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도 1학년 1반
28기 조갑식
꽃가루 날리는 4월이 되면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총동문회 체육대회가 열린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천막 아래 동기들이 많이 찾아주길 바라며 참가신청자 수보다 더 많은 의자를 깔았다. 결혼식이 많은 시즌의 일요일이라 뒤늦게 많이 올 것 같았다. 초등학교 재학생 운동회는 단풍과 햇밤이 나오는 가을에 열리지만, 졸업 후 총동문회의 체육대회는 파릇한 녹색 잎이 나오는 봄날에 열린다.
대구 칠성초등학교는 제일모직 담장 끝에 있었다. 그 당시 제일모직 담장은 하교길 낙서하는 담장이었다. 지금은 대구오페라하우스 옆으로 당시 기숙사의 터를 남겨 창조단지란 이름으로 여러 예술가들이 입주하여 사용 중이다. 참가 동문들 중 우리가 맨 위의 마지막 참가 기수이다. 위로는 원로석이라는 이름의 공동 텐트를 사용하지만 거의 나오지 않는다. 우리 기수는 올해 38명이 참가하여 최다 참가 2등을 하였다. 지난해에는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종합점수 1위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우리 기수도 한 해 한 해 다르다는 노년기이다. 올해는 많은 종목에서 기권하는 부상병들이 많았다. 초등학교 27회 졸업생 총무 일을 맡아 돈 관리는 예년과 달리 한다. 젊은 층 모임에서 하는 모임 통장을 새로 개설했다. 지출도 디지털통장 메모장에 바로 기록하고 물품 구매 영수증은 사진을 찍어 밴드에 붙여 놓으니 결산하기가 쉬웠다. 50대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동문회 임원으로 활동한 다양한 경험과, 안경사 협회에서 실행직 이사의 경험을 노년의 초등학교 동기회 총무 일에 접목시켰다.
테이블 위에 명찰을 놓다가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침산2동 마을 한복판에는 작은 동산이 있어 늘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오랫동안 이웃으로 살았던 김*오의 명찰이 보였다. TV가 몇 집 건너 한 대씩 있던 그 시절 만화방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요즘은 치맥을 먹으며 친구들과 스포츠를 즐겨보지만, 그 시절 스포츠 중계방송이 있는 날이면 동네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만화방으로 모였다. 한일전이 열리는 날에는 함께 힘찬 응원으로 지금 응원보다 더 뜨거웠다. 월드컵 축구 예선전, 복싱과 레슬링등 스포츠 중계방송은 만화방 입장료 100원에 동네 아이들로 가득 메웠다. 그 당시 박치기왕 김 일 선수의 한일전 프로 레슬링을 보고 나면 선수들은 우리들의 영웅이 되었고, 응원한 우리는 모두 애국자였다.
또 다른 명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김*숙, 16살의 초여름의 어느 날 무작정 준비도 없이 그녀의 동생들과 함께 넷이서 동화사를 갔었다. 입구에서 표를 끊어 들어가야 하는데 등산로가 옆으로 나 있어서 표를 끊지 않고 등산로 길을 택했다가 길을 잃고 불안하게 헤매던 중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 겨우 내려왔던 기억에 피씩 미소를 자아냈다.
잠시 쉬면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1학년 입학식 날 줄지어 섰던 기억이 난다. 눈을 운동장 쪽으로 그네 타던 곳을 바라보았다. 당시는 운동장 한 켠으로 나란히 철봉과 그네 등 놀이 기구가 많이 있었다. 지금은 미끄럼틀 하나만 운동장에 있을 뿐이다.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누구나 즐겼던 놀이, 모래를 수북히 쌓아 중앙에 가느다란 나무가지를 꽂아놓고, 가위 바위 보로 모래를 퍼가며 꽂아둔 막대가 쓰러지면 지는 게임. 얼마 전 네플릭스 영화로 만들어 세계적인 대 히트를 시킨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구슬치기, 딱지치기, 숨바꼭질, 여학생의 고무줄놀이등을 하면서 놀았던 모교 운동장. 저출산으로 학생수가 감소하였다가 근래에 재개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학생수가 다시 불어나 학교 건물을 새롭게 증축하였다. 오래된 굵은 플라타너스도 사라지고 운동장은 예전보다 작아졌지만, 개교 84년 된 운동장은 증축에도 불구하고 운동회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기수 조별 경기가 시작되었다. 낙하산 메고 달리기 종목을 보노라니 지난날 우리 삶을 보는듯하다. 똑바로 달려도 힘든 세상에서 보릿고개를 지나며 막 공업화 시대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어깨에 메달은 낙하산만큼이나 부양가족을 짊어진 아버지들이 많았다. 유독 땀을 많이 흘리시던 내 아버지는 일찍 하늘나라로 떠난 어머니가 그리워서일까? 당신은 속으로만 흘리는 눈물 때문인지 여름날 등에 유독 땀을 많이 흘리셨다. 힘들게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 반환점을 돌아와서 준비된 선수에게 터치하고 낙하산을 넘겨받아 허리에 매고 달려나간다. 일찍 산업전선으로 달려들어 뜀박질하며 살아온 애틋한 추억들이 떠올랐다. 동생 학비, 건강이 나쁜 형의 병원비, 나에게 불어오는 바람들을 내 어깨에 매달고 집안으로 불어오는 바람들을 낙하산에 잔뜩 매달아 온 힘을 다하여 달려야 했기에 나는 아내에게는 빵점이다.
가장으로 살아온 지난날이다. 많은 친구가 위로는 부모를 모시던 세대, 자녀들에게는 기대지 않는 세대였다. 내가 메고 달려온 낙하산을 자녀들에게는 넘겨주지 않으려고 하는 세대이다. 운동장을 한 바퀴 달리는 계주경기는 평탄하지 않은 장애물들을 건너며 뛰어야 했다. 사회복지가 없었던 그 시절, 가족 중 누군가 중병에 걸리면 가산을 모두 날리게 된다. 그냥 달리는 것도 숨이 찬데 달리다가 멈춰서 줄넘기 세 번 하고, 천으로 만든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달려야 했다. 한참 잘 나가다가 닥친 IMF는 코로나만큼이나 경제를 바꾸어 놓았다. 예비군 훈련 갔다가 산아 제한에 동참하며, 정관 수술에 손드는 이들에게는 훈련을 빼주며 집으로 가서 무료 시술을 받게 하는 정책 속에서 수술을 많이 받던 세대이다.
콩을 넣어 만든 오자미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 청팀 홍팀 두 개에 박이 터지며 떨어지는 현수막에는 ‘점심시간’이라는 문구 대신에 ‘선배에게는 존경을, 후배에게는 사랑을’ 이라고 쓰여있었다. 점심을 먹고 3. 4.학년 때 기억을 살려 교실 을 가보았다. 가장 오래된 초창기의 건물, 반 전체 아이들이 마룻바닥에 엎드려 초 칠하며 마른걸레로 문질러 주면, 바닥은 양초 코팅이 되어 반지르르 미끄러웠다. 달려가며 주르르 미끄러지는 재미도 있었지만, 여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조심스레 걷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냈다. 그 시절 마룻바닥은 사라지고 모두 딱딱한 시멘트 타일 바닥으로 바뀌었다. 바닥을 보니 세월 따라 굳어진 나의 마음밭은 돌이 아닐까?
한바퀴 돌아 나오면서 입학 후 처음 들어간 1학년 1반 교실이 복도를 바라보니 ‘우리 반 모여라’라는 제목의 아이들이 그린 22명의 아이 자화상이 전지에 그려져 복도에 붙어 있었다. 교실 안에는 칠판 대신 대형 TV가 모니터처럼 걸려있다, 선생님 책상의 컴퓨터를 보니 모니터로 공부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흰 분필로 생활규칙을 적어 놓았지만, 지금의 1학년 교실에서는 색지에 인쇄된 문구가 붙어 있었다. 55년 전 학교 칠판 가장자리에 선생님이 분필로 써 놓으셨던 글로서 지우지 않고 쓰여저 딱 붙어 있던 그때의 글이었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기
●먼저 사과하기
●정직하게 말하기
●하지마, 멈추기
석양이 내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1학년 1반에서 배운대로 만 살았어도...배움이 끝난 지금 난 아직도 1학년 1반이다.
첫댓글 조갑식 회장님
저도 칠성국민 학교 다니다가 전학 갔는데요
와~!
더 방갑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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