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 맨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고구려의 제17대 왕인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년)이다. 이 해 6월, 중국 북부에 자리잡은 전진(前秦)의 왕인 부견(符堅)이 사신과 순도(順道)라는 승려에게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 왔고, 또 소수림왕 4년(374년)에는 아도(阿道)라는 승려가 왔으며, 이듬해에 소수림왕은 초문사(肖門寺)를 세워 순도를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먼저 불교가 전해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과 한국은 같은 한자문화권으로서 그 접촉이 빈번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소수림왕의 시절이라면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지 무려 400년 가까이 되는 시기이다. 따라서 왕실간의 공식적인 교류가 있기 전에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를 알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실제 불교의 전래시기를 앞당길 만한 문헌상의 기록도 있다. 전진 남쪽에 위치했던 동진(東晉)의 고승 지도림(支道林, 314∼366년)이 당시의 고구려 승려에게 글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글의 내용은 동진의 고승인 축법심(竺法深)이라는 승려를 소개하는 것이므로, 그 글을 받는 고구려의 승려도 동진의 승려들과 버금하는 경륜을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고구려에는 이미 불교가 전파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지도림이라는 승려가 글을 보낸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소수림왕 이전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러저러한 면을 고려하면 4세기 초쯤에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상을 통해 중국과의 직접교류가 용이한 위치에 있던 백제는 중국의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했다. 그러나 이 전래는 국가적인 교류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진에 있던 인도출신의 한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개인적인 자격으로 백제에 건너옴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가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원년(384년)인데, 왕은 친히 교외에까지 나가 맞이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백제에서도 마라난타가 오기 이전에 간접적이나마 불교가 국가에 유익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왕은 그 해에 절을 짓고 10명의 승려를 배출케 하였다고 하니, 백제불교는 그 출발부터가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리적으로 중국과는 직접교류가 가장 곤란한 위치에 있었던 신라는 결국 같은 민족의 다른 왕국으로부터 불교를 전해 받았고, 그 시기도 상당히 늦었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제23대 법흥왕(法興王) 14년(527년)에 이차돈(李次頓)이 순교한 이후이지만, 이차돈의 순교라는 사건 자체가 그 훨씬 이전부터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었음을 입증한다. 공인되기 이전에 고구려의 승려가 신라에 들어왔음을 문헌의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문헌마다 그 시기가 서로 다르고 승려의 이름도 다른데, 그럼에도 한결같이 언급되는 사실은 승려들이 일선군(一善郡)의 모례(毛禮)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거나 피신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기록은 신빙성이 약하기는 하지만, 미추왕 2년(263년)에 고구려의 승려인 아도가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일 경우 우리 나라의 불교전래는 그 시기를 1세기쯤 거슬러 올려 3세기 초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외에 눌지왕(417∼458년) 때의 묵호자(墨胡子)가 언급된다. 또 비천왕(479∼500년) 시절과 다시 법흥왕 14년에 각각 아도가 왔음을 언급하고 있으니, 대체로 보아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5세기였을 것이다.
위와 같이 전래되어 발전하게 된 한국불교의 특징을 크게 두 가지로 든다면, 호국성과 종합성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때문에 한국불교를 흔히 호국불교 또는 통불교(通佛敎)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신라와 고려와 조선의 세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가 국가의 안전에 앞장섰던 전통은 시종일관 이어져 내려왔다. 특히 불교가 멸시되고 푸대접받던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등 국가적 위기에 처해, 승려들이 계율에 구애되지 않고 승병을 조직하여 왜적의 퇴치에 앞장섰던 것은 호국의 진정한 뜻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한국불교는 원효의 화쟁사상(제45문 참조) 이래로 갈라진 입장과 종파를 종합하려는 노력으로 일관해 왔다. 이런 특성을 일컬어 통불교라 한다. 더욱이 신앙의 면에서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와는 다른 복합성도 지니고 있다. 이는 한국의 독자적인 불교문화가 창출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민간신앙과 도교의 신앙도 불교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이의 대표적인 예가 사찰에 있는 삼신각이다. 삼신이란 독성(獨聖, 불교의 독각), 산신(山神,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 칠성(七星, 북두칠성에 축원하는 도교의 신앙)으로, 이들을 각각 모시고 독성각, 산신각, 칠성각이라 하는 것이다. 이밖에 한국불교는 특히 고려시대에 티베트계통의 영향도 어느 정도는 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국불교의 불교사적 의의는, 무엇보다도 일본의 고대불교사를 연구함에 있어 한국불교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단순한 모방도 아니며, 중국불교를 일본에 전하기 위한 가교적 역할만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은 불교를 나름대로 이해하여 수용했고, 또 그렇게 이해한 불교를 일본에 전함으로써 역시 독특한 일본불교의 창출에 기여한 것이다. 한국불교의 독창적 수용은 원효에 의해 두드러졌고 고려시대에 이르러 한국불교는 중국불교권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불교를 창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고려의 의천(義天)은 중국의 송(宋)나라에 한국불교의 전적(典籍)을 보냄으로써 당시의 중국에 화엄학을 흥성케 하기도 하였다.
종합과 조화를 목표로 하였던 한국불교의 전통은 원효로부터 출범하여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선혜쌍수론(禪慧雙修論)을 거쳐, 조선시대 휴정(休靜)의 교선일치(敎禪一致)로 맥을 잇는다. 결국 선(禪)이라는 실천과 교(敎)라는 이론의 조화를 꾀했던 것이 한국불교의 교의적인 전통이다.
이론과 실천, 즉 교와 선은 전체 불교를 이끌어 온 양대 원동력이다. 한국불교가 추구했던 종합, 통일이라는 전통은 이 양자의 조화이지 어느 한쪽으로의 편향은 아니었다. 따라서 당면한 사회와 미래의 문제해결을 위한 교의해석과 실천을 겸비할 때, 한국불교는 과거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면서 시대마다 인간의 정신을 위무하고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 조계사 : http://www.ijogyesa.net/
|
첫댓글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 백제 침류왕 384년 신라 법흥왕 527년 신라가 불교전파 시기가 정확하지 않은것 같고 설도 여러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미추왕 263년 비천왕 479년 설도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