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한국불교에서 원효는 절대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거의 부처나 보살급이다. 실제로 1960년대부터 정부와 언론 모두 원효를 외쳐왔다. 필자 역시 어린 시절부터 거기에 세뇌 되어 왔다. 한반도의 모든 교수 박사 도사들은 죄다 원효 우상화에 공감하여 왔다. 하물며 일반 불자들은 말할 나위가 있나? 한국의 원효사상 우상화는 일제시대 육당 최남선으로부터 시작한다.
2007년 발표된 불교학리뷰에서 석길암이 쓴 논문 "근현대 한국의 대승기신론소 별기 연구사"에 보면 1930년대부터 4시기로 나누고 있다. 시작은 육당 최남선부터다. 그는 일제시대 민족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원효를 선택히였다. 석길암에 의하면 1기는 1930년부터고 2기는 1960년 후반에서 1970년대다. 3기는 1980년대며, 4기는 1990년 이후다.
1기는 1930년 『불교』 74호에서 최남선이 "원효 통불교의 건설자"를 발표한 시기 부터다. 이후 지금까지 이 통불교라는 말은 원효의 대명사가 된다. 그후 이를 계승하여 서울대 철학교수 박종홍이 1963-1964년에 걸쳐 원효논문을 썼다. 교수 조명기의 논문도 거기에 촛점을 맞춰서 원효 우상화에 앞장 선다. 이 교수들의 논조는 이후 원효 연구의 시금석이 되어왔다. 원효의 십문화쟁 사상을 선양하고 절대적 영향을 행사하였다.
2기 1970년대 조명기 이기영 고익진= 국토개발 & 반공 이데올로기에 원효의 화쟁사상을 대입하여 통일 대업을 이루려는 이데올로기 제공.
3기 1980년대 원효의 소 별기를 학문적으로 연구. 이기영 고익진 박성배 은정희 등.
4기는 1990년 이후인데 석길암이 제시한 연구서들은 지리멸렬한 것들 뿐이다. 필자는 4기에 해당하는 인물은 전종식이라는 재야학자라고 생각한다. 원효연구는 모두 상아탑의 교수들이 1~3기를 이루었다는 석길암의 논증에는 동의한다. 이후에는 모두 이들의 연구를 계승하는 연구들 뿐이다. 구지 말하면 최남선 이후 모든 논문들이 원효 우상화에 빠지거나 아님 원효의 말과 사상을 분석 연구하는데만 소비하여 왔다. 유일하게 원효 비판을 시작한 이가 전종식이다. 그런데 전종식의 비판은 좀 무리가 많다. 대승기신론은 서역(중앙아시아) 승려 진제가 역출한 것인데 이 진제본으로 소와 별기를 작성한 이가 원효다.
『 眞諦三藏(499-569)이 太淸 4년(550)에 飜譯)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唐나라의 實叉難陀가 則天武后 時代인 695-700년 사이에 飜譯)한 經典 속에 大乘起信論이 포함되어 있다.』 -전종서
원효(元曉, 617년 ~ 686년)는 구역(진제역)을 보았고 주석을 달았다. 신역은 보지도 못했다. 전종서는 진제본과 실차난타본을 대조한 후 진제본의 오류와 오역을 발견하였다. 이 점에서는 기신론 연구에서 큰일했다. 필자가 에세이에서 "왜 대한민국에는 제대로 된 인문학자가 안 나오는가?"라는 글에 해당하는 케이스다.( https://cafe.daum.net/Wahrheit/LZpd/691 참고)
석사학위도 없는 그가 교수나 박사가 아니라서 새로운 시선으로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이 진제본의 번역 오류다. 필자가 금강경 오류번역을 지적한 것처럼 그렇다. 필자가 에세이에서 지적한 바처럼 박사를 받으면 아다마가 빠가(머리통이 바보)가 된다. 전종서에 의하면 원효가 진제본에 의거 소와 별기를 달았기에 그의 사상이 오류라고 지적한다. 또 그는 실차난타 본에 의거 원효를 비판 한다. 이 점에서 그의 비판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원효가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책을 가지고 그 사람을 비판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오류다. 전종서의 오류다. 이는 비판 대상이 아니다. 구지 따지면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 기신론 연구의 제일 문제는 국내의 모든 연구가 기신론을 성경으로 여기고 연구해 왔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원리주의자인 극우성경학자들이 성경은 오류 없는 무결점이며 말 하나 하나가 진리라는 입장과 유사하다. 서구의 양식 있는 수많은 연구자들은 성경에는 오류가 가득하다는 입장이다. 수많은 책들도 나왔다. 이점에서는 전종서도 동일하다. 교수 박사들이 대졸 연구자 보다도 못하다. 해서 한국에는 제대로 된 인문학자가 없다는 필자 말이 정확해진다.
대승기신론은 첫째,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논서다. 마명(馬鳴)이라는 인도 석학이 만든게 아니라는 것이 서구불교학자들의 입장이다. 인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책이다. 우즈베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만들어진 책이거나 아님 중국 돈황지역에서 만들어 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둘째 인도에서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위대한 사상가가 나타나면 후대에 주석서가 무수히 나타난다. 한중일 삼국의 기신론 주석서들을 보면 답이 나온다. 해서 마명이 쓴 것이 아니니 인도에서는 주석서가 없는 것이다. 중앙아시아나 돈황 등에서 조작하여 만든 논서다. 이 정도 논서를 쓸 정도면 한마디로 천재다. 무명의 천재가 자기 책을 선양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고승인 마명을 가차하여 만든 것이다. 이 조작질은 중국역사에서 수도 없이 나타난다. 달마대사 이름을 가차한 모든 책들 혈맥론 등등 역시 조작된 글들이다. 모두 육조혜능의 사상을 선양한 책이다. 능가사자기에 따르면 서역인 불타발타라의 제자가 보리달마다. 불타발타라가 서역에서 데려온 제자가 달마대사다. 해서 능가사자기에서 1조가 불타발타라 2조가 보리달마다. 이걸 조작한 조사선은 육조혜능 사후 300-500년에 걸쳐 조작질을 하여 달마대사를 1조로 놓고 혜가를 2조로 두었다. 나아가 능가경이 소의경전인 법맥을 금강경으로 조작한다. 그것이 혈맥론 이입사행론 등 달마대사 저작들이다. 보리달마는 능가경을 수행한 구나발타라의 제자다. 1930-1970년대까지 우리는 미국인들 전부 "존"이라고 불렀다. 개도 쫑(존)이라고 불렀다. 파란눈의 서역 승려는 중국인에게 모두 달마였던 것이다.
<조사선의 시조 https://cafe.daum.net/Wahrheit/LpDV/121 참고>
*대승기신론 자체가 오류다.
석가모니 사후 200년 후에 나타난 상키야 철학에서 출발 기원 전후에 대승불교와 힌두교가 만들어진다. 인도라는 나라는 라마야나, 바가바드기타로 인해 성립한다. 즉 힌두다. 힌두는 북인도의 하위신 비슈누와 시바신이 제석천(석제환인)인 인드라신을 꺾고 우주의 주인으로 우뚝 서면서 성립한다. 상키야 철학은 마음(心)을 모든 것의 원인라고 본다. 12연기는 모두 마음의 작용이다. 그리고 무명의 원인을 푸루샤와 프라크리티로 나누어 설명한다.(석가모니는 붓다가 아니다 https://cafe.daum.net/Wahrheit/LpDV/139 참고)
상키야 이후 인도사상은 모두 마음에 집중한다. citta(마음)의 탄생이다. 상키야 철학은 citta(마음)의 작용이 멈출때 해방(moksa 해탈)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대승불교 이전까지 석가모니는 해방(moksa)을 이룬 사람이며 아라한이었다. 대승불교에서 해방(moksa)을 열반으로 바꾸었으며 아라한을 붓다로 치환하였다. 이 마음의 철학을 정교화 시킨 것이 기원 전에 나타난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이며 이 요가수트라를 흉내낸 것이 A.D 2세기에 만들어져 5세기에 중국에 번역된 것이 "대승기신론"이다. 여기서 마명(馬鳴菩薩, 아슈바고샤, Aśvaghoṣa: c. 100-160)의 생몰연대로 만든 시기를 2세기로 정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진제가 번역한 그 시기(5세기)에 만들어진 논서로 보아야 한다. 인도에는 전혀 기록이 없다.
대승기신론은 진제본이든 실차난타본이든 내용은 같다. citta(마음)에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이 있다고 한다. 중생이 생사윤회의 고통에 사는 것은 생멸문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생멸문이 소멸하고 진여만 남게 되면 바로 붓다가 된다고 한다. 삼세육추의 미세번뇌를 소멸하는 과정은 '훅 불어서 끄는' 열반(니르바나)이 일어난다. 모든 수행을 간단명료화 했다. 결론은 번뇌만 마음에서 훅 불어서 꺼버리라는 것이다. 이는 요가수트라도 동일하다. 그럼 진여(眞如)라는 실체(붓다)는 무엇인가? 아트만이다.
여담으로 최근 지인에게 들은 말이 "인간에게는 두개의 자아가 있는데 하위자아와 상위자아다. 모든 수행은 이 상위자아를 깨닫는 것이다. 그 상위자아는 神이다."라는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황당한 필자는 지인에게 대충 얼버무렸다. 필자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고 설명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다. 그 명상가는 요가수트라 등등 수많은 명상서적을 통해 교묘한 논증을 펼치기에 그 지인도 세되되어 있었다. 그 명상가와 지인은 상위자아를 神으로 보았다. 마음에 신으로 자리잡는 상위자아를 요가수트라는 아트만이라고 부른다. 필자는 일륜스님에게 테스트 삼아 "인간에게는 두 개의 자아가 있는데 하위자아와 상위자아다. 모든 수행은 이 상위자아를 깨닫는 것이다"라는 말을 전해주자 1초의 망설임 없이 바로 답하는 일륜스님.
일륜스님 :
아니 그거는 아트만이잖아요.... 하여튼 사기꾼 놈들 이말저말 지어내다가 상위자아라는 말까지 조작해 내네요. 명상가라는 놈들 말을 조작하는 건 천재네요....ㅜㅜ
외부세계와 단절된 마음은 결국 언어논리에 따라간다. 거기서 얻는 깨달음은 언어가 만든 희열이다. 명상가들이 만나는 우주나 조사선의 돈오대각은 컴퓨터 최적화 처럼 축적된 언어의 망상을 청소하는 것이다. 최적화를 통해 컴퓨터가 잘 돌아가듯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그 해방감을 이들은 해탈 열반 돈오라고 부른다(석가모니 근본불교가 아니다). 허나 까르마(業)는 소멸되지 않는다. 까르마는 마음과 생각이 만든 것이 아니다. 자아와 그 몸이 저지른 행위들이 만든 것이다. 인간 상호간의 행위와 자연과 동물에게 벌인 행위들이 까르마를 만든다. 그리고 까르마는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다. 영혼에 새겨진다. 마음은 영혼과 별개다. 허나 영혼을 속박하는 것이 마음이다. 까르마에 의해 영혼이 부모를 선택한다. 정자가 난자에 결합할 때 영혼이 자리한다. 죄많은 영혼은 처참한 가정에서 평생 고생한다. 아님 초년에 죽을 고생 하다가 중년 이후나 노년에 복을 받는다. 복많은 영혼은 금수저 물고 태어나 호의호식하다가 금으로 만든 관에서 죽는데 죄가 먾으면 노년이나 중년에 망한다. 대승기신론 요가수트라를 비롯한 모든 명상서적은 모두 마음(citta)만 촛점을 맞추었다. 해서 영혼의 문제와 구신 악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석가모니부터 이후 명상가 대승불교는 마음이라는 일원론(心一元論)에 매몰되어 왔다. 해서 인문학이다. 그리고 이는 서구 철학(플라톤부터 내려오는 관념론)과 유사하다. 신이 인간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우주를 통제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영혼은 허상이고 망상이 된다. 해서 조사선은 외부의 신, 영혼, 악마를 믿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다. 근데 영가천도는 왜하니? 사기꾼들아.... 명상가들 중에도 영혼을 정화한다는 헛소리 하는 놈들이 많다. 자아와 상위자아 하위자아 등등을 운운하면 마음이라는 심일원론(心一元論)인데 뭔노므 영혼 영가가 있을 수 있나??
영혼 구신 악마 이매망량 등등은 물질에너지(프라크리티)와 결합한 외부의 침략자다. 빙의의 시작은 마음을 갉아먹는 것이다. 우울증도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은 개인컴퓨터의 프로그램이다. 영혼과 육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프로그램이다. 바이러스는 사람의 몸이든 컴퓨터든 외부 침략자다. 헌데 모든 명상은 마음의 작용으로 본다. 마음의 오류다. 해서 정신질환을 영어로 disorder(고장)이라고 한다. 정신분열증은 그리스어로 '갈라지다', '분열하다'라는 뜻을 가진 스키조'σχίζω(skhízō)'와 '정신', '마음'이라는 뜻을 가진 프렌 'φρήν(phrḗn)'을 합치고 여기에 질병을 뜻하는 어미 '-ia'를 붙여 새 병명을 조어하였는데, 쉬쪼프레니아 Schizophrenia 이다 이 말은 곧 '정신분열'을 의미했다. 이 용어를 만든 이는 오이겐 블로일러(Paul Eugen Bleuler, 1857 ~ 1939)이다. 정신분열 혹은 마음분열이 정확한 번역이다. 한국정신병학회는 정신분열증을 15년 전부터 조현병으로 바꾸어 버렸다. 마음 조절이 잘못된 것이라는 뜻이다. 모두 네 탓이라는 말이다. 네가 잘못해서 미쳤으니 반성하고 마약먹고 정신차려라는 의미이다. 이 정신과 의사들이 또라이들이다. 정신분열은 외부 바이러스이며 악마와 구신 이매망량의 침범이다. 옛날 사람들이 망령들었다라고 하는 말은 이매망량이 들어왔다는 말인데 정확한 말이다. 현대의학이 미신이라고 엄청 싫어한다. 이유는 의사들이 통제 관리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능력을 가진 자들만 치료 가능한 영역이기에 능력 없고 책만 본 놈들(교수 학자 의사)은 화가 난다.
목사(moksa)는 우파니샤드에서는 아트만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아트만은 브라흐만과 합일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해방(moksa)을 아트만을 깨닫거나 아트만이 브라흐만과 합일하는 것으로 본다. 석가모니는 아트만이 없다고 말한다. 아트만이 언어가 만든 자아이며 모 명상가 말대로 표현하면 상위자아다. 고통받는 하위자아가 상위자아를 깨달으면 신이 된다고 한다. 그것은 아트만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된 경지이며, 오직 아트만 만이 있다는 우파니샤드의 결론이다. 마음에서 언어가 만든 주작질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메타언어로 구성된다. 명상은 이 메타언어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메타언어를 찾은 순간 천지가 붕괴하고 무너진다. 모든 것은 영(0 제로 공)이 된다. 천지를 맘대로 재구성 할 수있다. 컴퓨터 최적화다. 마음이라는 컴퓨터가 최적화 되었다. 이것을 모든 명상 서적은 해방 해탈 열반 구원 등등으로 표현하여 새로운 언어(마음 속에 천지창조)를 만든다. 바둑판 장기판 같은 우주를 시작하고 끝내는 유심론적 세계만 있다. 천지가 붕괴하고 새로운 우주를 하루에도 수십번 만드는 것이 마음이다. 해서 조사선에서는 "곤륜산을 베개삼고 동해물을 다 마시고 중국 대륙을 요로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잔다"고 하는 오도송(悟道頌)이 나오는 것이다. 마음에 복제된 우주다. 필자는 악마를 물리칠 때 은하계를 부수고 창조하였으며 태양으로 공놀이 하였다. 그것도 기도 상대자의 마음에 들어가서디. 빙의 환자=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 하려면 그의 뇌 속에 들어가 마음을 찾아야 하며 그 마음에 숨어 있는 악마를 찾아야 한다. 이건 돈오대각이나 범아일여를 훨씬 넘어선 경지다. 천지를 재창조하는 돈오대각이나 아트만을 깨닫는 경지로는 미칠 수 없는 영역이다. 타인의 마음과 정신세계에 진입해야 하는 신통력이다. 마음은 생명을 유지하는 프로그램이다. 윤회 까르마와는 상관이 없는데 이 마음을 정화 시키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고 그걸 통해 까르마가 없어진다고 하면 이는 사기다.
기신론의 심 진여문은 마음에 진여라는 실체가 있고 그걸 깨달으면 붓다라고 하였다. 그 진여는 결국 아트만일 뿐이다. 언어가 만든 허구다. 기신론의 깨달음은 언어 논리가 만든 바둑판에서 승리하는 게임이다. 해서 무수무변한 자칭 타칭 붓다가 나왔어도 모두 한 시대의 연예인에 그친 것이다. 우리카페에 불꽃남자라는 변호사가 필자에게 질문한 내용이 "성철이 깨달아서 부처가 되었다면, 부처가 세상을 구원하는 존재라면, 왜 세상이 이렇게 더럽고 혼탁한가요?" 이다. 결국 대승기신론을 토대로 하는 한중일 삼국 불교는 인도의 요가수트라 처럼 언어의 세계에서 바둑 한 판 이기고 스스로 신이 되었다고 붓다가 되었다고 외치는 망상장애다. 사이비 교주랑 뭐가 다른가? 우상의 황혼이다.
2천년 동안 대승기신론이 만든 우상의 황혼이다. 대승기신론 비판은 다음에 좀 더 자세히 논하기로 하고 원효는 왜 노장사상가인가?
*원효 노장사상가다.
필자는 2천년의 성경 대승기신론의 근본 문제를 지적했고 해체하였다. 진여(眞如)는 언어가 만든 허상이며 아트만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 주석을 달았는데 그것이 소와 별기이다.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220년~589년)에 위진현학이라는 사상이 나타나 이후 불교는 이 위진현학의 연장선이라고 필자는불교학 방에서 논증하여 왔다. 원효 역시 위진현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원효(元曉, 617년 ~ 686년)는 왕필(王弼, 226년 ~ 249년) 승조(僧肇 383년 ~ 414년) 축도생(竺道生 미상 ~ 434) 지의(智顗 538년 ~ 597년)의 후대인이다. 선진 문물인 중국불교와 사상에 영향을 받으며 공부했고 해서 중국 유학을 하려고 의상대사와 국경을 넘으려다 포기하고 돌아왔다. 일체유심조를 외쳤다고 한다. 즉 마음의 문제를 직시한 그는 마음의 탐구에 세월을 보낸다. 이 사실은 그가 이미 대승기신론을 얻었다는 증거다. 550년에 역출된 대승기신론이 신라에 안들어 왔을리 없다. 필자는 천안통으로 본다. 원효는 국경에서 잠자는 의상대사의 소지품에서 대승기신론을 몰래 훔쳐서 본 후 큰 감동을 얻어 유학을 포기하고 바위틈에 숨긴다. 의상이 잃어버린 대승기신론을 찾는 걸 도와주는 척 하고 포기하게 만든 후 중국으로 보낸 후 숨겨둔 기신론을 가지고 돌아 온 후 해골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다고 대중 사기극을 친 것으로 본다. 그가 마신 해골물은 대승기신론이다. 중국 유학중 암만 생각해도 원효가 훔쳤다는 것을 알게 된 의상은 돌아와 국사가 된 후 평생 원효와 척을 지고 살게 된 이유다. 이 썩을 놈이 그 비싼 내 책을 훔쳐서 돌아갔구나.... 사기와 거짓말(자장율사의 석가모니 진신사리 및 금란가사 발우 조작 https://cafe.daum.net/Wahrheit/LZpd/491 참고)의 천재인 신라인들이 조작한 것이 "중국 왕실에서 대승기신론을 해석하라고 하니 원효가 소를 달았는데 산실하여 촉박한 시간에 소가 끄는 수레에 탄 채 주석을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기존 주석을 산실 했다는 말은 원효가 오랫동안 기신론을 연구하여 주석을 달았는데 잃어 버리고 그 머리속에 존재하는 견해로 짧은 시간 주석을 했다는 말이다. 사실 양이 아주 작은 기신론 정도야 하루 아침에 주석이 가능하다. 단 수십년간 연구했다는 걸 전제로 한다. 550년에 역출 되었고 원효가 이걸 읽을 나이면 20세 되는 637년 이후다. 최소 87년이 지난 책이 신라에 안들어올리 있는가? 불교국가인 신라인데 적어도 560년에서 570년에는 신라왕실에 들어왔을 것이다. 원효의 해석이 특출하여 화엄종의 법장이 대승기신론 주석을 달 때 원효를 표절하다시피 했으니 기신론에 일가를 이룬 것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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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信論疏上卷
釋元曉撰
將說此論 略有三門 初標宗體 次釋題名 其第三者依文顯義 第一標宗體者 然夫大乘之爲體也 蕭焉空寂 湛爾沖玄 玄之又玄之 豈出萬像之表 寂之又寂之 猶在百家之談非像表也 五眼不能見其軀 在言裏也 四辯不能談其狀 欲言大矣入無 內而莫遺 欲言微矣苞無 外而有餘 引之於有 一如用之而空 獲之於無 萬物乘之而生 不知何以言之 强號之謂大乘
이 론을 말하는데 간략히 3개의 문이 있다. 첫째 종의 본체를 나타낸다. 다음은 제목을 해석, 세번째는 문장에 의거 뜻을 드러낸다. 첫째 종의 본체다. 대저 대승의 본체는 고요하고 텅비어 적막하며, 맑고 충현( 沖玄 담박하고 깨끗)하다. 현지우현하니 만가지 상이 나오고 고요하고 고요하니 백가지 담론은 할말이 없어진다. 오안(五眼)으로는 대승의 몸을 보지 못하니 언어의 속(이면)에 있다.사변으로도 그 형상을 논하지 못한다. 구지 큰 것(大)을 말하려고 하면 無에 들어가 안에 남는 것이 없어야 한다(無化). 미세한 것을 말하려면 無를 포섭하여 밖으로 남는 것이 없어야 한다. 유에서 끌어오면 일여이고 그것을 사용하면 공이다. 그것을 無에서 획득하면 만물이 그것을 타고 생한다. 그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억지로 이름하여 대승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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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중요 용어 해석 ...오안은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법안(法眼) 불안(佛眼)이다. 사무애변(四無碍辯)은 사무애해(四無碍解), 사무애지(四無碍智)라고도 합니다. 사무애변(四無碍辯)은 법무애변(法無碍辯), 의무애변(意無碍辯), 사무애변(詞無碍辯), 변무애변(辯無碍辯)이다.
원효는 보살의 경지 부처의 경지도 대승의 몸(본체)를 볼 수 없다고 한다(五眼不能見其軀오안불능견기구). 오안 중 마지막은 불안(佛眼)이다. 부처의 눈으로도 보지 못하는게 대승이다? 이게 뭔 개소리인지??? 대승이 無이기에 부처의 눈으로도 못본다고 하는 것이다. 無는 볼 수 없는 것이다. 無니까. 대승의 본체가 無이니 부처의 눈으로도 볼 수 없다고 한다. 이건 노장사상가의 말 아닌가? 모든 원효 해석가들은 모두 이 글을 무시하고 지나간다. 해석도 요상하게 하고 지나간다. 나아가 四辯(사변) 역시 보살이나 부처의 경지다. 그런데 사변(四辯)으로도 그 형상( 狀 )을 논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유는 無이기 때문이다. 원효는 空을 無라고 생각했다. 아마 승조의 조론(肇論)을 읽고 공을 無로 이해한 것으로 본다. 그는 대승의 본체를 空으로 이해하고 조론의 영향으로 공을 무로 이해한 것이다. 학자들은 조사선의 영향으로 불교를 노장사상으로 왜곡하여 멸빈당한 승조를 조사선이 복권시켜 無를 깨달음의 주체로 만든 노장사상을 불교라고 사기친 것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아님 스스로 입틀막을 한 것이다.
이 글에서 주목할 것이 "허나 대승의 본체는 비어있고 공적하며 맑고 충현하다.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 玄之又玄之)" 이다.
玄之又玄之(현지우현지)는 노자의 玄之又玄(현지우현)에 之 하나 추가한 얄팍한 술책이다. 충현하다는 말도 노장사상가가 쓰는 말이다. 한 술 더 떠서 寂之又寂之(적지우적지)는 현지우현에 댓구를 맞추어 고요하고 또 고요하다고 표현한다. 줄친 부분들이 노자의 말들이다. 도덕경 1장에 "玄之又玄, 衆妙之門(현지우현,중묘지문)"이라고 나온다. 沖玄(충현)의 충은 도덕경 4장 道, 沖而用之(도,충이용지)에서 가져온 것이며 위진현학자들은 玄을 배우는 사람들이다. 沖과 玄을 즐겨 쓴다. 또 42장에 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라는 말이 나온다(충의 기는 和가 된다). 沖玄의 충을 원효는 공으로 본다. 沖은 비어있다는 뜻이니 空과 같은 뜻이다. 나아가 無다. 玄은 검은 것이니 그 실체를 말 수 없다. 그것이 道다. 원효는 불도(佛道)를 노자의 無로 본 것이다. 즉 沖=空=無이다. 여기서 불교 용어는 空 하나다. 나머지는 노자의 말이다. 沖氣(충기)라는 노자의 용어는 후일 공기(空氣)가 되고 오늘날 우리들도 공기가 좋다 대기(大氣)질이 좋다고 표현 하는데 모두 노장사상과 원효 조사선 영향이다. 대를 원효는 무로 해석하였으니 원효 이후로 한중일 삼국은 沖氣=空氣=大氣=無氣(충기=공기=대기=무기)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원효에게 대승은 무(無=大)의 수레(乘)이다. 조사선 탄생의 모태다. 無가 곧 대승이다. 공기밥 하나주세요의 공기가 空器다. 안이 텅빈 그릇이다. 텅비어야 밥을 답고 물을 담을 수 있다. 불교의 空을 모든 이들이 無로 이해하고 일상에서도 당연하게 사용하여 온 것이다. 해서 필자는 한중일 삼국의 불교는 노장사상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 즉 한자를 뜻으로만 풀면 沖(빌충, 비었다) 空(빌공, 비었다) 無(빌무, 비었다)이다. 沖, 空, 無는 모두 비었다=빈 것이다. 해서 같은 말이다. 大 즉 위대한 것은 오직 沖 空 無 뿐이다. 정말 조잡하고 유치한 인간 이다. 해서 위진현학의 계승자이자 노장사상가인 원효는 대승을 無로 본 것이다. 그는 축도생 승조 육조혜능 처럼 불교경전을 노자의 無로 해석한 격의불교를 만든 것이다. 沖 空 無 가 한자로 같은 뜻이다. 그래서 대승은 무다. 정말 조잡하고 유치한 인간 이다.
獲之於無 萬物乘之而生 그것을 無에서 획득하면 만물이 그것을 타고 생한다. 무가 만물을 생성하고 생명을 준다는 말이다. 대승은 무를 수레로 삼는 것이다. 해서 乘之(수레에 태운다)다. 大를 태우는 수레를 대승으로 보고 大를 수레에 실으려면 무를 수레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無만이 만물을 실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위대한 것은 오직 무다. 무라야 만물을 태울 수 있다. 텅비어야 만물이 들어 올 수 있다는 것이 원효의 입장이다. 노자의 무다. 원효는 결국 무도사가 된 것이다. 의상대사는 배추도사인가? 무도사~ 배추도사~ 노장사상 만만세~~~~ 한중일 삼국은 결국 노장사상 뿐이다.
이 태도는 기신론별기에 도 잘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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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乘起信論別記本
海東沙門 元曉撰
將釋此論略有二門 一者述論大意 二卽依文消息 言大意者 然夫佛道之爲道也 簫焉空寂 堪爾冲玄 玄之又玄之 ②出萬像之表 寂之又寂之 猶在百家之談 非像表也 五眼不能見其軀 在言裏也 四辯不能談其狀 欲言大矣 入無內而莫遺 欲言微矣 苞無外而有余 將謂有耶 一如③由之而空 將謂無耶 萬物用之而生 不知何以言之 强爲道 其體也
이 론을 간략히 하면 2개의 문이 있다. 하나는 대의이고, 둘은 문장에 의거한 뜻이다. 大는 불도가 道가 된다는 말이다. 고요하고 텅비어 적막하며, 맑고 충현( 沖玄 담박하고 깨끗)하다. 현지우현하니 만가지 상이 나오고 고요하고 고요하니 백가지 담론은 할말이 없어진다. 오안(五眼)으로는 대승의 몸을 보지 못하니 언어의 속(이면)에 있다.사변으로도 그 형상을 논하지 못한다. 구지 큰 것(大)을 말하려고 하면 無에 들어가 안에 남는 것이 없어야 한다(無化). 미세한 것을 말하려면 無를 포섭하여 밖으로 남는 것이 없어야 한다.
유라고 말하면 일여이니 空에서 나오는 것이다. 無라고 말하면 그것을 사용하여 만물이 생한다. 어떻게 이것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억지로 道라고 하니 대승의 본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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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불도는 沖=玄=無=空 이다. 즉 노장사상이다. 그가 본 불교는 노장사상이며 空은 노자의 無다. 기신론 소와 별기 서문에서 보여주는 원효의 논조는 노자 도덕경의 논조다. 해서 원효는 고려 조선시대 조사선 선사들에게 숭상 받아서 계승 발전 된 것이다. 승조의 철학에서 별반 벗어나지 않으니 그렇다. 안목있는 자는 승조의 조론과 기신론 소와 별기를 비교하면 놀라운 것이 보일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을 거치며 한중일 삼국 인문학의 수준을 논하면 한심 그 자체다. 누구도 필자 같은 시각으로 보지 못하니 맹목적으로 숭배하며 산 것이다. 수준이 한심하다. 노자 이해도 일천하고 기신론 이해도 일천하니 그렇다. 유불도 삼교를 달통하고 인도철학 서양철학에 달통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점에서는 이해한다. 원효의 수준은 승조철학과 위진현학자들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들의 사상을 모태로 삼았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아직도 위진현학에 대한 연구가 유치원 수준이다. 한중일 삼국의 모든 철학 사상은 위진현학에서 나온다. 모든 불교사상과 도교사상 나아가 성리학 역시 위진현학의 계승발전이다. 몇가지 예를 기신론 별기에서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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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謂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也...分別性法 本來非有 亦非不無 依他性法 雖復非有 而亦不無...先以絶言之言不絶而理實絶言故 若使絶言之言亦言絶者 則墮自語相違過 先以絶言之言亦絶而言得說言故...理非絶言 非不絶言 以是義故 理亦絶言
이것은 리가 없는 것(無理)이 지극한 理라고 하며 그렇지 않는 것이 크게 그런 것(大然)이란 말이다....분별법성은 본래 유가 아니니 또한 무가 아닌 것이 없다(無 만이 있다). 의타기성은 비록 유가 아니고 또 무도 아니다. ...먼저 언어를 끊은 언어로 말하니 말이 끊어지지 않는다. 理는 언어를 끊는 것이기에 언어를 끊은 언어는 또한 언어가 끊어짐이다. 그러면 언어 스스로가 서로 위배된다. 먼저 언어를 끊은 언어로 말하니 끊어짐이란 말이 얻어진다....理는 언어를 끊음이 아니며 언어를 끊지 않음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理는 또한 언어를 끊음(絶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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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理之至理는 理가 없어지는 것 혹은 무화되는 것을 말한다. 리가 없어야 또는 리가 무가 되어야 지극한 理가 된다는 뜻이다. 리가 없음이 지극한 리라는 것은 노자의 말이다. 絶言之言不絶는 말없은 말은 불변하고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절언은 無言이다. 말없이 하는말 즉 조사선의 양구묵언이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참된 도가 아니다)가 원효에게서는 絶言(말을 끊어 없앰)이고 조사선에서는 묵언(默言)이 되고 이는 곧 無言이다. 조사선이 양구묵언 하는 이유가 絶言之言不絶(언어가 없어진 말은 불변하고 사라지지 않는다) 때문이다. 도는 언어를 끊은 곳 즉 無이기 때문이다. 노자 시즌 2인가? 노자의 신라버전이 기신론 소와 별기다. 노자가 말하는 건지 불교학자(승려)가 말하는 건지 헷갈린다. 승복입은 도사에 노장사상가다. 어처구니다.
원효는 모든 해석에 철저히 노자의 무를 활용하고 노자의 논법을 따라간다. 언어를 끊음(絶言)은 노자의 가르침이다.즉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참된 도가 아니다)는 도라는 것은 언어를 벗어나거나 끊어야 하는 것이 된다. 참된 道(常道)는 언어를 벗어난 곳에 있다. 해서 언어를 끊음(絶言)은 조사선의 금과옥조다. 언어는 道를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노장사상의 핵심이다. 해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이 조사선의 핵심이다. 원효는 언어도단으로 기신론을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원효의 기신론소, 별기는 한중일 삼국에서 칭송받고 원효는 보살로 숭상 받은 것이다. 결국 그는 조사선 철학의 기여자다. 구체적으로 육조혜능의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둘 다 노장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원효와 동시대인 이통현(李通玄 635 ~ 730)은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을 저술하였는데 화엄경에 대한 최고의 저술로 꼽는다. 그러나 이 책은 주역과 음양오행에 노장사상으로 화엄경을 재단하였다. 완전히 화엄경을 해체하여 중국철학으로 만들었다. 화엄경의 참뜻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이다. 이걸보면 원효나 이통현 등등 수당시대 불교교학과 불교철학의 천재들은 죄다 노장사상+주역+음양오행이라는 전통 사상으로 불교를 왜곡 변질 시켰다. 이 세가지를 다 짬뽕 시킨 자는 이통현이고 노장사상으로 기신론을 해석한 자가 원효다. 단 한 놈도 인도철학과 인도불교를 연구하지 않았다. 모조리 불교라는 이름하에 노장사상+주역+음양오행 +맹자 심성론=불교라는 공식을 따라갔다. 결국 이것은 한중일 삼국의 왕실들이 권력옹호의 도구로 호국불교 왕실불교를 만든 결과다. 왕실의 입맛에 맞추고 국가경영에 도움이 되는 사상을 불교라는 옷을 입혀서 혹세무민 한 것이다.
(조계종 최고 고승의 한탄 https://cafe.daum.net/Wahrheit/LZpd/492 참고)
노장사상은 제자백가라 부르는 제나라 직하학궁의 황로학을 거치며 위진현학을 탄생시키고 그 위진현학은 천태 화엄 등 교종를 만들고 또 선종의 핵심이 되어 후일 성리학 탄생에 공을 세운다. 원효 역시 노장사상가이며 위진현학의 계승자라는 사실이 팩트이다. 진실이다.
대승기신론소와 별기에 수많은 용례들이 원효가 노장사상가 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역대로 그 수십만의 자칭 타칭 천재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이걸 발견하고 지적하는 내가 이상한가라는 자기검열의 시간이 1990년대였다. 모든 이가 원효를 찬양하는데 한문으로 읽는 내 눈에만 원효는 노장사상가였다. 원효로 박사 받은 놈들만 백명 전후이다. 아!! 이천년 불교 역사는 눈먼자들의 난동이며 아우성이다. 우상의 황혼이구나.......
2024년 4월 16일 紫霞仙人 遊於世間
첫댓글 글 잘읽었습니다. 글자 하나하나 보다보면 원리를 찾아가는데 시간가는줄 모르고 보았습니다. 일하는 도중에 읽다보니 주마간산격이지만 그래도 많은 가리킴을 받는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글 수정 하시느라 넘 고생하셨습니다. 이런글을 접할수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