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대 박진도 교수의 말 (박정희시절은) 저임금으로 수출을 했다. 저임금으로 수출을 하자면 농촌에서 사람을 뽑아 내야 합니다. 그렇게 노동력을 충당했다. 그런 면에서 농촌을 잘 살게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
<박정희시절의 부동산>
63년 기준으로 하여 7년 후 강남의 부동산은 학동이 20배,
압구정동이 25배, 신사동이 50배로 올랐다. 충격적이지 않는가?
같은 기간 서울의 중구 신당동은 10배, 용산구 후암동은 7.5배 상승했다.
이래도 박정희가 위대하다고 하면 도대체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대중.노무현 같으면 몇 번이나 쫓겨났을 것이다!
<도시빈민. 판자촌. 광주폭동>
박정희시절에 살기 어려워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빈민층을 형성했다.
그들은 산동네에 판자촌을 이루어 살았는데 서울의 경우 박정희 정권은 그들을 강제로 철거, 광주(성남)으로 이주를 시켰다.
도로도 없고,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지역에 사람만 추방을 했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어 굶주리다 못해 대대적으로 저항에 나선 거였다. 20만 명의 철거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그게 소위 광주폭동이라는 거다.
1970년대 중반 서울인구의 1/3-1/5에 해당하는 100만-300만 명이 판자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다.
<서민들의 삶>
1. 박정희시절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1. 산업재해는 세계 최고였다.
1. 피고용인 가운데 1976년 74.9%, 1978년 76.7%가 근로소득 면세점 이하였다.
(태반의 근로자가 최저생계비조차 못 버는 상황이었다)
1. 근로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쫓겨 나든가 OOO로 몰리기도 했다.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률>
대만을 포함한 주요국(8국:미,카,영,독,프,이,일,대)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하면 김대중 1위, 전두환 2위, 노태우 3위, 박정희 4위다. 그리고 성장율은 대체로 선진국에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을 참조하면 김대중과 전두환의 경제는 박정희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김대중의 경우 한국전쟁이후 가장 큰 국란이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세계 최고수준의 성장을 이루었다.
김대중은 또한 경제성장에서 세계 최고수준이었을 뿐만 아니라, 단 5년만에 대한민국을 IT강국, 전자제품강국, 생명공학의 강국으로 올려 놓았고, 수출 최대 그리고 흑자, 경상수지 흑자, 외환보유고 세계 4위로 올렸고, 한국의 영화산업을 세계 2위 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한류의 꽃을 피웠다.
<박정희가 한국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이 말은 박정희 이후에 이루어진 엄청난 경제적인 성장은 다 박정희가 밑바탕을 잘 닦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것 또한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
박정희경제는 처음 5년간은 부정부패이외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고, 6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베트남으로부터 돈이 들어오면서 좋아졌다.
말기에는 또 완전히 망할 정도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수치로 표현하면 박정희말기에 박정희경제는 거의 몰락상태에 있었다.
그 이후의 정권들이 잘했기 때문에 박정희 경제의 후유증인 외환위기를 극복하고도 지금까지 승승장구를 했다고 해야 말이 맞다.
(다음은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에서) 박정희의 마지막 해인 1979년 GNP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최악인 41억5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고, 기름재고는 7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 소비자 물가상승도 18.3%나 뛰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이 등장하고 일본에서 40억 달러를 빌려 수습을 합니다. MBC의 <5공화국>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둘째 박정희정권이 들어서고 초기에 박정희가 초능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뭔가를 이루었느냐 하면 그것 또한 전혀 아니다. (경제가 그런 것이 아니기도 하다) 초기 박정희 정권 5년간은 4대의혹사건 등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는 경제가 특별히 달라진 없었다. 1960~1654년의 연평균 GNP성장률은 5.5%로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현재, 중국은 7.5-10%, 베트남도 7%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의 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라, 차관 2억 달라)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달라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다른 대통령들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도 없어도, 그리고 월남특수가 없어도 박정희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 11위이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5만 명이 5년간 받은 수당은 1억3,000만 달라였다. |
(다음의 경제학자 최용식의 글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이미 1950년대 후반부터 시동을 걸었다. 이승만정권이 붕괴되던 60년에는 성장률이 1.2%에 그쳤지만, 4ㆍ19혁명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군사정권이 선전했던 61년에는 다시 5.9%로 뛰어올랐다. 또한 물가 역시 안정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완벽하게 은폐되고 말았다. |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 나아가
그것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 -고려대교수 이필상
<동아시아 : 1965년 ~ 1980년 연평균 경제 성장률>
1. 일본 : 10.5%
2. 싱가포르 : 10.1%
3. 대만 : 9.8%
4. 한국 : 9.4%
5. 홍콩 : 8.6%
북한 : 57년 ~ 69년 연평균 21% 성장했다..
그후
70년대 중반까지 연평균 10% 가량 되던 경제성장은 80년대 이후 완전 몰락 원인은 박정희와 같은 독재경제의 종말이였다.
동아시아 경제 성장률인데요.
한국만이 특별히 성장한 것이 아니란 것,
오히려 박정희 시대 한국의 성장은 동아시아 선발 개도국과 비교해서 미흡했고…
민주화 되면서 더 탄탄해 졌다는 것.
대부분의 독재국가는 망했고 망하게 되어 있는데 독재자를 찬양하는 이유가 뭘까요?
한국 국민들이 깨어 있어서 일하면서 독재자에 저항한 결과가 오늘의 한국이다.
독재자 덕이 아니다.
독재자는 쿠테타로 자리 차지하고 있었을뿐.
그 당시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60-70년대는 말뚝박는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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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삶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않을만큼의 정신과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결심입니다.
한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위해,나아가 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박정희-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박정희 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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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삶
1917년 11월14일 출생,1920년아버지 박성빈 관직에 오르기위해 토지와가산을 탕진
1926년 구미공립보통학교 입학,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 회고
1932년 구미공립보통학교11회졸,1932년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
1936년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대구사범 졸업하기 1년전
1937년 3월대구사범졸1937년문경공립보통학교교사 부임
1938년 아버지 박성빈 67세로 별세,1940년까지 교사직 부임
1940년 4월 만주국신경군관학교2기생 입교(연령초과로 1차탈락후 2차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졸업 후 5개월정도 현장실습 마치고1942년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3학년으로 편입
1944년 4월300명 가운데 3등의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57기 졸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주둔 일본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전쟁 참가
주 토벌부대는 중국의 팔로군(조선인 독립투사 "무정"몸담고 있었음).팔로군은 수많은
독립투사 가담하고 있는 중국부대
탈영할 생각 않고 계속 일본군 소좌(소위)로써 전투
같은부대 일본군중좌[류지마 세조](전범,훗날 일본우익의지도자이며 박정희정권때
한일회담 주선,한일의원연맹 결성에 힘씀,전두환정권 88올림픽제안,노태우정권에영향력
행사) 스승으로 모시기로 결심
1945년 7월 박정희,신현준,이주일,방원철 같은 부대의동료들이었던 중국인장교들에 의해 무장해제
1945년 8월29일패잔병으로 북경도착,조선인 경영한다는 덕경루라는 음식점들려 정보얻고 동북쪽
북신구 제지공장으로 이동
공장은 모여든 일본군조선인병사들로인해 순식간에 병영처럼되고독립투사 최용덕장군
이들4백여명 김학규대장지휘 광복군제3지대 편입
1945년 11월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신현준은 대대장,이주일은1중대장,박정희는2중대장,
학병 출신 윤영구제3중대장 맡음
1946년 2월광복군이라기보다 고향에 돌아오기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귀향대,귀국대기
1946년 5월8일귀국,9월조선경비사관학교2기생입학12월조선경비사관학교졸,육군소위임관
본부가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육군소위
1948년 육군본부작전정보국 근무,이화여대 1학년 이현란(당시 24세)과동거1948~1950
1948년 11월여수·순천반란사건체포,군사재판 회부 사형선고,군부내 남로당원의명단 군특무대에
실토하면서 실형 면하고 1949년 1월 강제 예편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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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 귀국하려면 봉천을 경유하는 것이 정상적 경로지만, 봉천에 소련군이 진주해 있을 가능성이 있어 .죽음을 면하기 위해 북경을 거쳐 먼 길을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박정희 일행은 한달여 만인 1945년 9월21일께 북경에 도착했다. 박정희가 북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북경에 일본군에 복무하던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중경 임시정부는 중국 주둔 일본군 내 있던 10만여명의 조선군 장병들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본진은 귀국하지만,일부 성원을남겨 중국국민당과의관계를 유지하고 일본군내 조선인청년들을 조직하는 사무를 관할하기위해1945년11월1일 박찬익(朴贊翊)을 단장으로하는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을 조직했다.
해방당시 3개 지대를 갖고있던 광복군은 모두7개의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설치해 모두 10개의지대를 각1만명씩 사단으로 육성해 귀국시켜 국군의모체로 삼으려고 했다.
박정희가 도착한 북경에는 최용덕을 지대장으로,이성가등을 참모로 한 북평잠편지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런계획은 임시정부와광복군의 일방적 바람이었을 뿐,연합군이나중국국민당정부의 계획과는 무관한것이었다.
중국은 자국 내에서 10만명의 외국군을 무장시킬 의사도 능력도 없었으며, 한반도를 분할점령한 미국은 남한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이 같은 계획을 지지하지 않았다.
황군장교 박정희가 광복군이된것은 이런혼란스러운상황이었다.일제패망이전에 비밀광복군에가담한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이는완전히허황된 것이다.박정희와같이근무한 신현준은 광복군의존재를 해방이전에는 알지못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의 광복군 신화가 만들어진 것은 한때 광복군을 따라다니던 박모라는 작가가 펴낸 광복군이라는 두권짜리 소설때문인데, 첫 권은 광복군 3지대장을 지낸 백파 김학규(白波 金學奎)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고,
다른 한권은 박정희를 주인공으로해서 박정희가 해방전에 광복군과내통하며 항일공작을 펼쳤다는 것이다.이책은 박정희 자신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밑의 아첨꾼들이 만들어낸 것이겠지만,
[장준하측근 이철우씨 증언]
광복군 편입된 박정희는 전형적인 일본식 군대 방침을 독립군에게 강요했다.이에 장준하 선생이‘너 뭐야’하고는 반말로 욕을 했대요.그랬더니 이 사람이 나와서는 경례를 딱 붙이더랍니다.
하도 화가나서 아무 생각없이 모자를 휙 벗겨서 땅에다밟고는‘너는 독립군모자를 쓸 자격이없어, 독립군 훈련을 일본식으로 해?’하고 야단을쳤답니다. 그랬더니 고개를 푹 꺾고서‘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하는데 일본말로하더라는거예요.
그래서 더 깜짝 놀라서 상부에 보고를 했답니다. 일본군대 출신들이 피난민대열에 끼어있다가 광복군에 들어왔는데, 이사람들이 일본군의 밀정일지 모르니 전부 제거하자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
장준하 선생이 그 사람이 박정희였다는 것을 어떻게 기억하냐면, 잘못했다는 말을 일본말로 했다는 것, 딱 한가지예요.5·16 군사정변 후에 박정희가 장준하를 만나자고 청해 왔어요.
그런데도 장준하선생은‘내가 왜 군대 반란을 일으킨놈을 만나느냐’면서 만나지않았는데 신문에난 박정희를보니 낯익은얼굴이더랍니다. 그래서 함석헌선생 등 몇사람을 사상계 사무실로 접견‘이사람은 내가 옛날 만주에서 만나본 일본군이다.
행적을 알아보자.’고 발언을 한 겁니다. 이 이야기가 박정희에게 들어갔고, 그것이 개인적으로 장준하를 싫어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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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이때 일본군장교라는 과거를별로 참회하지않고행동하는 박정희에게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자진해서 일군을 탈출하지않은 점, 일본이패전하지않았다면 일군장교로서 여전히 독립투사를학살했을 것이라는점, 유난스럽게 기회주의적인자세등을들어 크게 면박을주었다고 한다
소진은(총독부군서기,일제 경찰간부)의 후손을 알려드립니다
1대- [소진은]1892~ ? 조선총독부 경찰간부}
2대 -[소상영]1922~2008 대구출생,대한적십자사 부총재.전 요르단 대사
3대 -[소병희]1951~국민대 교수
[소정희]미국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교수
[소명희][여]1949~동국대 교수
[소윤희]차병원 중문의대 교수
소진은 - 경상북도 대구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군수를 지낸 소진하와는 형제 관계이다.
1911년에 문관보통시험에 합격하여 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1912년에 총독부 군서기로 임명되어 김천군에서 근무했다.
1920년에 총독부 도경부에 임명되면서 왜관경찰서에 발령받아 경찰 간부로 이동했다.
상주경찰서, 포항경찰서를 거쳐 경상북도 경찰부 보안과에 근무하며 정치범을 담당했다.
1933년에 는 도경시로 승진하여 전북순사교습소장에 임명되었다.
1934년에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이동했다. 평남 보안과장을 지내던
1935년에 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여 표창한 표창자 명단에도 들어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다시 관계로 돌아와 총독부 군수직을 지냈다. 평안북도 선천군과 의주군 군수를 역임했다. 의주군수이던 1941년에 정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