한 정국에 창원 부사를 스스로 그만두고 귀향하여 은거한 곳이며, 이후 조정에서 사헌부 장령과 사간원 사간 및 상주목사 등의 벼슬을 내려도 나가지 않고, 낚시와 후학들을 위한 강학 등으로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던 이 무렵에, 그는 아호(雅號)를 송간(松澗)에서 오한(聱漢)으로 바꿨는데, 이는 「못 들은 체할 오(聱)와 놈 한(漢)으로 '귀가 먹어 들리지 않는 자'」라고 하는 뜻이다.
마치 중국 후한(後漢) 시대의 은둔(隱遁)한 은자로 알려진 엄자릉(嚴子陵)이, 낚시로 은둔했던 ‘칠리탄(七里灘)의 고사’를 곁들여 비유하면서, 조정에서 여러 관직을 제수해도 이를 사양한 채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자신의 심경을, ‘벼슬을 버리고 낚시한다’ 고 하는 뜻인 철조시어(輟釣詩語)로도 표현을 하였는데, 다음은 선생이 쓴 ‘철조(輟釣)’ 시(詩) 중의 일부이다.
칠리탄두일조간(七里灘頭一釣竿) 칠리탄 어귀에서 한 낚싯대 드리우니
벽강청천낭화한(碧江淸淺浪花寒) 푸른 강물은 맑고 물결은 차네
당년각소양구자(當年却笑羊裘子) 당시엔 양구자 우습다 했는데
종대인간간의관(終帶人間諫議官) 마침내 인간 세상에서 간의 벼슬을 하는구나
그는 1588년(선조 21)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과 경주 제독, 울주 판관과 영천 군수와 창원 부사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절의(節義)를 바친 기록이, 팔공산의 창의사적(倡義史蹟)과 창녕 화왕산의 창의록에 남아 있으며, 도덕문장(道德文章)이 당대의 스승으로 문무(文武)에도 그 재능이 매우 뛰어났다.
특히 한강 정구(鄭逑)의 문하로 우복 정경세鄭經世, 지산 조호익(曺好益) 등 당시 영남지역의 명유(名儒)들과 교류를 하면서, 임란 이후의 쇠퇴한 밀양지역 향풍 쇄신과 선현(先賢) 추모에 앞장서 힘을 쏟았으며, 영남 선비를 대표하여 점필재 김종직을 위한 변무문(辨誣文, 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힌 글)을 지어 강력히 논변하였고, 호남에서 회재 이언적(李彦迪)의 문묘 종사를 비방하자, 사람의 공론을 모아 종사(從祀)를 청하는 소(疏)를 올렸으며, 송계 신계성(申季誠)에 대해 김해 유생들이 신산서원 향사(享祀)를 반대할 때도, 그가 나서 통문(通文)을 보내 배향될 수 있게끔 하였다.
오한 선생은 평시에는 고장의 풍속(風俗)을 교화하고, 임란(壬亂)에 임해서는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의연히 창의해 국난 극복에도 크게 앞장섰으며, 그 당시 밀양 사대부의 정도(正道)였던, 이른바 세상에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의 도리를 몸소 실천했던, 그야말로 올곧은 참 선비이자 밀양 향(鄕) 8현(賢) 중의 한 분으로, 오늘날까지 널리 추앙을 받고 있다.
그다음으로 방문한 머물며 즐길 수 있는 체류형 복합 테마단지인,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관광단지로 78에 위치한 ‘선샤인밀양 테마파크’는, 지난 5월 4일에 새롭게 오픈한 테마공원으로, 크게 6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농촌테마파크와 파머스마켓, 요가컬처타운과 스포츠파크, 그리고 반려동물지원센터와 네이처에코리움이 있으며, 총사업비 4천64억원을 들여 91만6천312㎡에 조성한 새로운 공간이자, 6차 산업 파머스 마켓과 스포츠시설 및 생태관광시설, 18홀의 골프장과 리조트 등이, 여러 곳에 나누어져 있는 곳이다.
그중에 ‘네이처에코리움’의 중앙홀에는 웅장한 LED미디어월과, 여러 상황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스크린 상상의 공간인 4D영상관이, 외부에는 인공습지관과 식물원, 사계절생태체험시설이 조성되어져 있어서, 그야말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된 테마파크 이자, 영화 속에서만 보던 세트장도 구경할 수가 있고, 신나는 레일썰매장과 VR체험관, 승마체험장 등의 갖가지 부대시설이 마련되어져 있다.
더군다나 드라마와 영화에서나 봤던 개화기의 의상이나, 다양한 종류의 의상들과 액세서리를 대여해서, 추억어린 사진을 찍거나 입고 다닐 수가 있고, 이어지는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 있는 명소로서, SBS 아침드라마인 <강남스캔들>과, 최근 방영중인 MBC 일일드라마 <나쁜사랑> 등이 촬영된 시설을 갖춘 곳으로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자 새로운 관광지 명소가 된 곳이다.
그날의 마지막 방문지였던 오봉서원(五峯書院)은, 조선 1780년(정조 4년) 취원당 조광익(1537년~1578년)의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고 지역 유자(儒者)를 양성하고 수양시키기 위해 오봉사(五峯祠)로 창건하였고, 1790년(정조 14년) 조광익의 증조할아버지 조치우를 추가 배향하여 ‘청효사(淸孝祠)’로 개칭하였는데, 청효사는 청백으로 공무를 받들고, 효우로 집안을 위한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796년(정조 20년) 밀양 사림의 청원으로 오봉서원(五峯書院)으로 개칭하였으나, 1868년(고종 5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이 되었고, 그 후 후손들이 재실을 세워 ‘오봉 서당’이라 칭하였고, 1988년 청효사를 다시 설립하여 이전 현판을 붙여, 신문(神門)을 ‘입덕문(立德門)’이라 편액 하였으며, 1989년에는 위판을 봉안하고 오봉 서원을 복원하였다.
1997년 노후한 강당과 정문을 철거하여 옛 모습대로 원위치에 중건하고, 청효당(淸孝堂)을 ‘실학당(實學堂)’으로, 효우당(孝友堂)을 ‘독지재(篤志齋)’로 바꾸었으며, 정문을 숭유문(崇儒門)이라고 현판(懸板)하였다.
그는 퇴계 이황(1501년~1570년)의 문인으로,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가회(可晦)요, 호는 죽와(竹窩)와 취원당(翠遠堂)이며, 효행으로 이름이 높아 정려(旌閭)되었고, 병조좌랑과 형조정랑을 거쳐 평안도 도감사(都監寺)의 벼슬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