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책)/ 노거수이야기 · 07
응달리 가락국 유궁帷宮터의 느티나무 - 신부를 맞으려면 대왕이 직접 나오소서
노거수이야기 · 07 응달리 가락국 유궁帷宮터의 느티나무
가락국을 건국한 지 6년째 되던 서기 48년의 일이었다. 아홉 중신이 수로왕首露王에게 “우리들의 집에서 가장 아리따운 규수를 골라 대왕의 배필로 삼으소서.” 하고 아뢴다. 왕은 “내가 이 땅에 내려온 것이 하늘의 명이듯, 내 짝을 지어 왕후를 맞는 것도 하늘의 명이 있을 것” 이라며 거절하고 유천간留天干과 신귀간神鬼干을 망산도望山島(지금의 진해시 용원동 앞바다)으로 내보냈다. 그러자 때맞춰 아유타국 허황옥許黃玉 공주가 탄 배가 입항한다. 열여섯 살 당찬 신부, 직접 나선 수로대왕 여기까지의 줄거리는 ‘장유사 전나무’ 편(206쪽)에서 자세히 소개하기로 하고, 허황옥의 그 다음 행적을 따라 가 보자. 구간 등은 바다로 나가 허황옥 일행을 영접해 대궐로 모시려 한다. 그런데 반응이 매몰차다. “나는 본시 당신들을 모르는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간단 말이오?” 황옥의 입에서, 예기지 못한 말이 나온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만리 바다를 건너온 규수가, 섣불리 이역異域 땅의 낯선 남정네들을 따라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구실일 뿐, 그 말 속에는 당돌한 요구가 들어 있다. “아무리 존귀한 왕이라 한들, 신랑 될 이가 직접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면 배에서 내리지 않겠다.”는 고집이다.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과 가락국駕洛國 수로왕의 혼인은 단순한 인륜지사가 아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혼國婚이다. 정치, 외교, 문화에 인종문제까지 고려해야 할 복잡한 국제교섭이다. 허황옥은 협상 시작단계부터 호락호락 끌려가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과시한 것이다. 『가락국기』 등 문헌에는 자세한 사정이 나타나 있지 않아도, 의전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실무협상이 여러 차례 벌어졌을 것이다. 가락국 측에서 처음 마중을 나간 이는 유천간과 신귀간이다. 하지만 “배가 당도했다는 소식에 왕이 무척 기뻐하고 이내 구간 등을 보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라는 기록으로 보아, 가락국 측 협상 대표는 구간의 우두머리인 아도간我刀干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유타국측 대표로 짐작되는 이는 신보申輔이다. 『가락국기』에는 신보, 조광趙匡 두 사람이 허황옥의 잉신媵身으로 따라왔다고 돼 있다. 잉신은 존귀한 신분의 여성이 시집갈 때 모시고 간 남자 하인을 말한다. 하지만 신보와 조광은 단순한 하인이 아니라 외교 · 의전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외교 관료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아유타국의 왕이, 그것도 ‘천제天帝의 명을 받아’ 금지옥엽 공주를 멀고 먼 가락국으로 시집보내면서 하인이나 몸종 몇 사람만 딸려 보냈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다. 수로왕이 신보에게 천부경泉府卿의 벼슬을 내리고 후일 그 딸 모정慕貞을 태자 거등居登의 비로 삼은 것만 봐도, 이들이 비천한 신분의 하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동행한 조 광의 손녀 호구好仇는 3대 왕 거즐미의 비가 되었다. 국혼 절차를 위한 협상은, 당초 입장에서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수로왕이 직접 공주를 영접하되, 그 장소는 배를 정박한 포구浦口가 아닌 중간 지점으로 절충이 된 것이다. 결국 수로왕은 왕궁 서남쪽 60보步 쯤 되는 산기슭으로 나가서 천막으로 임시 궁전을 차리고 허황옥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런데, 2천 년 전의 허니문코스를 뒤쫓는 걸음은 수로왕과 허황옥이 첫날밤을 맞는 부분에서 주춤거리게 된다. ‘궁궐로부터 60보’라는 임시궁전 위치가 분명하지 않아, 지금껏 논란의 대상이다. ‘보’의 길이는 중국 주周나라는 8자尺, 진泰~후한後漢 6자, 명明나라 5자 등으로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황종척黃鐘尺, 영조척營造尺, 조례기척造禮記尺, 주척周尺, 포백척布帛尺 등 다양한 척도가 있었고 그 길이가 제각각이어서, 더더욱 거리는 짐작하기 어렵다. 18세기 축성한 수원 화성 설계도의 ‘전체 길이 약 4,000보’를 기준하면, 1보는 약 1.18m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를 가락국 시대에도 적용하기는 어려워, 유궁터 후보지로 거론되는 곳만 해도 부산 강서구 지사동의 명월사터, 김해시 칠산동, 불모산 장유사, 장유면 응달리 등 한두 곳이 아니다. ‘첫날 밤 전설 간직하고 선 거목들 그 중의 한 곳인 장유면 응달리 672 일대에는, 수령 5백 50년이 넘고 가슴높이 직경이 각 150cm에 달하는 거대한 느티나무와 푸조나무 여러 그루가 서 있다. 태봉마을에서 남해 고속도로와 민가 사이를 비집고 올랐다. 산 위로 꺾어진 농로의 왼 편, 잘 가꾸어진 소공원을 차지한 노거수들의 발아래로는 남해고속도로를 바쁘게 오가는 차량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좀 더 멀리 눈길을 옮기면 조만강潮滿江 건너편 광활한 화목花木들판이 펼쳐져 있다. 가장 큰 느티나무는 땅 위로 5m 지점에서 큰 가지로 갈라져, 거대한 우산꼴을 이루고 있다. 높이 20m, 수관폭은 25m에 가깝다. 김해지역의 느티나무 가운데 가장 크고 잘 생겼다. 더욱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썩거나 벌레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다. 수령과 몸집이 훨씬 못한 나무들도 고사 직전인 경우가 흔한데, 이 나무는 흠 하나 없이 매끈하다. 가지 부위에 작은 외과 수술 흔적이 있지만, 몸집에 비하면 긁혀서 생긴 흉터를 메운 정도다. 바닥도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엎인 곳 없이 널찍하다. 뿌리 둘레에는 흙이 유실되지 않도록 호석護石을 두르고 잔돌을 깔아 두었다. 함부로 나무 가까이 가지 못하게 모릎 높이가 조금 넘는 경계선을 세웠고, 정면에는 제단祭壇을 놓았다. 공원 곳곳, 시설 하나마다 정성이 느껴진다. 나무가 살기에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나무가 아닌 사람이라도 명당으로 꼽을 만하다. 하기야 이 일대는 예부터 고기가 물구슬을 희롱하는 형국魚弄水珠形의 명당으로 만석꾼이 날 자리라 전해진다. 느티나무 안위를 비는 느티나무와 나란히 선 푸조나무는 주간의 윗부분이 부러지고 여기저기 썩은 곳이 눈에 띄지만 수세는 그런대로 양호한 편이다. 한 단 아래, 주차장 언저리에 선 노거수는 아직도 생기가 넘친다. 하지만 수형樹形이 불안감을 준다. 지상 1~1.5m 지점에서 멀어져 나온 네 개의 가지가 모두 땅 쪽으로 비스듬히 뻗어나가, 제 무게 때문에라도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가장 상태가 심각한 것은 세 번째 나무, 주간이 지상 1m 지점에서 둘로 갈라졌는데, 바닥부터 맨 윗부분까지 속이 완전히 부식됐다. 수피樹皮도 3분의 1 이상 떨어져 나갔다. 부식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이전에 시행했던 외과수술 부위가 떨어져 나가는 등 손을 쓰기도 쉽지 않은 상태다. 바닥에는 삭아 내린 나무 부스러기가 수북하다. 일부러 발품을 팔지 않으면 인적이라고는 없는 곳에, 여러 그루의 노거수가 자라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40~50년 전만 해도, 이곳은 화목동과 장유면에서 녹산菉山(현 부산시 강서구) 교통하는 요로要路였다. 화목, 칠산동 쪽에서는 곤지昆地나루를 건너 이 고갯길로 녹산에 넘나들었다.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을의 역사는 더 화려해진다. 뒷산의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중턱에 가락국 시대 어느 왕의 태胎를 묻었다는 태봉胎峰이 있어 태장산胎葬山이라 부르다가 태정산(360m)으로 바뀌었다. 큰 절 지나서 있었다는 ‘절 고개’, 산속 마을이 있었던 고리산古里山, 산거북이 개울로 내려오는 형국(山龜下溪形)의 명당을 찾아 밤에 장사지내는 횃불이 줄을 이었다는 횃고개 등 곳곳에 인적 人跡이 배여 있다. 허황후 기려 세운 왕후사가 장유사, 임강사로 이어져 관심을 끄는 것은 ‘큰 절’ 이다. 절 마당에는 으례 오래 된 나무들이 서 있는 일이니, 노거수들이 선 자리가 그 곳이 아닐까 짐작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수로왕의 8대손 금질왕金銍王(질지왕의 다른 이름)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참된 것을 숭상하여 세조모世祖母 허황후를 위해 명복을 빌고자 했다. 아예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452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합혼한 곳에 절을 세워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절 근처 밭 10결結을 측량해서 삼보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이 절이 생긴 지 5백년 후에 장유사를 세웠는데······ 장유사의 삼강三綱은 왕후사를 폐해서 창고를 만들어······ ” 『가락국기』 는 수로왕 8대손 (정확히는 7대손, 가락국 8대 왕)인 금질왕이 허왕후가) 첫날밤을 보낸 곳에 왕후사를 지었는데(452년), 5백년 후 인근에 창건한 장유사의 삼강(절의 운영을 책임진 세 직책)이 왕후사를 폐해 창고로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후사 창건 5백년 후인 서기 950년 무렵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936년)한 후 국가체제를 정비하던 시기이다. 왕후사를 없앤 것은 건국(918년) 이후에도 독자세력을 유지해온 지방 호족豪族들을 중앙 통제권에 편입하기 위해, 김해지역의 정신적 구심인 가야의 흔적을 지우려는 조치였는지도 모른다. 이 기록이 허왕후의 수로왕이 합혼한 곳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은 또 다른 수확이다. “왕후사의 구지舊址는 장유산에 있으니, 질지왕咥知王이 시조가 만전을 차리고 합혼한 자리에 세웠는데 뒤에 폐사하고 장사莊舍로 만들었다.”(『신증 동국여지승람』, 1530년) “부남府南 40리 장유산에 임강사臨江寺 터가 있다. 수로왕이 만전을 치고 왕후를 기다리던 곳에 질지왕이 왕후사를 세웠는데, 지금은 임강사로 이름을 고쳤다. 후에 왕과 왕후의 영정을 봉안하는 원당願堂이 되었다. (『김해읍지』, 1832, 1866년) 이 일련의 기록이, 『가락국기』 내용과 더불어 장유산에 있던 왕후사 ―장유사 ― 임강사의 전승傳承과정을 좀 더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장유산’ 이나 ‘장유사’ 는 현재의 불모산 장유사와는 다르다. 산모롱이 하나만 돌아가면 장유면 장유리 본장유마을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장유면의 역사가 이 일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강변 가까이 있다’ 는 뜻의 임강사라는 이름도, 조만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태봉마을 노거수들의 위치와 부합한다. 또, 영조시대에는 균역청均役廳에서 임강사의 승려들에 대해서 노역을 면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유사 창건으로 폐사된 왕후사가 어느 시기엔가 증진되어 임강사라 이름했고, 조정에서도 이를 허왕후의 원찰로 인정해 승역僧役을 면제해 준 것이다. 물론 현지에는 왕후사는 고사하고 장유사의 흔적도 없다. 20~30년 전까지 임강사 터를 짐작케 해주며 나뒹굴던 기와조각들도, 부지런한 농민들 소에 골라져 나와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저 노거수들 역시, 왕후사나 장유사 당시의 것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모자란다. 그러나 아마도 임강사 마당을 지키며 허왕후의 영정 앞에 손비비는 아낙들은 지켜보았을 것이다. 『김해읍지』 1832년 간행본에는 “왕후사가 지금의 임강사”라 했고, 1866년 간행본은 “임강사는 태장사라고도 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돼 있으니, 임강사는 그 30여 년 사이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날 문득 가야의 바다에 나타난 허황옥, 그녀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실은 외로운 배로 험한 바다를 건너 온 여걸이었다. 배를 내려 높은 언덕에 오르자 주저 없이 비단 속곳을 벗어 이 당의 산령山靈에게 바치고, 수로왕을 도와 가야를 일으킨 성모聖母였다. 이설異說은 있지만, 허왕후는 용원의 망산도를 거쳐 주포主浦―명월산―지사리―왕후사를 거쳐 가락국에 입성했다는 견해가 다수다. 그런데 그 길이 사라지고 있다. 용원 앞바다는 신항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뭍으로 바뀌었고, 망산도 역시 코앞까지 매립돼 횟집들이 비린내를 풍긴다. 지사리는 산과 들을 깎고 메워 과학단지를 조성했다. 명월산 자락에도 부산의 어느 대학이 옮겨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허왕후가 그 길을 다시 걷는다면, 눈은 낯설어 허둥대고 걸음은 곳곳에서 막힐 게 틀림없다. 첫날밤을 보낸 자리와 그곳의 늙은 나무들이라도 ‘역사의 이정표’로 남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도감) |
#김해의 노거수 #망산도 #태정마을 #응달리 #느티나무
2020.1.22. 노거수 탐사 16차/김해시 응달동 태정마을 느티나무와 푸조나무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넣으니 '김해시 장유면 응달리 672번지를 쳤더니 '김해시 응달동 672번지'로 나온다.
주소 개편이 있었나 보다. 주소변환을 하면 옛날 주소도 나오고 도로명도 나온다.
오전까지 비가 흩뿌렸다. 눅눅하지만 계획대로 출발하다. 오늘은 장유면의 노거수 이야기 두 편을 볼려고 계획하다.
젤미마을의 왕버들과 응달리 유궁터의 느티나무다.
40분 걸려 도착한 장유 젤미마을...40분을 주위를 맴돌다 찾지 못하다.
아파트 관리하시는 분도 여기서 왕버들을 보지 못했단다. 2007년이었으니 고사를 했나?
(후일에 김해시에 전화를 해 보니 젤마마을 왕버들은 고사하고 없었다.)
한 곳은 오늘 봐야겠기에 응달리로 출발하다.
10분 정도 걸렸나...태정마을 터널을 들어서자 바로 우측으로 꺾어 올랐다.
한 번에 찾은 느티나무다. 노거수 푸조나무 세 그루가 함께 있어 금방 시야에 확 들어왔다.
화목 들판을 내려 다 보며, 남해고속도로 지선이 눈 아래 쫙 뻗었다.
비는 그쳤지만 눅눅해서 그런지, 마을에서 오른쪽으로 벗어난 곳이라 그런지 동네 어른들은 만나지 못했다.
여긴 과수원이 많아 젊은 이들이 있으려나... 과수원의 나무를 살피지 못했다.
노거수 있는 곳에 운동기구가 설치된 건 여기도 마찬가지다.
공원처럼 꾸며서 간이화장실도 있고... 시멘트 흔적 없어 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는 가 한다.
느티나무, 500년 세월을 이렇게 잘 견딘 나무는 처음이다.
아래 밑동도 아니고, 가지 하나 외과수술을 한 것 빼고는 튼실하다.
사람들이 잘 관리를 했다는 말이다.
시멘트 대신 나무를 심었고, 물길도 옆으로 내어 두었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봄이 되면 다시 가 봐야겠다.
한참을 앉아서 오후 흐린 날의 김해 화목 들판을 내려다본다.
2천 년을 거슬러 올라,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만나 첫날밤을 지낸 유궁터에 왔다.
허황옥 공주님이 여기로 들어온 길의 흔적이 개발로 변화하는 것이 안타깝다.
두 분이 꿈에라도 여기 오시면 느티나무를 보고 아직은 길을 잃지 않으실까~~~
개발로 온전한 모습이 변하기 전에 진해 용원 앞에 있는 『가락국기』에 나오는 망상도를 가 봐야겠다.
느티나무가 커서 가까이에서는 한 컷에 멋지게 들어오지 않는다.(RX10)
두번째 있는 푸조나무의 가지가 앞을 드리웠다.봄에 가서 반대쪽에서 찍어봐야겠다.
느티나무뒤에 약간 보이는 나무가 맨 마지막 컷의 푸조나무임.
느티나무가 커서 두 번 째 서 있는 노거수 푸조나무를 품에 넣는다.
푸조나무 전체사진만 1컷씩 올립니다.
들어가면서 1번 푸조나무임.
느티나무 바로 아래쪽에 서 있는 푸조나무임.
느티나무 바로 뒤에 서 있는데 이 푸조나무도 노거수이고 큰 나무인데 느티나무에 가려서 안 보이게 사진을 찍었음.
김해의 노거수 이야기 [장유면 관내 노거수]
번호 | 수종 | 소재지 | 본수 (본) | 수령 (년) | 수고 (m) | 흉고 직경 (m) | 수관목(m) | 비고 | |
동서 | 남북 | ||||||||
1 | 왕버들 | 무계동 426-14 | 1 | 300 | 13 | 150 | 18 | 16 | 시보호수 |
2 | 느티나무 | 응달동 672 (유궁터) | 1 | 500 | 16.5 | 150 | 21 | 23 | 시보호수 (7편) |
3 | 푸조나무 | 삼문동 373 | 1 | 150 | 14 | 162 | 15 | 17.5 | 시보호수 |
4 | 느티나무 | 관동동 448-7 | 1 | 150 | 9 | 162 | 20 | 16 | 시보호수 |
5 | 푸조나무 | 응달동 672 주변 (유궁터) | 3 | 150 | 9.5 | 130 | 14 | 19 | (7편) |
150 | 14.5 | 130 | 17 | 17 | |||||
350 | 10.5 | 180 | 15 | 13 | |||||
6 | 팽나무 | 유하동 109-2 | 3 | 200 | 16 | 120 | 18 | 17 | |
13 | 80 | 15 | 15 | ||||||
13 | 40 | 18 | 16 | ||||||
7 | 이팝나무 | 부곡 483-2 김해시청 장유출장소옆 (장유면 부곡동 490번지 주변) | 1 | 250 | 13 | 100 | 14 | 17 | |
8 | 팽나무 | 무계리1구 305앞 | 1 | 150 | 11 | 108 | 14 | 17 | |
9 | 팽나무 | 관동동 538-1 | 2 | 100 | 13 | 1717 | 16.5 | 14 | |
200 | 10.5 | 9090 | 14 | 14 | |||||
10 | 전나무 | 대청리 1129 (장유사) | 1 | 200 | 17 | 78 | 11 | 8 | (15편) |
11 | 팽나무 | 내덕리 631임 | 1 | 200 | 13 | 102 | 17 | 16 | |
12 | 왕버들 | 삼문동 주공6단지 (삼문동 61-6) | 1 | 200 | 8 | 80 | 13 | 16 | (22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