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소화가 잘 안 됩니까라는 제목입니다. 그래서 오늘 소화 시리즈로 한번 은혜를 나눠보자 합니다.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소화시키는 것이라고 하네요. 아무리 잘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으면 체하고 또 먹은 것이 우리를 이렇게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그리고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어도 별로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아무런 행복을 주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 소화라는 말에 사전적 의미는 섭취한 음식물을 분해하여 영양분을 흡수하기 쉬운 형태로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하네요.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80세까지 약 27톤 가량의 음식을 먹는다고 합니다. 27톤 27톤 매일 일 키로 정도 세 끼를 1키로 어느 정도 먹는 분량으로 계산을 해도 27톤을 먹는다고 하네요. 근데 이 먹는 이 습관 소화 이 문제가 사람의 조기 사망 원인에 5분의 1, 25프로나 차지한다고 해요. 그래서 사실은 이 소화되고 또 먹는 음식에 의해서 매년 1100만 명이 조기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조사 결과도 1위가 스트레스 2 위가 소화불량 소화기 장애 뭐 이런 것들이 있는데,
음식으로만 우리가 소화되느냐 뭐 이런 부분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음식은 우리의 육신의 건강을 위한 거라면 우리의 정신적 영적 건강을 위한 영적 음식도 있다는 거죠. 정신적 음식이 있어요. 이게 뭘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힘을 나게 만들고 살맛나게 할까요? 영적 음식을 우리 아시는 대로 뭐라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육신적인 음식으로는 우리가 음식을 먹죠. 그 다음에 정신적인 어떤 그런 것도 우리가 있긴 한데 그래서 오늘 저는 민수기 14장 1절부터 9절까지 있는 말씀인데 가운데서 8절 9절에 있는 말씀을 제가 봉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민수기 14장 1절부터 8절까지 있는 말씀인데요. 말씀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민 14:8-9)
이 뭔 얘기냐 하면 이 열두 지파의 대표되는 별두정탐꾼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이제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해요.
가나안 땅이 이렇더라 라고 인제 보고를 했을 때 이 보고 내용이 좀 달랐습니다. 10명 대 두가리 명 10명은 어떤 보고였을까요? 부정적인 보고 두 명만이 긍정적인 여러분 보세요. 똑같은 기간에 똑같은 것을 봤어요. 그런데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런데 훨씬 많은 퍼센테이지로 우리는 무슨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냐면 부정적인 것을 가져요. 12명 가운데 10명이 거의 대다수죠 거의 대다수입니다. 진리가 다수결이 아니라는 게 참 감사하죠. 다수결에 의한 게 아니라 절대 다수가 부정적이었어요.
이제 그런 와중에 이스라엘이 보고를 듣고 다수결에 의해서 인제 그들도 막 이제 끝났다 이제 왜 여기까지 왔냐 뭐하러 왔냐 이 고생할려고 왔냐 이제 죽겠다. 뭐 이렇게 인제 불평불만을 쭉 하는 가운데 5절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민 14:5)
“[6]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민 14:6-7)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 14:8)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민 14:9)
그 다음에는 뭐 백성들이 자 근데 여기서 저는 이제 중요한 한 단어를 보게 됩니다. 말은 뭐냐 하면 밥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이 밥이 뭐예요? 여기서 말하는 밥은 뭐예요? 빨리 그들이라고 하세요. 뭐예요? 여기 나와 있잖아요. 뭐가 밥이에요. 그들 그들 그들은 어떤 그들이었어요. 그 가나안 땅이 이미 거기서 거주하고 있는 누구요.
아낙 자손들이었어요. 아낙 자손들이 밥인데 이 밥이 뭐냐 이거예요. 이 밥이 뭐냐 이것은 다른 말로 나타나면 고난일 수도 있어요. 고난이 밥이다. 고통이라는 단어도 말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가나안 땅이나 자손들이 보통 자손들이 아니거든요. 아주 싸움하기를 즐겨하고 그다음에 잔인하고 키가 크고요.
네 크고 거인 같고, 뭐 그런데 이 고난이, 이 문제가, 이 어려움이, 이 고통이, 이 복잡함이, 이 속상함이, 이 상처가 밥이래요.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는 밥은 뭘까요? 밥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는 밥이에요. 친절한 사람 내 말 잘 들어주는 사람, 나하고 한 번도 부딪친 적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밥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어요. 사람이 밥이 아니라 인간이 밥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과 인간은 같은 뜻인데 이상하게 인간이라고 하면 딱 와닿죠! 밥이 그들은 우리 밥이라고 했는데 이 뭐냐 하면 나를 힘들게 하는 그들이 밥이래요. 오히려 그들 때문에 내가 밥 먹고 힘나듯이, 밥 먹고 내가 정말 오늘 밥 잘 먹었다. 밥이잖아요. 모든 인생의 문제는 밥의 문제 그런데 우리 여러분 나를 신나게 만들고 나를 정말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그들 밥이 누구냐 우리는 지금 영양실조예요. 이런 밥을 절대로 먹지 않거든. 거절, 식사 거절이에요. 식사 거절 밥상에 차리기만 하면 다 엎어버려요 그들이 밥이라니 어떻게 그들이 어떻게 밥이에요.
그러므로,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는 한 번도 이런 밥상을 차려서 먹어본 적이 없어요. 내 삶의 밥상에 그들이 올라오는 순간 밥상을 다 뒤집어 엎습니다. 신앙이고 뭐고 간에 교회고 뭐고 안 다녀요 그들 때문에 그들 때문에 여러분 우리 인생에도 그들이 있잖아요. 그들 있잖아요. 아낙 자손과 같은 그들 여기 성경은 그들이 우리 밥이라고 그랬어요. 이런 밥을 먹어본 적이 있냐는 거예요. 나를 힘들게 만들고 나를 어렵게 만들고 불편하게 만들고 나를 나에게 대들고 싸우고 지금 그렇지 않습니까? 아낙 자손이 그들이에요. 그런데 그들을 밥 대하듯이
밥을 어떻게 대해요. 아침 먹을 때 어떻게 대해요? 제발 말해주세요. 소중히 대한다고 한 톨이라도 뭐 할까 봐 떨어질까 봐 조심조심해 가지고 그쵸!
이거지! 우리가 우리의 만약 그들을 밭과 같이 우리가 대하고 밥과 같이 우리가 그들을 취급하고 접근하고 대하는 순간 진짜 우리에게 밥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거예요. 밥은 널려 있습니다. 이런 밥 많죠? 네 고개라도 끄덕거리지 마세요. 다 눈치채고 있으니까! 이런 밥이 많아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소화가 안 된다는 거예요. 소화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들을 인간들을 보기만 해도 소화불량이야, 안 봐도 소화불량이야 자꾸 생각나 그죠! 그분들 얼굴을 보기 저도 그런 경험 있지 예전에 신앙생활 하면서 그런 경험이 있는 것 같아요.
누구랑 좀 관계가 안 좋아서 그래서 제가 일부러 제일 앞에 앉았어요. 그래야 그분의 얼굴 뒤통수를 안 보니까 보면 자꾸 소화가 안 되지, 소화가 안 돼서 제일 앞자리에 앉아 제일 앞자리에 앉으면, 교인들은 칭찬하죠. 와 어떻게 말씀을 그렇게 사모해서 제일 앞에 앉냐!
이거지 남 속도 모르고 나는 그들이 내 밥상에 올라오니까 소화불량인데 여러분 밥은 먹고 힘을 얻고 건강해지고, 살게 만드는 것에 통칭의 단어가 밥이에요. 개정개혁에는 먹이라고 돼 있습니다. 우리에게 쉽게 들어오는 단어가 밥이에요. 밥 먹어야 사는 거예요. 밥 먹어야 힘이 나는 거고, 밥 먹어야 건강이 와요. 밥이 보약이에요. 일단 밥을 먹어야 되는 건데 문제는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는 이 밥을 한 번도 제대로 먹고자 한 적이 없어요. 한번 시도는 해봤어요. 그런데 뭐가 걸렸어요?
소화불량에 걸려 가지고 다시는 보기도 싫어요. 여러분 그들이 우리 밥이라고 그랬어요. 지금 이 밥을 안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힘이 없는 거예요. 예 이 밥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쳐다보지도 않기 때문에 지금 아사 상태예요. 아사가 뭔지 아시죠. 여러분 굶어 죽는 이제 우리 아프리카나 이런 데 이제 굶어 죽어가는 음식이 부족해서 죽는 것도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 굶어 죽어 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아주 안 먹잖아요. 그러면 뭘 못 느끼냐 하면 배고픔을 못 느껴요 희한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한 끼 두 끼 하루 이틀 3일 이렇게 굶다 보면 그때는 막 뭐하고 싶어져요 아 먹고 싶어서 왔는데 그런데 고게 지나가잖아요. 그 다음에는 아예 뭐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다가 죽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상태가 우리의 상태가 말이죠. 너무 안 먹어서 너무 안 먹어서 허기를 못 느끼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어요. 거기를 그들이 우리 밥이라고 했는데 밥은 우리가 매일 먹어야 하잖아요. 이상한 것 아닙니다.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밥은 우리가 받아서 먹는 거예요.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이 밥을 먹었어요. 소화력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12명 가운데 누구만 똑같은 밥을 보고 왔는데 똑같은 밥상을 차린 것을 40일 동안 그들이 그곳에서 보았는데 또 그곳에서 경험을 하고 또 땅의 소산을 또 먹기도 하고 어쨌든 밥을 먹었는데 10명이 소화불량이여 누구만이여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그들을 소화한 거예요. 문제를 어려움을 나를 힘들게 만들고 나를 상처 주는 그들을 나를 아프게 만들고 나를 무너지게 만들고 나에게 싸움을 걸기 위해서 덤벼드는 그들을 뭐, 뭐한 거예요. 소화시켰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이 소화력이 있는가 이 소화력이 있는가 그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말할 정도의 그런 소화력이 우리에게 여호수아와 갈렙은 고난에 대해서 태도가 달랐습니다. 고난이 올 때 어려움이 올 때 자 밥 먹을 시간이다. 밥 먹자 예 밥 먹을 때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합니까? 밥 먹을 때 제발 그냥 먹는다고 하세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먹잖아요. 고난이 올 때 그냥 고난을 내가 그냥 밥 먹듯이 먹는 거지. 젓가락을 들고 숟가락을 들고 맛있다.
행복하다 즐겁다 살만하다 그리고 고난의 밥상을 그들은 우리 밥이라고 얘기를 했잖아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바로 뭐예요? 소화능력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섭취된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능력이라고 결국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갖춰야 될 능력 가운데 중요한 능력이 뭔가 얼마나 많이 먹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내가 소화를 우리 인생의 아낙 자손 같은 나를 힘들게 만들고 어려움을 주는 그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말 거룩한 소화력을 가지고 있는 누가 어떤 말을 하잖아요.
그게 평생 걸려요. 얻쳐요. 지금도 언체인 말이 있어요? 몇 년째인지를 몰라요. 제 얘기입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말 한마디가 소화가 안 된 채 저 깊숙한 곳에 있는 거예요. 그게 체해가지고 여러분! 체한 사람이 아무리 많은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다 어떻게 돼요? 다 토할 수밖에 없어요. 체 한 채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소화시키지 못한 채 못한 채 말씀만 계속 몇십 년째 . 듣는 들 그게 그거에요. 채하고 먹는 음식과 같다는 거예요. 아무런 도움이 안되요. 내게 어떻게 그거를 소화를 시키겠어요.
음식물을 소화시키듯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절 이 절에 보면 현대인 역으로 한번 이거를 번역해서 읽어드릴게요.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듯이 말할 수가 없어서 세속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하듯 말합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젖을 먹이고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소화시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고전 3:1-2, 현대인)
처음 믿었을 때나 지금이나 뭔 능력이 없어요. 소화시킬 능력이 없는 거예요.
자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데 자 근데 영감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아주 참 증언보감 1권 462페이지예요. 이 말씀을 제가 읽으면서 참 마음속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뭐라고 돼 있냐면 교회 안에는 영적 소화불량이 있다. 어떤 모든 상황들 이런 모든 사람들을 내가 만날 때 여러분 그러므로, 음식만 소화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어서 소화불량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사람이 소화되지 않을 때입니다.
뭐가 소화되지 않을 때 사람이라고 썼어 사람 저는 뭐 음식은 뭘 먹어도 소화 잘하는 아직 그런 때지만 사람은 안 가리는데, 사람을 가리는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소화불량이 소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것은요, 평생에 있어서 소화불량의 원인이에요. 그 사람과 더 이상 만나지 않지만, 어느 날 갑자기 문득 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니까요?
심지어 그들도 나를 소화시키지 못해서 교회를 떠나, 교회는 떠났지만 남아있는 나는 또 그들 또한 소화를 못 시켜서 이게 계속해서 이게 반복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요. 누구에게든 웃고 화내지 않고 부드러운 어떤 그런 품성을 만나는 사람 참 부럽죠. 주님은 누구든 소화 시키시는 분이셨어요. 우리 주님은 왕성한 소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자신을 향하여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모욕하는 그들을 향해서도 소화를 시켰어요.
아버지요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 하는 것을 알지 우리가 주님께 가면 주님은 소화시키지 못할 어떤 사람도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저기서 참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요 먹지를 못해서 지금 소화불량 걸린 게 아니에요. 사실은 너무 먹어요. 지금 너무 많이 먹어요. 요즘은 코로나 시대 이후로 뭐 유튜브와 SNS 뭐 이런 걸 통해 가지고 너무 원하는 대로 먹어요. 뷔페예요. 말씀의 뷔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먹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거예요. 소화가 안 돼요. 소화가 소화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먹기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먹기는 먹었어요.
그런데 내가 소화시켜서 내 것이 됐던 그것이 없다는 거예요. 소화되지 않은 채 또 다른 걸 먹고 또 먹고 또 먹고 하니까 나중에는요. 어떤 현상이 오냐면 지겨워요 부모님이 집에서 집밥을 차려놓고 저녁을 차려놓고 놀고 있는 애들을 부르죠. 누구야 밥 먹으러 와 그러면 놀기만 한 애는 와요. 배고프니까 그런데 놀면서 뭐하는 애들은 군것질하는 애들은 안 와 아니 먹었는데 또 먹으라고 그러니까 지겨운 거예요. 너무 힘든 거예요. 먹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이 왜 그러냐면 소화의 경험이 없이 그래서 성경을 에스겔 3장 3절에는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다 말씀을 이제 먹는 것으로 비유를 했잖아요.
시편 119:3절에도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라고 했고요.
계시록 10장 10절에도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계 10:10)
영감의 글에는 음식물에 관한 보면 107페이지에 보면 이제 재미있는 표현이 있어요. 소화작용을 원활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어떻게 해야 된다. 천천히 뭐하래 천천히 이거 아시죠. 요즘 뭐 몇 번 이상 씹기 뭐 이렇게 하잖아요. 먹는데 밑에도 보면 입맛에 만족은 삼킨 음식의 양에 있지 않고 음식의 양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의 만족은 입맛에 만족은 뭐에 있냐 하면 음식이 입에 머무르는 시간의 길이에 달려있다라고 여러분 천천히 먹는다. 이게 뭘까? 고민해 봤어요. 영적으로 우리가 이건 어떤 의미일까라고 했는데 이런 의미이더라고요. 시편 1편 1절의 3절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이라는 말로 시작되죠. 그리고 끝에는 뭐로 끝나죠. 이렇게 됩니다. 1절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이건 가운데 설명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뭐하는 자로다 묵상하는 자다 그러면 서론과 결론만 얘기하면 뭐예요?
복 있는 사람은 뭐 하는 자로다 여러분 아세요. 묵상이라는 말이 천천히 자주 씹는다 라는 뜻이에요. 묵상이 그거예요. 묵상이 이게 시편의 시작이 복이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결국 결론은 뭐냐 하면 복 있는 사람은 그다음에 저쩌고 다 인제 생략하고 한마디로 묵상하는 자 묵상하는 도다 요즘 묵상이 없어요.
묵상이 없고 묵상까지도 다 설명해 줘요 예 말씀을 말씀 그대로 내가 보면서, 이 말씀 그대로 내가 마음에 그리고 이 말씀을 보니까 어디에서 다른 또 말씀이 또 연결되고 그거 어미 없이 이게 너무 이게 지금 소화가 지금 문제예요. 소화가 묵상이 문제예요. 묵상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이 내 삶에 이 머리에가 아니라 머리에서 이 가슴으로 내려와서 내가 창세기 1장1절을 읽고 눈물 난 적이 있으실까요? 혹시 태초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 눈물이 나요? 왜 이것이 눈물이 날 정도인지 설명을 들어야 눈물 나잖아요.
그런데 말씀 그대로 내가 묵상하면서 눈물이 난 적이 있으신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말씀을 묵상하는데 눈물이 나는 하나님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의 의미가 뭐 무슨 아가페가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설명을 들어서가 아니라 말씀 그대로 내가 그냥 조용히 내 삶에 묵상을 해본 거예요. 천천히 곱씹어 본 거예요. 내가 또 한번 되새기고 되새겨 본 거예요. 그 말씀이 하나님 말씀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삶에 여러분 그렇습니다. 소화력의 문제는 묵상의 문제에 있어요. 묵상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생각을 잘 하기가 힘든 시대라고요.
생각을 잘 못하게 만드는 시대에서 우리가 요셉의 생애를 보면은 요셉은 사실 소화가 안 되는 사람들 투성이였어요. 형들 보디발의 아내 감옥에서 만난 바로의 잔을 책임졌던 관원. 그죠 아 이 어떻게 소화를 시켜요? 요셉의 입장에서 자기를 팔아버린 형들을 어떻게 소화시키냐고요. 죽일려고 그랬어요. 그래서 웅덩이를 집어 던졌어요. 마침 웅덩이가 비어 있어서 살았지 그래서 노예로 팔아 팔려갔지 원래는 거기 웅덩이 물웅덩이에다 집어넣어서 그냥 익사시키려고 했단 말이에요. 근데 마침 거기가 빈 구덩이여서 살아 이런 형들이 어떻게 소화를 시켜요 평생에 걸쳐서 소화가 되겠습니까? 보디발의 아내는 어떻습니까?
이제 좀 정착하고 뭔가 조금 이제 살만한데 이 억울한 누명을 받고 감옥살이 하게 된 거예요. 종살이도 못 알아서 감옥살이에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사람을 어떻게 소화시키겠어요. 감옥 안에서 바로의 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줘서 석방시켜 주게 됐는데 배은망덕하게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요셉의 생애는 너무한 거예요. 해도 너무한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었어요. 이렇게 17세부터 30세까지 무려 13년간을 만난 사람마다 소화가 불가능한 사람들만 만난 게 요셉이었어요. 잊혀지겠습니까? 눈만 감으면 형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거예요. 형네 다시는 꿈 얘기 안 할게 한 번만 살려둬라고 그렇게 울부짖었지만 어유 그랬단 말이에요. 보디발 집안의 아내가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집어넣었단 말이에요.
근데 성경에서 요셉이 감옥에서 억울하니까 탄원서를 썼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아니 탄원서를 써야지 자기 억울한데 지금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줬잖아요. 어떻게 여러분 요셉의 생애에 있었어 저는 철저하게 소화가 소화 불가능한 사람들만 투성이었어요. 사람이 소화가 안 돼요. 형들 보디발의 아내, 바로의 술 맡은 관원 어떻게 이 소화를 시켰을까요? 요셉이 어떻게 이걸 소화시켰을까요? 한두 명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소화력이 있었냐 이거예요. 심지어 형들을 만났을 때 드디어 형들을 만났을 때 요셉이 울어요. 울어요. 너무 보고 싶었던 거예요. 형들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응 형들 보고 막 울어요.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요셉이 감옥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지요. 바로 왕의 꿈에 인제 꿈을 나타내시고 해석을 못한 거죠. 인제 그러고 나서 감옥에 있던 요셉을 이 바로의 잔 맡은 관원이 생각하게 된 거예요. 추천하게 된 거죠. 그런 다음에 드디어 바로 앞에 세웠습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요셉의 소화력의 근원은 어디에서 있었을까? 창세기 41장 15절 16절 입니다.
“[15]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 41:15-16)
여러분 이 상황에서는 절호의 기회 잖아요. 이제 바로의 왕의 꿈을 내가 풉니다. 그렇습니다.
약간의 겸손을 가장해서 저는 부족하지만 제가 최선을 다해서 풀어보겠어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요셉의 생애에 있어서 첫 번째 이 소화력의 근원이 뭐냐 하면 내가 아니라 여러분 우리가 뭔 말을 듣고 뭔 일이 있으면 내가 소화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뭐이기 때문에 뭔가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용서가 안 되고 나를 무시하는 저 인간만큼은 내가 손을 좀 봐줘야지, 내가 내가 있어서, 안죽어서 소화불량을 진행되는 거야. 비결은 여러분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볼 때, 마음에 안 들어라는 말을 쉽게 하잖아요. 말 쉽게 하면 안 돼요.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은 실제로 마음에 안 들어온다는 말이에요.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안 든다. 이 말은 뭔 말이냐 하면 마음에 안 들어올 정도로 내 마음이 뭐다 그 밴댕이라고 시작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마음이 밴댕이 속아지다.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안 들어온다는 건데 말은 내 마음이 뭐 해졌다는 거예요. 너무 좁아졌다는 거예요. 속 좁다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전에는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갑자기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잖아요. 그죠 인간이 그렇죠. 그러면은 밥인데 인간이 마음에 안 들어요. 안 들면 참 이제 예의주시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계속 소화불량이에요. 왜 저런 어떻게 하나 저거 다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리고 나는 계속 소화불량이야 그 상태에서 계속 말씀을 듣고 계속 설교를 듣고 해도 이게 최한 체 음식 먹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 오는 거예요. 여러분 중요한 건 이겁니다. 내가 지금 소화불량이에요. 교외 안에 영적 소화불량이 있다고 그랬어요.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습니다. 대부분이에요. 여러분 이것을 해결하는 소화제가 있습니다. 그 뭐예요?
장세기 41장 16절에 나오는 반드시 소화불량에 걸릴 수밖에 없는 요셉이 어떤 사람이라도 다 소화시켰던 그의 최고의 소화제가 뭐냐 내가 아니라 나는 아닙니다. 이거예요. 여러분 이 말 하기가 쉽지 않아요. 지금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고 지금 13년째 그렇게 완전히 생애하는데 이제 말 한마디면 절호의 찬스 아니 왕 앞에 섰단 말이에요. 요셉이 겸손을 조금 가미한 채 저는 부족하신 하지만 제가 한번 해보겠 이렇게 말할 법도 하지만 철저하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내가 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닙니다.
이 마음이 이 소화제가 우리도 우리가 우리 이 소화제를 우리가 한 병 들키는 순간 마음에 안 들기는 뭐가 마음에 안 들어요. 내가 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 들어오는 거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나 같은 사람을 주님이 이렇게 구원해 주시고 나 같은 사람도 주님이 이것이 사랑해주시는데, 내가 주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사람을 소화시키는 최고예요. 소화죠 여러분 요셉만이 아니에요.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고린도도서 15장 10절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 아멘 여러분 사람이 나를 소화불량 되게 만들고 사람이 소화되지 않을 때 우리가 특효 소화제 하나 있어요. 뭐냐 하면 나는 아니구나 내가 뭐라고 나는 아니오. 요셉이 한 것처럼 내가 아니라 바울이 한 것처럼 내가 아니오. 이 고백이 이 확신이 그래 사람이 나를 이렇게 힘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사람이 저렇게 나를 이렇게 어렵게 하는 그래 내가 아니야. 나는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여러분 이 확신 속에서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 인생의 아낙자손을 만나고 또 우리의 밥상에 그들이 올라와 있을 때 여러분 믿음에 우리가 외침을 통해서 ‘그들은 우리 밥이라’ . 우리에게 힘내라고 고난의 밥을 주셨어요. 어려움과 문제와 골치 아픔과 속상함과 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 인생광야 길을 지나고 이제 우리 하늘 가나안 어귀에 와 있습니다. 하늘입구의 문턱에 와 있으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면서 끝까지 승리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되시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