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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가야산) 소리길을 번개산행 하다.
글 쓴 이 旲 熀 高 達 五
2월 22일, 오늘은 “설 연휴”가 겹쳐서 “남산정기산행”은 하지 못하고 “해인사(가야산) 소리길” ‘번개산행(정기산행 외에 간단한 친목산행)’을 하는 날이다. 9시 30분을 조금 지나 칠곡IC를 최종출발 하니 생각보다 많은 회원님들이 동참하셨다.(29명)
임기사님도(년간 계약) 바쁜 시간을 짬 내어서 지원을 해 주셔서 고맙기 이를데 없슴니다. 차는 신나게 달려 “옥포 간이휴게소”에 휴식차 잠시 들리니 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어 고즈넉하기 까지 합니다.
차 내에서 간단한 진행을 마치고 부지런히 달려서 합천군 가야면 “대장경 테마파크”에 도착하니 시계는 10시30분을 조금 지나 있으며, 이곳도 “설 연휴”의 마지막날이라 그런지 한적하기는 매 한가지다.
단체로 간단한 기념촬영을 마치고 몇몇 회원님들에게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전시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해드리고는 곧 바로 “해인사 소리길”로 접어 듬니다. 작은 연못의 분수대 주위로는 ‘가야산 일대의 명소 사진들’을 전시 해 놓았으며, 그 옆으로 터널형식으로 다리발 입구에는 “八萬大藏經”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해인사 장경각 입구의 글씨를 모조(模造)해서 붙여 놓았다. “대장경 테마파크”의 관람은 훗날로 미루고 함께 진행 합니다.
“해인사 소리길” 비문 아래는 “(소리길이란) 우주만물과 소통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생명의 소리, 우리가 추구하는 완성된 세계를 향하여 가는 깨달음의 길이며, 귀를 기울이면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세월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하여 소리길이라 함.”이라고 적혀 있다.
‘소리길’ 일주문을 지나 ‘넝쿨터널’ 옆에는 ‘요상한 돌조각상’이 세워져 있는데... 귀가 큰 사람의 형상으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징물로 여겨지며, 소리길에 걸맞는 석조물(石造物)이라 여겨진다.
엊그제 나린 비로 개울물은 제법 불어나서~ 콸 콸 콸~ 쏴아~ 쏴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출~출~ 시원하게도 흐른다. 비 온뒤라 날씨도 상큼하여 맑은 공기에 기분이 상쾌하고 발걸음도 가벼웁다.
몇걸음을 나아 가니 우측 개울옆에는 “예운 최동식 거사 作. 갱멱원(更覓源)”의 詩가 전시돼 있어 잠시 옮겨 봅니다.
蕭蕭款段訪林邱(소소관단방림구)(호젓이 더딘 걸음으로 숲언덕을 찾아드니)
亂石喧豗萬壑流(난석훤회만학류)(돌무더기 어지러운 구비마다 물결이 부딪히네.)
花落鳥啼人跡少(화락조제인적소)(꽃은 지고 새는 우는데 인적은 드물고)
雲深不辨舊時遊(운심불변구시유)(구름까지 깊어 예 놀던 곳 알 수 없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상상하며 가야산(伽倻山)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적절한 詩가 전시돼 있슴니다. 마음을 텅 비우고 대자연에 동화(同和)되어 쉬~엄~ 쉬~엄~ 걷노라니 가끔씩 불어오는 산들 바람에 온 몸이 시원하고, 은은히 풍겨오는 대자연의 향기(香氣)는 코 끝을 간지러 줍니다.
흐르는 물소리는 천연(天然)의 교향악(交響樂)이요, 가야천(伽倻川)의 바위들은 자연 그대로가 수석(水石)이로다! 아직은 이른 봄이라 낙엽수(落葉樹)들은 싻눈이 뾰족 뾰족 겨우 겨우 기지개를 켜고 있으며, 개울가 언덕에는 얼기설기 엉클어진 넝쿨들이 고스란이 속살을 드러내고 있어 겨울인 듯~ 봄인 듯~ 짐작키 어렵습니다.
축화천(逐花川:갱멱원~홍류동 계곡~ 해인사~ 가야산 상왕봉 까지 19명소 中의 하나.)을 지나 펼쳐지는 야천리(倻川里), 구원리(舊源里) 일대의 논 밭에는 아직은 농부의 손길이 닿지 않슴니다.
야천리 부근에는 계곡을 가로 지르는 거대한 “무지개 나무다리”가 놓여져서 운치를 더 해 주시고, 아직은 미완성(未完成)이라 출입금지다. 그 옆으로 자투리 밭에는 지난해 버려진 배추포기들이 말라 죽어서 허옇게 널부러져 있으며, 들 논에는 벼 그루터기가 나란히 줄을 서 있습니다.
산촌(山村)의 풍광들이 아롱 다롱 정겨웁게 느껴지며, 따스하고 평온(平溫)한 정감(情感)으로 다가 옵니다. 그럭 저럭 무릉반석(武陵盤石)을 지나 청량사(淸凉寺)로 가는 갈림길의 주차장에 이르니, “뚱순이 가야산 소리길 쉼터”가 있어 후미에 김해진님과 함께 웃으며 지나는데... “쉬었다 가세요!” 하길래~ 메뉴판을 잠시보니 냉콩국수, 팥빙수, 아이스커피, 아이스크림, 잔치국수, 파전, 호박전, 동동주. 막걸리 등 혼자서 저 많은 메뉴를 어찌 다 만드시노~?
콧 노래를 부르면서 몇 걸음을 나아가니 “여기는 가야산 소리길 입니다.”라고 새겨진 작은 일주문이 있어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와 ‘해인사’의 숨바꼭질을 느끼게 합니다. 선두는 어디메 쯤 가셨는지 보이지 않고 후미 그룹은 많이도 처져 있슴니다.
이제부터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있어 솔 향기 그윽하여 향물에 목욕한 듯~ 온 몸에 배어드니~ 상쾌한 기분을 주체할 수 없슴니다. 무릉교(武陵橋)를 지나 소리길 옆으로는 나무의 수종(樹種)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하나 하나 정성스럽게 이름표를 붙여 놓았으며, 또 가야산에 서식하는 동, 식물들과 조류(鳥類)들, 버섯종류, 뱀종류, 맹금류 등 다양하게 사진으로 전시 해 놓았다.
그 중에 나무종류를 몇가지 적어봅니다. 굴참나무, 층층나무, 팥배나무, 서어나무, 노간주나무, 쪽동백나무, 신갈나무, 다릅나무, 노각나무, 쇠물푸레나무, 박달나무, 정금나무, 생강나무, 잣나무, 전나무, 조록싸리, 당단풍나무, 졸참나무, 산벗나무 등 끝이 없슴니다.
연하여 이름난 명소(名所)에는 갱멱원(更覓源)을 비롯하여, 무릉교(武陵橋), 칠성대(七星臺), 홍류동(紅流洞), 농산정(籠山亭), 음풍뢰(吟風瀨), 취적봉(翠積峰), 광풍뢰(光風瀨), 분옥폭(噴玉瀑), 용문폭포(龍門瀑布), 낙화담(落花潭), 제월담(霽月潭), 첩석대(疊石臺), 회선대(會仙臺) 등 무려 19개의 명소(伽倻十九名所題詠 : 예운 최동식 거사 作.)가 있다하니... 필설(筆舌)로 다 논(論)하기가 어렵슴니다.
쭉쭉 뻗은 소나무는 하늘에 닿아 있고, 아람드리 거목(巨木)에는 일정시대 때 송진 채취로 난 상처가 1세기가 다 되어 가건마는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또 어떤 나무는 그로 말미암아 고사목(枯死木)이 되어 쓰러져 있으니... 약소국(弱小國)의 슬픔이 어떤 것인가를 온 몸으로 느낌니다.
깊은 계곡 음지(陰地) 벼랑에는 얼어붙은 빙벽(氷壁)이 여전히 남아있어 물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시고, 그래도 오는 봄소식에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 쏟아지는 폭포수를 보노라면 대자연의 섭리(攝理)는 어김이 없슴니다 그려!
12시가 조금 지나 매표소에 도착하니 윤갑용 총무님이 후미의 회원님들을 위해서 혼자 기다리고 계신다. 잠시 기다리며 매표소 건물을 살펴보니 거대한 기둥이 8개요, 팔작지붕 형식으로 지어져 있으며, 용마루는 대웅전의 “치미”를 양쪽 끝에 올려 놓았고, 처마 밑에는 “法寶宗刹伽倻山海印寺(법보종찰가야산해인사)”라고 새겨져 있다.
잠시후 홍류동(紅流洞) 계곡에 도착하여 쉼터에서 가져 온 과일들을 나누어 드시면서 얼마를 쉬다가 농산정(籠山亭) 주위를 둘러봅니다. 홍류동(紅流洞)은 말 그대로 붉은빛이 흐르는 계곡이다.
20여 리의 긴 골짜기에서 경치가 가장 뛰어 난 곳이기도 하며, 울퉁 불퉁 아름다운 바위들에는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이름이 즐비(櫛比)하게 새겨져 있고, 흐르는 물소리에 귀가 먹어 농산정(籠山亭)이라 했던가!
안내문에 이 곳은 신라말의 거유(巨儒)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은둔하여 수도하던 곳이라 하며, 농산정은 1936년에 고운선생의 후손과 유림(儒林)들에 의해 세워 졌고, 이후 1990년에 보수공사를 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籠山亭은 정면2칸, 측면2칸의 정방형 팔작지붕 형식의 목조건물이며, 내부에는 김영한(金寧漢)이 쓴 농산정기(籠山亭記)와 찬양시(讚揚詩) 4수(首)가 걸려있고, 이 밖에도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의 시를 비롯하여 시(詩) 7수가 더 있는데, 점필재 선생의 시를 간단히 옮겨봅니다.
九谷飛流激怒雷(구곡비류격노뢰)(아홉 굽이 날아내리는 물 격노한 우레런가)
落紅無數逐波來(낙홍무수축파래)(떨어진 붉은 꽃잎 끝없이 물결따라 흘러오네)
半生不識桃源路(반생불식도원로)(무릉도원 가는 길 반 생이 되도록 몰랐더니)
今日應遭物色猜(금일응조물색시)(오늘에야 산빛조차 시샘하는 그곳에 다다르리)
또 정자 옆에는 “孤雲崔先生遯世地(고운최선생둔세지)”라는 비문(碑文)이 세워져 있고, 후면에는 당시의 후손과 유림들의 이름이 새겨져(16명) 있다. 아울러 정자 건녀편에는 치원대(致遠臺) 혹은 제시석(題詩石)이라 불리는 석벽이 있는데, 거기에는 칠언 절구의 최고운 선생의 둔세시(遯世詩)가 새겨져 있다. 일설에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 하는 학자도 있어 의견이 분분 합니다.
그는 이미 기울어 가는 신라를 버리고 이곳 가야산에 머물러 은둔(隱遁)하다 일생을 마감했다 하는데, 입산 후 어떻게 살았는지 언제 타계 하였는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해인사에 머물던 그의 형인 현준(賢俊), 정현(定玄) 스님 등과 서로 오가며 지냈다는 사실만 전해질 뿐, 죽음조차도 홍류동 어느 바위 위에 신발과 지팡이 하나를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해 올 따름이다.
저만큼 맞은편 언덕 위에는 ‘文昌候先生遺墟碑(문창후선생유허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옆으로 고운선생을 제향(祭香)하는 단촐한 서원(書院)이 몇채 보인다. 일정상 다 답사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해인사로 나아갑니다.
솔 향기 산내음 그윽하게 느끼며 그럭 저럭 길상암(吉祥庵) 입구에 도착하니, 깎아지런 절벽에 마치 제비집처럼 지어져 있어 참으로 아슬아슬 합니다. 절 입구에는 “寂滅寶宮(적멸보궁)”이라 새겨진 자연석(自然石)이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 수각(水閣)에는 연화석조(蓮花石槽)에 감로수(甘露水)가 철~ 철~ 흘러 넘침니다.
한 바가지 물로 세속의 번뇌를 씻어 내리며 마음을 가다듬으니 다시 기운이 솟아 남니다. 그 옆으로는 약사불, 미륵불, 불광보탑이 연(連)하여 모셔져 있고, 모두 근세에 모셔진 석조물이라 고색어린 멋은 느끼지 못하겠으며, 조각 기법이나 예술성은 훌륭하여 보는 눈이 아름답슴니다.
조감도에는 이 밖에도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마야불모전(摩耶佛母殿), 종각, 관음전, 나한전, 영암큰스님 부도 사리탑, 영진큰스님 부도 사리탑 등 많은 전각들이 세워져 있슴니다. 시간이 여의치 못해 다 둘러보지 못하고 다음 행선지로 나아 갑니다.
길상암의 풍광을 멀리서 바라보며 몇걸음을 나아가니 낮은 나뭇가지에 “下心(하심)”이라는 명찰(名札)이 보인다. “자기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이라고 새겨져 있어, 소리길의 답사가 꼭 ‘구도(求道)의 길’을 찾아 나서는 고은 著 장편소설“화엄경”에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아 헤매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길을 걷는다는 것, 특히 등산을 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길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낙화담(落花潭)에 이르니, 얼음에 덮인 빙벽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수(瀑布水)는 참으로 장관이다.
평소 찻길로 다닐 때는 보지못했던 아름다운 풍광들에 감탄하면서~ 첩석대(疊石臺), 회선대(會仙臺)를 거쳐 나오니, ‘졸참나무(졸병참나무:참나무 중에 잎이 가장 작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함)’가 필자를 반겨 주심니다.
무언(無言)의 미소(微笑)를 지으며 기~인~ ‘소리길의 탐방’을 마치고 해인사로 오르니, 커다란 사각돌기둥 2개가 좌우(左右)에서 맞아 주시는데... 자세히 보니 “禪敎兩宗大道場(선교양종대도량), 法刹大本山伽倻山海印寺(법찰대본산가야산해인사)”라고 새겨져 있어 여기서 부터는 도량에 들어서는 것이리라.
검문소를 지나 인도(人道)를 따라 몇걸음을 오르니 중간쯤에 “김영환장군팔만대장경수호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김영환 장군(金英煥 將軍. 1920~1954)은 형 김정렬(金貞烈) 장군과 함께 우리 공군 창설과 그 육성에 신명(身命)을 기울였고, 6.25전쟁 중에는 그의 탁월한 결단으로 “고려팔만대장경판”을 포화의 위기에서 구했다.
당시 해인사에는 인민군 낙오자 9백 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1951년 경남지구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한 김영환 장군은 상부의 3~4차례 포격(砲擊) 명령을 어겨가면서 해인사에 포격을 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 후 1954년 3월 5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전사(戰死) 하였다.
그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업적(業績)이 청사(靑史)에 길이 길이 빛나기를 기원(祈願)하면서 선채로 예를 드리고, 도량(道場) 입구의 열반(涅槃) 고승(高僧)님들의 부도(浮屠)밭을 답사(踏査)합니다.
해인사 경내를 먼저 다녀오신 벽송님, 윤갑용님 등 몇 몇 회원님들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돌계단을 오르니, “자운대율사 사리탑비”가 영겁(永劫)의 침묵(沈黙)속에 잠들어 계십니다. 그는 근세에 ‘용탑선원’에 계시면서 자애롭기로 소문난 스님이며, 또 계율정신과 그 실천을 보여준 분이라고 한다.
그 뒤로는 “동곡당 일타대종사 사리탑비”가 자그마 하고 소박하게 모셔져 있다. 스님은 생전에 수행하시면서 ‘소지공양(燒指供養)’으로 널리 알려지신 분으로 살아서 생사리(生舍利)가 많이도 나왔다고 알려져 있으며, 해인사 지족암(知足庵)에 계시다가 영천 은해사 조실스님으로 추대되어 그 곳에서 열반적정(涅槃寂靜)에 드셨다.
맨 위에는 “성철큰스님의 승탑 일월무광3층탑(日月無光三層塔)”이 모셔져 있으며, 성철스님(1911~1992)은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고 이르셨단다. 출가 이 후 늘 참선으로 일관하시며 8년간을 장좌불와(長坐不臥) 하시고, 16년간을 생식으로 수행 하였다 하며, 또 1981년 1월 15일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에 취임하시면서 남기신 법어를 간단히 옮겨 봅니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멸(寂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萬物)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眞理)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아~ 아~ 산(山)은 산(山)이요 물(水)은 물(水)이로다!
평생에 수 백군데를 기운 누더기를 걸치고 검정고무신에 소찬(素饌)으로 살다 가신 스님의 부도(浮屠)가 얼마나 넓고 크게 모셔 졌는지... 한 때는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지나치게 그 규모가 크다고 데모까지 하였다고 하니, 되려 청빈하게 살다 가신 스님의 행적에 누가 되지는 않을지 염려가 됩니다.
구름걷힌 가야산을 바라보며 너털 너털 나려오니 우측으로는 역대 조사님들의 이끼 낀 비림(碑林)이 즐비(櫛比)하게 늘어 서 있고, 그 옆으로 “원경왕사비(元景王師碑)”가 전각(殿閣)안에 모셔져 있다.
일주문 입구에 이르니 “海印寺 碩德 賢覺堂 正圓宗師(해인사 석덕 현각당 정원종사)”님의 영결식이 있어 일주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양해를 구하고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이라 새겨진 거대한 자연석(自然石)을 촬영만 하고 우회해서 진입 합니다.
일주문에는 “伽倻山海印寺(가야산해인사)”라는 현판이 달려 있고, 글씨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의 글씨이다. 또 기둥에는 좌우로 주련(柱聯)이 달려 있는데,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천겁이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만세를 뻗쳐도 항상 오늘 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아울러 반대편에는 “海東第一道場(해동제일도량)”이라 씌여있다.
봉황문(鳳凰門)으로 가는 길 좌우에는 아람드리 전나무와 천이백여 년이 넘는 고사목(枯死木)이 있어 이 또한 볼거리이고, 문 위에는 “海印叢林(해인총림)”이라는 현판이 있어 이 곳이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 등을 두루 갖춘 종합수도원(綜合修道院)이라는 것을 무언(無言)으로 알려 주신다.
다시 ‘국사단(局司壇:해인사 토지신을 위한 건물)’을 지나 解脫門(해탈문)을 들어서니, 맞은편에 九光樓(구광루)가 이층으로 우뚝하며, 해탈문 처마 아래에는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쓴 “海印大道場(해인대도량)”의 현판이 걸려있어 해인사의 격을 한층 더 높여 주심니다.
구광루 옆으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맞은편 높은 계단위에 ‘大寂光殿(대적광전)’이 도량의 중심에 우뚝하고, 정면5칸, 측면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의 건물이다. 또 건물의 남쪽에는 金剛戒壇(금강계단), 동쪽에는 大方廣殿(대방광전), 북쪽에는 法寶壇(법보단)이라는 현판이 각각 다르게 걸려 있다.
뜰 아래 마당에는 고풍스런 3층석탑과 연화무늬와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등 한 기가 서 있는데, 창건 당시의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장중하고 안정감은 있으나 예술성이 그리 높지는 않다.
선채로 간단한 예를 드리고 대적광전 뒤로 돌아 높은 돌계단을 오르니, “八萬大藏經”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 온다. 출입문은 약간 둥글고 낮게 하여 고개를 숙이고 들어 가도록 하여 경외심(敬畏心)을 저절로 갖도록 하였다.
안내문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국보 제32호)”은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三藏)을 일컫는 것으로 대몽항쟁의 여건 속에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고려 조정에서는 1237년부터 1248년 까지 무려 12년에 걸쳐 대장경을 완성하였다.
판수(板數)가 81,258장에 달하고 8만4천의 법문을 실었다 해서 ‘팔만대장경’이라 하며,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고려 현종2년(1011)에 시작하여 선종4년(1087)까지 76년에 걸쳐 완성함]이 만들어진 이 후 고려에서는 ‘의천 대각국사(義天 大覺國師. 1055~1101:문종의 넷째아들)’의 주도로 1092부터 1100년까지 9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 하였는데, 그 수가 1010부, 4740여 권에 달했고, 이 것을 속장경이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초조대장경’이나 ‘속장경’이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거나 소실되어 없어지고 다시 만들은 대장경이 오늘날의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이라 한다. 불력(佛力)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뜻으로 만들어진 ‘재조대장경’은 무려 ‘5천2백만자’의 글자가 오자(誤字)나 탈자(脫字) 없이 정밀하게 만들어 졌다고 한다.
대장경은 본래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었으나 조선 초기(1399년)에 합천 해인사로 옮겨진 후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장경판전(藏經版殿)은 해발고도, 풍향, 일조량 등을 고려하여 건립된 조선 초기 건물이라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경판(經板)의 재질로 보아 해인사 주변의 나무일 가능성과 남해에서 나는 나무일 가능성도 제기(提起) 되고 있어 정설(定說)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유네스코에서는 1995년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수다라장과 법보전, 고려판각을 보관하는 동, 서 사간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2007년에 팔만대장경판과 고려각판 및 제경판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세계적으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법보전(法寶殿) 입구에는 “圓覺道場何處(원각도량하처)”(원만히 깨달을 수 있는 곳이 어느 곳인가?) “現今生死卽是(현금생사즉시)”(지금 生死생사가 있는 바로 이 자리다.)라고 좌우에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그렇다! 살아서 지금(現今)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생애(生涯)에 깨닫겠는가? 우리가 몸 받아 이 세상에 온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던가!
법보전 뒤로는 수 년 전에 세워진 ‘다층석탑’이 한 기가 있는데, 해인사는 배가 나아가는 형국이라 돛대 역할을 한다고 하며, 또 도량 전체의 형국이 화엄(華嚴)의 화(華)자 형식으로 포진되어 있다.
장경각(藏經閣)을 한바퀴 돌아 나오니 낮은 담 넘어로 해인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야산 정상에서 서남으로 뻗어내린 한 줄기의 주산(主山)은 웅장하고, 청룡(靑龍)은 그만 그만 하나 백호(白虎)는 우람하고 지근한 거리에서 안산(案山)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어 참으로 장엄한 길지(吉地)입니다.
멀리서 매화산(梅花山:千佛山)의 꽃봉오리(정상)가 찬란히 빛나고 안산과 조산(朝山)이 물셀틈 없이 감싸주시니, 가야산의 지덕(地德)은 만년을 가고도 남으리라! 이 밖에도 궁현당, 국사전, 응진전, 대비로전, 퇴설당, 관음전, 명부전, 독성각, 범종각 등 끝이 없으니 다 둘러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허허(虛虛)로운 발걸음으로 일주문을 나섬니다.
천지(天地)는 뜻이 있어 가야산을 만들었고
만년의 지덕(地德)속에 僧俗은 오고 가는데
남은 자취는 ‘팔만대장경’에 찬란히 빛나도다!
단기 4348년(서기2015년) 2월 22일
가야산(해인사) 소리길 등산(탐방)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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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산님들! 그간 편안하신지요?
후기가 차일피일 바쁘다는 핑계로 많이도 늦었슴니다.
"해인사(가야산) 소리길" 산행 당일 동참하신 모든회원님들에게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진행에 수고하신 구윤서 회장님을 비롯하여
벽송대장님, 윤갑용부회장(총무)님, 김미소(총무)님, 능선운영위원장님, 윤상복부대장님 등
많은분들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를 드림니다. 또 사진 자료를 제공해 주신 김해진님께도 감사를 드리며,
일부 사진자료는 다른 답사 때 사진을 활용하였슴을 밝힘니다. 이제 3월입니다.
남국에서 밀려오는 봄소식을 님들에게 전해 올리며, 늘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을 빌겠슴니다.
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의 내력 역사공부 잘하고 갑니다.
홍류계곡의 시원한 물줄기하며 아름다운 비경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고고문님 가정에 만복이 늘깃드시고 가족모두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벽송대장님이 다녀 가셨군요!
산행당일 진행에 수고 많으셨으며~
남산의 발전을 위해서 항상 노력하심에 감사드림니다.
보잘 것 없는 장문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세요!
고회장 님의
산행후기 다시한번 산행한 것 같읍니다.
감사합니다.
김선생님! 반갑슴니다.
그간 잘 계시는지요?
늘 함께할 수 있어 참으로 행복합니다.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