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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가귀감 스크랩 禪家龜鑑 선가귀감 1~26
승가108 추천 0 조회 90 15.02.03 23: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 禪家龜鑑 전체내용을 게시판 넷으로 구분 작성하였다. 1~26을 하나로, 27~51을 하나로, 52~74를 하나로,

75~81 발跋을 하나로 작성하였다. 이미지화되어 있는 티벳어를 편의상 영문 대문자와 : 로 표기하였다 -

 

 

 

 

『운수단』, 『선가귀감』(보현사 수충사 소장)

 

 

출처 :

 

한국전통사상총서?불교편 03
精選休靜정선휴정?譯註역주
Hyujeong: Selected Works
Collected Works of Korean Buddhism, vol. 3

 

 

總目次총목차

 

淸虛堂行狀 청허당행장
禪家龜鑑 선가귀감
心法要抄 심법요초
禪敎釋 선교석
禪敎訣 선교결
淸虛集 청허집

 

 

 

 

禪家龜鑑 선가귀감

 

 

일물(一物) 1 ~ 4 …069
교외별전(敎外別傳) 5 ~ 7 …081
선교(禪敎)의 동이점(同異點) 8 ~ 11 …091
화두 참구와 그 요소 12 ~ 26…101

마음의 근원 27 ~ 36…129
실천의 조목 37 ~ 51…141

염불(念佛) 52…159
경전의 인연 53 ~ 54…171
수행에 대한 경책과 바른 길 55 ~ 74…175

병통과 화두의 본질 75 ~ 77…211

각 종파의 법계와 법문의 특징 78 …217
     임제종臨濟宗…218 조동종曹洞宗…220 운문종雲門宗…221 위앙종?仰宗…222 법안종法眼宗…223

     임제가풍臨濟家風…224 조동가풍曹洞家風…225 운문가풍雲門家風…237 위앙가풍?仰家風…237

     법안가풍法眼家風…230
별명임제종지(別明臨濟宗旨)…233
     삼구三句…233 삼요三要…234 삼현三玄…235 사료간四料揀…236 사빈주四賓主…236

     사조용四照用…238 사대식四大式…239 사할四喝…241 팔방八棒…242
방(棒)과 할(喝)의 본질 79…245
맺음 80 ~ 81…247

발跋 1…253
발跋 2…258
발跋 3…259

 

 

 

『선가귀감』

 

1) 『선가귀감』의 구성과 대의

 

이 책은 서산휴정이 선가의 본보기가 될 만한 글귀들을 모으고 그 각각에 대하여 평을 가하거나 송(頌)을 붙여 이루어졌다. 경전이나 역대 선사들의 어록 등에서 주제별로 선별한 말들을 구절마다 좀 더 자세히 해설하
고 마지막에는 선사로서의 안목에 따라 한두 구절의 시구(詩句) 또는 착어(著語)를 붙이는 형식으로 마무리한다.

 

사명유정(四溟惟政)의 「발문(跋文)」이 실려 있는 1579년(宣祖12) 간행본(고려대학교 및 일본 駒澤大學 소장)을 저본으로 한 『한국불교전서』 권7을 토대로 번역했다. 이 밖에 1590년(宣祖23)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 간행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605년(宣祖38) 경상도 화산(華山) 원적사(圓寂寺) 개간본, 1607년(宣祖40) 전라도 순천(順天) 조계산(曺溪山) 송광사(松廣寺) 개간본(동국대학교 소장), 1612년(光海君4) 묘향산(妙香山) 내원암(內院庵)에서 개판(開板)하여 보현사(普賢寺)로 옮긴 판본(동국대학교 소장), 1618년(光海君10) 송광사(松廣寺) 개간본(동국대학교 소장), 서문과 발문 없이 『선교석(禪敎釋)』이 부록으로 실려 있는 1633년(仁祖11) 용복사(龍腹寺) 유판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649년(仁祖27) 취서산(鷲栖山:梁
山) 통도사(通度寺) 중간본(전라남도 담양군 龍華寺 소장), 1731년(英祖7)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유간본(동국대학교 소장), 보원(普願)의 발문(跋文)이 실려 있는 1583년(선조16) 간행본(고려대학교 소장) 등 수차례 간행되었다.

 

『선가귀감』은 보기 좋은 문구를 단순히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편자 휴정이 하나로 꿸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여과시킨 결과물로서 그 제목대로 우리나라 선맥(禪脈)에서 대대로 귀감이 되어 왔다.

사명유정과 보원· 성정(性正) 등의 발문(跋文)에도 보이듯이, 이 책은 선(禪)과 교(敎)의 무리들이 제각각 지니고 있는 편견과 결함들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이를 극복하고 바른 길을 제기하려는 목적에서 출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선교일치(禪敎一致)의 관점은 아니며, 선가의 관점에서 교가의 여러 설들을 화해시키려는 시도에 속한다.

 

여기서 선가란 선종으로 분류되는 종파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무엇보다 조사선과 간화선이라는 특수한 수행법을 종지로 삼는 일단의 그룹을 말한다. 휴정은 이 선법이 다른 어떤 수행법보다 학인들
이 따라야 할 본보기가 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선가의 주옥같은 구절들을 간화선에서 제기하는 화두 참구의 관점에서 간명하게 나타내고, 무수한 수행의 과제를 돌파하는 망치와 집게가 되도록 후세에 남겼던 것이다.
성정의 「발문」에서 “귀감이라고 한 이유는 선과 교에서 날마다 활용하는 요체가 되는 문이기 때문”이라고 했듯이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에 귀감이 되는 글들을 휴정의 관점에 따라 정리한 책이 『선가귀감』이다. 휴정이 항상 지니고 있었던 선수행과 사상에 관한 평소의 생각은 여러 단편에 들어 있지만 이 책의 편집을 통하여 그것들이 하나로 종합되어 꽃을 피웠던 것이다.

 

2) 일물(一物)

 

말도 생각도 붙을 수 없고 불조(佛祖)의 기량도 그 앞에서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는 ‘하나의 그 무엇[一物]’이 이 책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선가귀감』 전체를 꿰뚫는 화두는 바로 이 ‘하나의 그 무엇’이다.

선(禪)이나 교(敎)나 모두 이것을 밝히는 방식에 따라 갈라지고, 화두 공부의 목적도 언어와 분별에 물들기 이전의 이 일물(一物)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그 경계에 안착하는 데 있다. 불성이니 진여니 하는 교학의 개념과 ‘하나의 그 무엇’을 등치관계에 놓고 이해하려는 시도는 조사선의 뜻에 배반된다. 하나의 그 무엇 앞에서는 부처나 조사도 할 일이 없고 하늘과 땅도 빛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뜻을 가진 법과 그것을 이해하는 수많은 근기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물을 고수하며 본분(本分)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차별된 근기를 이끌어갈 방법이 없다. 따라서 마음·부처·중생 등의
말에 일물을 실어 전할 수밖에 없다. 어떤 방편도 허용하지 않고 일물의 영역을 고수하는 방식과 대상에 따라 다양하게 펼치는 방편을 허용하는 입장을 자유롭게 운용해야 본분에서 어긋나지 않으면서 중생 제도의 뜻을 펼칠 수 있다.

 

마음이라 하거나 부처라 하거나 그 밖에 무슨 말로 표현하더라도 그 이름을 고수해서는 안 되고 그 속에서 일물을 포착하여 언어 이전의 몰자미(沒滋味)로 돌아가야 본래 지시한 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표현된 말은 교법(敎法)이고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선법(禪法)이다. 일물을 보여주기 위한 언어와 명칭이 도리어 그것을 가리는 장애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타파해 나가는 방법이 필요하다. 휴정은 이 장애를 제거하고 하나의 그 무엇과 마주치기 위한 수행법으로 ‘화두 참구’를 제시한다. 경전의 말씀이나 조사의 말이나 모두 의심으로 몰아가서 그 말에 지배당하지 않고 말의 허구가 산산조각 날 때까지 궁구하는 방법이 화두 참구이다. 그러한 의심 속에 들어오면 모든 말은 활구(活句)가 된다.

 

3) 선교(禪敎)의 동이점(同異點)

 

휴정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는 말에 따라 이 두 가지 모두 부처님이 근원이지만 전승한 사람의 차이에 따라 갈라지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말이 없는 경지로부터 말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선이요, 말이 있는 것으로부터 말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교이니, 마음은 선법(禪法)이요 말은 교법(敎法)이다”라고 한다.

교는 만대의 의지처가 되므로 자세한 언어로 풀어줄 수밖에 없고, 선은 곧바로 근원을 가리키는 방법에 따르므로 마음이 근본에 통하도록 언어의 자취를 없애는 것이다. 그래서 교는 활등이 굽은 것과 같이 우회하며 자세히 설하고, 선은활시위가 곧은 것과 같이 직접 근원을 가리킨다. 이러한 차별성이 있지만 선과 교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뿌리라고 보는 것이 휴정의 견지이다.

 

하지만 선과 교 사이에는 깊이와 활용의 차이가 있다. 염화미소(拈花微笑)와 같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소식도 교학의 자취에 따라 이해하면 죽은 말[死句]에 불과하며, 마음에서 선(禪)의 경계를 성취하면 거리에 하찮게 떠도는 말이나 자연의 모든 소리도 진리를 전하는 법음(法音)이 된다. 그래서 언어에 매몰되지 말라는 뜻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이다.

 

선과 교의 모든 소재를 타파하여 수행자로서 할 일을 마치고 나면 특별히 추구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이 경계에 이르고 나서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는 무사인(無事人)의 경지를 일상에서 전개하게 된다고 한다.

 

4) 화두 참구와 그 요소

 

휴정은 참구(參句)와 참의(參意)의 구별을 기점으로 수행의 바른 방향을 찾는다. 구절의 뜻을 낱낱이 추구하는 참의는 원돈문(圓頓門)의 사구(死句)이다. 이 방법에 따르면 모든 구절은 활력을 잃고 사구(死句)가 된다. 반면에 참구(參句)는 구절에 어떤 맛도 없는 경절문(徑截門)의 활구(活句)이다. 이 활구는 모색할 도리가 전혀 없다. 화두 참구는 하나의 공안을 원돈문과 같은 교학의 최고 이론에 따라 조명하려는 시도가 아니며, 그 밖의 인식체계로 의미를 추구하는 방식의 공부가 아니다. 의미와 언어의 길로 통할 방도가 없는 구절[句]을 대상으로 삼아 그렇게 통하지 않는 장벽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두를 참구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일정한 화두를 끊어짐 없이 잠시도 생각에서 놓치지 말고 제기하는 것이다. 화두를 들고 공부할 때 화두 이외의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는 이유는 마음의 틈이 있기
때문이다. 그 틈은 화두를 놓치고 아무 생각이 없거나 다른 생각이 화두를 대신하는 순간 발생한다. 이렇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휴정은 마군(魔軍)의 침입으로 보고 빈틈없이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뜻을 전한다.

휴정은 대신근(大信根)·대분지(大憤志)·대의정(大疑情) 등 고봉원묘(高峰原妙)가 제시한 화두 참구의 세 가지 요소 중에서 특히 의심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간화선사들의 생각을 정리하여 소개한다.

여기서 무자(無字)화두를 공부하면서 발생하는 열 가지 병통 곧 간화십종병(看話十種病)에 대한 설명도 보인다. 이들 하나하나에서 어떤 분별 수단으로도 파고들어 갈 수 없는 화두의 본질적 속성이 나타난다. 이렇게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화두 본래의 경계를 ‘활구’라 한다. 그 밖에 화두 공부를 할 때 지나치게 덤벼들면 산란하게 되거나 혈기가 오르고, 느슨하게 하면 혼침에 빠지게 된다고 경계한다.

 

화두 공부가 바르게 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휴정은 수행자로서 일상에서 언제나 자신을 반성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조목을 제시하는데, 여기에 화두 공부를 점검하는 사항도 들어
가 있다. 이러한 자기 점검과 더불어 공부하는 자들은 화두를 타파했다고 생각한 다음에 반드시 그 경계가 올바른 것인지 밝은 눈을 가진 선지식을 찾아가 점검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게 스스로 돌아보는 방법과 선지식에 의지하는 방법 등 두 가지 점검법은 태고보우(太古普愚)의 설에 따랐다.

 

5) 마음의 근원

 

먼저 깨닫고 나중에 닦는다는 취지의 글들을 모아 해설한 부분(27~36)에서는 자기 마음의 근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리 수행해도 무명만 증가할 뿐이라 한다. 범부와 성인은 본래 두 가지로 갈라서 분별할 수 없는 동일한 근원이라는 점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근원이며, 이 도리를 확고하게 믿고 이해하는 것이 신해(信解)이다. 따라서 범부와 중생의 마음을 버릴 필요도 없고 진실을 구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버리거나 구하거나 두 가지 모두 그 자체로 번뇌에 물든 것이기 때문이다.

 

6) 실천의 조목

 

이러한 신해(信解)의 내용을 구현하기 위한 수행(37~44)이 이어진다.
수행의 요체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평등하게 닦는 데 있기 때문에 이들의 밀접한 관계를 알아야 한다. 특히 계는 교가와 선가 양자 모두의 근원이며, 삼학은 각각 독립적인 수행 조목이 아니며 필연적으로 상호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음으로(46~51) 보시·지계·인욕 등 6바라밀로부터 주문과 예배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인 수행 조목을 제기하여 하나씩 언급한다. 6바라밀을 실천하는 지침을 하나씩 제기하여 경전과 논서 등에서 예를 들어 지시한다.
또한 신주(神呪)를 들고 외우는 공덕, 진실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뜻을 지닌 예배 등을 들어 준다.

 

이것은 수행으로 성취한 진실한 경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조목들을 추려 그에 대한 각각의 근거와 수행법을 간결하게 해설한 것이다.

 

7) 염불(念佛)

 

52 전체는 염불과 극락왕생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다. 입으로 소리 내어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송(誦)과 마음으로 외우고 관(觀)하는 염(念)이 함께 운용되어 마음과 입이 합치되어야[心口相應] 바른 염불이라 한다.

초기 선종부터 제기되는 염불관의 자료를 싣고서 이들은 모두 본래의 마음을 가리켜 보이기 위한 목적에서 시설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휴정은 염불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 이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미타불의 48대원을 비롯하여 전통적인 염불의 교설을 부정하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맥락을 소개한다. 자력(自力)으로 왕생하는 길은 느리고 타력(他力) 또는 불력(佛力)으로 그것을 추구하면 빠르다는 뜻을 전하고, 자신의 성품 자체가 아미타불이라는 생각에 기초하여 더 이상 아미타불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한다. 본성 자체가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타력에 의한 왕생을 낮추어 보고 자력만 믿어서도 안 된다는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뜻을 전제로 휴정은 적어도 염불에 관한 한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취지를 지지하고, 돈오했더라도 반드시 점차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종밀(宗密)의 주장을 활용한다.

 

대체로 염불과 정토왕생에 관해서는 모든 조목에 대하여 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선법으로 통일시키는 관점에 근거하여 처리한다. ‘본심을 곧바로 가리키는 하나의 법으로써 모든 근기에 맞아떨어지게 한다’라는 근본 이치에 따라 그 방편으로 왕생과 염불을 펼쳐 보인 것이다.

 

8) 경전의 인연

 

선가는 경전을 무시한다는 잘못된 편견이 있으나, 경전의 뜻을 몰라도 읽는 소리가 귀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불도를 성취하는 인연이 된다고 한다. 다만 그것을 자기 본분상에 귀착시켜 읽지 않으면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세에 남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지식을 자랑하고 말재주로 돋보이려는 허망한 공부를 비판하는 것이다.

 

9) 수행자에 대한 경책

 

무상(無常)의 불은 항상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다. 이렇게 무상이 우리의 육신을 비롯하여 주변의 모든 것을 덧없이 사라지게 만든다는 사실을 가장 긴급한 일로 인식하고 번뇌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수행에 힘쓰며 시
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경책한다. 다급한 이 현실을 무시하고 명예와 이익을 좇아다니며 헛되게 살아가는 수행자를 휴정은 호되게 비판한다. 명예와 이익의 덧없음을 보여주고 그것들이 탐욕의 불길만 조장한다
는 뜻을 경전과 시구 등을 인용하여 드러내었다. 또한 수행자가 일상에서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할 마음의 상태를 지시하면서 성냄과 교만을 가장 큰 번뇌의 조목으로 경계하였다.

 

59~67에서, 이러한 수행자는 가사를 입고 있지만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양과 같을 뿐이며, 신도의 시주물만 허비한 죄를 반드시 받게 되리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뜻을 되돌아보고 항상 본분에 힘쓰며, 두려운 마음으로 시주물을 받아서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는 수단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68에서는 신체의 부정(不淨)하고 무상(無常)한 본질을 제기한 다음 그에 집착하지 말고 일상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69에서는 죄를 참회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방법을 보이고 이어서 오로지 도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소박하고 곧은 태도를 견지하는 올바른 삶의 방향에 대하여 언급한다.

 

10) 병통과 화두의 본질

 

소승의 성문은 고요한 경계에 집착하여 머물지만, 대승의 보살은 시끄러운 저잣거리에서도 걸림 없이 노닐고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72).
더 나아가 오늘날 선을 말하는 자들이 모든 것이 소멸하여 단절된 경계에 집착하여 본래의 공(空)을 오인하는 착각을 비판한다(75). 또한 심문담분(心聞曇賁)의 설을 인용하여 귀와 눈에 병통이 있는 종사로부터 심장과 배에 병통이 있는 종사에 이르기까지 진실을 모르고 학인을 가르치는 종사들의 잘못을 비판한다(76).

 

77부터는 다시 ‘이 구절’ 곧 어떤 분별 수단도 통하지 않는 화두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 시작된다. 말도 꺼내기 전에 방(棒)을 휘두르거나 할(喝)을 내지르는 방식은 화두의 그러한 속성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몸을 아프게 자극하는 방과 고막을 찢을 듯한 할은 분별을 부수는 화두와 다르지 않다. 이 측면을 마조의 할에 귀가 멀었던 백장과 그 말을 듣고 혀를 내둘렀던 황벽의 인연을 통하여 드러내고 그것이 곧 임제종의 연원이라 해설한다.

 

11) 각 종파의 법계와 법문의 특징

 

임제종(臨濟宗)·조동종(曹洞宗)·운문종(雲門宗)·위앙종(?仰宗)·법안종(法眼宗) 등 5가를 대표하는 선사들의 법명을 나열하고, 각 종파의 종지를 간명하게 제시한다.

특히 임제종의 종지를 별도로 독립시킨 별명임제종지(別明臨濟宗旨)라는 제목의 글에서 삼구·삼요·삼현·사료간·사빈주·사조용·사대식·사할·팔방 등 9항으로 나누어 자세히 보여 준다.

휴정은 이것이 단지 임제의 종지에 한정되지 않고 누구나 갖추어야 할 본분상의 요소이기 때문에 이것과 떨어진 설법은 모두 망령된 말이라고 하여 임제종의 종지가 지니는 보편성을 드러내었다.

 

결론 부분(79이하)은 임제와 덕산까지도 한계로 설정하고, 부처나 조사 보기를 원수를 보듯 하여 어떤 것에도 얽매임이 없어야 한다는 무사(無事)의 뜻을 제기한 다음, 가장 앞에서 제기한 구절들과 이 말을 연관시켜
마무리한 것이다.

 

부록으로 사명유정을 비롯한 제자 세 분의 발문을 수록했다.

 

 

 

 

 

 

 

일물(一物)

 

1

 

하나의 그 무엇[一物]1)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본래부터 밝디밝으며 신령스럽고 신령스럽지만 생성한 적도 없고 소멸한 적도 없으니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을 그려 나타낼 수도 없다.2)

 

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 不曾滅, 名不得, 狀不得.

 

1) 一物.

그 무엇이라고도 결정지어 말할 수 없는 것. ‘物’을 ‘물건’이라 번역하는 것은 본래의 뜻에 적절하지 않다. 『六祖法寶壇經諺解』에 ‘ 것도 업거니’ 라고 하였는데, ‘物’을 ‘것’이라 한 번역에 따라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어떤 정해진 모습도 가지지 않고 모든 규정의 틀로부터 빠져나가는 ‘하나의 그 무엇’으로 옮겼다.

어떤 이름이나 개념과도 친근하지 않지만 동시에 가능한 모든 명칭이 붙어도 무방하다. 마음이나 부처나 중생을 비롯한 어떤 이름도 허용하지만 그중 어느 것에 확고한 보금자리를 틀고 이해하려 한다면 벌써 ‘하나의 그 무엇’은 아니다.

이 말은 “보리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에도 받침대가 없다. 본래 하나의 그 무엇도 없거늘, 어디서 티끌과 얼룩이 생기겠는가!”(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는 6조 혜능(慧能)의 게송에서 유래한다.

혜능의 게송 제3구가 본래 돈황본(燉煌本) 『壇經』에는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佛性常淸淨)” 또는 “맑은 거울은 본래 청정하다(明鏡本淸淨)”라고 되어 있었으나 돈황본 이후의 『壇經』에서는 “본래 하나의 그 무엇도 없다(本來無一物)”라는 전혀 다른 문장으로 바뀌었다.

‘불성’의 자리에 ‘하나의 그 무엇도 없다(無一物)’는 말이 대신 들어섰는데, 이 두 가지가 서로 통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다. 피상적으로는 일물(一物)이 불성의 대체어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변화된 선사상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성은 언제나 모든 중생에게 갖추어져 있는 변하지 않고 보편적인 가능성이지만, 일물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어떤 보편적 본질도 개별적 특징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본체보다 활발한 작용 중심으로 변화된 선법의 관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주석6)에서 보이듯이 신회가 6조의 서자가 되고 회양이 적자가 된 까닭은 바로 이 일물에 대한 이해를 기준으로 한다.

신회는 그것을 불성이라 단정하여 구태의연한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6조의 본의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혹한 것도 아니요 깨달은 것도 아니니 범부나 성인으로 일컬을 수도 없고,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자신이나 타인이라 칭할 수도 없으므로 다만 ‘하나의 그 무엇’이라 한다.

6조 혜능이 ‘하나의 그 무엇이 있다.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부를 이름도 없고 쓸 글자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지탱하고 아래로는 땅을 받치며, 밝기는 태양과 같고 어둡기는 칠흑과 같다. 항상 움직이며 작용하는 속에 있으나 움직이고 작용하는 속에서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라고 한 말이 바로 이 뜻이다.
비록 이러하지만 ‘하나의 그 무엇’이라는 말 또한 억지로 붙인 말일 뿐이다. 그러므로 남악회양화상이 ‘하나의 그 무엇이라 말하여도 딱 들어맞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하나의 그 무엇이 여기에 있다’라고 한 말은 현재의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맑고 고요하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金剛經五家解說誼』「序」 韓7 p.10b22.

非迷非悟, 不可以凡聖稱, 無我無人, 不可以自他名, 故但云一物.

六祖云, ‘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上柱天, 下柱地, 明如日, 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 收不得者.’ 是.

然雖如是, 一物之言, 亦强稱之而已. 故南嶽讓和尙道, ‘說似一物卽不中.’

‘有一物於此者.’ 不離當處, 常湛然故, 云爾.)

여기에 인용된 6조의 말은 동산 양개(洞山良价)와 태수좌(泰首座) 사이의 문답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洞山語錄』 大47 p.511a5 참조.

2) 명부득상부득(名不得狀不得). 운문문언(雲門文偃)의 말.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분별로 헤아릴 수도 없는 경계를 나타낸다.

“동산이 ‘부처님의 경지 이상으로 향상하는 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말에 대해 학인이 물었다. ‘부처님의 경지 이상으로 향상하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동산이 말했다. ‘부처님의 경지도 아니다.’ 운문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을 그려 나타낼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의 경지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門廣錄』 권중 大47 p.558a8.

擧洞山云, ‘須知有佛向上事.’ 僧問, ‘如何是佛向上事?’ 山云, ‘非佛.’ 師云, ‘名不得, 狀不得. 所以言非.’)

 

 

[평]

‘하나의 그 무엇’이란 무엇인가? ?3) 옛사람의 게송에 “과거칠불(過去七佛)4)께서 나오시기 전부터 (이미 있었던) 뚜렷한 동그라미 하나.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했거늘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었으리오?”5)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그 무엇이 생성하는 것도 아니요 소멸하는 것도 아니므로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을 그려 나타낼 수도 없는 까닭이다.

육조혜능이 대중에게, “나에게 하나의 그 무엇이 있는데, 부를 이름도 없고 써 보일 글자도 없다. 그대들은 알겠는가?”라고 하자

신회(神會)선사가 나아와서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本源)이며,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라고하였다.6)

이것이 신회가 육조의 서자(庶子)가 되는 이유이다.

회양(懷讓)선사가 숭산(嵩山)에서 왔을 때 육조가 “어떤 것이 이렇게 왔는가?”라고묻자 회양은 어찌할 줄 몰랐다.

8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스스로 옳다고 여긴 것이 있어 “하나의 그 무엇이라 말하더라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회양이 육조의 적자(嫡子)가 되는 이유이다.

 

一物者, 何物? ○ 古人頌云,“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 名不得狀不得也.

六祖, 告衆云,“ 吾有一物, 無名無字. 諸人還識否?”

神會禪師, 卽出曰,“ 諸佛之本源, 神會之佛性.” 此所以爲六祖之蘖子也.

懷讓禪師, 自嵩山來, 六祖問曰,“ 什?物伊?來?” 師罔措,

至八年方自肯曰, “說似一物卽不中.”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

 

 

[게송]

유·불·도 삼교의 성인7)들이 모두 이 구절로부터 나왔으니, 누가 이에 대하여 들먹이겠는가? 눈썹 아까운 줄 알라!8)

 

三敎聖人, 從此句出, 誰是擧者? 惜取眉毛!

 

 

3) 일상원(一相圓)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 ‘하나의 그 무엇’에 대해 일원상을 도시하여 대답한 것이다. 진여·법성·실상·불성 등을 나타낸다고 해설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사선에서는 불자·주장자·손가락 등을 이용해 땅이나 허공 등에 원상을 그려 놓고 상대를 시험하고 점검하는 수단으로 쓰면서 상황에 따라 활용하는 틀일 뿐 진여 등과 같이 일정하게 규정된 의미는 없다. 그러므로 조사선의 맥락에서 볼 때 일원상은 진여 등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아니며 그때마다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제시되는 일종의 화두에 가깝다.

『從容錄』 권5 77則 「評唱」 大48 p.276a15에 따르면, 중국에서 일원상을 가르침의 수단으로 처음 사용한 이는 혜충국사(慧忠國師)인데, 그는 이 일원상을 시자였던 탐원(耽源)에게 전해주었고, 탐원은 다시 앙산(仰山)에게 전해주어 위앙종의 가풍[?仰家風]이 되었다라고 한다.

한편 어떤 수재(秀才)가 24가(家)의 서체(書體)를 안다고 하자 목주(睦州)가 허공에 한 점을 찍어 붓글씨를 쓰는 가장 기초적인 필법을 보임으로써 본분의 뜻을 보인 인연에 대해 위산모철(?山慕喆)이 그 핵심을 집어내어 평가한 말에 일원상이 화두로 제시된다.

“‘목주는 그 한 점의 미묘한 뜻을 활용하는 데 걸림이 없었으나, 마치 자신의 권세로 상대를 속인 것처럼 보인다.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 하고, 원상(○) 하나를 그려 놓고 말했다.

‘알겠는가? 글자의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으니 이 온전한 문장에 한 점도 덧붙일 필요가 없다.’”

(『禪門拈頌說話』 656則 韓5 p.504c1.

?山喆拈, ‘睦州不妨用得這一點妙, 又似以勢欺人. 大?卽不然.’ 乃?一圓相云, ‘會?? 字義炳然, 文不加點.’)

4) 과거에 출현한 일곱 분의 부처님. 비바시불(毘婆尸佛 Vipa?yin)·시기불(尸棄佛?ikhin)·비사부불(毘舍浮佛 Vi?vabhu)·구류손불(拘留孫佛 Krakucchanda)·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Kanakamuni)·가섭불(迦葉佛 Ka?yapa)·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kyamuni) 등을 가리킨다.

석가모니불 이전의 먼 과거부터 이들 여러 부처님에 의해 불법(佛法)이 전해져 왔으며, 비바시불에서 비사부불까지의 세 부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먼 과거인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에 출현하였고, 구류손불에서 가섭불까지의 부처님은 석가모니불과 같은 현겁(現劫)에 출현하였다고 한다.

5) 자각종색(慈覺宗?)의 말. “천동정각(天童正覺)이 자각종색의 『권효문』 수편(首篇)에 나오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부터 뚜렷한 동그라미 하나! 석가도 알지 못했거늘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었으리오’라고 한 게송을 들고 평가했다.
‘14조인 용수보살이 법좌에서 몸을 숨긴 채 ○상을 드러내자,

 제바가 「이는 존자가 부처님의 체상(體相)을 드러내어서 우리들에게 보이신 것이다.

이 무상삼매(無相三昧)의 형태가 마치 보름달과 같으니, 불성의 뜻은 막힘없이 트이고 밝구나」라고 말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비유한 것이다.”

(『從容錄』 권5 77則 「評唱」 大48 p.276a11.

師擧, 慈覺勸孝文首篇頌云,

‘父母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不會, 迦葉豈能傳?’,

 ‘十四祖龍樹, 於法座上, 隱身現○相,

提婆曰, 「此尊者現佛體相, 以示吾輩也.
以此無相三昧形如滿月, 佛性之義, 廓然虛明.」 譬此而已.)

7) 보통 유교의 공자, 불교의 석가모니, 도교의 노자를 말한다.
8) 어떤 말도 붙을 수 없는 하나의 그 무엇[一物]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들먹인다면 빗나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불법을 오해하여 잘못 말해버리면 눈썹과 수염이 모두 떨어져 나간다는 설에 따르는 말이다. 반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에 대하여 눈썹이 떨어져 나갈 것을 알면서도 방편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석미모(不惜眉毛)라 한다.

 

 

 

2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온 것은 바람도 불지 않는 곳에서 물결을 일으킨 것과 같다.9)

 

佛祖出世, 無風起浪.

 

 

[평]

부처님과 조사란 세존과 가섭을 말한다. 세상에 나왔다는 말은 큰 자비를 근본으로 삼아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의 그 무엇’으로써 관찰해 보건대 사람마다 그 면목이 본래 이루어져 완성되어 있
으니, 어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자신의 본래 모습에) 연지 찍고 분을 발라 꾸밀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와 공연히 물결만 일으켰다고 한 이유이다.

『허공장경』에 “문자도 마업10)이요 명상11)도 마업이요, 부처님의 말씀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마업이다”12) 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이는 곧바로 본분(本分)13)을 들어 말한 것이니, 부처나 조사일지라도 특별히 할 역할이 없다.14)

 

佛祖者, 世尊迦葉也. 出世者, 大悲爲體, 度衆生也. 然以一物觀之, 則人人面目, 本來圓成, 豈假他人, 添脂着粉也! 此出世之所以起波浪也.

虛空藏經云,“ 文字是魔業, 名相是魔業, 至於佛語, 亦是魔業.” 是此意也. 此直擧本分, 佛祖無功能.

 

 

[게송]

하늘과 땅도 빛을 잃고, 해와 달도 광명을 잃었네.15)

 

乾坤失色, 日月無光.

 

 

9) 무풍기랑(無風起浪). 아무 일도 없는 곳에서 쓸데없이 불필요한 일을 만들어 혼란하게 만드는 것.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온 것은 바람도 없는 데서 파도를 일으킨 것과 같으며,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연꽃을 들어 보인 것도 한바탕의 잘못에 불과하다.”

(『緇門警訓』 권7 大48 p.1075b4. 達磨西來, 無風起浪, 世尊拈花, 一場敗闕.)

10) 魔業. 마구니의 행위. 마구니는 정법을 방해하고 불도의 성취를 방해하는 유형·무형의 존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마구니의 직접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를 증득하는 것을 장애하는 것, 예를 들면 번뇌·게으름·미혹 등도 통틀어서 마업이라 한다. 『大方等大集經』 권15 大13 p.105c17 참조.
11) 名相. n?ma-sam3 sth?na. 사물의 명칭과 차별적인 형상. “이 중에서 상(相)이란 드러난 색 등의 형상에 각기 차별이 있는 것을 말하고, 명(名)이란 저 여러 가지 상에 따라서 병(甁)이라는 등의 이름을 세우는 것을 가리킨다.”(『楞伽經註解』 권4 大39 p.418a7. 此中言相者, 謂所見色等形狀各別也;名者, 依彼諸相, 立甁等名.) 『楞伽經』 권4 大16 p.511b12 참조.
12) “문자를 시설하는 것은 모두 마업이니, 부처님의 말씀까지도 마업이 된다.”(『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 권7 大13 p.642a15. 施設文字, 皆爲魔業, 乃至佛語, 猶爲魔業.)
13) 어떤 분별과 수단도 허용하지 않는 종사의 법도이다. 어떤 대상에도 규정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활발하고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는 ‘하나의 그 무엇’에 해당하며, 일원상(一圓相)과도 통한다.
14) 앞에서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온 것은 바람도 불지 않는 곳에서 물결을 일으킨 것(無風起浪)과 같다’라는 구절에 대한 해설이다.

15) 본분을 바로 들어 보여 차별이 사라진 세계를 표현한 말.

“파정을 시행하면 하늘과 땅이 빛을 잃고 해와 달도 광명이 사라지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방행을 시행하면 바위 골짜기에서 광명이 일어나고 삼라만상이 밝은 빛을 드러내며,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대상 하나하나마다 모두 진실하고 낱낱의 존재가 그 실상을 드러낼것이다.”

(『?悟語錄』 권8 大47 p.751a3.

其把定也, 乾坤失色, 日月無光, 盡大地人, 喪身失命.

其放行也, 巖谷生光, 森羅顯煥, 隨長隨短, 隨有隨無, 處處皆眞, 頭頭露現.)

 

 

 

 

3

 

그러나 법에는 다양한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수많은 근기가 있으니, 그에 따르는 방편을 세워도 무방하다.

 

然, 法有多義, 人有多機, 不妨施設.

 

 

[평]

법이란 하나의 그 무엇이요, 사람이란 중생을 말한다.

법에는 변하지 않다[不變]는 뜻과 인연을 따르다[隨緣]16)는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돈오와 점수의 근기가 있으니, 문자나 언어로 방편을 펼치지 않을 수 없다.16)

이것을 가리켜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허용하지 않지만, 사적으로는 수레와 말도 통과하도록 허용한다”17)고 한다.

중생이 비록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지혜의 눈을 타고나지 못하여18) 윤회를 감수하게 된 것이니, 세간의 속박을 벗어나게 하는 금비(金?)19)가 아니라면, 누가 무명(無明)의 두꺼운 꺼풀을 벗겨줄 수 있을 것인가!19)

고해(苦海)를 건너 즐거운 언덕에 오르는 데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크나큰 자비심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무수한 목숨으로도 그 은혜의 만 분의 일도 갚기 어렵다.

이것은 새롭게 훈습20)하여 습득한 결과를 자세하게 거론하여 부처와 조사의 깊은 은혜에 감사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法者一物也, 人者衆生也.

法有不變隨緣之義, 人有頓悟漸修之機, 故不妨文字語言之施設也.

此所謂,“ 官不容針, 私通車馬” 者也.

衆生, 雖曰圓成, 生無慧目, 甘受輪轉故, 若非出世之金?, 誰刮無明之厚膜也!

至於越苦海而登樂岸者, 皆由大悲之恩也. 然則恒河沙身命, 難報萬一也.

此廣擧新熏, 感佛祖深恩.

 

 

[게송]

임금이 용상에 오르시니, 촌로가 태평가를 부르네.21)

 

王登寶殿, 野老謳歌.

 

 

16) 진여(眞如)는 모든 법의 근거로서 생성과 소멸을 넘어서 상주하므로 ‘불변’이라 하고, 이러한 불변의 본질을 지니면서도 염(染)·정(淨)의 인연에 따라 움직이며 삼라만상을 드러내므로 ‘수연’이라 한다. 법성종(法性宗)의 공통된 설이며, 화엄종의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에도 널리 적용된다.

『大乘起信論』 大32 p.576a5에 따르면, 불변은 심진여문(心眞如門)이고 수연은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서 일심(一心)의 두 가지 측면이며 이 두 문으로 모든 법을 총괄적으로 포섭한다고 한다.
17) 관불용침사통거마(官不容針私通車馬). 공적인 일로는 사사로운 이해득실에서 벗어나 오로지 법을 준수해야 하지만, 사사로운 일로는 사정에 따라 법에 어긋나더라도 허용할 수 있다는 뜻. 일물을 고수하는 입장에서는 털끝만큼의 말도 허용하지 않지만, 상황이나 사람의 수준 등에 따라서는 다양한 방편을 쓸 수 있다는 말이다. 『景德傳燈錄』 권17 「曺山本寂傳」 大51 p.336b5, 『臨濟語錄』 大47 p.506b24 등 선문헌에 널리 나타나는 구절이다.
18) “시작도 없는 때부터 본래 무명을 일으켜 자기의 주재(主宰)로 삼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은 지혜의 눈을 타고나지 못하여 몸과 마음 등의 본질이 모두 무명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지 못하는 것과 같다.”
(『圓覺經』 大17 p.919b20.

由有無始, 本起無明, 爲己主宰, 一切衆生, 生無慧目, 身心等性, 皆是無明. 譬如有人, 不自斷命.);“

〈경〉 모든 중생은 지혜의 눈을 타고 나지 못하였다.

〈소〉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람이 열 살이나 스무 살에 장님이 되었다면, 눈앞에 있는 사물을 비록 보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설명해 주면 이해할 수 있지만, 만약 모태에서부터 눈이 멀어 장님으로 태어났다면 색상을 마주고 있을 때에 갖가지로 설명해 주더라도 끝내 이해하는 데 도움이되지 않는 것과 같다. 곧 먼저 금비로 눈을 덮고 있는 꺼풀을 도려낸 다음에 옳고 그름을 가리켜 보여야 한다.”

(『圓覺經略疏』 권하 大39 p.564a26.

一切衆生, 生無慧目.

未曾悟故. 如人若十歲, 二十始盲, 則眼前, 雖不見物, 說之, 卽能了知. 若胎中無目, 生來便盲, 則對色之時, 種種爲說, 終無所益. 則先須金?抉膜, 然後, 指示是非.)

19) 인도에서 사용하던 의료기구의 하나. 무명을 타파하는 지혜를 비유한다. 위의 주석 인용문 참조. 금주(金籌)·금비(金?·金?)·금배(金拜) 등과 같은 말이다. 의사가 맹인의 눈을 고치기 위하여 안막을 도려내는 데 사용했던 의료 도구이다. 부처님께서 지혜의 방편으로 중생의 무지를 도려내어 차츰 깨달음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을 이것에 비유한다. 『大般涅槃經』 권8 大12 p.411c21, 『大般涅槃經疏』 권11 大38 p.108b24, 『大般涅槃經集解』 권20 大37 p.462b29 등 참조.
20) 신훈(新熏). 본분(本分)에 대칭되는 말이다. 금시(今時)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본분이 어떠한 분별과 수단도 허용하지 않는 무차별한 조사의 법도라면, 신훈이나 금시는 상황이나 학인의 근기에 따라 방편을 허용하는 입장이다.
21) 임제의현(臨濟義玄)의 문답에 나오는 말.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임금이 용상에 오르시니, 촌로가 태평가를 부르네.’”

(『臨濟語錄』 大47 p.497a28. 僧云 ‘如何是人境俱不奪?’  師云, ‘王登寶殿, 野老謳歌.’)

주관인 사람과 객관인 경계가 모두 자신의 차별된 지위에서 그 본질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어떤 방편도 허용하지 않고 일물의 영역을 고수하는 방식과 대상에 따라 다양하게 펼치는 방편을 허용하는 입장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뜻을 나타낸다.

 

 

 

4

 

마지못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고도 하고, ‘부처’라고도하고, ‘중생’이라고도 한 것일 뿐이니,

이 이름을 고수하며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옳은 것이니,22) 생각을 일으켜 분별하는 즉시 어긋나버린다.

 

强立種種名字, 或心或佛或衆生, 不可守名而生解.

當體便是, 動念卽乖.

 

 

[평]

하나의 그 무엇에 굳이 세 가지 이름을 붙인 것은 교법(敎法)상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일 뿐이요,

그 이름을 고수하며 지해(智解)를 일으키지 말라고 한 것 또한 선법(禪法)을 펼치기 위해 마지못해 한 말일 뿐이다.

한 번은 떠받쳐 올리고 한 번은 내리누르며, 세웠다가 바로 허물어뜨리고 허물었다가 다시 세우는 것은 모두 법왕(法王)23)이 법령(法令)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기틀이다.

이것은 위의 구절들을 결론짓고 아래의 구절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부처와 조사가 각각 드러내는 구체적 현상과 본체의 차이점을 거론한 것이다.

 

一物上, 强立三名字者, 敎之不得已也,

不可守名生解者, 亦禪之不得已也.

一擡一?, 旋立旋破, 皆法王法令之自在者也.
此, 結上起下, 論佛祖事體各別.

 

 

[게송]

오랜 가뭄 끝에 단비 내리고, 타향에서 옛 친구 만났네.24)

 

久旱逢佳雨, 他鄕見故人.

 

22) 당체편시(當體便是). 황벽희운(黃蘗希運)의 말. 있다·없다, 크다·작다는 등의 대대적(對待的) 분별에 근거하여 생각이 동요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본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의 중생은 오직 일심일 뿐이며,그 이상 다른 법은 없다.

이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생겨난 적도 없고 소멸한 적도 없으며, 푸르지도 누렇지도 않고, 형체도 모양도 없으며, 있거나 없는 것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거나 오래된 것으로 분별하지 못하며, 길지도 짧지도 않고, 크지도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이름 그리고 자취와 대대를 넘어서 있다. 있는 그대로 옳은 것이니 생각을 일으켜 분별하는 즉시 어긋나버린다.”

(『傳心法要』 大48 p.379c15.

諸佛與一切衆生, 唯是一心, 更無別法.

此心無始已來, 不曾生不曾滅, 不靑不黃, 無形無相, 不屬有無, 不計新舊, 非長非短, 非大非小,

超過一切限量名言, 縱跡對待. 當體便是, 動念卽乖.);

“눈앞에 있는 그대로가 옳으니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고 모자라는 것이 전혀 없다.”

(같은 책 p.380b18. 直下便是, 圓滿具足, 更無所欠.);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더 이상 다른 부처는 없으며 다른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이 밝고 깨끗한 것은 마치 허공에 한 점의 모양도 없는 것과 같다.

마음을 움직여 생각을 일으키면 법의 본체와 어긋나게 되며 곧 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같은 책 p.380a2.

此心卽是佛, 更無別佛, 亦無別心.

此心明淨, 猶如虛空無一點相貌.

擧心動念卽乖法體, 卽爲著相.)

23) 본래 부처님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부처와 조사를 아울러 나타낸다.
24) 오래된 소원이 하루아침에 실현되면서 오는 기쁜 심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말. 『道吾眞禪師語要』 古尊宿語錄19 卍118 p.407b16 및 『楊岐語錄』 大47 p.644c1 에서는 임제사료간 중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을 모두 부정하지 않고 허용하는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에 대한 대답으로 활용한다.

이 구절의 작자는 알 수 없으나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온 시구이다. 송(宋)의 홍매(洪邁)가 지은 『容齋四筆』「得意失意詩」에

“오래전부터 전해진 4구의 시 중에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실현된 심정을 읊은 것이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 내리고, 타향에서 옛 친구 만났네.
신방에 화촉 밝힌 밤이요, 과거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오른 순간이로다.’”

(舊傳有詩四句, 誦世人得意者云:

‘久旱逢甘雨, 他鄕遇故知. 洞房花燭夜, 金榜掛名時.’)라고 전한다.

 

 

 

 

교외별전(敎外別傳)

 

5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이고,

전 생애에 걸쳐 설하신 일체의 가르침25)은 교문(敎門)이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26)라고 하는 것이다.

 

世尊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 爲敎門.

故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평]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앉아 계시던 자리를 반 나누어 앉도록 하신것이 첫 번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신 것이 두 번째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이신 것이 세 번째이다.

가섭이 선의 등불을 별도로 곧장 받았다27)는 말은 이것을 가리킨다. 일생 동안 설하신 말씀이란 49년간 오교(五敎)28)를 설하신 것을 가리킨다.

인천교·소승교·대승교·돈교·원교가 그 다섯 가지이니, 아난이 바다처럼 드넓고 깊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흘러 통하게 하였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선과 교 두 가지 모두의 근원은 부처님이시고, 선과 교로 나뉜 갈래는 각각 가섭과 아난이다.

말이 없는 경지로부터 말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선이요, 말이 있는 것으로부터 말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교이니, 마음은 선법(禪法)이요 말은 교법(敎法)이다.

즉, 법은 비록 한가지 맛이지만 견해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이것이 선과 교가 두 갈래 길로 갈라진 이유이다.

 

三處者, 多子塔前分半座, 一也,

靈山會上擧拈花, 二也,

雙樹下槨示雙趺, 三也.

所謂迦葉, 別傳禪燈者, 此也. 一代者, 四十九年間所說五敎也.

人天敎, 一也, 小乘敎, 二也, 大乘敎三也, 頓敎, 四也, 圓敎, 五也, 所謂阿難, 流通敎海者, 此也.
然則禪敎之源者, 世尊也, 禪敎之派者, 迦葉阿難也.

以無言至 於無言者, 禪也, 以有言至於無言者, 敎也, 乃至心是禪法也, 語是敎法也.

則法雖一味, 見解則天地懸隔, 此辨禪敎二途.,

 

 

[게송]

그대로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번뇌의) 풀숲에서 뒹굴고 있구나.29)

 

不得放過. 草裡橫身.

 

 

25) 일대시교(一代時敎). 일대성교(一代聖敎), 일대교(一代敎) 등이라 한다.
26) 선가(禪家)와 교가(敎家)의 일치를 주장하는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입장에서는 이 둘을 상보적 관계로 보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혜심(慧諶)은 『看話決疑論』 「跋文」 韓4 p.737b13에서

“근고(近古)이래로 불법이 대단히 쇠약해져서 혹은 선을 근본으로 삼아 교를 배척하며,혹은 교를 받들며 선을 비난한다. 이는 선이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며, 교는 선을 포착하는 벼리요 선은 교를 통괄하는 벼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噫, 近古已來, 佛法衰廢之甚, 或宗禪而斥敎, 或崇敎而毁禪. 殊不知, 禪是佛心, 敎是佛語, 敎爲禪網, 禪是敎網)라 주장하였고,

선교일치의 전형을 보인 종밀(宗密)은 『都序』 大48 p.400b10에서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부처님의 마음과 입은 결코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經是佛語, 禪是佛意, 諸佛心口, 必不相違)라고 하였으며,

휴정(休靜)은 『선교결』 韓7 p.657b5에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교란 말이 있는 것으로부터 말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며, 선이란 말이 없는 경지에서 말이 없는 경지로 이르는 것이다.”

(然禪是佛心, 敎是佛語也. 敎也者, 自有言, 至於無言者也. 禪也者, 自無言, 至於無言者也.)라고 하였다.

27) 별전(別傳).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말한다. 교 밖에 별도로 전한다는 뜻으로 문자나 경전과는 관계없이 별도의 방법으로 전한다는 뜻이다. 곧 문자나 언어에 의한 가르침[敎]을 통하지 않고 깨달음의 경계를 곧바로 전하는 것이다.
28)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얕고 간단한 가르침부터 차례대로 깊은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그 분류는 시대에 따라 또는 분류한 사람에 따라 다르다.

당나라의 법장(法藏)이 설한 소승교(小乘敎)·대승시교(大乘始敎)·대승종교(大乘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 제(齊)나라 때 호신사(護身寺)의 자궤(自軌)가 설한 인연종(因緣宗)·가명종(假名宗)·부진종(不眞宗)·진
종(眞宗)·법계종(法界宗), 융통염불종(融通念佛宗)에서 나눈 인천교(人天敎)·소승교·돈교·원교·점교(漸敎) 등의 5교가 그 예이다.

29) 부처님의 삼처전심도 아직 번뇌의 경계에 얽매여 있고 해탈에 이른 경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허용해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말.

“어떤 학인이 운문에게물었다. ‘눈앞에 있는 기틀도 아니고, 눈앞에 드러난 일도 아닌 경지는 어떤 것입니까?’〈뛰어서 무엇 하려는 것인가? 3천 리 밖으로 물러나버렸다.〉

운문이 말하였다. ‘모조리 뒤집어엎고 한마디 해보라.’〈다 토해냈다. 죄인이 죄상을 실토하였구나. 그래도 그대로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거친 번뇌의 풀숲에서 몸을 뒹구는구나.〉”

(『碧巖錄』 15則 大48 p.155a21.

擧僧問雲門, ‘不是目前機, 亦非目前事時, 如何?’〈跳作什?? 倒退三千里〉

門云, ‘倒一說’〈平出. 款出囚人口. 也不得放過. 荒草裏橫身.〉)

 

 

 

6

 

그러므로 누구든 말에 얽매여 근본을 잃어버리면 염화미소30)의 소식도 모두 교의 자취31)에 불과하지만, 마음에서 깨달으면 세간의 온갖 거칠고 자질구레한 말들도 모두 교외별전32)의 선지(禪旨)가 된다.

 

是故, 若人失之於口, 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 則世間?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평]

법은 붙일 이름이 없으므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고, 법은 나타내 보일 상(相)이 없으므로 마음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33)

말에서 이리저리 헤아리는 것은 본래의 심왕(心王)34)을 잃은 것이다.

본래의 심왕을 잃으면 세존께서 꽃을 들어 보이신 것과 가섭이 그에 응답한 미소가 모두 한낱 진부한 말이 되고, 결국 활력을 잃은 이야기가 되고 말리라.

마음에서 얻은 자는 길거리에서 하는 말로도 법의 요체를 잘 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비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도 실상을 깊이 이야기할 수 있다.35)

그러므로 보적(寶積)선사가 곡소리를 듣고 몸과 마음이 뛸 듯이 기뻐하였고,36) 보수(寶壽)선사가 주먹다짐하는 광경을 보고서 본래면목을 활연히 깨달았던 것37)은 모두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이상은 선과 교가 지니는 깊이의 차이를 밝힌 것이다.

 

法無名故, 言不及也, 法無相故, 心不及也.

擬之於口者, 失本心王也.

失本心王, 則世尊拈花, 迦葉微笑, 盡落陳言, 終是死物也.

得之於心者, 非但街談善說法要, 至於?語, 深談實相也.

是故, 寶積禪師, 聞哭聲踊悅身心, 寶壽禪師, 見諍拳, 開豁面目者,

以此也. 此明禪敎深淺.

 

 

[게송]

밝은 구슬을 손바닥에 놓고서 이리저리 마음대로 굴리는구나.38)

 

明珠在掌, 弄去弄來.

 

30) 拈花微笑.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하나. 영취산 설법에서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제자들이 모두 무슨 뜻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는데 가섭만이 미소 지은 일화이다. 위경(僞經)인 『大梵天王問佛決疑經』 권상 「初會法付囑品」 卍87 p.606a6에 보인다. 『禪門拈頌說話』 5則 「세존염화(世尊拈花)」 참조.
31) 교적(敎迹). 교법(敎法)의 자취라는 뜻으로 성인의 가르침을 뜻한다. 언교(言敎)라고도 하며 교적(敎跡)이라고도 쓴다. 여기서는 선지(禪旨)와 대비를 이루어 언어를 넘어서는 염화미소가 도리어 언어의 관념으로 전락한 것을 나타낸다.

32) 敎外別傳. 주석27) 참조.
33) 염화미소도 교적(敎迹)으로 환원시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 무명(無名)·무상(無相)은 그 어떤 이름이나 상의 제한에서도 벗어난 제법의 실상을 나타낸다.공(空)과 같은 맥락의 개념이다.

“법은 상을 여의었으니 대상으로 삼을 것이 없기 때문이며, 법은 이름이 없으니 언어가 끊어졌기 때문이다.”(『維摩經』 「弟子品」 大14 p.540a7. 法離於相, 無所緣故, 法無名字, 言語斷故.);

“거침없이 트였구나! 태허의 텅 비고 아득한 공간을 본 듯 실오라기 하나 티끌 하나도 없도다.

끝없이 드넓구나! 바다의 거대한 물결을 본 듯 언저리와 끝이 없도다.

말로 미치지 못하고, 미묘하여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음을 깊이 알아야 하리라.

대사께 감사드리오니 우리들의 미혹과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에게 정법을 보이시고 점차적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보리에 이르도록 하셨다네.”

(『曆代法寶記』 「大曆保唐寺和上傳頓悟大乘禪門門人寫眞讚文」 大51 p.196a6.

蕩蕩乎! 如覩太虛之寥廓, 無纖無埃.

洋洋乎! 若視滄溟之浩?, 無際無涯.

深知道言不及, 微妙無名.

感荷大師, 愍我迷愚, 示我正法, 不由階漸, 直至菩提.)
34) citta. 마음 그 자체. 마음 작용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마음이 대상을 받아들여 통합하는 기능을 왕에 비유한 것이다. 교학에서는 종파에 따라 6식이나 8식을 심왕으로 본다. 반면 선종에서의 심왕은 법상체계 속의 심왕과는 거리가 멀며, 마음이 깨달음의 능동적 근거이기 때문에 왕에 비유한 것이다. “심왕(心王)이 6적(賊)에게 부림을 당하면 오랜 겁의 세월 동안 벗어날 기약이 없다.”(『龐居士語錄』 卍120 p.70a10. 心王被賊使, 劫劫無出期.);

“근본을 깨닫고 마음을 알고, 마음을 알고 부처를 본다.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며, 생각마다 부처의 마음이요, 부처의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한다.

빨리 성불하고자 하는가? 계를 지키는 마음 자체가 율이며, 이 청정한 율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부처이니 이 심왕을 제거하고 더 이상 별도의 부처는 없다.”

(『善慧大師語錄』 권3「心王銘」 卍120 p.23b4.

了本識心, 識心見佛. 是心是佛, 是佛是心, 念念 佛心, 佛心念佛.

欲得早成? 戒心自律, 淨律淨心,

心卽是佛, 除此心王, 更無別佛.)
35) 현사사비(玄沙師備)의 말을 활용한 구절이다. “법좌에 올라앉아 제비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서 ‘실상을 깊이 이야기하고, 법의 요체를 잘 설하는구나’라고 한뒤 법좌에서 내려왔다.”

(『玄沙廣錄』 권하 卍126 p.388a3. 上堂, 聞燕子叫云, ‘深談實相, 善說法要.’ 便下座.)
36)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인연을 말한다.

“어느 날 절 밖으로 나섰는데 상여를 들고 가는 사람을 보았다. 장송곡을 선창하는 사람이 요령을 흔들며

‘붉은 해는 서편으로 졌는데, 이 혼령은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네’라고 흥얼거리자,

상여 천막 아래에서 상주가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하는 소리를 듣고

보적이 홀연 뛸 듯이 기뻐하며 마조(馬祖)에게 돌아와 그 사정을 들려주니 마조가 인가해주었다.”

(『五燈會元』 권3 「盤山寶積章」 卍138 p.99b3.

一日出門, 見人?喪. ??振鈴云,

 ‘紅輪決定?西去, 未委魂靈往那方.’

幕下孝子哭曰, ‘哀哀.’

師忽身心?躍, 歸擧似 馬祖, 祖印可之.)
37) “법좌에 올라 ‘보수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주먹으로 한 대 때리면서 「너는 이다지도 면목이 없느냐!」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들고서 말했다.

만일 이 이야기에서 귀착되는 뜻을 알아차린 사람이라면 참으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판별하였다고 할 만하다. 대중들이여! 나의 게송 한 수를 들어 보라.

 ‘대단히 묘하고 대단히 묘하도다! 여기서 성명(性命)을 알아차리다니. 코를 한 대 쥐어 박은 바로 그 순간 바른 이치를 깨달았도다.’”

(『法演語錄』 권상 大47 p.652c7.

上堂 擧, ‘寶壽作街坊時, 見兩人相諍. 一人以手打一拳云, 「?得恁無面目!」 寶壽因而得入.’
若人於此知落處, 可謂公辦私辦. 大衆, 聽取一頌,

 ‘甚妙也甚妙! 於此知性命. ?鼻與一拳, 當時便打正.’)

38) 마음에서 근본이 되는 활용의 수단을 성취하여 모든 상황에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는 뜻.

“마치 맑고 깨끗한 거울이 받침대에 올려져 있거나 밝은 구슬이 손바닥 안에 있어서 호인(胡人)이 오면 호인이 나타나고, 한인(漢人)이 오면 한인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碧巖錄』 24則 「評唱」 大48 p.165a27.

如明鏡當臺, 明珠在掌, 胡來胡現, 漢來漢現.)

 

 

 

7

 

나는 분별을 끊고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잊은 한마디 말을 간직하고 있다.39)

올연히 일없이 앉아 있어도,40) 봄이 오면 풀은 절로 푸르리라.41)

 

吾有一言, 絶慮忘緣. 兀然無事坐, 春來草自靑.

 

 

[평]

‘분별망상을 끊고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잊었다’는 말은 마음에서 얻은 것이니, 한가한 도인41)42)의 경지를 가리킨다.

아, 그 사람이여!

본래 집착할
대상도 없고 본래 아무 일도 없으니,43)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44)

맑은 물 푸른 산 따라 마음 가는 대로 거닐며,

어물전이나 주막에서도 아무 걸림 없이 자재하여 편안히 쉬는구나.

세월 가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지만 봄이 오면 변함없이 풀빛은 완연히 푸르리라.

이상은 특별히 한 찰나에 지혜의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는4) 45) 사람을 찬탄한 것이다.

 

絶慮忘緣者, 得之於心也, 所謂閑道人也.

於戱, 其爲人也!

本來無緣, 本來無事;飢來卽食, 困來卽眠;

綠水靑山, 任意逍遙;
漁村酒肆, 自在安閑.

年代甲子總不知, 春來依舊草自靑.

此別歎 一念廻光者.

 

 

[게송]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한 사람 있구나.

 

將謂無人, 賴有一箇.

 

 

39) 명찬(明瓚)화상이 제시한 공안. 명찬일언(明瓚一言)이라고 한다.

나는 분별을 끊고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잊은 한마디 말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뛰어난 말솜씨로도 표현할 수 없으니, 다만 마음으로 전하고자 할 뿐이다.”

(『?悟語錄』 권18 大47 p.796c19. 吾有一言, ?慮忘緣, 巧說不得, 只要心傳.)

명찬화상은 나찬(懶瓚)화상이라고도 불리는데, 대중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만 먹었다고 하여 나잔(懶殘)이라고도 하며, 난찬(?瓚)으로 명명된 곳도 보인다.

40) 무사좌(無事坐). 번뇌망상을 모두 그치고 본분사를 마쳤으므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사람의 경지를 묘사한 말이다. 나찬의 다음 게송에 이와 관련된 적절한 이야기가 나온다. 게으르게 먹기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나찬의 법명에 어울리는 ‘무사’의 경지가 드러난다.

“올연히 아무 일도 없고 바꿀 일도 없노라. 일이 없거늘 어찌 한 토막의 말이라도 하겠는가!

다만 마음에 산란함이 없으니 다른 일을 끊을 필요도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며, 미래에 대해서는 아직 헤아리지 마라.

올연히 일 없이 앉아 있거늘 어찌 부르는 사람인들 있겠는가!

마음 밖에서 찾으며 공부하는 것은 모두가 어리석고 둔한 사람의 짓이로다.”

(『景德傳燈錄』 권30 「南嶽懶瓚和尙歌」 大51 p.461b16.

兀然無事無改換. 無事何須論一段!

直心無散亂, 他事不須斷. 過去已過去, 未來猶莫算.

兀然無事坐, 何曾有人喚!
向外覓功夫, 總是癡頑漢.)
41) 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잊은 상태를 표현한 말. 대상 자체의 존재를 망각한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집착 없이 대상이 청정하게 그대로 드러난 것을 말한다. 『白雲語錄』 권상 韓6 p.653b5 참조.
42) 한도인(閑道人). 그 무엇에도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살아가는 사람.
본분사를 끝마치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자유롭게 노니는 사람. 백일무한인(白日無閑人) 또는 백일몰한인(白日沒閑人)이라고도 한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억지로 하는 일도 없는 한도인은 망상을 끊으려 애쓰지도 않고 진리를 얻고자 힘쓰지도 않는다.”(『證道歌』 大48 p.395c9. 絶學無爲閒道人, 不除妄想不求眞.)
43) 연(緣)은 법이 발생하거나 소멸하는 조건 또는 인식의 대상 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본래무연’이란 법이 발생하거나 소멸하는 데 조건이 될 만한 것이 본래 없다는 말이다. ‘본래무사’는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쳐서 할 일이 없는 본래의 경지를 가리킨다. 또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 모든 것이 진리를 구현하고
있으므로 억지로 추구하거나 조작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44) 기래즉식곤래즉면(飢來卽食 困來卽眠). ‘飢來卽食’은 ‘기래끽반(饑來喫飯)’으로도 쓴다. 무사(無事)를 표현한 대표적인 말이다. 임제(臨濟)선사의 곤래즉와(困來卽臥)도 같은 맥락이다. 세간의 일상생활을 떠나 별도로 추구할 일이 없는 경지를 나타낸다.

“똥오줌을 누고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다.”(『臨濟錄』 大47 p.498a17. ?屎送尿, 著衣喫飯, 困來卽臥.);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碧巖錄』 74則 大48 p.202a9. 飢卽喫飯, 困卽打眠.)
45) 회광반조(廻光返照). 자신에게 내재한 지혜의 빛을 대상세계로부터 거두어들여자기 자신 내부를 돌이켜 비추는 것.

“만약 한 찰나에 돌이켜 비추어 본다면 전체가 모두 성인의 마음일 것이다. 그대들은 각자 자신의 마음에 통달할 일이며, 내가 한 말을 기억에 담아두지 마라.

설령 모래알처럼 무수한 도리를 말한다 해도 그 마음은 증가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감소하지도 않을 것이다. 말하는 것도 그대의 마음이며, 말하지 않는 그것도 그대의 마음이다.”

(『馬祖語錄』 卍119 p.811b16.

若能一念返照, 全體聖心. 汝等諸人, 各達自心, 莫記吾語.

縱饒說得河沙道理, 其心亦不增, 縱說不得, 其心亦不減. 說得亦是汝心, 說不得亦是汝心.);

“그대들이 말을 듣자마자 지혜의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고 다시는 다른 것에서 구하지 않아 자신의 몸과 마음이 부처님이나 조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져야 비로소 법을 얻었
다고 할 수 있다.

대덕들이여! 산승이 지금 어쩔 도리가 없어서 이야기를 건네어 쓸모도 없고 낡아버린 무수히 많은 말을 꺼낸 것이지만 그대들은 착각하지마라.

내가 보는 견지에 따르면 진실로 무수히 많은 도리는 없으니, 쓸 만하면 곧바로 쓰고 쓸모가 없으면 곧바로 버릴 뿐이다.”(『臨濟語錄』 大47 p.502a12.

?言下, 便自回光返照, 更不別求, 知身心與祖佛不別, 當下無事, 方名得法.

大德! 山僧今時, 事不獲已, 話度說出, 許多不才淨, 爾且莫錯.

據我見處, 寔無許多般道理, 要用便用, 不用便休.);

“돌이켜 비추어 보면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 그때마다 헤아리며 ‘이것은 무엇일까?’라고 살펴보십시오.

이리저리 꾸준히 헤아리다가 헤아림이 의지할 근거가 전혀 없는 곳에 이르면 평상시의 기지와 기량이 깨끗하게 모두 사라져 갑자기 한 찰나에 문득 녹아버리고 마음의 꽃이 발현하면 헤아릴 수 없는 겁의 세월 동안 쌓였던 일들이 모두 현재의 자기 주변에 있게 될 것입니다.”

(『密菴語錄』 「答卜運屬」 大47 p.981c1.

回光返照, 向己躬脚?下, 時時推勘, 看是什?.

推來推去, 推到無依倚處, 平生機智, 伎倆淨盡, 驀然一念頓消, 心花發現, 塵劫來事, 盡在于今.)

 

 

 

 

선교(禪敎)의 동이점(同異點)

 

8

 

교문에서는 오로지 일심의 법만 전하고,46) 선문에서는 오로지 견성의 법만 전한다.47)

 

敎門, 惟傳一心法;禪門, 惟傳見性法.

 

[평1]

마음은 거울의 바탕과 같고 본성은 거울의 빛과 같다.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곧바로 활연히 깨닫게 되는 바로 그 순간, 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본분의 뜻을 얻으려는 한 생각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 말이다.

 

말이다.
心如鏡之體, 性如鏡之光. 性自淸淨, 卽時豁然, 還得本心. 此秘重得意一念.

 

 

[게송]

겹겹이 둘러싼 산과 물이여, 맑고 깨끗한 것이 예전 그대로의 가풍이로다!48)

 

重重山與水, 淸白舊家風!

 

 

[평2]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본원의 마음이요, 다른 하나는 무명으로 상(相)에 집착하는 마음49)이다. 성(性)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본래 법의 성이요, 다른 하나는 성과 상이 상대를 이루는 성이다.50)

그러므로 선법을 닦는 이나 교법을 배우는 이들이 똑같이 미혹하여 이름을 고수하고 이해를 일으키며 혹은 얕은 것을 깊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깊은 것을 얕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실상을 관하는 수행[觀行]50)51)에 큰 병통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 병을 가려낸 것이다.

 

評曰 心有二種. 一, 本源心;二, 無明取相心也.

性有二種. 一,本法性;二, 性相相對性也.

故禪敎者, 同迷守名生解, 或以淺爲深, 或以深爲淺, 遂爲觀行大病. 故於此辨之.

 

 

46) ‘오로지 한마음의 법을 전한다(惟傳一心法)’는 말은 황벽희운(黃蘗希運)의 말인데, 선과 교가 다른 것이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 교문(敎門)과 이 말을 연결시켰다.

“마음 그대로 부처이니,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꿈틀거리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동일한 마음의 본체이다.
그러므로 달마가 인도로부터 와서 오로지 일심법을 전하여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도리를 곧바로 가리킨 것이다. 별다른 수행이 필요하지 않고 다만 지금과 같이 자기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자기의 본성을 보면 될 뿐이니, 더 이상 별도로 구하지 말라.”

(『宛陵錄』 大14 p.386b2.

卽心是佛, 上至諸佛, 下至蠢動含靈, 皆有佛性, 同一心體.

所以, 達摩從西天來, 唯傳一心法, 直指一切衆生, 本來是佛.

不假修行, 但如今識取自心, 見自本性, 更莫別求.)
47) “말로도 통하고 마음으로도 통하니, 해가 허공에 떠 있는 것과 같다. 오로지 견성의 법을 전하니, 세상에 나가 삿된 종지를 무너뜨린다.”

(宗寶本 『壇經』 大48 p.351b14. 說通及心通, 如日處虛空. 唯傳見性法, 出世破邪宗.)

48) 뒤의 구절은 굉지정각(宏智正覺)의 말이다.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공겁(空劫)에 진실한 종지가 있으니, 말로 드러나기 이전에 자기 자신에게 물어라. 가진 것 하나 없이 궁핍하여 새롭게 살길을 찾으니, 맑고 깨끗한 것이 예전 그대로의 가풍이로다.

분명히 드러났으나 3승을 벗어났고, 텅 빈 하나의 인(印:心印) 안이다. 다시 이류(異類)로 태어나 살아가니, 온갖 물결이 저절로 동해로 모이는격이다.’”

(『宏智廣錄』 권1 大48 p.12b7.

上堂云, ‘空劫有眞宗, 聲前問己躬. 赤窮新活計, 淸白舊家風.

的的三?外, 寥寥一印中. 却來行異類, 萬派自朝東.’)
49) 무명취상심(無明取相心).

“수선사가 『화엄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삼계에 별다른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심이 일으키는 것일 뿐이니, 지금 일심이 무명으로 상을 취하여 일으켰다는 말을 가리킨다. 이것(無明取相心)이 삼
계에서 생사 윤회하는 병통의 근본이다. 만약 무명이 본래 일어나지 않음을 안다면 집착하는 마음도 사라질 것이므로 새로운 생사를 만들지 않게 되리니, 이것이 병통의 근본을 끊는 것이다.’”

(『法集別行錄節要』 韓4 p.761a5. 壽禪師, 引華嚴經云, ‘三界無別法, 唯是一心作, 今謂唯是一念無明取相心作也. 此卽三界生死之病本也. 若知無明不起, 取有畢故, 不造新, 卽是斷病本.’)

50) “위의 세 가지 교(敎)는 모든 부처님들이 한평생 설한 경전과 모든 보살이 지은 논서를 빠짐없이 아우른 것이다. 상세한 그 법의(法義)는 세 가지 의미로 전혀 다르기는 하나 일법(一法)으로서는 차별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세 가지 의미로 보자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공(空)과 유(有)로 상대를 이루고, 세 번째와 첫 번째는 성과 상으로 상대를 이루니, 모두 뚜렷하여 알기 쉽다.

오로지 두 번째와 세번째가 파상(破相)과 현성(顯性)으로 상대를 이루니, 강론하는 자와 선을 수행하는 자가 똑같이 미혹하여 모두 하나의 종(宗)이며 하나의 교(敎)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 모두가 파상을 곧 진성(眞性)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都序』 권하 大48 p.406a7.

上之三敎, 攝盡佛一代所說之經, 及諸菩薩所造之論. 細尋法義, 便見三義全殊, 一法無別.

就三義中, 第一第二, 空有相對, 第三第一, 性相相對 皆條然易見.

唯第二第三, 破相與顯性相對, 講者禪者同迷, 皆謂同是一宗一敎, 皆以破相, 便爲眞性.)
51) 신수심법(身受心法)의 네 가지를 관찰하는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비롯하여 모든 대상을 무상으로 관하는 무상관 등 다양한 관행이 있다. “관행이란 말에서 ‘관’은 공간적 범위로 말한 것으로서 경계와 지혜에 모두 통한다는 뜻이고, ‘행’은 시간적 길이로 바라본 것으로서 원인과 결과에 두루 이어져 있다는 뜻이다.”(『金剛三昧經論』 권상 大34 p.961a24. 言觀行者, 觀是橫論, 通於境智, 行是竪望, 亘其因果.)

 

 

 

9

 

여러 부처님께서는 경을 설하실 때 먼저 모든 법을 분별하신 다음에 필경공52)을 설하셨으나, 조사들께서 들어 보이신 구절에는 교설의 자취가 생각에서 끊어지면 도리가 마음의 근원에서 드러난다.53)

 

然, 諸佛說經, 先分別諸法, 後說畢竟空, 祖師示句, 迹絶於意地, 理顯於心源.

 

 

[평]

부처님의 교설은 만대가 지나도 누구나 의지하는 근거가 되기에 그 이치를 자세히 들어 보일 수밖에 없고, 조사의 가르침은 곧바로 생사윤회와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있으므로 마음을 근본 도리에 깊이 통하도록 한 것이다.54) 자취란 조사의 말 자취요, 뜻이란 배우는 이들의 생각이다.

 

諸佛, 爲萬代依憑故, 理須委示;祖師, 在卽時度脫故, 意使玄通.

迹, 祖師言迹也;意, 學者意地也.

 

 

[게송]

함부로 해설을 달지만55) 팔은 밖으로 굽지 않는 법이라네.56)

 

胡亂指注, 臂不外曲.

 

 

52) 畢竟空 atyamta-??nyat?. 궁극적인 공. 18공의 하나. 모든 법은 본래부터 실체로 존재하지 않아서 궁극적으로 공이라는 뜻이다. “이 미혹에는 본성이 없어 필경공이다. 본래부터 미혹된 적이 없었으니 미혹과 깨달음이라는 차별이 있는 듯이 보일 뿐이다. 미혹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미혹이 사라지니, 알아차리는 그 자체로 미혹이 일어나지 않는다.”(『楞嚴經』 권4 大19 p.120b27. 此迷無本性, 畢竟空. 昔本無迷, 似有迷覺, 覺迷迷滅, 覺不生迷.);

“필경공이란 무엇인가? 유위공과 무위공으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무너뜨리는 것을 가리켜 필경공이라 한
다.”(『大智度論』 권31 大25 p.289b26. 畢竟空者, 以有爲空, 無爲空, 破諸法, 令無有遺餘, 是名畢竟空.)
53) “종사는 법에 근거하고 말을 떠나니, 자취가 없는 말을 가지고서 사람들로 하여금 집착을 깨뜨려 종지를 드러내보이게 한다. 이것을 가리켜 ‘생각에서 자취가 끊어지면 마음의 근원에서 이치가 드러난다’라고 하는 것이다.”(『法集別行錄節要』 韓4 p.748a9.

宗師據法離言, 以無迹之言, 令人破執現宗. 是謂迹絶於意地, 理現於心源矣.”)
54) 『都序』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보인다. 『都序』 권상 大48 p.400a2 참조.

55) 호란지주(胡亂指注). 호란은 임의대로, 함부로, 아무렇게나 등의 뜻이고, 지주는 하나하나를 낱낱이 가리켜 지적하고 해설을 단다는 뜻이다.
56) 비불외곡(臂不外曲). 비박불향외곡(臂膊不向外曲)·수비종불향외곡(手臂終不向外曲) 등으로도 쓰인다. 무리하게 선과 교로 나누어 분별하지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10

 

모든 부처님께서는 활등처럼 설하셨고 조사들은 활시위처럼 설하셨다.

부처님께서는 걸림 없는 법을 설하시어 한가지 맛57)으로 귀결시키지만, 이 한가지 맛의 자취조차 떨쳐버려야 비로소 조사들이 제시한 일심이 드러나게 된다.58)

그러므로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59) 같은 화두는 용궁의 대장경60)에는 있지 않다.

 

諸佛說弓, 祖師說絃.

佛說無?之法, 方歸一味, 拂此一味之迹, 方現祖師所示一心.

故云, 庭前栢樹子話, 龍藏所未有底.

 

[평]

활등처럼 말씀하셨다는 것은 상세한 방편으로 설하였다는 뜻이고 활시위처럼 말씀하셨다는 것은 곧바로 핵심을 가리켰다는59) 뜻이다.60)

용장이란 용궁에 간직해 두었다는 장경을 말한다.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
라고 답한 이 문답은 격을 벗어난 선지(禪旨)를 말한다.

 

說弓, 曲也;說絃, 直也.

龍藏, 龍宮之藏經也.

僧問趙州,‘ 如何是, 祖師西來意?’ 州答云,‘ 庭前栢樹子.’

此所謂格外禪旨也.

 

 

[게송]

물고기 헤엄치니 물 흐려지고, 새 나니 깃털 떨어지네.61)

 

魚行水濁, 鳥飛毛落.

 

 

57) 일미(一味). 다른 맛이 섞이지 않은 하나의 맛이란 뜻에서 동등·평등·무차별 등을 뜻하기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상의 근기에 따라 다르지만 그 근본 이치는 같다는 말이다.
58) 고려 때 천책(天?)이 지은 『禪門寶藏錄』의 다음 글에서 인용한 말이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활등처럼 설하셨고 조사들은 활시위처럼 설하셨다. 활시위처럼 설하였다는 말은 선문에서 현묘한 길을 바르게 전하면서 언설을 빌리지 않고 근본이 되는 마음의 본체를 곧바로 가리켜 보이는 양상이 활시위가 곧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교문의 경우에 일승은 곧은 길이고 삼승은 굽은 길이므로 근본이 되는 마음의 본체를 곧바로 들어서 마음에 보여준 것과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일승교에서 설한 것은 일마다 걸림이 없어 법계의 모든 존재가 원만하게 융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일마다 걸림 없는 이 법계는 한가지 맛의 법계로 귀결되고, 이 한가지 맛의 법계가 남긴 흔적조차 떨쳐버려야 비로소 조사들이 제시한 일심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교설은 곧지 않음을 알 수 있다.”

(『禪門寶藏錄』 권상 「禪敎對辨門」 卍113 p.987a14.

諸佛說弓, 祖師說絃. 說絃者, 禪門正傳玄路, 不借言說, 直示宗本心體, 如弓之絃.

若敎門, 則一乘是直路, 三乘是曲路, 不如直擧宗本心體, 示於心念之中.

何故? 一乘敎中所說者, 事事無?, 法界圓融, 此事事無?法界, 方歸一味法界, 拂此一味法界之跡, 方現祖師所示一心. 故知諸敎不直.)

59) 조주종심(趙州從?)이 제기한 화두. “그때 어떤 학인이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화상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지시하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지시한 것이 아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趙州語錄』 古尊宿語錄13 卍 118 p.307a17. 時, 有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學云, ‘和尙莫將境示人.’ 師云, ‘我不將境示人.’ 云,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60) 용장(龍藏). 대승경전을 가리킨다. 고사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에 대승경전을 용궁에 간직해 두었다고 한다. “학인이 물었다. ‘묘하고 뛰어난 경계란 어떤 것입니까?’ ‘대장경을 열어 보았을 때 패엽에 적힌 구절 그대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景德傳燈錄』 권23 「妙勝臻傳」 大51 p.390c11. 僧問, ‘如何是妙勝境?’ 師曰, ‘龍藏開時, 貝葉分明.’)

61) 원오극근(?悟克勤)이 자주 썼던 말. 여기서는 조주와 학인의 ‘정전백수자’ 문답이 격을 벗어난 선의 종지를 드러낸 말이기는 하나, 이 역시도 한낱 자취[迹]를 남긴 것에 불과하다고 서산 스스로 자신의 안목을 드러낸 말이다.

“학인이 향림에게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어떤 것입니까?’〈사람들이 의심하고 있구나. 아직도 이 같은 이야기가 남아 있단 말인가!〉

 ‘오래 앉아 있었더니 피로하다.’〈물고기 헤엄치니 물 흐려지고, 새 나니 깃털 떨어지네. 개 주둥이 다물라. 작가의 안목은 탁월하구나. 톱으로 저울추를 자른다.〉”(『碧巖錄』 17則 大48 p.157a19.

僧問香林, ‘如何是, 祖師西來意?’〈大有人疑著. 猶有這箇消息在!〉

林云, ‘坐久成勞.’〈魚行水濁, 鳥飛落毛. 合取狗口好. 作家眼目. 鋸解稱鎚.〉)

 

 

 

11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먼저 진실 그대로를 말로 드러낸 가르침에 따라 불변(변하지 않음)과 수연(인연을 따름)62)의 두 가지 뜻이 자기 마음의 성(性)과 상(相)이요,

돈오와 점수라는 두 문은 자기 수행의 처음과 끝임을 세밀하게 판별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 교의(敎義)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리고 단지 자기 마음에 드러난 화두일념을 가지고 선지를 참구한다면 반드시 소득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얽매인 몸에서 벗어나 살아나는 길이다.63)

 

故學者, 先以如實言敎, 委辨不變隨緣二義, 是自心之性相;
頓悟漸修兩門, 是自行之始終.

然後, 放下敎義, 但將自心 現前一念, 參詳禪旨, 則必有所得, 所謂出身活路.

 

 

[평]

상근기로서 큰 지혜를 가진 이는 이 같은 한계에 머물지 않으나 중하의 근기로서는 이 단계를 함부로 뛰어넘을 수 없다.

교의는 불변과 수연 또는 돈오와 점수 등에 선후가 있지만,

선법은 화두라는 한 생각 가운데 불변과 수연, 성과 상, 체와 용 등의 두 가지 대대가 원래부터 한꺼번에 있어서64) 두가지가 같다는 생각도 떠나고 같지 않다는 생각도 떠나며 같다는 생각이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65)

그러므로 종사들은 법에 근거하되 말에서는 벗어나 곧바로 한 생각을 가리켜 보이고 제 자신의 본래 성품을 깨달아 성불하게 할 뿐이다. ‘교의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다’라고 한 말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上根大智, 不在此限, 中下根者, 不可獵等也.

敎義者, 不變隨緣, 頓悟漸修, 有先有後;

禪法者, 一念中, 不變隨緣, 性相體用, 元是一時, 離卽離非, 是卽非卽.

故宗師, 據法離言, 直指一念, 見性成佛耳. 放下敎義者以此.

 

[게송]

밝고 뚜렷할 때는 구름이 깊은 계곡을 덮어 가리고,

깊고 은밀한 곳에는 해가 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비추네.66)

 

明歷歷時, 雲藏深谷,

深密密處, 日照晴空.

 

 

62) 주석16) 참조.
63) 『禪要』 卍122 p.709a11 참조.

64) 화두 하나에 선법과 교학의 모든 도리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혜심(慧諶)의 다음 말에 그 전형이 보인다. “이것 말고 화두를 살피는 ‘간화’라는 하나의 문이 있으니 이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지·관과 정·혜가 자연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眞覺語錄』 「孫侍郞求語」 韓6 p.40a11.

此外有看話一門, 最爲徑截, 止觀定慧, 自然在其中.)
65) 불변과 수연 등의 대대적인 짝에 대하여 모든 사유의 길을 차단하는 방식. 화두의 관문을 설정하는 법에 따른다. 『楞嚴經』의 다음 구절을 활용한 것이다.

“이렇게 모두 세간과 출세간이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래장의 묘하게 밝은 마음의 근원은 세간과 출세간이 같다는 것도 떠나고 같지 않다는 것도 떠나서 같다는 것이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

세간과 삼계의 중생과 출세간의 성문과 연각이 어떻게 분별로 가득 찬 마음으로써 여래가 이룬 최상의 보리를 헤아릴 것이며, 세간의 언어로써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楞嚴經』 권4 大19 p.121a24.

以是卽俱世出世故, 卽如來藏, 妙明心元, 離卽離非, 是卽非卽,

如何世間三有衆生, 及出世間聲聞緣覺, 以所知心, 測度如來無上菩提, 用世語言, 入佛知見.)

66) 밝을 때는 덮어 가려 어둡게 하고 어두울 때는 빛을 비춰 밝게 만들어서 밝음과 어두움 그 어느 한편에 고착되어 집착하지 않는 활발한 선기(禪機)를 드러내 보인 말이다.

 

 

 

화두 참구와 그 요소

 

12

 

배우는 자라면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할 것이요, 사구를 참구하지 마라.67)

 

大抵學者, 須參活句, 莫參死句.

 

 

[평1]

활구로 알아차리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지만, 사구로 알아차리면 제 자신조차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68)

이하는 특별히 활구를 제기하여 스스로 깨달음에 들어가게 하는 내용이다.

 

活句下薦得, 堪與佛祖爲師, 死句下薦得, 自救不了.

此下特擧活句, 使自悟入.

 

[게송]

임제의 의중을 알고자 하는가? 의지가 굳센 자69)라야 하리라.

 

要見臨濟? 須是鐵漢.

 

 

[평2]

화두에는 구절과 뜻이라는 두 가지 문이 있다.

구절을 궁구한다[參句]는 것은 경절문70)의 활구를 가리키니, 마음으로 헤아릴 길도 전혀 없고 말을 따라 좇아갈 길도 없어서 모색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뜻을 궁구한다는 것[參意]은 원돈문71)의 사구를 가리키니, 이치로 통할 길도 있고 말을 따라 좇아갈 길도 있어 듣고 이해하고 생각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評曰 話頭, 有句意二門.

參句者, 徑截門活句也, 沒心路, 沒語路, 無摸故也.

參意者, 圓頓門死句也, 有理路, 有語路, 有聞解思想故也.

 

 

67) 『?悟語錄』 권11 大47 p.765b13, 『大慧語錄』 권14 大47 p.870b4 등에서 인용한 구절. 동일한 화두에 대해 바르게 의심하면 활구이고,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해서 물들어버리면 사구이다. 이처럼 활구나 사구로 정해진 말이 각각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말이지만 이를 참구하는 방법이나 태도에 따라 활
구도 되고 사구도 되는 것이다. 『精選 선어록』 진각어록 주석284) 참조.
68) “활구를 참구해야지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 된다. 활구로 알아차리면 영원토록 잊히지 않는 사람이 되겠지만 사구로 알아차리면 제 자신조차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大慧語錄』 권14 大47 p.870b4.

須參活句, 莫參死句. 活句下薦得, 永劫不忘, 死句下薦得, 自救不了.) 『看話決疑論』 韓4 p.737a8.

69) 철한(鐵漢). 이러저러한 이론이나 말에 흔들리거나 속박되지 않는 강철과 같이 의지가 굳센 사람. 격을 벗어난 사람. 언구에 매몰되어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 사람 또는 의심이 살아 있는 사람을 말한다.
70) 徑截門. 무수한 우회의 방편을 다 끊어버리고 근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간명하며 적절한 방법. 화두를 공부하는 간화(看話)의 방법을 가리킨다. ‘경절’은 직절(直截)·첩경(捷徑) 등과 같은 뜻이다. ‘경절’이라는 말은 『碧巖錄』, 『書狀』 등에서 간화선을 묘사하는 말로 나오기는 하지만, 이를 간화선과 직접 연결시켜
사용한 것은 지눌(知訥)이 처음이다.

“경절문의 맛없는 말(화두)을 듣자마자 지해(知解)라는 병에 걸리지 않고 바로 귀착점을 알게 되니, 이것을 일러 하나를 듣고 천 가지를 깨달아 대총지(大摠持)를 얻는 사람이라 한다.”

(『看話決疑論』 韓 4 p.733a20. ?聞徑截門無味之談, 不滯知解之病, 便知落處, 是謂一聞千悟, 得大摠持
者也.);

“이 외에 화두를 살피는 ‘간화’라는 하나의 문이 있으니 이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지관과 정혜는 화두 하나만 들면 자연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眞覺語錄』 「孫侍郞求語」 韓6 p.40a11. 此外有看話一門, 最爲徑截, 止觀定慧, 自然在其中.)
71) 圓頓門. 교학상 최고의 이치에 해당한다. 주로 사사무애(事事無?)를 근본 도리로 삼는 화엄종의 원돈일승(圓頓一乘)을 말한다. 교판론으로 보자면, 원교(圓敎)와 돈교(頓敎)에 해당한다. 『圓頓成佛論』 韓4 p.730a14 참조.

 

 

 

13

 

자신이 본래 참구하던 공안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되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72) 배고플 때 먹을 것을 떠올리듯이,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듯이,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이 하면 반드시
꿰뚫을 날이 있으리라.

 

凡本參公案上, 切心做工夫, 如?抱卵, 如猫捕鼠, 如飢思
食, 如渴思水, 如兒憶母, 必有透徹之期.

 

[평]

조사들이 남긴 일천칠백여 칙의 공안이 있다. 예컨대 ‘개에게 불성이 없다’,73) ‘뜰 앞의 잣나무’,74) ‘마삼근’,75) ‘간시궐’76) 등이 그것이다.

닭이 알을 품을 때 따듯한 기운을 이어가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생각하고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며, 어린아이가 어미를 생각하듯이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진심에서 발로한 것이지 억지로 지어낸 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간절하다고 한 것이다. 참선을 하면서 이렇듯 간절한 마음 없이 꿰뚫는 일은 있지 않다.

 

祖師公案, 有一千七百則. 如狗子無佛性, 庭前栢樹子, 麻三斤, 乾屎?之流也.

?之抱卵, 暖氣相續也, 猫之捕鼠, 心眼不動也, 至於飢思食, 渴思水, 兒憶母, 皆出於眞心, 非做作底心.
故云, 切也. 參禪, 無此切心, 能透徹者, 無有是處.

 

 

72) 닭과 고양이의 비유는 화두를 항상 뚜렷하게 의식하고 잠시도 의식에서 끊어지면 안 된다는 공부의 요령을 나타낸다.

“다만 오로지 이 무자만 들고서 하루 모든 시각 중의 어떤 행위 반경에서도 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거나 닭이 알을 품듯이 해야 하며, 때로는 끊어지고 때로는 이어지는 방식이 되지 말도록 하라.”

(『誡初心學人文』 「?山正凝禪師示蒙山法語」 大48 p.1005a9.

只單單提箇無字, 於十二時中四威儀內, 須要惺惺, 如猫捕鼠, 如鷄抱卵, 無令斷續.);

“비유하자면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마음과 눈을 주시하는 대상에 통일시키는 것과 같이 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쥐를 놓치기 때문이다.
또한 마치 닭이 계란을 품을 때 따뜻한 기운이 이어지는 것을 중시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하니, 버리고 떠나면 병아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天目明本雜錄』 「示徒」 卍122 p.724b4.

喩如猫捕鼠, 心目一於注?, 少怠則失鼠矣;

如鷄抱卵, 暖氣貴於相接, ?之則不成種子矣.);

“하루 모든 시각 중의 어떤 행위 반경에서도 다만 화두를 생명의 뿌리로 삼아 항상 또렷하게 의식하며 어느 순간에나 살피면서 화두를 꼭 붙들고 놓치지 않는 상태로 눈앞에 붙이고 있어야 한다.

마치 닭이 알을 품을 때 따뜻한 기운이 이어지게 하는 듯이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몸과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눈은 잠시도 쥐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

몸과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느끼지도 못한 채 마음의 눈으로 화두를 한곳에 거두어들이고 다만 이와 같이 또렷하면서도 분명하고 분명하면서도 또렷하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참구하라.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과 같고, 배고플 때 밥을 생각하는 것과 같으며,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太古語錄』 「示衆」 韓6 p.676b16.

於十二時中四威儀內, 只與話頭爲命根, 常常不昧, 時時檢察, 提?話頭, 帖在眼前.

如鷄抱卵, 使暖氣相續;如猫捕鼠, 身心不動, 目不暫捨.

不覺身心有之與無, 心眼話頭攝在一處, 但伊?惺惺歷歷, 歷歷惺惺, 密密參詳.

譬如?兒憶母相似, 如飢思食, 如渴思水.)

73)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조주종심(趙州從?)에게서 비롯된 공안. 조주구자(趙州狗子)·조주무자(趙州無字) 등이라고도 한다. 『趙州語錄』 卍118 古尊宿語錄13 p.314a8 참조.
74) 주석59) 참조.
75) 麻三斤. 운문문언(雲門文偃)의 제자 동산수초(洞山守初)가 제시한 공안. 『洞山守初語錄』 古尊宿語錄38 卍118 p.646a14, 『無門關』 18則 大48 p.295b4 참조.
76) 乾屎?. 마른 똥막대기. 운문문언(雲門文偃)이 제기한 공안. 부처와 중생을 이분하는 분별심을 가지고 근원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봉쇄하고, 궁극의 경지로 유도하기 위한 방편적 선어(禪語). 『雲門廣錄』 권상 大47 p.550b15, 『臨濟語錄』 大 47 p.496c10, 『無門關』 21則 大48 p.295c6 등 참조.

 

 

 

14

참선에는 반드시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지극히 견고한 믿음의 뿌리[大信根]가 있어야 하고,

둘째 넘치도록 분하게 여기는 의지[大憤志]가 있어야 하며,

셋째 철두철미하게 의심하는 생각[大疑情]이 있어야 한다.

만약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뜨린다면 다리 부러진 솥이 결국 쓸모없는 그릇이 되는 것과 같다.77)

 

參禪, 須具三要.

一 有大信根,

二 有大憤志,

三 有大疑情.

苟闕其一, 如折足之鼎, 終成廢器.

 

 

[평]

부처님께서는 “성불하려는 데는 신심이 근본이 된다”78)라 하셨고,

영가현각은 “도를 닦는 데는 뜻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79)라고 하였으며,

몽산은 “참선하는 수행자가 어떤 말과 구절이 되었건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는 가장 근본적인 병통이다”80)라 하고,

또한 “크게 의심하면 반드시 크게 깨닫게 된다”81)라고 하였다.

 

佛云,“ 成佛者, 信爲根本.”

永嘉云,“ 修道者, 先須立志.”

蒙山云, “參禪者, 不疑言句, 是爲大病.”

又云, “大疑之下, 必有大悟.”

 

 

77) 대신근(大信根)은 화두 공부를 하면 반드시 깨달을 것이라는 목표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고, 대분지(大憤志)는 화두를 타파하고 말리라는 충만한 의지이며, 대의정(大疑情)은 화두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품는 것으로서 대의단(大疑團)과 통하는 말이다. 고봉원묘(高峰原妙)의 『禪要』에 나오는 말이다.

“정도에 딱 들어 맞는 참선에 대하여 말하자면 반드시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

제1 요소는 대신근이 있어야 한다. 이 본분사는 마치 우뚝 선 하나의 수미산에 기대고 있는 것과 같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제2 요소는 대분지가 있어야 한다. 마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만났을 때 곧바로 한칼에 두 토막을 내고자 하는 의지와 같다.
제3 요소는 대의정이 있어야 한다. 마치 어두운 곳에서 한 건의 중요한 일을 마치고 곧바로 드러내고자 하나 드러내지 못하는 순간의 심정과 같다.

…… 만약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뜨린다면 마치 다리 부러진 솥이 결국 쓸모없는 그릇이 되는 것과 같다.”

(『禪要』 「示衆」16 卍122 p.714a17.

若謂著實參禪, 決須具足三要.

第一要, 有大信根. 明知此事, 如?一座須彌山.

第二要, 有大憤志. 如遇殺父?讐, 直欲便與一刀兩段.

第三要, 有大疑情. 如暗地做了一件極事, 正在欲露未露之時.

…… 苟闕其一, 譬如折足之鼎, 終成廢器.)

78)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로써 모든 선한 법을 늘어나게 한다.”

(60 권본 『華嚴經』 권6 大9 p.433a26. 信爲道元功德母, 增長一切諸善法.)
79) 『禪宗永嘉集』 大48 p.387c21.
80) 화두 참구의 요소 중의 요소는 의심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언구란 화두를 가리킨다. 일체의 의식을 화두에 붙여두고 평소에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고착된 관념들을 하나하나 제거한 다음 빈틈과 끊어짐[間斷]이 없이 화두를 의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의심이란 어떤 대상을 믿지 못하거나 이리저리 사량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 아니라, 화두에 대한 갖가지 분별이 사라질 때까지 불태워 없애는 화로 같은 기능을 하는 핵심적 작용을 말한다. 안팎의 모든 현상을 화두하나에 통일시켜 의심덩어리로 만들고 다른 생각은 전혀 끼어들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이러한 의심을 의단(疑團)이라 한다.

몽산 이전에 원오극근(?悟克勤 1063~1125)과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가 주로 했던 말이다.

“어느 날 방장에 들어가니 노화상[?悟克勤]께서 말씀하셨다. ‘그대의 본래 모습을 바꾸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안타깝다! 그대는 죽을 줄만 알았지 다시 살아나지는 못하는구나. 화두의 구절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병통이다.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아야 스스로 수긍하고 알아차릴 것이다. 모든 생각이 끊어진 다음에 다시 소생하면 누구도 더 이상 그대를 속일 수 없으리라(화두의 말을 제대로 안다는 뜻)」고 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모름지기 이러한 도리가 있음을 믿어야 한다.’”

(『大慧語錄』 권17 大47 p.883a20.

一日去入室, 老和?曰, ‘也不易爾到這箇田地. 可惜! 爾死了不能活. 不疑言句, 是爲大病.

不見道,「懸崖撒手, 自肯承當. ?後再甦, 欺君不得.」 須信有這箇道理.’);

“원오극근이 ‘화두의 구절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병통이다’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인가?

의심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데서 비롯되니, 믿지 않고서 무엇을 따라 깨달을 수 있겠는가!

믿은 다음에 의심하게 되고 의심한 다음에 진실로 의심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경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御製揀魔辨異錄』 권5 卍114 p.441b15.

圓悟, 以不疑言句, 爲大病者?

蓋不疑由於不信. 不信何由得入!

信而後疑, 疑而後眞到不疑之地.);

“수행하는 형제들을 보건대 10년이나 20년에서 한평생이 다하기까지 세간사를 끊고 세상의 인연을 잊고서 오로지 이 본분사만을 밝히고자 하면서도 꿰뚫지 못하는 자들은 그 병통이 어디에 있을까?

본분을 추구하는 납승이라면 그 핵심을 집어내 보라.

…… 화두의 언구를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거나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했다고 생각지는 않았는가?”

(『禪要』 「示衆」 卍122 p.712b9.

兄弟家, 十年二十年, 以至一生, ?世忘緣, 單明此事, 不透脫者, 病在於何?

本分衲僧, 試拈出看.

…… 莫是不疑言句??
莫是未得謂得未證謂證??)
81) 이 말 역시 대혜종고의 말이며, 그 이후 여러 선사들이 인용한 구절이지만 몽산이 말했다는 전거는 보이지 않는다. 『大慧語錄』 권17 大47 p.886a28 참조.

 

 

 

15

 

일상에서 대상경계와 마주치는 그 어느 때나 다만 ‘구자무불성’화두를 들어야 한다.

오거나 가거나 항상 들고서 놓치지 않고 오거나 가거나 언제나 의심하다가 도리로 모색할 길도 사라지고 따라갈 규범이 되는 길도 사라지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아82) 마음이 애달아 답답할 때83)가

바로 그 당사자 자신의 목숨을 던질 순간84)이며,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바탕이 된다.85)

 

日用應緣處, 只擧狗子無佛性話.

擧來擧去, 疑來疑去, 覺得沒理路, 沒義路, 沒滋味, 心頭熱悶時,

便是當人, 放身命處, 亦是成佛作祖底基本也.

 

 

[평]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고 하였다.

이 무(無)라는 한 글자는 종문의 으뜸 관문86)으로서 무수히 많은 그릇된 지각을 꺾어버리는 무기이자87) 또한 모든 부처의 본래 모습이요 모든 조사들의 골수이다.

이 관문을 뚫어버린 후에야 부처나 조사가 될 기약이 있을 것이다.88)

옛사람이 게송으로 읊었다. “조주가 드러낸 칼날이여! 서릿발같이 차가운 빛이 번득이는구나. 무슨 뜻인지 몰라 머뭇거리며 ‘어떤 뜻이냐’고 묻는다면, 몸을 갈라 두 동강 내리라.”89)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此一字子, 宗門之一關, 亦是?許多惡知惡覺底器仗, 亦是諸佛面目, 亦是諸祖骨髓也.

須透得此關然後, 佛祖可期也.

古人頌云,“ 趙州露刃劒, 寒霜光??. 擬議問如何, 分身作兩段.”

 

 

82) 몰자미(沒滋味). 어떤 맛도 없다는 말. 화두는 분별로 더듬을 실마리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화두의 본질적 속성을 표현한 말이다. 무자미(無滋味)·몰파비(沒巴鼻)·몰가파(沒可把) 등과 같은 뜻이다. 있다·없다 등의 모든 개념 또는 정서 상의 맛이 끊어져 어떤 수단으로도 분별할 여지가 없는 상황을 말한다.
83) 마음속에 구하는 것이 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애달아하고 말을 하려고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분분비비(憤憤??)의 상태를 말한다.

“예전에 운봉문열(雲峰文悅)은 ‘불법의 근본적인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옛 스님(임제)이 세 번 물었다가 세 차례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늘 기억하고 있었는데, 형주의 금란(金?)에 선(善)선사가 있고, 균주의 대우에는 수지(守芝)선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발분하고 애타는 심정으로 찾아갔으나 한 생각도 싹트기 전에 벌써 대우의 말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었다.”

(『偃溪和?語錄』 권하 「示印維那」 卍121 p.297b12.

昔雲峯悅, 誦先德, 如何是佛法大意, 三問三被打話, 知金?有善, 大愚有芝, 憤憤??. 未萌一念已前, 早被大愚一??定.)

이런 분분비비의 상태는 『論語』에 그 어원이 보인다.

“어떤 대상을 통하기 위해 발분하지 않으면 그 뜻을 깨우쳐 주지 말고, 애태워하지 않으면 그 말문을 열어주지 마라. 한 모퉁이를 들어 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나머지 세 모퉁이를 들어 보이지 못하면 다시 더 가르쳐줘서는 안 된다.”

(『論語』 「述而」. 不憤不啓, 不?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84) 화두 공부가 극치에 이르러 타파되기 직전에 마지막 승부를 벌이는 자리라는 말이다. 그 궁극의 경계에서도 끝까지 화두를 타파하기 위해 빈틈과 끊어짐 없이 화두를 들어야 한다.
85) 대혜종고(大慧宗?)의 『書狀』에 나오는 글이다.

“화두를 들 때는 허다한 방편으로 재주를 부릴 필요가 전혀 없이 다만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누워 있는 그 자리에서 화두를 빈틈과 끊어짐 없이 들면 될 뿐 희로애락을 유발하는 대상경계에서 분별을 일으키면 안 된다. 항상 화두를 들고서 놓치지 않고 언제나 화두를 간수하여 도리로 모색할 길도 사라지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아 마음 애달아 괴롭다고 느끼는 때가 바로 그 당사자 자신이 목숨을 던질 순간이다.”

(『書狀』「答宗直閣」 大47 p.933c1.

擧話時, 都不用作許多伎倆, 但行住坐臥處, 勿令間斷, 喜怒哀樂處, 莫生分別. 擧來擧去, 看來看去, 覺得沒理路, 沒滋味, 心頭熱悶時, 便是當人, 放身命處也.)

86) “바로 무(無)라는 이 한 글자가 곧 종문의 으뜸 관문이다.”(『無門關』 1則 「趙州狗子」 大48 p.292c27. 只者一箇無字, 乃宗門一關也.)
87) 『書狀』 「答富樞密」 大47 p.921c8 참조.
88) 『無門關』 1則 「趙州狗子」 大48 p.292c28.
89) 조주의 무자를 즐겨 제기하던 오조법연(五祖法演)에게 한 학인이 그 뜻을 묻자 이에 답한 게송이다. 『五祖法演語錄』 大47 p.666c1, 『聯燈會要』 권6 卍136 p.531b12 참조.

 ‘어떤 뜻이냐?’고 묻는다는 말은 모색할 내용을 미리 예상하고 접근하는 분별을 가리킨다. 이러한 분별을 잘라내어야 무자가 타파된다는 뜻이다. 무자에 관하여 더 이상 묻지도 대답하지도 못하여 이에 관하여 좋다·나쁘다, 있다·없다는 등의 그 어떤 분별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이끌기 위한 방편으로써 제시한 말이다.

 

 

 

16

 

화두를 의심하지 않고 단지 들고만 있는 그 자체로 깨달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이리저리 사량 분별해서도 안 되며, 또한 지금 미혹되어 있다고 여기며 깨달을 시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도 안 된다.90)

다만 생각으로 미칠 수 없는 곳에까지 이르러 생각하고자 하지만 마음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지경이 되면 마치 쥐가 소뿔로 만든 쥐틀에 거꾸로 처박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것91)과 같이 될 것이다.92)

또 평소에 이리저리 분별하여 가지런히 정돈하는 것도 식정(識情)이요 생사를 따라 휩쓸려 다니는 것도 식정이요 두려워 떠는 것도 식정이거늘,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병통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이 안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뿐이다.93)

 

話頭, 不得擧起處承當, 不得思量卜度, 又不得將迷待悟.

就不可思量處思量, 心無所之, 如老鼠入牛角, 便見倒斷也.
又尋常計較安排底, 是識情, 隨生死遷流底, 是識情, ?怖?惶底, 是識情,

今人不知是病, 只管在裏許, 頭出頭沒.

 

 

[평]

화두에 열 가지 병통[十種病]94)이 있다.

의근(意根)을 가지고 사량 분별하는 것,

눈썹을 움직이고 눈을 깜박거리는 등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에 뿌리를 내리고 알아내려고 하는 것,

언어문자에서 살 길을 모색하려고 하는 것,

경전이나 어록 등의 문자를 끌어들여 입증하려고 하는 것,

화두를 의심하지 않고 단지 화두를 들고만 있는 그 자체로 깨달으려고 하는 것,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경계 속에 우두커니 머무르는 것,

있다·없다는 대립적 유·무의 무라고 이해하는 것,

진무(眞無)의 무(無)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일정한 도리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

현재 미혹되어 있다고 여기며 깨달을 시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열 가지 병통을 벗어난 사람은 다만 화두를 들 때 번잡함을 털어버리고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의심하기만 하면 된다.

 

話頭, 有十種病.

曰意根下卜度,

曰揚眉瞬目處?95)根,

曰語路上作活計,

曰文字中引證,

曰擧起處承當,

曰?在無事匣裏,

曰作有無會,

曰作眞無會,

曰作道理會,

曰將迷待悟也.

離此十種病者, 但擧話時, ???精神,

只疑是箇甚?.

 

 

90) 장미대오(將迷待悟). 장심대오(將心待悟)·대오심(待悟心)·구오지심(求悟之心)·구오증지심(求悟證之心)·구증오지심(求證悟之心) 등이라고도 한다. ‘언제 쯤 깨달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는 무자화두 공부를 할 때 생기는 십종병(十種病) 중 하나이다.

『大慧語錄』 권19 大47 p.891b29에서 “미혹되었다고 집착하며 깨달음을 기다린다(執迷待悟)”라고 한말이나 지눌이 『修心訣』 大48 p.1006c28에서 “미혹된 상태에서 깨닫기를 기다린다(將迷待悟)”라고 한 말도 이 병통을 나타낸다. 지눌은 이것을 십종병 중 근본적인 병통으로 들었다(『看話決疑論』 韓4 p.732c13. 所言十種病, 以求證悟之心爲本.).

“이것은 대체로 깨달음을 희구하는 마음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 장애를 만든 것이며, 별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書狀』 「答曾侍郞」 大47 p.917c8. 此蓋以求悟證之心, 在前頓放, 自作障難, 非干別事.)
91) 쥐가 소뿔로 만든 쥐틀 속에 들어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형국에 빗대어 화두를 들고 의심하다가 사량 분별로 모색하는 길이 끊어진 상태를 비유한다.
92) ‘마음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心無所之)’는 것은 대혜종고(大慧宗?)가 썼던 말이다.

“무엇보다 먼저, 화두를 의심하지 않고 단지 들고만 있는 그 자체로 깨달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이리저리 사량 분별해서도 안 된다. 다만 생각으로 미칠 수 없는 곳에까지 이르러 생각하고자 하나 ‘마음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지경’이 되면 마치 쥐가 소뿔로 만든 쥐틀에 거꾸로 처박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것과 같이 될 것이다.”(『書狀』 권28 「答呂舍人」 大47 p.930a17. 第一, 不得向擧 起處承當, 又不得思量卜度. 但著意就不可思量處思量, 心無所之, 老鼠入牛角, 便見倒斷也.)

93) ‘평소에 이리저리~사라졌다 할 뿐이다’라는 구절은 『書狀』 「答曾侍?」 大47 p.918a1~a3의 인용이다.
94) 대혜종고(大慧宗?)는 『書狀』 「答富樞密」에서 무자화두를 참구할 때 빠져서는 안 될 여덟 가지 병통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다 보조지눌이 두 가지를 더해 십종병으로 나누었다. 『선교석』 주석38) 참조.
95) ‘?’의 오기로 보인다.

 

*? 헤아릴 타. 1. 헤아리다 2. 재다 3. 흔들다 4. 송이(꽃을 세는 단위) [부수]?

? 살받이 타. 1. 살받이(과녁의 앞뒤와 양쪽에 화살이 날아와서 꽂히도록 쌓은 것) 2. 글방 3. 장벽 [부수]土

 

 

 

17

 

눈앞에 당면한 이 일96)은 마치 모기가 무쇠소 등에 앉은 것과 같으니97)
이러니저러니 따지며 분별하지 말고 부리를 꽂을 도리가 전혀 없는 경계98)에서

목숨을 한번 버린다는 생각으로 온몸으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99)

 

此事, 如蚊子上鐵牛,

便不問如何若何, 下?不得處,

棄命一?, 和身透入.

 

 

[평]
위에서 말한 뜻을 거듭 결론지어 말하였다. 활구(活句)를 궁구하는 자로 하여금 (어떤 수단도 통하지 않는 경계에서) 물러서지 않도록 한 것이다.

옛 사람이 “바르게 참선하려면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하고,

묘하게 깨달으려면 마음으로 분별할 길이 끊어진 곳을 궁구해야 한다”100)라고 말한 그 뜻이다.

 

重結上意. 使參活句者, 不得退屈.

古云,“ 參禪, 須透祖師關,

妙悟, 要窮心路絶.”

 

 

96) 본분사(本分事)를 뜻한다.
97) 모기가 무쇠소를 진짜 소로 착각하여 그 위에 앉아 부리를 대고 피를 빨려고 한다는 비유이다. 문자나 이론 또는 사량 분별 등 어떤 수단으로도 전혀 통하지 않는 경계 또는 화두 자체를 비유한다. 『景德傳燈錄』 권9 「?山靈祐傳」 大51 p.265b22, 『?悟語錄』 권13 大47 p.772a26, 『大慧語錄』 권16 大47 p.881b18 참조.
98) 발 들여 놓을 여지가 없다는 무하각처(無下脚處), 손 쓸 도리가 없다는 무하수처(無下手處) 등과 통하는 말이다. 무쇠소의 등 여기저기에 부리를 꽂으려 하지만 그럴 만한 곳이 없듯이 어떤 말이나 분별로도 파고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경지를 비유한다. 화두가 온전히 성숙되어 타파되기 직전의 상황 또는 화두의 근본적
속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99) 『景德傳燈錄』 권9 「?山靈祐傳」 大51 p.265b22, 『?悟語錄』 권13 大47 p.772a26,
『大慧語錄』 권16 大47 p.881b18, 『密菴語錄』 大47 p.974c17 등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보이며 고봉원묘(高峰原妙)의 『禪要』 卍122 p.714a5~a6의 내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100) 무문혜개(無門慧開)의 말. 『無門關』 1則 「趙州狗子」 大48 p.292c25.

 

 

 

18

 

공부는 마치 현악기의 줄을 고를 때에 죄임과 늦춤이 그 중도에 맞아야 하는 것과 같으니, 지나치게 덤벼들면 집착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

또렷또렷하고 분명하게 화두를 의식하면서 세밀하고 끊어짐 없이 들어야 한다.101)

 

工夫, 如調絃之法, 緊緩得其中, 勤則近執着, 忘則落無明.
惺惺歷歷, 密密綿綿.

 

[평]
거문고를 타는 사람들이 “줄의 죄임과 늦춤을 적절히 조절한 다음에야 맑은 소리가 두루 어울려 퍼지게 된다”라고 하는 말처럼 화두 공부 또한 이와 같아서 급하게 하면 혈기가 오르고 느슨하게 하면 귀신굴102)에 들어가게 되니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면 공부의 묘한 방법이 그 안에 있을 것이다.

 

彈琴者曰, “緩急得中然後, 淸音普矣.” 工夫, 亦如此, 急則動血囊, 忘則入鬼窟, 不徐不疾, 妙在其中.

 

 

101) “시험 삼아 이와 같이 공부해 보십시오.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상관하지 말며, 마음속에서 애태우거나 초조하게 느끼지 말고 또한 느슨하게 풀어져서도 안 됩니다. 현악기의 줄을 고르는 법과 같으니, 그 죄임과 늦춤이 딱 맞으면 곡조는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書狀』 권29 「答林判院」 大47 p.936b25.

試如此 做工夫看. 莫管悟不悟, 心頭休熱忙, 亦不可放緩. 如調絃之法, 緊緩得其所, 則曲調自成矣.);흥선유관(興善惟寬 755~817)의 말.

범부의 무명과 이승의 집착, 이 두가지 병통을 여읜 것을 참된 수행이라고 한다.

참된 수행은 지나치게 덤벼들어서도 안 되고 잊어버려서도 안 된다. 지나치게 덤벼들면 집착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되니, 이것을 마음의 요체라고 한다.”

(『景德傳燈錄』 권7「惟寬傳」 大51 p.255b5.

凡夫無明, 二乘執著, 離此二病, 是曰, 眞修.

眞修者, 不得勤, 不得忘. 勤卽近執著, 忘卽落無明, 此爲心要云爾.)

한편 이러한 취지는 혼침에 빠진 것과 같은 망회(忘懷), 산란과 같은 관대(管帶)를 모두 벗어나는 방법과 맞닿아 있다.

“고목과 같이 메마른 마음으로 마음에 품은 모든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마음을 붙들고 항상 놓치지 말고 지니고 있으려 하지도 마라.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단지 그렇게 살피며 놓치지 마라. 있다는 견해도 없다는 견해도 짓지 말고, 두 가지를 넘어선 진실한 무[眞無]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마라.”

(『眞覺語錄』 「示宗敏上人」 韓6 p.25c5.

莫枯心忘懷, 莫將心管帶. 狗子無佛性, 只?看不昧. 不作有無見, 不作眞無會.)

102) 생동감이나 지혜가 없는 선정(禪定)을 비유한 말. 마음의 고요함만 지키고 응용력이 없는 상태나 혼침 등을 말한다. “아직까지 묵조의 무리들은 귀신굴에서 긴세월 동안 좌선만 하고 있다.”

(『大慧語錄』 권6 大47 p.836b3. 致今, 默照之徒, 鬼窟長年打坐.)

 

 

 

19

 

공부가 (성숙하여) 걸어가면서도 걸어가고 있는 줄 알지 못하고 앉아 있으면서도 앉아 있는 줄 알지 못하는 데 이르더라도

바로 이때에 팔만사천 마군(魔軍)이 육근의 문 앞103)에서 엿보며 마음을 따라 여러 책략을 일으키겠지만,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군인들 어떻게 하겠는가!104)

 

工夫, 到行不知行, 坐不知坐,

當此之時, 八萬四千魔軍, 在六根門頭伺候, 隨心生設,

心若不起, 爭如之何!

 

 

[평]

마(魔)란 생사윤회를 즐거워하는 귀신을 가리키고,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를 말한다.

마는 본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 중에 염(念)105)을 잃고 마침내 그 근원을 떠나 생각이 갈가리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106)

중생은 그 경계를 그대로 따르므로 순조롭고, 도인은 그 경계를 거스르므로 곤란을 겪는다.

그러므로 도가 높을수록 마가 무성해진다107)고 하는 것이다.

선정에 들어 있던 중에 상주를 보고서 자기 다리를 칼로 찔렀다거나 혹은 돼지를 보고서 코를 잡은 것 또한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 상을 보고서 이를 밖에 있는 마라고 느끼는 것이다.108)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군이 갖가지 기량을 부리더라도 도리어 칼로 물을 가르거나 빛을 불어 날려버리려는 시도와 같이 소용없다.

옛말에 “벌어진 벽 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마음의 틈으로 마군이 침입해 들어온다”109)라고 한 말이 바로 이 뜻이다.

 

魔者, 樂生死之鬼名也, 八萬四千魔軍者, 乃衆生八萬四千煩惱也.

魔本無種, 修行失念者, 遂派其源也.

衆生順其境故,109) 順之;道人逆其境故, 逆之.

故云, 道高魔盛也.

禪定中, 或見孝子而斫110)股, 或見猪子而把鼻者, 亦自心起見, 感此外魔也.

心若不起, 則種種伎倆, ?爲割水吹光也.

古云,“ 壁隙風動, 心隙魔侵.”

 

 

103) 육근문두(六根門頭).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등 육근(六根)으로 모든 대상들이 출입하므로 문에 비유하여 이를 문두 또는 육근문두라 한다. ‘두’는 명사 뒤에 붙는 조사이다.
104) 『禪要』 卍122 pp.706a18~707a6 참조.
105) s?ti. 선정(禪定)에 들어 산란과 혼침이 없이 주의를 집중하는 작용. 여기서는 화두만 들려 있고 다른 생각이 없는 화두일념(話頭一念)의 염이다.
106) “천마와 외도는 본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 중에 염을 잃고 마침내 그 근원을 떠나 생각이 갈가리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다만 소중히 여기는 것과 의지하는 것을 가지고, 분별과 이해를 내세울 줄만 알아서 아주 작은 견해라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모두 외도가 될 뿐이다.”

(『宗鏡錄』 권46 大48 p.689b5.

天魔外道, 本無其種, 修行失念, 遂派其原. 故知但有所重所依, 立知立解, 絲毫見處, 不亡, 皆成外道.)
107) “그러므로 도가 높아지면 마(魔)가 무성해져 거스르거나 순조로운 경계가 무수히 일어날 것을 근심할 일이다. 그러나 정념(正念)이 눈앞에 실현된다면 그 어떤 것에도 장애를 받지 않을 것이다.”

(『百丈淸規』 권5 「坐禪儀」 大48 p.1143a18. 然恐道高魔盛, 逆順端. 若能正念現前, 一切不能留?.)

108) “옛날에 어떤 선사가 산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상주(喪主)가 시신 하나를 들고 와 선사 앞에다 놓고 곡을 하며 ‘어째서 우리 어머니를 죽였는가?’라고 말했다.

선사는 마구니라 알고 ‘이것은 마구니의 경계가 틀림없다. 내가 도끼로 이를 찍어버리면 어찌 해탈을 얻지 못하겠는가!’라고 생각한 끝에 기둥에 걸려 있던 도끼를 들고 마침내 한 번 휘두르자 상주가 달아났다.

잠시 뒤에 넓적다리가 축축한 것을 느끼고 살펴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의도와는 달리 자기 자신을 찍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좌선을 하고 있을 때 마음속에서 망령된 견해를 일으킴에 따라 마음 밖에 있는 마구니가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느끼지만 그 모두가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까닭 없이 노래하고 춤추는 등의 행위도 원래 자기 마음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일체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면 모든 경계는 저절로 소멸할 것이니 어찌 마음 밖에 별도로 마구니의 경계가 있을 것인가?

또한 옛날에 어떤 선사가 좌선을 하고 있는데, 마침 돼지 한 마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선사는 이것을 마구니로 생각하고 천천히 돼지의 코를 잡아끌며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불을 들고 와서 보니 그 스님이 스스로
자기 코를 잡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이 변화하여 나타난 현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바른 선정을 닦기만 한다면 어디서 마구니의 일이 벌어지겠는가!”

(『宗鏡錄』 권29 大48 p.587a8.

昔有禪師在山坐, 見一孝子, 擎一死屍來, 向禪師前著, 便哭云, ‘何故, 殺我阿母?’

禪師知是魔, 思云, ‘此是魔境. 我將斧斫, 却可不得解脫!’ 便於柱上取斧, 遂斫一斧, 孝子走去.

後覺股上濕, 便看, 乃見血. 不期自斫.

斯乃正坐禪時, 心中起見, 遂感外魔來入, 行人心, 不知皆由自心.

或自歌舞等, 元是自心影像. 故知若了唯心, 諸境自滅, 何處心外別有境魔耶?

又, 昔有禪師坐時, 見一猪來在前, 禪師將是魔, 則緩擎把猪鼻?, 唱叫. 把火來, 乃見和?, 自把鼻唱叫.

明知由心變, 但修正定, 何有魔事!)

109) “산상격왕보살이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구멍 뚫린 틈으로 바람이 들어가 물체를 움직이게 하여 오고 가는 형상이 있게 되는 것과 같이 보살도 그와 같아서 마음에 틈이 있을 때 마음이 동요되고, 마음이 동요하므로 마구니가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음을 지켜서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에 틈이 없다면 모든 상(相)이 원만하게 되고, 모든 상이 원만하게 되면 그 공한 성품도 원만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마구니를 넘어서는 법문입니다.”

(『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 권7 大13 p.641c9.

山相擊王菩薩曰,

‘譬如有孔隙處, 風入其中, 搖動於物, 有往來相,

菩薩亦爾, 若心有間隙, 心則搖動, 以搖動故, 魔則得便.

是故, 菩薩守護於心, 不令間隙.

若心無間隙, 則諸相圓滿, 以相圓滿故, 則空性圓滿. 是爲菩薩超魔法門.’);

“어떤 비구 하나를 마구니가 유혹하려고 7천 세가 지났으나 결국 유혹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 비구가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니, 마치 밀실에 바람이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바람이 들어갈 수 있는 여지는 구멍 난 틈이 있기 때문이듯이 마구니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起信論疏筆削記』 권19 大44 p.402b6.

有一比丘, 魔欲惑之, 經七千歲, 竟不得便. 何以故?

以是比丘 不起心故, 其猶密室風不能入.

風得入者, 由孔隙故, 魔得便者, 由起念故.)
110) ‘斫’의 오기로 보인다.

 

* 斫 벨 작. [부수]斤(날 근) . 본문한자 [부수]斥 .물리칠 척

 

 

 

20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천마(天魔)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음마(陰魔)이며,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煩惱魔)이다.

그러나 우리 정법 가운데는 본래 이러한 일은 없다.111)

 

起心是天魔,

不起心是陰魔,

或起或不起, 是煩惱魔.

然我 正法中, 本無如是事.

 

 

[평]

대체로 마음의 작용을 잊는 것112)이 부처의 도요, 분별하는 것은 마구니의 경계이다.113)

그러므로 마구니의 경계라는 꿈같은 일을 무엇 하러 애써 가려내어 따지겠는가!

 

大抵, 忘機是佛道, 分別是魔境.

然魔境夢事, 何勞辨詰!

 

 

111)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법을 이어받은 대주혜해(大珠慧海)의 말. 천마, 음마, 번뇌마는 사마(四魔) 또는 오마(五魔)·십마(十魔)에 속한다.

천마(S: deva-m?ra, T:lhah3 i bdud)는 타화자재천마(他化自在天魔)·자재천마(自在天魔)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착한 일을 행하려고 할 때 방해하는 타화자재천(욕계의 꼭대기에 있는 제6천)의 마왕을 이른다.

음마(S: skandha-m?ra)는 온마(蘊魔)라고도 하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5온을 마구니로 본 것이다. 번뇌마(S: kle?a-m?ra, P: kilesa-m?ra)는 번뇌를 마구니로 본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사마(死魔 S: maran3 am?ra)는 죽음을 마구니로 간주한 것이다.

“지관을 강설하는 혜강주가 물었다.‘선사께서는 마를 가려낼 수 있습니까?’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천마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음마이며,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이다. 그러나 우리 정법 가운데는 이러한 일이란 없다.’”

(『景德傳燈錄』 권28「大珠慧海傳」 大51 p.442a12.

講止觀慧座主問, ‘禪師辨得魔否?’

師曰, ‘起心是天魔, 不起心是陰魔, 或起不起是煩惱魔. 我正法中, 無如是事.’)
112) 망기(忘機). 자신을 잊고 무심하게 되는 것. ‘기’는 분별을 비롯한 마음의 여러가지 작용이다.
113) 황벽희운(黃檗希運 ?~850)의 말.

“그런 까닭에 보고 듣는 것은 환예(幻?)와 같고, 알고 느끼는 것은 중생의 작용이다. 조사문 안에서는 단지 마음의 작용을 쉬고 견해를 잊는 것만 중시할 뿐이다. 그래서 마음의 기틀을 잊으면 부처의 도가 융성하고 분별하면 마군이 거세게 일어나는 것이다.”

(『宛陵錄』 大48 p.384b12.

所以云, 見聞如幻?, 知覺乃衆生. 祖師門中, 只論息機忘見. 所以忘機則佛道隆, 分別則魔軍熾.)

 

 

 

 

 

21

 

공부가 성숙하여 화두가 하나의 의심덩어리114)가 된다면 설령 금생에 꿰뚫지 못한다 해도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115) 악업에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다.116)

 

工夫, 若打成一片, 則縱今生透不得,

眼光落地之時, 不爲惡業所牽.

 

 

[평]

업(業)이란 무명이요 선(禪)이란 반야이니,

밝음(반야)과 어둠(무명)이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이치가 진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業者無明也, 禪者般若也,

明闇不相敵, 理固然也.

 

 

114) 타성일편(打成一片). 화두에 약간의 분별도 붙을 여지가 없고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안팎의 모든 것이 화두로서 한 덩어리가 된 것. 이것이 바로 더 이상 앎의 수단이 통하지 않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의 경계이다.

“공부를 하면서 화두를 살피다가 온몸과 마음으로 용맹하게 정진하여 한 덩어리가 되면 마치 은산철벽과
같아질 것이다. 이미 한 덩어리가 되었다면, 몸과 마음 그리고 주관과 객관이 남김없이 하나로 뒤섞여 앎의 대상은 전혀 수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한 덩어리라고 안다면 다시 두 조각 세 조각으로 갈라져버린 것이니, 어찌 남김없이 하나로 뒤섞인 이치가 있겠는가!”

(『天目明本雜錄』 「示雄禪人」 卍122 p.764a11.

做工夫看箇話頭, 身心勇猛, 打成一片, 如銀山鐵壁相似. 旣是成一片, 身與心, 人與境, ?體混融, 不容有所知. 苟或知是一片, 則又是兩片三片了也, 安有混融之理哉!)
115) 안광락지(眼光落地). 임종할 때의 모습으로써 죽는 순간을 표현한 말이다.
116) 대혜종고(大慧宗?)의 다음 취지와 같다.

“다만 찰나마다 (화두를 의심함에) 빈틈과 끊어짐이 있어서는 안 될 뿐이니, 힘을 얻었거나 얻지 못했거나 상관하지마라.

과거세에 반야와 인연이 없어 금생에 철저하게 깨닫지 못한다 해도 죽음에 임하는 순간에 또한 악업에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다.”(『大慧語錄』 권20 「示眞如道人」 大47 p.895a17.

但念念不 要間斷, 莫管得不得.

便是夙與般若無緣, 今生未打得徹, 臨命終時, 亦不被惡業所牽.)

 

 

 

22 117)

 

참선하는 자들이여! 네 가지 은혜118)가 깊고 두터움을 아는가?

사대119)로 이루어진 더러운 육신이 찰나마다 쇠하여 썩어가는 것을 아는가?

사람의 목숨이란 한낱 호흡에 달려 있을 뿐임을 알고 있는가?

태어난 이래로 부처나 조사를 만나보았는가?

최상의 법을 듣고 보기 드물고 귀하다는 생각을 일으켜 보았는가?

참선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참선의 뜻을 굳게 지켰는가?

좌선하고 있을 때 옆에 앉은 사람120)과 잡담하지 않았는가?

시비를 선동하여 부추기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는가?

화두를 들고 있는 어느 시각에나 분명하고 또렷또렷하여 알아채지 못한 적은 없는가?

사람들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화두를 드는 데 빈틈이나 끊어짐이 없는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순간마다 그 모든 것이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는가?

자신을 돌이켜 관찰하는121) 그때 부처와 조사의 의중을 포착했는가?

이번 생에 반드시 부처님의 혜명122)을 이을 수 있겠는가?

생활하기 편안한 순간에도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 생에 받은 몸으로 결단코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팔풍123)의 경계와 마주쳐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는가?

 

이상의 것들이 바로 참선하는 사람이 일상생활 중에 점검해야 할 도리이다.

옛사람이 말했다. “금생에 이 몸을 건질 수 없다면 다시 또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건지겠는가?”124)

 

大抵參禪者, ‘還知四恩深厚??

還知四大醜身念念衰?125)??

還知人命在呼吸??

生來値遇佛祖??

及聞無上法, 生希有心??

不離僧堂, 守節??

不與?單, 雜話??
切忌鼓扇是非??

話頭十二時中, 明明不昧??

對人接話時, 無間斷??

見聞覺知時, 打成一片??

返觀自己, 捉敗佛祖??

今生決定續佛慧命??

起坐便宜時, 還思地獄苦??

此一報身, 定脫輪廻??

當八風境, 心不動??

 

此是參禪人, 日用中, 點檢底道理.

古人云,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평1]

네 가지 은혜란 부모와 임금과 스승 그리고 시주의 은혜이다.

사대로 이루어진 더러운 육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아버지의 정수(精水) 한 방울과 어머니의 피 한 방울은 수대(水大)의 습한 성질이고, 정수가 뼈가 되고 피가 피부가 된 것은 지대(地大)의 견고한 성질이며, 정수와 피가 한 덩어리가 되어 썩어 문드러지지 않는 것은 화대(火大)의 따뜻한 성질이며, 콧구멍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126) 들숨과 날숨을 통하게 하는 것은 풍대(風大)의 움직이는 성질이다.

아난이 “애욕의 기운은 거칠고 더러우며, 비린내와 누린내가 나는 몸이 섞인 것일 뿐이다”127)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더러운 몸’이라 한 이유이다.

찰나마다 쇠하여 썩어간다는 것은 세월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 얼굴에는 저절로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털은 저절로 희어져 ‘지금이 이미 예전과 같지 않고 미래도 당연히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128)라는 말 그대로이니, 이것은 무상한 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무상이라는 귀신은 죽이는 것을 즐겁게 여기니 참으로 순간순간이 모두 두려울 뿐이다.

날숨은 내뿜는 불의 기운이고 들숨은 들이마시는 바람의 기운이니, 사람의 목숨은 단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팔풍이란 순경과 역경 두 가지를 말한다. 지옥의 고통이란 인간 세상 육십 겁이 지옥129)의 하루 낮밤이니, 확탕·노탄·검수·도산 지옥130)에서 겪는 고통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다.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기 어려운 것이 바다에 빠진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려우므로131) 이것을 애처롭게 여겨 경계한 것이다.

 

四恩者, 父母君師施主恩也.

四大醜身者, 父之精一滴, 母之血一滴者, 水大之濕也;精爲骨, 血爲皮者, 地大之堅也;精血一塊, 不腐不爛者, 火大之暖也;鼻孔先成, 通出入息者, 風大之動也.

阿難曰, “欲氣?濁, 腥?交?.” 此所以醜身也.

念念衰?132)者, 頭上光陰, 刹那不停, 面自皺而髮自白, 如云,‘ 今旣不如昔, 後當不如今.’ 此無常之體也.

然無常之鬼, 以殺爲戱, 實念念可畏也.

呼者, 出息之火也;吸者, 入息之風也, 人命寄托, 只在出入息也.

八風者, 順逆二境也. 地獄苦者, 人間六十劫, 泥犁一晝夜, ?湯爐炭劒樹刀山之苦, 口不可形言也.

人身難得, 甚於海中之鍼, 故於此愍而警之.

 

[평2]

위의 법어는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보면 차가운지 따뜻한지 저절로 알 수 있는 것133)과 같다.

총명으로는 업을 대적할 수 없고134) 간혜135)로는 생사윤회라는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135)136)

각자 마땅히 자세히 살피고 생각에 붙여두되 스스로 속아서는 안 될 것이다.

 

評曰 上來法語, 如人飮水, 冷暖自知.

聰明不能敵業, 乾慧未免苦輪.

各須察念, 勿以自?.

 

 

117) 여기에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자가 스스로 자신을 점검하도록 세세한 조목을 제시하고 있다. 태고보우(太古普愚)의 설을 따르면서 약간 수정하고 몇 가지 조목을 부가했다. 『太古語錄』 「示衆」 韓6

pp.676c14~677a11 참조.
118) 사은(四恩). 네 가지 은혜를 말한다.

『大乘本生心地觀經』 권2 大3 p.297a12에 부모은(父母恩)·중생은(衆生恩)·국왕은(國王恩)·삼보은(三寶恩), 『正法念處經』권61 大17 p.359b14에 모은(母恩)·부은(父恩)·여래은(如來恩)·설법사은(說法師恩) 등으로 나누고 있다.
119) 四大.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네 가지 요소.
120) 단(單). 총림의 승당(僧堂)에 각 수행자들에게 배분된 자리. 여기서 좌선하고 공양하고 잠을 잔다. 단위(單位) 또는 괘탑단(掛搭單)이라고도 한다.
121) 반관(返觀). 자기 자신을 돌이켜 관찰한다는 뜻으로 밀밀반관(密密返觀)이라고도 한다. 이는 잠깐의 빈틈도 없이 돌이켜 관찰한다는 말로서 화두 공부를 하거나 염불을 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령이다.
122) 慧命. 지혜의 생명 또는 목숨과 같은 지혜. 부처님의 지혜는 중생을 살리는 목숨과 같으므로 혜명이라 한다. 특히 법신의 근본이 되는 지혜를 말한다.
123) 八風(P: att 3 3halo-kadhamm?). 사람의 마음을 동요케 하는 여덟 가지 상황 또는 경향을 바람에 비유한 것. 팔법(八法) 또는 팔세풍(八世風)이라고도 한다.

이익(利 P:l?bha)·손실(衰 P: al?bha)·칭찬(譽 P: yaso)·비방(毁 P: ayaso)·칭송(稱 P:pasam3 s?)·비난(譏  P: nind?)·즐거움(樂 P: sukha)·고통(苦 P: dukkha)을 가리킨다.
이 중 이·예·칭·락을 4순(順), 쇠·훼·기·고를 4위(違)라고 한다.

“여덟 가지 법이 바로 팔풍이다. 이·쇠·훼·예·칭·기·고·락 등을 말한다.

이 여덟 가지 법은 세간에서 애착하거나 증오하는 경계가 되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바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만일 마음에 관장하는 주인이 있어 정법에 안주한다면 애착과 증오에 미혹되어 어지럽혀지지 않을 것이니, 그는 팔풍에 흔들리지 않는 자일 것이다.”

(『大乘本生心地觀經淺註』 권6 卍34 p.382a17.

八法, 卽是八風. 謂利衰?譽稱譏苦樂.

此八法, 世間所愛所憎, 而能扇動人心, 名之爲風.

苟心有主持, 安住正法, 不爲愛憎惑亂, 卽八風不能傾動之者.)

『增壹阿含經』 권39 大2 p.764b14, 『法華文句記』 권1 大34 p.168b19 등 참조.
124) 『洞山語錄』 大48 p.516b23, 『死心新和尙語』 續古尊宿語要1 卍118 p.862a10, 『蓮宗寶鑑』 권5 大47 p.328b24 등에 나오는 구절.

“사람의 몸은 얻기 어렵고 불법은 만나기 어려우니, 금생에 이 몸을 건지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생에 이 몸을 건지겠는가?”(『書狀』 권30 「答湯丞相」 大47 p.942a21.

人身難得, 佛法難逢,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125) ‘朽’의 오기로 보인다.

126) “사람이 배태될 때 코가 가장 먼저 형성되므로 시조를 비조라 한다.”

(『正字通』. 人之胚胎, 鼻先受形, 故謂始祖爲鼻祖.)
127)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부처님의 32상은 애욕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애욕의 기운은 거칠고 더러우며 비린내와 누린내가 나는 몸을 섞어 진한 피가 난잡하게 엉기는 것이므로 수승하고 청정하며 묘하고 밝은 자금광취(紫金光聚)를 발생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목마른 듯 우러러 부처님께 귀의하여 삭발하였습니다.”

(『楞嚴經』 大19 p.106c22.

常自思惟, 此相, 非是欲愛所生.

何以故, 欲氣?濁, 腥?交?, 膿血雜亂, 不能發生, 勝淨妙明, 紫金光聚. 是以, 渴仰從佛剃落.)

128) 『從容錄』 35則 大48 p.260b22 「착어」에 동일한 문장이 보인다.
129) 니리(泥梨). niraya. 나락가(那落迦 naraka)와 마찬가지로 지옥을 나타내는 말이다.
130) 확탕(?湯)은 끓는 솥에서 삶아지는 고통을 받는 지옥, 노탄(爐炭)은 숯불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화로에 떨어지는 고통을 받는 지옥, 검수(劒樹)는 잎이 모두 칼로 이루어진 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는 산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 지옥, 도산(刀山)은 칼이 하늘을 향해 꽂혀 있는 산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 지옥이다.
131) “한 번 잘못하여 법과 오래도록 멀어지면 억천 겁이 흘러도 다시 만날 수 없다.
마치 바늘 하나가 깊은 바다에 빠지면 아무리 반복하여 찾아보아도 쉽게 찾을수 없는 것과 같다.”

(『超日明三昧經』 권하 大15 p.547a5.

若一蹉跌, 與法永違, 於億千劫, 未卒値遇,

猶如一鍼, 墮深大海, 反覆求索, 寧易致乎?)
132) ‘朽’의 오기로 보인다.

133)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는 직접 마셔보기만 하면 저절로 알 수 있다는 말. 깨달음은 스스로 체험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그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그것을 적절히 밝힐 수 없다는 것을 비유한다. 곧 성인들의 체험을 전하는 경전이나 어록의 말씀도 자기 스스로 그 경지에 도달해야 온전히 알 수 있다는 뜻이다.
134)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은 총명한 재능에 장애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안이 열리지 않아 가는 곳마다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심의식(心意識)의 부림을 당하여 나고 죽는 세계에 반복하여 유랑하므로 자유자재하게 되지 못합니다.

진실로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 탁 트이고 활발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단칼에 두 동강을 내듯이 심의식의 길을 끊어버려야 비로소 본분과 상응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書狀』 「答王敎授」 大47 p.934b20.

聰明靈利人, 多被聰明所障. 以故, 道眼不開, 觸途成滯.

衆生無始時來, 爲心意識所使, 流浪生死, 不得自在.

果欲出生死, 作快活漢, 須是一刀兩段, 絶却心意識路頭, 方有少分相應.)
135) 간혜(乾慧).S: ?ukla-vidar?an?, tarka. 여러 가지 알음알이를 내지만 선정(禪定)을 닦아 실다운 것으로 하지 못한 상태. 이러한 지혜를 지니고 있는 지위를 간혜지(乾慧地)라고 한다. 법성(法性)의 이수(理水)로 윤택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랐다는 뜻으로 ‘간’이라고 한다.
136) 『景德傳燈錄』 권28 「大達無業傳」 大51 p.444c17, 『聯燈會要』 권5 「大達無業章」 卍136 p.506a3 참조.

 

 

 

23

 

말만 배우는 무리137)들은 법을 설할 때는 깨달은 듯 보이지만

경계를 마주하면 도리어 미혹될 뿐이니,

이들을 두고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자들이라고 한다.

 

學語之輩, 說時似悟,

對境還迷,

所謂言行相違者也.

 

 

[평]

이것은 앞서 말했던 ‘스스로를 속인다’는 뜻을 결론지은 것이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기에 거짓인지 참인지를 가려낼 수 있다.

 

此, 結上自?之意. 言行相違, 虛實可辨.

 

 

137) “본래 신통력으로 괴이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들의 본분사와는 관계가 없다.

말만 배운 무리들은 스스로 자신을 살펴 잘못을 알지 못하고

다만 허공에서 꽃을 꺾고 물속에서 달을 건져내려는 듯이 하려고만 하니 어떻게 이 마음의 힘을 붙이고 궁구할 수 있겠는가!”

(『景德傳燈錄』 권20 「瑞龍幼璋傳」 p.367b16.

自是神通作怪, 非干我事.

若是學語之輩, 不自省己知非,

直欲向空裏采華, 波中取月, 還著得心力?!)

 

 

 

24

 

생사를 대적하려면 이 한 생각138)이 ‘탁!’ 하고 단번에 타파되는 경지를 얻어야139)

비로소 생사에서 벗어나는 도리를 분명히 알아차릴 것이다.140)

 

若欲敵生死, 須得這一念子, 爆地一破,

方了得生死.

 

[평]
‘폭’이란 칠통141)을 깨뜨리는 소리다. 칠통을 깨뜨린 후에야 생사를 대적할 수 있다.

모든 부처가 수행 단계인 인위(因位)에서 행한 법(法)은 오직 이것일 뿐이다.

 

爆, 打破漆桶聲. 以打破漆桶, 然後生死可敵也.

諸佛因地法行者, 只此而已.

 

 

138) 일념자(一念子). 화두 곧 화두라는 단 하나의 생각. 공부를 할 때는 화두 이외에 다른 생각이 파고들어 오면 안 되기 때문에 한 생각[一念]이라 한다.
139) 막혔던 장애가 한꺼번에 폭발하듯이 무너지는 것. 궁구하던 화두가 한순간에 타파되는 상황을 묘사한다.

“시신을 지키는 귀신들과 같이 화두를 항상 지키며 들고 있다가 의심덩어리가 갑자기 ‘탁!’ 하고 한 소리를 내며 타파되면 틀림없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흔들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하라.”

(『禪要』 「示衆」2 卍122 p.707a9.

如箇守屍鬼子, 守來守去, 疑團子, ?然爆地一聲, 管取驚天動地, 勉之勉之.)
140) “만일 가장 빠른 길로 이해하고 싶다면 이 한 생각이 ‘탁!’ 하고 한 번에 타파되는 경지를 얻어야 비로소 생사의 도리를 분명히 알아차릴 것이며, 비로소 깨달았다고 할 것입니다.”

(『書狀』 「答富樞密」 大47 p.921c2.

若要徑截理會, 須得這一念子, ?地一破, 方了得生死, 方名悟入.)
141) 漆桶. 시커먼 통. 보통은 사물의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모든 분별이 차단되어 더듬고 모색할 여지가 없는 화두 자체를 비유하는 말이다.

 

 

 

25

 

그러나 한 생각이 폭발하듯이 단번에 타파된 후에는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가서 올바른 안목을 갖추었는지 점검받아야 한다.142)

 

然, 一念子爆地一破, 然後須訪明師, 決擇正眼.

 

[평]
이 일은 극도로 어려우니 겸손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도는 바다와 같아서 들어갈수록 더욱 깊어지는 것이니 작은 결과를 얻고 만족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깨달은 후에 점검받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다면, 제호의 뛰어난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는 격이다.

 

此事, 極不容易, 須生?愧,

始得. 道如大海, 轉入轉深, 愼勿得小爲足.

悟後若不見人, 則醍?上味, ?成毒藥.

 

 

142) “진실로 이 경지에 이르면 문득 무명이 깨어지고 확 트인 듯이 크게 깨달을 것입니다.

깨달은 다음에는 반드시 본색(本色)을 갖춘 종장(宗匠)을 친견하여 자신이 깨우친 경지가 궁극적인 뜻에 맞는지 점검받아야 합니다.

만일 종사를 친견하여 점검받지 않는다면 열이면 열 모두 마구니가 될 것입니다.”

(『太古語錄』 권상 韓6 p.678b16.

實到此田地, 則驀然無明破, 豁然大悟矣.

悟後須見本色宗匠, 決擇究竟.

若不見宗師, 則十箇五雙, 成魔去也.);

“그래서 ‘참선하려면 반드시 깨달아야하고, 깨닫고 나면 반드시 (점검해줄) 사람을 만나야 한다’라고 말한다. 만약 밝은 눈을 가진 종사로부터 인증(印證)을 구하지 않는다면, 마치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여 급제는 했지만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것과 흡사할 것이다.”

(『兀菴普寧語錄』 권상 卍123 p.14b5. 所以道,

‘參禪須是悟, 悟了須遇人.’ 若不求明眼宗師印證, 譬如讀書發解及第了, 不得轉官相似.)

 

 

 

26

 

고덕[ 山]은 “오로지 그대의 안목이 바른지 만을 귀하게 여길 뿐, 그대가 어떻게 수행할지는 대수롭게 여기지 마라” 고 하였다.

 

古德云,“ 只貴子眼正, 不貴汝行履處.”

 

 

[평]

지난날 앙산이 위산의 물음에 답하기를 “『열반경』 40권143)은 모두 마구니의 말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앙산의 바른 안목이다.

앙산이 다시 수행법에 관해 묻자 위산은 “오로지 그대의 안목이 바른지 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144)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먼저 바른 안목을 뜨고 난 이후에 수행에 관해 말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고자 하면 먼저 단박에 깨달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昔仰山答?山問云, “涅槃經四十卷, 總是魔說.” 此, 仰山之正眼也.

仰山又問行履處, ?山答曰, “只貴子眼正.” 云云.

此所以, 先開正眼而後說行履也. 故云,“ 若欲修行, 先須頓悟.”

 

 

143) 북량(北?)의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40권본 『大般涅槃經』을 말한다.
144) “위산이 앙산에게 ‘『열반경』 40권은 얼마간이 부처의 말이고 얼마간이 마구니의 말인가?’라고 묻자 앙산이 ‘모조리 마구니의 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후에는 아무도 너를 어쩌지 못하리라.’

‘제가 일생동안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오로지 그대의 안목이 바른지 만을 귀하게 여길 뿐 그대가 어떻게 수행할지는 말하지 마라.’”

(『景德傳燈錄』 권9 大51 p.265a26.

師問仰山, ‘涅槃經四十卷多少 佛說多少魔說?’

仰山云, ‘總是魔說.’ 師云, ‘已後無人奈子何.’

仰山云, ‘慧寂卽一期之事, 行履在什?處?’

師云, ‘只貴子眼正, 不說子行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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