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世 문도공파 원경왕후(元敬王后) 태종(太宗)의 왕비,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모후
민칭도(閔稱道)시조(始祖)→ 민세형(閔世衡)→ 민의(閔懿)→ 민영모(閔令謀)→ 민공규(閔公珪)→ 민인균(閔仁鈞)→ 민황(閔滉)→ 민종유(閔宗儒)→ 민적(閔頔)→ 민변(閔忭)→ 민제(閔霽)→ 본인
○ 1365(공민왕 14) ~1420(세종 2)년 7월 10일 56세에 훙(薨)
○ 조선 태종(太宗)의 왕비이자 조선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모후이다, 5代 임금 단종(端宗)의 증조모이고, 6代 임금 세조(世祖)의 조모이며, 세조의 둘째 아들인 8대 임금 예종(睿宗)의 증조모이다,
○ 증조부는 고려조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지낸 민적(閔頔), 조부는 고려조 좌사의대부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민변(閔忭) 중현조. 아버지는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 태종의 장인) 민제(閔霽)이다,
○ 어머니는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여산송씨(礪山宋氏)로, 좌정승(左政丞)을 지낸 여산군(礪山君) 송선(宋璿)의 딸이며, 1342(고려 충혜왕 3)년 ~ 1424(세종 6)년 6월 10일 83 세에 卒하였다,
○ 형제는 4남 3녀, 7남매이다,
장남은 참지중추부사(參知中樞府事)를 지낸 여강군(驪江君) 민무구(閔無咎), 차남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지낸 여성군(驪城君) 민무질(閔無疾), 삼남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낸 여원군(驪原君) 민무휼(閔無恤)이고, 사남은 공안부윤(恭安府尹)을 지낸 여산군(驪山君) 민무회(閔無悔)이며,
장녀는 태종 때 호조판서(戶曹判書), 동북면도체찰사(東北面都體察使)를 지낸 평양조씨(平壤 趙氏) 평원군(平原君) 조박(趙璞)에게 출가하였고,

헌릉
차녀는 태종비 원경 왕후로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차남은 효녕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삼남은 충녕대군(忠寧大君), 이도(李裪) 제4대 세종대왕(世宗大王)이고, 사남은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이고,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 1385년~1460년)는 1399년(정종 1) 영의정부사서원부원군(領議政府事西原府院君) 이거이(李居易)의 아들인 사헌부감찰 이백강(李伯剛에게 하가하였고 차녀 경정공주(慶貞公主, ?~1455년)는 1403년(태종 3)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의 아들 조대림(趙大臨)에게 하가하였으며, 삼녀 경안공주(慶安公主, 1393년~1415년)는 안동 권씨 길창부원군 권근(權近)의 아들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하가하였고, 사녀 정선공주(貞善公主, 1404년~1424년)는 의령 남씨(宜寧南氏) 병조의랑(兵曹議郞) 남경문(南景文)의 아들 의산위(宜山尉) 소간공(昭簡公) 남휘(南暉)에게 하가 하였다.
삼녀는 교하노씨(交河盧氏) 창성군(昌城君) 노직(盧稙)의 손자이고, 대리경(大理卿) 노균(盧鈞)의 아들로,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노한(盧閈)에게 출가하였다.

헌릉
○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네 오빠가 유배되었다가 모두 자진 하였다. 별호는 정비(靜妃), 시호는 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이다.
여흥부원군 문도공 민제(驪興府院君 文度公 閔霽)의 둘째 딸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남편 태종이 왕이 되는 데 막대한 역할을 했으나 후일 남편에 의해 처가가 멸문당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조선 왕조에서 세조의 비 정희왕후, 조선 11代 임금 중종의 비 문정왕후와 더불어 가장 정치적인 왕비이며, 성격 또한 담대하고 괄괄하였다. 1382년(우왕 8) 방원(芳遠)과 결혼했고, 1392년(태조 1)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1398년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왕자들간에 싸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여 무기를 몰래 숨겨두었다가 방원의 군사에게 제공했다. 1400년(정종 2) 방원이 세자에 책봉되자 정빈(貞嬪)에 봉해졌으며, 그해 11월에 방원이 즉위하자 정비(靜妃)가 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 후 잉첩(媵妾)들만 가까이 하자 투기를 하여 사이가 벌어졌으며, 동생인 민무구(閔無咎) 등이 정치적으로 제거당하는 1407년(태종 7) 7월의 옥사를 계기로 불화가 심해졌다. 그후에도 민무구 등의 일로 태종과 사이가 더욱 나빠져 한때 폐비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한편 태종은 이 일이 있은 후 일빈이잉(一嬪二媵)의 빈어제도(嬪御制度)를 마련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한 뒤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에 봉해졌다. 소생으로 세종(世宗)과 양녕(讓寧), 효령(孝寧), 성녕(誠寧)의 세 대군, 정순(貞順), 경정(慶貞), 경안(慶安), 정선(貞善)의 네 공주를 두었다. 능은 헌릉(獻陵)이다. 1424년 창덕소열(彰德昭烈)이 추상(追上)되었다. 시호는 창덕소열원경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이다.
○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 산13번지 1호에 있는 헌릉(獻陵)이다,
○ 참고문헌 -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인조실록(仁祖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순종실록부록(純宗實錄附錄), 여주군史, 선원계보(璿源系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 1382년(우왕 8)에 방원(芳遠)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태조 1)에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제1차왕자의 난 때 부군(夫君)을 도와 공이 출중하였으며, 1400년(정종 2) 2월에 방원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어 정빈(貞嬪)에 봉해졌다. 이해 11월에 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1398년 8월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주살될 때에 그는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때마침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또한 10여일 전에 여러 왕자가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侍衛牌)를 혁파하고 영중(營中)의 군기를 모두 불태울 때 정비가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일이 발생하던 그날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며 선수를 쓰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 초부터 궁녀문제로 불화가 일어났다.
태종과 정비의 불화는 빈어(嬪御)문제로 인한 갈등에 그치지 않고, 1407년(태종 7) 7월에 발발한 민무구(閔無咎)형제의 옥사를 계기로 하여 더욱 더 심각해졌는데, 민무구형제는 이미 태종 2년에 왕이 창종(瘡腫)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시녀를 끼고 왕의 병세를 염탐하며 은근히 협유집권(挾幼執權)의 기회를 노렸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정비가 직접 참여한 것 같지는 않지만, 민무구형제가 끝내 대역(大逆)에 몰려 비명으로 죽게 된 데에는, 정비의 정도에 지나친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에 거슬린 것이 곧 민무구형제에게 영향을 주어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게 하고, 그들의 방자한 행동을 도와주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비는 민무구형제의 옥이 발발한 4개월 후 금령을 범하여 친정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서 그들의 옥을 악화시키는 요인을 만들었다. 정비가 친정과 내통한 일이 있던 직후, 민무구형제의 직첩(職牒)을 거두어 서인을 만들 정도로 정비의 무엄한 태도에 태종이 격분하였던 것이다.
민무구형제는 그뒤 태종이 정비의 면목과 장인 민제와 빙모 송씨(宋氏)의 생존으로 인하여 겨우 생명을 보전해나갔으나, 1408년 9월 민제가 죽자, 같은해 10월에 태종은 그들의 열가지 죄를 열거한 교서를 반포하였고, 1409년 10월에 그들의 옥에 관련된 이무(李茂)를 죽였다.
그동안 정비는 민무구 등의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말을 자주 하여 왕의 분노를 여러 번 사서 민무구형제가 죽은 지 1년 남짓 된 11월 9일에는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태종은 일빈이잉(一嬪二媵)의 빈어제도를 정하여, 같은해 10월 27일에 판통례문사 김구덕(金九德)의 딸을 빈으로 삼아 명빈(明嬪)에 봉하고, 전 제학 노구산(盧龜山)의 딸과 전 지함주사 김점(金漸)의 딸을 잉실(媵室)로 삼아 각각 소혜궁주(昭惠宮主)와 숙공궁주(淑恭宮主)로 봉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여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봉하고, 1420년 7월 56세로 죽었다. 시호는 원경왕후로 창덕소열(彰德昭烈)이라는 휘호(徽號)가 추상되었다. 소생은 세종(世宗)과 양녕(讓寧)·효령(孝寧)·성녕(誠寧)의 3대군과 정순(貞順)·경정(慶貞)·경안(慶安)·정선(貞善)의 4공주가 있다. 능은 헌릉(獻陵)이다.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가계(家係)
아버지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문도공(文度公) 민제(閔霽)
(1339년~1408년)---↓---어머니
삼한국 대부인
(三韓國 大夫人)
여산송씨(礪山宋氏)
--
언니(개국공신 평원군 조박(趙璞)에게 출가)
여동생(우의정 노한(盧閈)에게 출가)
남동생: 민무구(閔無咎)
남동생: 민무질(閔無疾)
남동생: 민무휼(閔無恤)
남동생: 민무회(閔無悔)
---↓---남편
제 3대 태종
(太宗, 1367년~1422년)---↓---원경왕후((元敬王后 )
민 氏---↓---장남(일찍죽음)
차남(일찍죽음)
3남(일찍죽음)
4남: 양녕대군 제(讓寧大君 褆,)
5남: 효령대군 보(孝寧大君 補,)
손자 : 보성군
6남: 충녕대군 도(忠寧大君 裪,)제4대 세종(世宗)
며느리 : 소헌왕후 심씨, 심온의 맏딸)
손녀 : 정소공주 손자 : 제 5대 문종
증손 : 제 6대 단종
손자 : 제 7대 세조
증손 : 추존왕 덕종
증손 : 제 8대 예종
손자 : 안평대군
손자 : 임영대군
손자 : 광평대군
손자 : 금성대군
손자 : 평원대군
손자 : 영응대군
7남: 성녕대군 종(誠寧大君 褈, 1405년~1418년)
1녀: 정순공주(貞順公主, 1385년~1460년)
2녀: 경정공주(慶貞公主, ?~1455년)
3녀: 경안공주(慶安公主, 1393년~1415년)
4녀: 정선공주(貞善公主, 1404년~1424년)--
조선실록 태조에서 순종에 이르기 까지 279회 기록 되어 있다. 어느 왕대를 막론하고 대부분 왕대에 등장한다.
헌릉(獻陵)
사적 제194호.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1420년(세종 2) 원경왕후가 죽자 지금의 내곡동인 광주(廣州) 서대모산(西大母山)을 능지로 선정했으며, 1422년 태종이 죽자 왕후 옆에 봉릉(奉陵)했다. 태종은 불교 요소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국상에 법석(法席)은 물론 원찰(願刹)도 금하여 헌릉에는 원당이 없으며 다만 현판류(懸板類) 8점이 남아 있다. 헌릉의 상설(象說)은 고려 현릉(玄陵)과 정릉(正陵)의 제도를 답습하여 봉분을 2기로 하되 주위의 난간을 터서 연결시키고, 망주석(望柱石)을 제외한 모든 석물(石物)을 한 벌씩 갖추어 쌍으로 배치한 쌍릉제이다.
봉분 하부에는 병풍석(屛風石)을 만들어 우석(隅石)에는 영저(靈杵)·영탁(靈鐸)을 돋을새김했고, 면석(面石)에는 와형운무늬[渦形雲紋]를 두르되 중앙에 각 방위별로 수관인신(獸冠人身)의 12지신상을 새겨넣었으며, 하단에는 영지(靈芝)를 새겼다. 병풍석에는 앙련(仰蓮)·복련엽(伏蓮葉)을 새겼으며, 그 앞은 낮은 돌계단으로 되어 있다. 비각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손상되어 1695년(숙종 21) 다시 세웠다. 변계량(卞季良)이 찬(撰)하고, 박태상(朴泰尙)이 기(記)했으며, 이덕성(李德成)이 글씨를 쓰고, 홍수주(洪受疇)가 전(篆)했다.
○ 조선실록 ○
○ 정종 2년(1400 경진 / 명 건문(建文) 2년) 3월 4일(기사) 1번째기사, ○
민씨(閔氏)를 봉하여 세자 정빈(貞嬪)으로 삼았다. 책문(冊文)은 이러하였다. “배필(配匹)을 중하게 하는 것은 인륜(人倫)을 두텁게 하는 것이요, 위호(位號)를 높이는 것은 명분(名分)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에 성한 예전(禮典)에 따라서 아름다운 칭호를 세우노라. 아! 그대 민씨는 세가(世家)에 나서 군자(君子)에 배필이 되어, 일찍부터 부드럽고 아름다운 의측(儀則)을 나타내었고, 항상 고요하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졌었다. 그른 것도 없고 마땅치 않는 것도 없이 중궤(中饋)140) 를 주장하여 바르고 길(吉)하였으며, 반드시 경계하고 반드시 조심하여 내조(內助)를 다해서 삼가고 화합하였도다. 이미 풍화(風化)의 근원을 두텁게 하였으니, 마땅히 종묘(宗廟)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겠으므로, 그대를 책봉하여 왕세자(王世子) 정빈(貞嬪)으로 삼노라. 아아! 매양 계명(鷄鳴)141) 의 경계를 바쳐 덕음(德音)을 어기지 말고, 길이 인지(麟趾)142) 의 상서에 응하여 복록을 받을지어다. 나도 이로써 그대의 아름다움을 기뻐하노라.”
○ 세종 2년(1420 경자 / 명 영락(永樂) 18년) 8월 24일. ○
「 참찬(參贊) 변계량(卞季良)이 올린 헌릉(獻陵) 지문(誌文) 」
“삼가 안찰(按察)하여 보니, 태후 민씨(閔氏)는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시다. 고려 문하 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문경공(文景公) 휘(諱) 영모(令謨)로부터 육세(六世) 뒤에 황고조(皇高祖)인 휘(諱) 종유(宗儒)가 의릉(毅陵 ; 공민왕의 능) 을 도와 벼슬이 도첨의 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이르고,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이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을 나으시니, 휘(諱)는 적(頔)이요, 문순(文順)이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 휘(諱) 변(抃)을 낳으시고, 대광(大匡)이 황고(皇考)를 낳으시니, 순충 동덕 찬화 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諱) 제(霽)이시고, 황비(皇妣) 송씨(宋氏)는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封)하셨으니,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諱) 선(璿)의 따님이다. 을사년 정묘(丁卯7월 11일) 에 태후(太后)를 송경(松京) 철동(鐵洞) 사제(私第)에서 낳으셨다.
태후가 어려서부터 맑고 아름다우시며, 총명하시고 인자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출가할 나이에 배필을 고르시다가 우리 성덕 신공(盛德神功) 상왕의 빈(嬪)으로 들어오셨다. 상왕이 젊어서부터 세상을 경영할 뜻을 두시고 경사(經史)에만 마음을 쓰시고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아니하셨으나, 태후께서 살림하는 데 능숙하시고 주부로서 음식새에 삼가하시여 남편의 공을 이룩하도록 힘쓰셨고, 여려 아들을 가르쳐서 옳은 데로 따르게 하셨고, 시첩들을 예로 대하여 부인의 도리에 극진하셨다. 홍무(洪武) 임신(壬申)에 상왕이 태조를 도우셔서 개국하게 되시니 정녕 옹주(靜寧翁主)에 봉하였고, 경신(庚申)에는 공정왕(恭靖王)이 뒤 이을 아드님이 없으시므로 우리 상왕을 세자(世子)로 봉하시면서, 태후는 정빈(貞嬪)에 봉하셨다. 그 해 11월에 상왕이 공정왕(恭靖王)의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卽位)하시면서 정비(靜妃)에 봉(封)하셨고, 영락 계미 4월에 황제가 조거임(趙居任)을 보내어 우리 상왕을 조선 국왕(朝鮮國王)으로 봉(封)하고, 그 해 10월에 황제가 태후에게 관(冠)·포(袍)를 내렸으니, 화려함이 비할 데 없었다. 이 해부터 정유년까지 여러 번 황제의 내림을 다섯 차례나 받았다.
무술년 8월에 상왕이 우리 주상 전하에게 선위(禪位)하시니, 전하가 즉위하시면서 그 해 겨울 11월 갑인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상왕에게는 성덕 신공(盛德神功)의 존호(尊號)를, 태후에게는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란 존호를 올렸고, 기해년 정월에 황제가 고명(誥命)과 새인(璽印)을 내려 우리 주상 전하를 국왕으로 봉(封)하였다. 경자년 5월 25일에 태후가 병환이 드시었는데, 상왕은 매일 오셔서 보시었고, 주상은 곁에 모시고서 부채[扇]로 서늘하게 하며 침석을 보시고 친히 탕약(湯藥)을 받들어 무릇 구료하심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7월 10일에 수강궁 별전에서 훙(薨)하시니, 춘추가 56세이시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아래로 복예(僕隷)에 이르기까지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아아, 슬프도다. 상왕이 슬퍼하심을 이기지 못하시어 조금 평안치 못하시니, 주상이 대신을 보내어 육선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시고 흰옷과 소찬으로 30일을 지내셨으며, 주상은 애통함이 다할 데 없으시어 양암(樑闇)423) 에 거처하시니, 상왕이 장례 뒤에 복을 벗으라 허하셨다. 주상이 9월 14일에 존호(尊號)를 올려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라 하였다. 대신이 헌의(獻議)하기를, ‘오월(五月)만에 장례하는 것은 예(禮)이나, 송나라 제도에 왕공(王公) 이하는 모두 3월이면 장사하라.’ 하였고, 이제 주상은 오랫동안 양암(樑闇)에 거하시어 〈상왕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니, 마땅히 그 때의 편의에 참작하여 송나라 제도에 따라 하기를 청하였더니, 상왕이 윤허하시어 석달 되던 9월 17일에 광주군(廣州郡) 대모산(大母山)에 안장하시고 능 이름을 헌(獻)이라 한다. 태후(太后)께서 유한 정정(幽閑貞靜)의 덕을 타시어 능히 성상(聖上)의 배필이 되시어 19년 동안 내치(內治)에 전력하셔서 내정이 엄숙하고 화락하였으며, 또 성자(聖子)를 낳으셔서 종사(宗社)의 주인이 되게 하고 영귀한 봉양을 누리게 되시니, 아아, 거룩한 일이다. 태후가 사남(四男)과 사녀(四女)를 낳으셨으니, 우리 주상 전하는 셋째이시다. 맏아들은 이제(李禔)이니, 일찍이 세자(世子)가 되었다가 덕에 삼가하지 못하여 여러 신하들이 세자(世子) 되기가 마땅치 않다 하여, 상왕이 황제에게 알리고 폐하여 양녕 대군에 봉하였고, 다음은 이보(李補)이니, 효령 대군에 봉하고, 다음은 이종(李褈)이니, 성녕 대군(誠寧大君)에 봉하였으나 먼저 돌아갔다.
맏딸은 정순 궁주(貞順宮主)이니,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하가(下嫁)하였으니, 본이 다른 이씨이다. 다음은 경정 궁주(慶貞宮主)이니,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하가하였고, 다음은 경안 궁주(慶安宮主)이니, 길창군 권규(權跬)에게 하가하였으나, 또 앞서 돌아갔다. 다음은 정선 궁주(貞善宮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하가하였다. 우리 중궁(中宮) 공비 심씨(恭妃沈氏)는 문하 시중(門下侍中) 휘(諱) 심덕부(沈德符)의 네째 아들인 온(溫)이 따님이시다. 4남과 2녀를 낳으셨으니 아직 모두 어리다. 양녕은 김한로(金漢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리며, 효령은 호조 판서 정역(鄭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5남 1녀를 두었는데 다 어리고, 성녕은 경창부 윤(慶昌府尹) 성억(成抑)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고, 정순 궁주는 딸이 동부지돈녕(同副知敦寧) 이계린(李季疄)에게 출가하니, 본이 다른 이씨이다. 1녀를 낳았으나 어리다. 경정 궁주는 4녀를 낳았으니, 큰딸은 유학(幼學) 안진(安進)에게 출가하고, 그 아래로는 아직 어리다. 경안 궁주는 2남을 낳았으니, 권담(權聃)은 사헌부 장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재취하였고, 다음은 어리며, 정선 궁주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고 하였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권홍(權弘)을 시켜 돌[石]에 쓰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책 393면
원문
謹按, 太后閔氏, 驪興世家, 自高麗門下侍郞平章事文景公諱令謨六世, 而至皇高祖諱宗儒, 相毅陵, 位都僉議侍郞贊成事, 諡忠順。 忠順生皇曾祖判密直司事諡文順諱頔, 文順生皇祖大匡驪興君諱抃, 大匡生皇考純忠同德贊化功臣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諡文度諱霽, 皇妣宋氏, 封三韓國大夫人, 高麗重大匡礪良君諱璿之女。 以乙巳丁卯, 生太后于松京鐵洞私第。
太后生而淑懿, 聰惠異常, 將筓擇配, 來嬪于我聖德神功上王, 少有濟世之志, 留心經史, 不事家産。 太后能給於治家, 謹於主饋, 以勉其功。 敎誨多男, 俾循義方, 禮遇妾侍, 克盡婦道。 洪武壬申, 上王扶太祖開國, 封靜寧翁主。 歲庚辰, 恭靖王以無繼嗣, 封我上王世子, 封太后貞嬪。 其年十一月, 上王受恭靖王內禪卽位, 封靜妃。 永樂癸未四月, 帝遣趙居任, 封我上王爲朝鮮國王。 是年冬十月, 帝賜太后冠袍, 鮮麗罕比。 自是年至丁酉, 累受帝賜凡五。
戊戌八月, 上王禪位于我主上殿下, 殿下卽位, 以其冬十一月甲寅, 奉冊寶獻號, 上王曰聖德神功, 太后曰厚德王大妃。 己亥正月, 帝賜誥印, 封我主上殿下爲國王。 庚子五月二十五日, 太后感疾, 上王日至視疾, 主上侍側扇枕, 親奉湯藥, 凡所救療, 無所不至。 七月十日, 薨于壽康宮別殿, 春秋五十六。 大小臣僚下至僕隷, 莫不痛哭。 嗚呼痛哉!
上王不勝軫悼, 稍不豫, 主上遣大臣請進肉, 不許。 以白衣素膳, 終三十日。 主上哀慟罔極, 居于(樑)〔諒〕闇, 上王許於葬後釋服。 主上以九月十四日, 上尊號曰元敬王太后。 大臣獻議以爲: “五月而葬, 禮也。 然宋制, 王公以下皆三月而葬。 今主上久居諒闇, 不得問安, 當酌時宜, 以從宋制。” 上王許之。 越三月十七日壬午, 安厝于廣州治之大母山, 陵曰獻。
太后稟幽閑貞靜之德, 克配聖上, 以專內治十九年間, 壼儀肅穆。 又誕聖子, 俾主宗社, 以享榮養。 嗚呼盛哉! 太后誕四男四女, 我主上殿下居三。 長曰褆, 嘗爲世子, 不謹于德, 群臣上言不宜儲副, 上王聞于帝廢之, 封讓寧大君。 次曰補, 封孝寧大君, 次曰〔褈〕, 封誠寧大君, 先卒。 長女貞順宮主, 下嫁淸平府院君李伯剛, 非一李也。 次慶貞宮主, 下嫁平壤君趙大臨, 次慶安宮主, 下嫁吉昌君權跬, 亦先卒。 次貞善宮主, 下嫁宜山君南暉。
我中宮恭妃沈氏, 門下侍中諱德符第四子溫之女也。 誕四男二女, 皆幼。 讓寧娶金漢老之女, 生三男一女, 皆幼。 孝寧娶戶曹判書鄭易之女, 生五男一女, 皆幼。 誠寧娶慶昌府尹成抑之女, 無子。 貞順宮主生女, 適同副知敦寧李季疄, 亦非一李, 生一女, 幼。 慶貞宮主生四女, 長適幼學安進, 餘幼。 慶安宮主生二男, 聃改娶司憲掌令鄭淵之女, 次幼。 貞善宮主生一男一女, 幼。命判敦寧府事權弘書諸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