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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가진 존재가 어떤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가 그것을 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 사실을 또 알고 있는…의식을 가진 존재는 외부의 물건을 자각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각할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그 존재를 여러 부분으로 나눌 수는 없다는 데에서 의식의 페러독스(paradox, 역설)가 생긴다.
비슷한 맥락에서 아이어(A.J. Ayer)도 이렇게 썼다. "한 사람의 자아는 마치 수많은 상자들을 계속해서 담고 있는 중국의 상자들을 연상시킨다." 자기인식이야말로 의식의 신비를 해명하는 열쇠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미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이 말한, 자기 조직(self-organization)의 능력을 가진 '흩어지는 구조(散逸構造, dissipative structure)'에서의 피이드백(feedback, 재생)과 자기연결(self-coupling)을 보았으며, 무생물이 생물을 통하여 의식체라는 복잡성과 자기조직을 갖춘 위쪽의 차원으로 올라가는 자연적인 과정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다른 설명 방법이 있다. 앞 장에서 살펴본 개념적 차원 구분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은 통합적(統合的)인 개념이며, 환원주의의 분석은 단지 우리들 내부의 무생명체인 원자만을 드러내줄 뿐이다. 마찬가지로 의식 역시 통합적인 개념이다. 우리가 하나의 세포를 그것의 구성 성분인 원자 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듯이 의식을 뇌세포에 기준하여 이해할 수는 없다. 개별적인 뇌세포들 속에서 의식이나 지성을 찾으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의식이나 지성의 개념은 뇌세포 차원에서는 그저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자기인식(self-awareness)은 통합적인 속성이며, 두뇌의 특수한 전기 화학적인 메카니즘으로 추적해 들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자기를 언급하는 문제(self-reference)에 대한 연구는 언제나 역설과 모순에 부딪쳤다. 자기인식에 관한 철학적인 질문뿐만이 아니라 예술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논리와 수학 차원에서도 그렇다. 희랍 철학자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자기를 언급하는 진술에 관한 문제를 제시하였다. 우리는 보통 모든 의미 있는 진술은 참이거나 거짓이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바꿔 쓸 수 있는 에피메니데스의 진술을 생각해보자(그 진술을 편의상 A라고 하자).
A : 이 진술은 거짓이다.
A는 참인가 거짓인가? 만일 참이라면 그 진술 자체는 거짓이 되고, 만일 거짓이라면 그 진술은 참이다. 하지만 A는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 "A는 참인가 또는 거짓인가?"는 대답이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제3장에서 러셀(Russell)이 말한 세트(set)의 역설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살펴본 적이 있다. 두 경우 모두, 전혀 잘못이 없는 진술이나 개념들이 둥근 고리를 이루어 그것들 자신을 가리킬 때에는 불합리가 뒤따른다. A와 같은 형태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A : 다음의 진술은 참이다. A₁ 앞의 진술은 거짓이다. A₂
여기서도 각각의 개별적인 진술 A₁과 A₂는 전혀 잘못된 곳이 없으며 모순이 아니지만, 그것들이 서로 둥근 고리를 이루어 자기 자신을 가리키게 되면 그것들은 논리의 넌센스를 발생시킨다.
호프스태터(Hofstadter)는 자신의 걸작품 《괴델, 에셔, 바하(Godel, Escher, Bach)》에서 '부분적'으로는 의미가 있는 개념들이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에는 둥근 고리를 이루면서 역설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어떻게 독일 화가 에셔(M.C. Escher)의 작품 속에 충격적인 예술로 묘사되어 있는지를 지적한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폭포(Waterfall)》를 생각해보자. 둥근 고리를 이루고 있는 폭포의 물길을 따라 계속해서 내려가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자신이 처음의 원점에 되돌아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각 부분에서는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인데 갑자기 우리는 처음에 출발했던 지점으로 되돌아와 있는 것이다. 물론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 고리 전체는 분명히 불가능한 것이지만, 고리의 어떤 부분에서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 역설이 생겨나는 것은 순전히 전체적인 또는 통합적인 측면인 것이다. 호프스테터는 또한 바하(Bach)의 음악작품 푸가(fugues)들 속에도 음악적으로 이 '이상한 고리(strange loops)'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한다. 수학의 논리적인 기초에 관심을 가진 수학자와 철학자들 역시 이러한 자기 언급(self-reference)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가장 놀랄만한 성과는 1931년에 독일 수학자 쿠르트 괴델(Kurt Godel)의 연구 결과이다. 그것은 불완전이론(Incompleteness Theorem)으로 알려진 것인데, 호프스테터의 책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괴델의 이론은 수학의 논리적인 근거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초론 과정을 체계화하려 했던 수학자들의 시도에서 생겨난 것이다. 괴델은 수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진술을 요약하려는 착상이 떠올랐다. 그 자체는 전혀 새롭거나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숫자로 열거한 계약서를 읽어본 사람은 이 연습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괴델이 발견해낸 독특한 점은 수학에 대한 진술을 수학을 이용하여 성문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자기가 자기를 가리키는 측면인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에피메니데스의 역설과 비슷한 것이 생겨났으며, 괴델은 자신의 이론을 통하여 심지어 원리상으로도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절대로' 알 수 없는 숫자들에 대한 진술(위의 A처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괴델의 불완전이론은, 주체와 객체를 섞음으로써 심지어 논리적인 분석의 근본 차원에서조차도 자기 언급은 역설과 불완전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그 이론의 중요성이 있다. 이것은 원리상으로도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식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자주 인용되는 이론이다. 호프스태터는 이렇게 말한다. "괴델의 불완전이론은, 자기를 알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불완전하게 끝나는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어떤 고대의 이야기 같은 멋을 풍긴다." 괴델의 이론은 의식의 비(非)기계적인 성질을 입증하기 위해서도 자주 인용된다. 〈의식, 기계, 괴델(Minds, Machines and Godel)〉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루카스(Lucas)는 인간의 지성은 컴퓨터에 의해서는 결코 획득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괴델의 이론은 나아가 기계론적 우주관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해주는 듯하다. 다시 말해, 의식은 기계로서는 설명될 수 없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루카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인간 존재들은 숫자들에 대한 수학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정해진 일련의 공간들에 따라 작동하도록 입력된, 그래서 괴델의 이론에 지배될 수밖에 없는 컴퓨터는 그것을 스스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기계가 아무리 복잡하다고 해도, 그것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이 불가능한 공식에 지배를 받는 괴델의 이론에 걸려들기가 쉽다. 이 공식에서 비록 의식은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기계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 도리가 없다. 따라서 기계는 의식을 가진 모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비기계적인 의식 또는 '영혼'에 대한 증거로 자주 인용되는 사랑과 미(美 )의 감상, 유머 등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의식을 신비의 수학보다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는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못마땅해 할 것이다. 루카스의 논법은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공격을 받아왔다. 예컨대 호프스태터는 이렇게 지적한다. 실제로 복잡한 수학적 진리를 발견하는 인간 의식의 능력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 숫자에 대하여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그 컴퓨터 역시 그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에피메니데스 식의 진술들 때문에 '우리'는 컴퓨터만큼이나 괴델의 불완전이론에 걸려들기 쉽다. 결코 스미스에 의해서는 증명될 수 없는 스미스를 포함한 세계 전체에 대한 논리적인 진술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 강조했듯이 의식, 자유의지, 개인적 주체의식 등은 모두 자기가 자기를 언급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역설적인 측면을 가질 수가 있다. 관찰자가 어떤 것을 지각할 때, 예를 들어 어떤 물체를 지각할 때 감각기관의 메카니즘을 통하여 그 물체와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그 관찰자는 정의상 관찰되어지는 물체의외부에 존재한다. 하지만 관찰자가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자기분석 중에는 주체와 객체가 가장 복잡한 방식으로 뒤엉켜 있다. 그것은 마치 관찰자(the observer)가 그 자신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몇 가지 흥미있는 설명이 이러한 신기한 정신 현상에 주어질 수 있다. 한 예로, 유명한 뫼비우스의 띠(Mobius band)를 생각해보자. 그림은 띠를 한차례 비틀어 양끝을 이어서 고리를 마든 것이다. 고리의 각 지점에서 보면 분명히 고리의 앞쪽과 반대쪽이 있을 듯하다. 하지만 고리의 한 면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어느덧 원점에 되돌아오기 때문에 거기에 실제로는 한 개의 면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부분적으로 보면 두 개의 범주(주체와 객체라고 할 수 있는)가 구별되어 있는 듯하지만, 전체 구조를 보면 거기에는 한 면밖에 없다.
[그림10] 유명한 뫼비우스의 띠는 하나의 띠를 한 차례 비틀어 끝을 서로 연결해서 만든 고리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거기 단지 한 면이 존재할 뿐이다.
자기가 자기를 가리키는 것에 대한 또다른 설명으로는 호프스태터의 '이상한 고리(Strange loops)'라는 용어로 표현된 것이 있다.
나는 우리의 두뇌 속에서 '솟아나는 현상'들, 이를테면 생각과 희망과 영상(映像)과 논리와 의식과 자유의지 등에 대한 설명은 일종의 '이상한 고리'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고 믿는다. 이 이상한 고리는, 위쪽의 차원이 아래쪽 차원에 연결되어 영향을 주며, 동시에 위쪽의 차원은 아래쪽 차원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그러한 고리이다…우리의 자아는 그것이 그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때에만 존재할 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