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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2의 고봉 K2(8,611m)는 현지인들이 ‘거대한 산’이란 뜻의 초고리(Chogo-Ri)라고 부르지만, 이 이름이 K2의 명칭a으로 아직 공인받지 못했다. 이 산은 ‘산중의 산(The Mountain of Mountains)’, ‘잔혹한 산(The Savage Mountain)’, 또는 ‘산악인의 산(The Mountaineer’s Mountain)’이란 별칭을 지니고 있는데, 이 삼각형의 아름다운 산은 행운과 재난을 상징하는 ‘빛의 다이아몬드’, 즉 코히누르(Kohinoor)의 이름을 따서 ‘히말라야의 코히누르’라고 부를 만하게 영광과 비극이 되풀이된다.
K2의 노멀 루트인 동남릉( 아브루치능선)은 모든 8,000m급 봉들의 루트 중에서 최난 코스다. 1994년까지 에베레스트 등정자가 600명을 초과한 반면 K2 등정자는 113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K2 접근이 에베레스트 접근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K2 등반 고난도에 대한 무언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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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2 남벽과 베이스캠프. 중앙 능선이 매직라인, 우측 능선이 아브루치 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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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파키스탄 관광성은 K2 남남서릉(매직라인), 남벽, 남동릉( 아브루치능선), 북서릉 4개의 루트에 9개 팀의 등반허가를 내주었다. 이탈리아의 단독 등반가 레나토 카사로토는 자신의 부인 고레타와 두 명의 바스크(스페인의 서부) 산악인과 함께 K2의 남쪽 베이스캠프(5,000m)에 도착했다. 레나토는 1979년 자신의 등반이 좌절되었던 남남서릉, 즉 매직라인을 단독 등반하고, 두 명의 동료는 아브루치능선을 등반할 예정이었다.
모리스 바라르가 이끄는 4명의 프랑스 팀(폴란드 여성 산악인 반다 루트키에비츠 포함)은 아브루치능선이 목표였다. 영국의 유명 산악인 알란 라우스 대장이 이끄는 11명의 등반대는 북서릉을 등반할 계획이었고, 이탈리아의 쿠오타(Quota) 8,000 팀은 매직라인을 등반하려 했으나, 나중에 아브루치능선으로 등로를 변경했다.
미국의 존 스몰리치 대장이 이끄는 등반대는 매직라인을 등반목표로 삼았고, 독일의 카를 헤를리히코퍼 박사가 이끄는 국제대는 남벽에 신 루트를 개척하려고 했다. 오스트리아의 알프레드 이미처 대장과 한국의 김병준 대장은 아브루치능선의 등반허가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폴란드의 야누츠 마예르는 3명의 여성 산악인들을 포함한 8명의 대원을 이끌고 매직라인을 등반할 계획이었다. 이리하여 최소 4명으로 구성된 카사로토 팀으로부터 최대 19명으로 구성된 한국 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처에서 80명이 넘는 산악인들이 K2의 베이스캠프에 집결해 커다란 캠프촌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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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브루치의 하우스 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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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모리스-릴리앙 바라르 부부 등정 후 하산 중 사망
서벽과 남벽 사이의 능선으로 K2의 최대 난코스, 즉 남남서릉(일명 남서 필라 루트)에 ‘매직라인’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준 산악인은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였다. 그는 1979년 6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등반대를 이끌고 이 루트 등반을 최초로 시도했다.
그의 등반대에 참가한 산악인들은 알프스 그랑드조라스 북벽 워커스퍼 단독 등정자 알레상드로 고냐, 25세의 젊은 나이에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8,000m급 3개봉을 등정한 오스트리아 산악인 로베르트 샤우어(훗날 폴란드 산악인 쿠르티카와 함께 가셔브룸 4봉의 서벽 ‘빛나는 벽’ 등반함), 8,000m급 2개봉 등정자 독일 산악인 미셀 다허, 파타고니아 피츠로이 북동 필라 초등자 레나토 카사로토였다.
K2의 남남서릉의 등반기점에 도달하려면 사보이아 빙하를 거쳐 K2 서벽 아래를 우측으로 통과해 네그레토 콜까지 오르는 길을 따르거나, 또는 고드윈 오스틴빙하에서 필리피빙하로 네그로토 콜까지 오르면 된다. 메스너 대는 K2의 서벽 아래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포터 한 사람이 크레바스에 빠져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해는 얼음 사태의 위험 때문에 서벽 밑으로 네그로토 콜까지 진출하는 것이 난감했다. 이리하여 메스너 대는 등로를 아브루치릉으로 바꾸고 7월 12일 메스너와 다허가 등정에 성공했다. 이때 레나토 카사로토는 이 등반대의 등로 변경에 크게 실망했고, 훗날 매직라인을 단독 등반 시도 중에 비극을 겪게 된다.
1979년 프랑스의 베르나르 멜레 대장이 이끈 최정예 클라이머들로 구성된 등반대가 네그로토 콜에서 정상까지 수직고 2,300m의 등반을 시작했다. 그들은 여러 개의 바위 스텝을 돌파하고, 능선 중간 부근에 위치한 ‘버섯’ 모양의 암탑, 즉 사우스 웨스트 필라(Southwest Pillar)를 돌파했다. 그들은 그 필라 상부의 평평한 빙원을 지나고 얼음이 살짝 얼어붙어 있는 암벽에 도달하고, 이 능선 상의 8,350m 지점에 최종캠프를 구축한 다음 다섯 차례나 정상공격을 시도했으나 거듭되는 악천후에 의해 실패했다.
2년 뒤인 1981년 일본의 데루오 마추우라 대장이 이끄는 K2 서릉 팀의 오타니 대원과 셰르파 사비르가 서릉 상부에서 우측으로 서벽 상부를 횡단하고 매직라인 8,350m 지점에 도달했다. 두 사람은 프랑스 대의 매직라인 상의 미등 구간을 등반하여 K2의 정상을 밟았다. 그러니까 남남서릉은 프랑스 대와 일본 대에 의해 부분 등반으로 등정된 셈이지만 완등되지는 못했으며, 여전히 매력을 지닌 루트였다.
1986년 미국대가 이 루트에 과감하게 도전하면서 그 해 6월 21일 K2에서 첫 번째 비극이 발생했다. 존 스몰리치 대장과 알란 페닝턴이 등반 기점인 네그로토콜을 향해 고드윈 오스틴빙하에서 필리피빙하로 향하던 중 설사면에서 쏟아져 내린 수천 톤의 거대한 눈사태가 덮쳐 목숨을 잃었다. 눈 속에 매몰된 페닝턴의 시신은 발견되어 아트 길키(1953년의 최초의 희생자)-푸초츠(1954년 이탈리아 초등대의 희생자) 묘지에 매장되었지만, 스몰리치 대장의 유해는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미국대는 이 루트의 등반을 포기했고, 이탈리아 쿠오타 8,000 팀도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자신들의 등로를 매직라인에서 아브루치릉으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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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정 후 실종된 모리스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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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 폴란드 여성 반다 루트키에비츠, 프랑스 산악인 모리스와 그의 부인 릴리앙 바라르, 파리의 언론인 출신인 미셀 파르멘티에르 4명과 레나토 팀의 바스크 산악인 2명, 마리 아브레고와 호세마 카시미로(Josema Casimiro), 이렇게 모두 6명이 아브루치능선으로 그 해 처음 K2의 정상에 섰다.
반다 루트키에비츠는 무산소로 K2를 등정하여 최초의 여성 K2 등정자가 되었다. 모리스는 1980년 한 명의 동료와 히든피크(가셔브룸 1봉·8,068m)에 알파인스타일로 신 루트를 개척했고, 1982년 자신의 부인 릴리앙 바라르와 가셔브룸2봉을 등정했으며, 1984년 낭가파르바트를 등정하여 릴리앙 바라르는 낭가파르바트의 첫 번째 여성 등정자가 되었다. 이 부부는 1985년 마칼루에도 도전했으나, 정상에서 대략 40m 아래 지점까지 진출했을 때 사람을 날려보낼 정도의 강력한 폭풍을 만나 퇴각했다.
프랑스 팀이 하산할 때 릴리앙이 탈진으로 하산 속도가 너무 늦어지자, 모리스 대장은 아브루치능선의 상부 최난코스인 보틀넥(Bottleneck) 위쪽 8,300m 지점, 즉 그들이 지난 밤 비박했던 지점에서 다시 비박하자고 주장했고, 완다는 계속 하산을 원했지만 K2를 무산소로 등정하고 나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행복감(Euphoria)에 도취되어 모리스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이튿날 바라르 부부는 하산 도중 뒤로 처졌다가 실종되어 불귀의 객이 되면서 그 해 K2에서의 두 번째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완다는 극도의 탈진을 극복하고 무사히 하산했고, 미셀 파미멘티에르는 숄더에서 기상이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바라르 부부를 기다리다가 화이트 아웃 속에서 혼자 하산했다. 그는 길을 잃고 절벽을 헤맸으나 무전기를 이용하여 베이스캠프와 연락을 취하며 천신만고 끝에 눈 위에 얼어붙은 오줌자국과 고정 자일을 발견하여 무사히 귀환했다. 1주일 후에 아브루치능선 상의 숄더 아래쪽 남벽의 기슭에서 릴리앙 바라르의 시신이 눈사태의 퇴적물과 함께 발견되었지만, 그녀의 남편 모리스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7월 5일 이탈리아 쿠오타 8,000 팀의 대원 6명(체코 산악인 요체프 라콘카이, 프랑스 산악인 브뉴와 샤모 포함)과 헤를리히코퍼 박사의 남벽 팀에서 탈퇴한 두 명의 스위스 산악인 베다 후스테르와 롤프 쳄프가 아브루치능선으로 K2의 정상을 밟았다. 라콘카이는 3년 전 K2를 이미 등정했기 때문에 K2를 최초로 두 번 등정한 산악인이 되었다. 또한 브뉴와 샤모는 다른 등반대가 설치한 고정자일과 고정 캠프를 이용하여 23시간 만에 아브루치능선으로 K2를 등정하여 스피드 클라이밍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는 11번째 8,000m급 고봉 등반으로 K2의 남벽을 등반했다. 그는 로체를 제외하고 8,000m급 9개봉을 신 루트로 또는 동계 초등으로 이미 등정한 경력이 있었다. 그의 자일 파트너인 타에우츠 피오트로브스키는 폴란드의 타트라산군, 알프스, 노르웨이 등지에서 여러 차례 동계 초등을 이룩했고, 힌두쿠시의 7,000m급 봉우리인 노사크(Noshaq)도 동계 초등한 유명 산악인이었다.
두 사람은 남벽 중앙 기슭의 빙탑 아래에서 비박하고, 15분 동안 죽음의 공포를 감내하며 매우 위험한 빙탑 밑을 돌파했다. 이전에 메스너를 비롯한 다른 산악인들은 이곳의 돌파를 꺼려서 K2의 남벽 등반을 포기했다. 쿠쿠츠카 팀은 남벽의 7,000m 지점까지 장비와 고정 로프를 운반하고, 기상악화로 인해 베이스캠프로 하산하여 열흘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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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2의 북벽(우측 능선이 북서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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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두 사람은 남벽 상부의 ‘하키 스틱’이라고 불리는 길고 구부러진 걸리(gully) 등반을 시작했다. 그들은 걸리 속에서 두 번 비박하고 높이 100m의 록밴드 밑에 도달했는데, 이 암벽은 난이도가 V급 혹은 VI급이었다. 그들이 K2 남벽의 최대 난코스인 이 록밴드 하단 30m를 돌파하는 데 하루종일 걸렸다. 암벽 등반의 달인 쿠쿠츠카도 록밴드 등반에서 한 번에 1cm 이상 전진할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들이 등반을 끝내고 아래쪽 비박지로 되돌아왔을 때, 멀리 지평선에 모루(anvil) 구름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악천후를 예고했다. 쿠쿠츠카가 요리하기 위해 얼어버린 손가락으로 마지막 남은 가스통을 만지다가 실수로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들은 이제 음료수 장만은 물론 음식도 준비할 수 없었고, 따라서 탈수증상으로 고통 받기 시작했다. 다음날 쿠쿠츠카는 자신의 배낭 속을 샅샅이 뒤져 양초 반 토막을 찾아내고, 그것으로 한 컵의 눈을 녹여 음료수를 만들어 마지막으로 나누어 마셨다.
그들은 7월 8일 오후 쿠쿠츠카의 선등으로 아브루치능선 상부에 도달하여, 모든 비박 장비를 남겨두고 정상능선으로 등반을 계속했다. 그들이 정상 아래 마지막 빙탑에 도달했을 때, 눈발이 거세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둠이 다가오는 가운데 K2 남벽에 신 루트인 ‘폴란드 루트’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정상에서 200m쯤 하산해 설동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 비박했다.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부둥켜안고 혹한과 탈진에 시달리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일각이 여삼추같이 지나갔다. 다음날 그들은 화이트아웃 속에서 보틀넥 옆의 암릉으로 하루 종일 하산하여 숄더 위쪽에 도달하여 다시 비박했다.
그들은 3일간 아무런 음료수도 마시지 못했고, 어떤 음식도 먹지 못한 굶주린 상태였다.
다음날 아침 쿠쿠츠카가 기진맥진한 상태로 숄더 아래로 내려 왔을 때 짙은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여 가시거리가 호전되었고, 블랙타워 위쪽의 제3캠프의 텐트들이 내려다 보였다. 그곳에만 도달할 수 있다면 음식을 입에 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텐트들이 천국처럼 여겨졌다. 그때 비극이 발생했다. 뒤따르던 피오트로브스키의 한쪽 아이젠이 느닷없이 벗겨져 빙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잠시 후에 다른쪽 아이젠마저 역시 절벽으로 떨어졌다. 빙벽 한가운데 박은 아이스 액스에 매달려 있던 피오트로브스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미끄러지며 하마터면 쿠쿠츠카와 충돌할 뻔하다가 절벽 아래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쿠쿠츠카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빙벽을 내려와 피오트로브스키가 떨어뜨린 아이젠을 회수했다. 그의 구식 아이젠의 가죽끈이 묶여 있는 상태로 미루어 보아, 피오트로브스키가 탈진상태에서 아이젠을 착용할 때 가죽끈을 제대로 묶지 않은 것 같았다. 쿠쿠츠카는 사라진 동료의 이름을 목청껏 불러댔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쿠쿠츠카는 극도의 탈진 상태에서 서서히 하산하여 고정 자일을 발견했다. 그는 약간의 동상을 입고 베이스캠프로 무사히 귀환했다. 그때까지 K2에서 5명의 산악인들의 죽음은 베이스 캠프에 머물고 있던 여러 등반가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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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2 BC. 레나토, 요세라, 쿠르트, 툴리스(좌측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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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크레바스에 빠졌어요. 그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요”
이탈리아의 유명 산악인 레나토 카사로토는 자신의 아내를 K2의 베이스캠프에 남겨두고, 2개월 동안 매직라인 단독등반에 매달렸다. 그는 1983년 브로드피크 북봉(7,550m)을 7일 만에 단독 등정했다. 당시 그는 브로드피크의 북릉의 가파른 암·빙벽 혼합구간을 돌파하고 7,500m 지점에서 선 채로 비박하고 등정 후 3일 만에 하산했다. 그는 또한 1984년 북미 매킨리(6,194m)의 기나긴 북동릉을 단독 초등하고, ‘돌아오지 않는 능선(Ridge of No Return)’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K2의 매직 라인을 세 차례 단독 등반하고 악천후를 만나 하산했는데, 이번에 8,300m 지점 진출을 끝으로 매직라인 등반을 포기하고 아내와 귀국할 작정이었다. 오스트리아 산악인 쿠르트 디엠베르거는 레나토 카사로토가 하산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멋진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망원렌즈를 그의 하산 루트에 고정시켰다. 디엠베르거는 레나토가 한 개의 점의 모습으로 네그레토 콜 아래의 필리피빙하 상 여러 크레바스들과 곧 무너질 것 같은 빙탑들 사이로 하산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5분만 하산하면 필리피빙하를 다 내려와 고드윈 오스틴빙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카사로토가 갑자기 디엠베르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디엠베르거는 베이스캠프에 위치한 레나토의 아내 고레타의 텐트로 달려가, 레나토에게 급히 무전을 걸도록 재촉했다. 카사로토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들려왔다. 그의 아내 고레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남편이 크레바스에 빠졌어요. 그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요.”
구조대가 급조되었다. 디엠베르거와 툴리스는 로프와 아이스스크루를 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탈리아 산악인 아고스티노는 손에 워키토키(휴대용 무전기)를 들고 레나토와 계속 대화를 나누며 현장으로 접근했다. 레나토는 여느 때 무사하던 스노브리지가 갑자기 무너지며 크레바스 밑으로 40m 정도 추락했다. 구조대가 레나토를 크레바스 밖으로 끌어냈을 때, 그는 복합 골절상과 내상으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구조대는 그의 시신을 숨은 크레바스 속으로 다시 내려 눈으로 매장했다. 위대한 산악인 한 사람이 이렇게 산에서 종말을 맞이했다.
디엠베르거 경고 무시한 오스트리아팀 C3 눈사태에 붕괴
1986년 한 해 동안의 K2 등반기록은 에베레스트 초등 이후 어떤 산에서 이룩된 등반 기록의 양을 훨씬 능가한다. 기상이 호전되자 야누츠 마예르 대장의 폴란드 대가 매직라인에서 전력투구하며 등반 중이었고, 아브루치능선에서는 한국 대, 오스트리아 대, 이탈리아대 대원이었던 오스트리아 산악인 쿠르트 디엠베르거와 영국 여성 산악인 줄리 툴리스 조, 영국의 북서릉 등반대장 알란 라우스와 폴란드 여성 산악인 도브로슬라바 울프(별명 므루브카, 거미) 조가 등반 중이었다.
알파인스타일 등반의 달인이었던 알란 라우스는 K2에서 신 루트 이외의 다른 루트에 대해 무관심했지만, 자신의 북서릉 등반대가 7,000m 지점까지 진출하고 와해되자, 빈손으로 여러 지원 업체들이 있는 영국으로 귀국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대원이었던 카메라 맨 커란과 K2를 촬영하려고 남쪽 베이스캠프에 왔다가 폴란드 여성 산악인 울프를 만났고,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하여 밀회 장면이 한국등반대의 여러 대원들에게 목격되기도 했다. 울프는 자신이 매직라인으로 등정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자신의 목표를 아브루치능선으로 바꾸고, 알란 라우스를 설득하여 함께 등정하려 했다.
오스트리아 대와 한국 대는 아브루치능선의 블랙피라미드 위쪽에 제3캠프를 구축했다. 7월 28일 쿠르트 디엠베르거와 줄리 툴리스 조, 4명의 오스트리아 산악인들이 아브루치능선으로 출발했다. 29일 저녁 늦게 알란 라우스와 울프가 출발했다. 29일 자정에 폴란드 대는 매직라인에서 마지막 시도를 하려고 네그레토 콜로 출발했다.
며칠 전 기상악화 기간 중에 쿠르트 디엠베르거는 천막 속에서 천둥소리를 방불케 하는 눈사태 굉음을 듣고, 카메라를 손에 들고 번개처럼 텐트 밖으로 달려나가 아브루치능선 쪽을 살폈다. 굉음이 계속되고 눈사태가 2,000m 높이의 절벽을 휩쓸고 쏟아져 내렸다. 아브루치능선 아래의 고드윈 오스틴빙하에서 수백m 높이의 눈구름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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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다 루트키에비츠, 줄리 툴리스(사망), 피아세츠키, 예지 쿠쿠츠카, 쿠르트 디엠베르거, 빌리 바우어(좌측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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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이 호전되어 그들이 전진 캠프로 등반 중에 디엠베르거는 빙하에서 구겨진 가스통, 차 주전자, 스웨터를 발견하고, 아브루치능선의 거대한 눈사태가 오스트리아 대의 제3캠프를 파괴한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가 오스트리아 대원들에게 그들의 제3캠프의 파괴가능성을 암시했지만, 그들은 눈사태 방향이 다르다며 디엠베르거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며칠 후 디엠베르거와 툴리스가 제3캠프 부근에 올라갔을 때, 하산 중인 초췌한 모습의 오스트리아 대원 만디를 만났다. 그가 말했다.
“이탈리아 대의 텐트 뒤쪽 빙탑이 얼음사태로 무너져 내리며 제3캠프의 텐트들이 사라졌소.”
그는 해발 7,350m 고도의 부서진 텐트 자리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후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 중이었다. 디엠베르거가 질문했다.
“빌리 바우어는 어떻게 되었소?”
“그는 제3캠프에서 얼음사태의 화를 면한 유일한 텐트, 한국 대의 텐트 안에 있소.”
“만디, 조심해서 잘 내려가시오.”
그들은 서로 안타까운 작별을 했다. 오스트리아 대는 당장 숄더 위쪽에 설치할 고정텐트 부족난에 직면하게 되었고, 한국 대는 여분의 텐트가 있었지만 여러 명의 고소포터들이 줄줄이 그 텐트를 숄더 위쪽까지 운반하기를 거부해 난감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오스트리아 대와 한국 대 간에 하나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대가 한국 대의 돔형 텐트와 고정 자일을 숄더 위쪽으로 운반하여 설치하고, 그들이 보틀넥 위쪽에 고정 자일을 설치해 주는 대가로 자신들이 숄더에 설치하게 될 한국 대의 텐트를 자신들의 정상 공격용으로 이용하겠다고 제안하여 수용되었다. 이 조치는 오스트리아 대의 등정 차질로 인해 결국 숄더에서 귀중한 하루를 허비하는 위험한 결과를 낳게 되어, K2에서의 또 다른 비극의 빌미가 되었다.
8월 1일, 3명의 오스트리아 대원들이 정상공격을 위해 숄더에 도착해 한국 대 텐트를 그곳에 설치한 후 비박하고 다음날 정상을 향해 떠났다. 그 날 디엠베르거와 툴리스, 4명의 한국 대원, 알란 라우스와 므루브카 울프 조가 숄더에 도달했다. 한 명의 한국 대원은 돔형텐트가 너무 비좁아서 제3캠프로 하산하고 정상 공격조인 장봉완, 김창선, 장병호만 오스트리아 대가 설치한 텐트에 머물렀다. 툴리스는 영국의 유명 산악인 알란 라우스와 함께 K2를 등반하는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숄더 위쪽으로 30~40도 설사면이 아브루치능선 상부의 최대 난코스인 약 45도 경사의 좁은 걸리인 보틀넥과 연결되고, 보틀넥 위쪽으로 빙벽 트래버스 구간이 바라보였다. 디엠베르거는 숄더에서 오스트리아 대가 보틀넥 위쪽의 트래버스 구간을 등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보틀넥에 고정자일을 설치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낭비해 등정할 시간이 부족했다. 오스트리아 대는 오후 4시 8,400m 지점에서 등반을 중단하고 숄더로 퇴각 중이었다. 오후 7시 3명의 오스트리아 대가 숄더까지 하산했다.
오스트리아 대는 아브루치능선 상부의 최대 난코스인 보틀넥에 고정 자일을 설치하고도 등정을 포기하는 일은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음날 정상에 한 번 더 도전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그 날 밤 자신들을 숄더의 3개의 텐트에 분산 수용해 달라고 산악인들에게 애걸복걸했다. 그들은 최악의 경우 텐트 없이 눈밭에서 비박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숄더에는 2인용 텐트 2동과 3인용 텐트 1개가 설치되어 최대 7명밖에 수용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10명이 3개의 텐트에서 복작거리며 비박해야 할 판이었다. 거구의 이미처 대장이 디엠베르거와 툴리스의 최소형 2인용 텐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의 다리가 텐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툴리스가 말했다.
“여기서 함께 비박이 불가능해요.”
디엠베르거도 거들었다.
“우리는 내일 정상공격을 앞두고 있소. 우리들은 당신을 수용할 수 없소.”
두 사람은 자신들의 2인용 텐트가 최소형이라서 오스트리아 대원들을 한 명도 더 수용할 수 없다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평지의 기준으로 말하면, 디엠베르거의 거절이 몰인정해 보이지만, 등정에 실패하면 곧바로 하산하는 것이 더욱 당연한 조치였다. 인정 많은 한국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대원 바우어와 비에저를 받아들여 그들이 한국 대 텐트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고, 이미처 대장은 알란과 울프의 비좁은 2인용 텐트로 기어 들어가 모두 좁은 공간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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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브루치능선으로 23시간 만에 등정한 프랑스의 브뉴와 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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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라인 초등한 브뢰츠가 보틀넥에서 남벽으로 추락사
8월 3일 한국 대는 산소를 이용하며 정상으로 향했다. 알란 라우스와 울프는 전날 밤 비좁은 텐트에서 불면의 밤을 보낸 터라, 날씨가 등반하기에 완벽했지만 그 날을 휴일로 보내며 아깝게 허비했다. 툴리스는 자신이 영국의 위대한 산악인 알란 라우스보다 먼저 K2의 정상을 밟는 것은 산악인의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디엠베르거에게 그 날을 휴일로 정하자고 고집했다.
노련한 고산 등반가 디엠베르거는 8,000m 이상의 죽음의 지대에서는 산악인은 정상공격 전날 밤과 등정한 날 밤 이외에는 또 다른 밤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지론의 소유자였지만, 어쩔 수 없이 툴리스의 요구에 동의하여 디엠베르거-툴리스 조도 그날을 휴일로 허비했다. 3명의 오스트리아 대원들도 마찬가지로 휴무를 즐겼다. 그 날 한국 대가 아브루치능선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K2의 매직라인 측면으로 낭가파르바트가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해 K2의 매직라인의 남서 필라는 얼음이 얼어붙고 경사도가 급해서 등반에 최상의 기술을 요했다. 폴란드 등반대장 야누츠 마예르가 1차 정상공격에서 퇴각했고, 다음날 안나 체르빈스카와 크리슈티나 팔모브스카도 퇴각했다.
3일 피아세츠키, 체코 산악인 보치크, 브뢰츠 3인은 매직라인의 마지막 암릉 구간을 돌파하고 초등에 성공했다. 매직라인을 등정한 폴란드 대는 어둠 속에서 아브루치능선으로 하산했다. 그러나 등정자 브뢰츠는 보틀넥의 고정자일 끝이 고정되지 않았던 사실을 모르고, 그냥 자일하강하다가 미끄러져 내리며 남벽으로 추락사하고 말았다. 피아세츠키와 보치크는 지치고 정신이 나가다시피 하여 제4캠프로 하산했다. 그들은 알란 라우스와 므루브카 울프의 좁은 텐트로 기어들어 갔다. 알란 라우스는 텐트가 너무 비좁아 텐트 밖에 설동을 파고 그의 몸을 반쯤 설동에 넣고 밤을 지새웠다. 3명의 한국인 등정자들 중에 두 사람은 제4캠프로 돌아왔지만, 한 사람은 보틀넥 위쪽 암벽에 피톤을 박고 거기에 매달려 비박을 해야 했다.
8월 4일 알란 라우스와 므루브카 울프가 먼저 정상으로 출발했다. 그들의 뒤를 오스트리아 산악인 알프레드 이미처, 쿠르트 디엠베르거와 툴리스 조, 빌리 바우어와 하네스 비에저 순으로 뒤따랐다. 비에저는 젖은 장갑 때문에 혹한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탈진하여 제4캠프로 귀환했다. 제4캠프에서 폴란드 대의 매직라인 등정자 피아세츠키와 보치크가 제3캠프로 함께 하산하자고 청했지만 비에저는 거절했다.
알란 라우스가 하루 종일 선등하며 눈 속에 길을 텄다. 이미처와 빌리 바우어가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므루브카 울프는 체력의 한계상황에 봉착해 몸을 축 늘어뜨린 상태로 불규칙적인 걸음으로 등반을 속행했다. 그녀는 보틀넥 위쪽 8,400m 지점의 눈 속에서 잠이 들기도 했으나 등반을 포기하지 않았다. 정상 몇m 아래에서 바우어와 이미처가 알란 라우스를 따라잡고 오후 3시15분에 등정했다. 알란 라우스는 하루 종일 눈밭에 길을 트느라고 몹시 지친 상태였다. 몇 분 후 알란 라우스도 영국인 최초로 K2의 정상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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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나토 카시로토, 보치크, 브뢰츠(사망), 므루브카 울프(사망), 알란 라우스(사망), 피오트르브스키(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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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인들은 서서히 하산하면서 등반 중인 쿠르트 디엠베르거와 툴리스, 그리고 울프를 차례로 만났고 울프에게 하산을 권유했다. 기상이 하루 종일 악화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었다. 오스트리아 산악인들은 무사히 숄더의 제4캠프로 하산했다. 알란 라우스가 하산하면서 므루브카 울프를 겨우 설득하여 두 사람은 제4캠프로 내려왔다. 디엠베르거와 툴리스는 늦게 등정하고 회색빛 땅거미 속에서 자일을 함께 묶고 하산을 시작했다. 정상 조금 아래쪽에서 먼저 하산하던 툴리스가 미끄러져 추락하면서 디엠베르거를 자일로 끌어당겨 두 사람은 100m쯤 함께 추락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거대한 빙탑 위의 부드러운 눈 속에 처박혔다. 두 사람이 조금만 더 추락했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눈 웅덩이 속에서 비박했다. 날씨는 잔뜩 흐려 맑은 날 밤처럼 춥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8,400m 부근에서 모진 비박을 견디고 다음날 새벽 화이트아웃 속에서 서서히 하산하여 정오쯤 제4캠프 부근에 도착했다. 빌리 바우어가 그들의 외침소리를 듣고 그들을 제4캠프로 인도했다. 툴리스는 탈진상태에 시력마저 나빠져서 그녀를 눈밭에 드러눕힌 다음, 제4캠프까지 끌어내렸다. 이미처, 바우어, 비에저가 그녀를 오스트리아 대원들이 사용하는 한국 대 텐트로 옮겨, 정성껏 뜨거운 음료를 먹이고 여분의 오리털 점퍼를 입혀 그녀의 건강을 회복시켰다. 그때쯤 한국 대의 사다이자 고소포터인 모하메드 알리가 제1캠프 아래쪽에서 낙석에 맞아 사망했다.
8월 5일 저녁 무렵 그 해 여름의 최악의 무시무시한 폭풍이 숄더의 제4캠프를 강타하여 10일까지 계속되었다. 7명의 산악인들은 3개 텐트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6일 디엠베르거와 툴리스의 텐트가 폭설로 무너져 버렸다. 툴리스는 오스트리아 대의 텐트(한국 대 텐트)로 피신했고, 디엠베르거는 알란 라우스와 울프의 텐트로 피신했다. 툴리스는 시력이 흐려지고 점점 더 오랜 기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7일 밤 그녀는 뇌수종으로 죽어가면서 “빌리 바우어, 쿠르트가 무사히 하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다음날 아침 툴리스의 죽음을 알게 된 디엠베르거는 망연자실했다. 8일 연료 가스가 바닥이 났다. 그때까지 원기 왕성하던 알란 라우스는 폭설을 제거하고 동료들의 생존을 돕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그가 음료수를 마실 수 없게 되자, 고소에 장시간 체류했던 후유증에 제일 먼저 시달리게 되었다. 2개 텐트 속의 6명은 갈증을 달래기 위해 계속 눈을 먹으면서 잠들었다.
9일 밤 알란 라우스는 정신착란에 걸려 계속 물을 찾았고, 잠을 자면서도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중얼거렸다. 10일 아침 강풍과 폭설이 기세를 다소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대원들의 텐트에서는 이미처와 비에저의 건강상태가 나빴지만, 바우어는 스스로 하산 준비를 할 정도로 건강했다. 바우어가 나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산을 권유했다. 디엠베르거와 므루브카도 하산을 준비했다. 알란 라우스는 혼자 힘으로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디엠베르거는 알란 라우스를 그대로 텐트 속에 남겨두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은 잔인한 결정이었지만 고소에서는 어느 누구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디엠베르거는 부서진 텐트 속에서 영면하고 있던 툴리스에게 작별을 고하고 마른 침낭을 찾아내어 알란 라우스에게 최후의 우정의 상징으로 덮어 주고 눈물을 삼켰다.
그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쌓여 있던 가루눈 속을 헤매면서 다른 사람들 뒤를 따랐다. 그들이 100m 쯤 내려왔을 때 오스트리아 산악인 이미처와 비에저가 눈밭에 쓰려져 일어나지 못했다. 울프와 바우어가 두 사람을 일으켜 세우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허사였다. 두 사람은 눈밭에 그냥 누워 움직이지 못했다. 디엠베르거는 곧 바우어와 울프를 따라잡았고 세 사람은 서서히 암흑 속에서 하산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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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2의 서벽(우측 능선이 매직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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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명 중 7명은 그 해, 1992년까지 다른 등정자 5명은 다른 산에서 사망
마침내 그들은 숄더 기슭에 위치한 베르크슈룬트를 건넜다. 하산이 조금 수월해져서 세 사람은 설사면을 내려가 블랙피라미드의 위쪽 제3캠프의 파괴된 텐트까지 내려갔다. 거기서부터 고정자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므루브카 울프는 ‘슈티치트 플레이트(Sticht plate)’라는 확보장비를 사용하여 자일하강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얼음 자일에서 사용하는 데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녀는 동작은 느렸으나 빈틈없이 하강을 잘하고 있었다. 셋 중에서 제일 건강한 바우어가 눈 속에 파묻힌 자일을 파내며 먼저 내려갔고, 디엠베르거가 울프를 따라잡고 제2캠프까지 하강하여 바우어와 함께 울프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 바우어가 먼저 하산했다. 베이스캠프에 머물고 있던 산악인들은 숄더에 갇혀 있던 7명의 귀환을 포기한 지 오래였는데, 송장 모습의 외로운 사나이가 비틀거리며 모레인 지대로 내려오는 광경을 바라보고 몹시 놀랐다. 바우어는 동상에 걸리고 옷이 찢겨 초췌한 모습으로 마치 항공기 추락사고의 생존자 같았다. 그는 말할 기운이 없어 겨우 쿠르트 디엠베르거도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므루브카 울프는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수색대가 결성되어 고드윈 오스틴빙하로 올라가 어둠 속에서 전진캠프 위쪽 설사면을 서서히 내려오는 디엠베르거를 발견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동반자 툴리스를 잃었어.”
피아세츠키와 보치크는 피로가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아브루치능선으로 울프를 찾아 나섰지만 그녀를 찾을 길이 없었다. 이 용감했던 폴란드 여성은 탈진으로 자일에 매달린 채 잠들었다가 동사했고, 다음해 일본대원에 의해 그 상태로 발견되었다. 쿠르트와 바우어는 헬기로 후송되어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병원에 장기간 입원하여 발가락과 손가락 끝을 절단했다.
1986년 K2의 등정자 27명 중 7명은 K2에서 하산 시에 조난당했고, 1992년까지 다른 등정자 5명은 다른 산에서 사망했다. 1988년 여름 파르멘티에르와 보치크는 에베레스트에서, 1989년 예지 쿠쿠츠카는 로체 남벽에서, 1992년 기아니 칼카그노(Gianni Calcaggno)는 데날리에서, 그리고 반다 루트키에비츠는 캉첸중가 북서벽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