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거시대 / 이정록 1 어쩌다 집이 허물어지면 눈이 부신 듯 벌레들은 꿈틀 돌아눕는다 똥오줌은 어디에다 버릴까 집안 가득 꼴이 아닐텐데 입구 쪽으로 꼭꼭 다져 넣으며 알맞게 방을 넓혀간다 고추에는 고추벌레가 복숭아 여린 살 속에는 복숭아 벌레가 처음부터 자기 집이었으므로 대물림의 필연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으며 집 한 채씩 갖고 산다 벌레들의 방은 참 아늑하다 2 PVC 파이프 대림점 옥상엔 수많은 관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아직은 자유로운 입으로 휘파람 불고 둥우리를 튼 새들 관악기를 분다 아귀에 걸린 지푸라기나 보온 덮개 쪼가리가 빌딩 너머 먼 들녘을 향해 흔들린다 때론 도둑고양이가 올라와 피묻은 깃털만 남기고 가는 문명과 원시의 옥상으로 통이 큰 주인아줌마가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또 몇 개의 관이 땅 속이나 콘크리트 사이에서 우리들의 쓰레기나 소음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관을 타고 온 것에는 새끼 잃은 어미 새 소리가 있고 회오리치는 바람 소리가 있고 도둑고양이 이빨 가는 소리가 뛰쳐나온다 피묻은 둥우리, 숨통을 막는 보온덮개의 질긴 터럭이 우리들 가슴에 탯줄을 늘이고, PVC 파이프 그 어두운 총신들이 퀭한 눈으로 꼰아보고 있다 3 우리들의 가슴속에도 제 집인양 덩치를 키워온 수많은 벌레들 으쓱거린다 햇살 반대편으로 응큼 돌아눕는 그들과 우리는 낯면이 많다 코를 풀고 눈곱을 떼내며 아침마다 우리는 벌레의 집을 청소한다 그들의 방으로 채널을 돌리고 보약을 넣고 벌레의 집은 참 아늑하다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가구의 힘 /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 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나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물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풍경 / 심보선 1 비가 갠 거리, XX 공업사의 간판 귀퉁이로 빗방울들이 모였다가 떨어져 고이고 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하다. 이윽고 고인물은 세상의 끝자락들을 용케 잡아당겨서 담가 놓는다. 그러다가 지나는 양복신사의 가죽구두 위로 옮겨간다. 머쉰유만 남기고 재빠르게 빌붙는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엉긴 기름을 보고 무지개라며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무지개다...... 것도 일종의 특허인지 모른다. 2 길 건너 약국에서 습진과 무좀이 통성명을 한다. 그들은 다쓴 연고를 쥐어 짜내듯이 겨우 팔을 뻗어 악수를 만든다. 전 얼마 전 요 앞으로 이사왔습죠. 예, 전 이 동네 20년 토박이입죠. 약국 밖으로 둘은 동시에 털처럼 삐져 나온다. 이렇게 가까운 데 사는 구만요. 가끔 엉켜보자구요, 흐흐흐. 인사를 받으면 반드시 웃음을 거슬러 주는 것이 이웃간의 정리이다. 밤이 오면, 거리는 번지르하게 윤나는 절지동물의 다리가 된다. 처방전만하게 불 켜지는 창문들. 3 마주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오히려 여인네들은 간혹 전화로 자기네들의 천진한 권태기를 확인한다. 가장들은 여태 귀가하지 않았다. 초점없는 눈동자마냥 그녀들은 불안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자정으로 무겁게 옮아간다. 가장들이 서류철처럼 접혀 귀가하고 있다.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열매를 꿈꾸며 / 조연호 나는 순을 밀어올리며 껍질 밖으로 나왔다. 땅 위에 하늘의 끝자리를 조금씩 올려놓으며 안개가 내려올 때 다발 꽃을 손에 쥔 아이가 허전한 꿈가를 뛰놀고 있었다. 아무도 그곳에 와서 기웃거리지 않았으므로 그 아이의 걸음, 한 줌의 사랑에도 묶이지 않았다. 안개는 강과 함께 흘러가고 들풀의 잠결로 깔깔한 삶이 두런거렸다. 그리움을 뒷전에 두고 나는 망울을 터뜨리며 봉오리 밖으로 나왔다. 몇 장의 꽃잎이 내 빈손에 넓은 잎의 속죄를 쥐어주고 있었다.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좋은 사람들 / 이병률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골목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들이비치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로 밤낮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개미들의 행렬을 따라 내 몇 평의 땅에 골짜기가 생기도록 뒤척인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한데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좋은 사람을 만나 한 시절을 바라보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눈발을 지켜보는 일 (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식히면서 살 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낸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 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날마다 세상 위로 땅이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 노인이 지은 집 / 길상호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2001년 한국일보 당선작 [ 시를 읽는 아침 접속 방법 : 앱스토어에서 먼저 ‘카카오 음’을 설치하시고, 주영헌 시인을 찾아 ‘팔로우’ 해 주세요. 새벽 6시 ‘카카오 음’에 접속하시면, 주영헌 시인의 <시를 읽는 아침>이 보입니다. ] https://www.mm.xyz/@yhjoo 주영헌 시인 🔖시인 독서가 2009년 시인시각(시)로 등단, 시와 산문 씁니다. 📶새벽, 라디오처럼 📝시와 🔈음악을 듣고 싶으신 분들은 팔로우 해 주세요. 제가 먼저 찾아가 노크합니다. 제 블로그와 브런치에서 다음날 읽을 시를 먼저 소개합니다. 📚시집 <당신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걷는 사람)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시인동네) 🎙카카오 음 프로그램 월~금 새벽 6시 ~ 6시 50분, <시를 읽는 아침> 목요일 저녁 7시 <시를 읽는 저녁> 💌 위의 프로그램은 <북크루> 작썰과 함께 합니다. ☆ 이메일 y... www.mm.xyz #이정록시인#박형준시인#심보선시인#조연호시인#이병률시인#길상호시인#신춘문예#시를읽는아침#주영헌시인#카카오음#클럽하우스 ` 공감 18 댓글 3 새 댓글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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