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시대 15
같은 시각.
"하악... 아아!"
"허허헉!"
신방의 남녀는 격렬한 율동을 계속하며 쾌락의 늪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남궁력은 여체에 몸을 실은 채 율동을 계속했다. 그의 정력은 절
륜했다. 그러나 그는 점차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여인의 정
력이 오히려 자신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아아... 더... 더......!"
여인은 그의 어깨를 깨물고 등을 할퀴면서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
의 하반신이 율동할 때마다 여인은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이면서
그를 세차게 끌어들였다.
'이럴 수가!'
남궁력의 놀라움은 점점 더 커져갔다. 여인은 깊이를 모를 늪이자
거대한 꽃뱀이었다. 그녀는 두 다리와 두 팔로 남궁력을 칭칭 감
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남궁력은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으나 여인은 아직도 만족할 수 없
다는 듯이 계속 그를 요구하고 있었다.
"허억, 그... 그만!"
마침내 남궁력은 지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땀에 젖어 녹초가
된 채로 여체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런 남궁력의 마음 속에는
의혹과 함께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허무감이 회오리쳤다.
'이럴 수가! 그토록 순결해 보였던 백문혜가 처녀가 아니라니.......'
실망과 분노가 밀려와 그의 가슴을 쳤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천장을 보고 누운 채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혜매, 당신 정말... 대단하군. 이건 정말 뜻밖이군."
그때였다. 여인은 그에게 안기며 손으로 목을 휘감아 왔다. 뱀처
럼 감겨든 여인은 남궁력의 귓전에 뜨거운 숨을 부으며 속삭였다.
"누가 당신의 혜매란 말인가요? 호호홋! 정말 오늘 당신은 대단했
어요."
"아니?"
남궁력은 대경했다. 마치 거대한 쇠뭉치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려 했다. 그러
나 여인이 목을 휘감고 있어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너... 넌 누구냐!"
남궁력은 코 앞의 여인을 노려보며 분노성을 발했다.
"호호호! 직접 제 얼굴을 보시면 알잖아요?"
찌익!
여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가 찢겨져 나갔다.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직까지도 얼굴에 열락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여인은
바로 표운하였다.
"이... 이럴 수가! 네 년이 어찌......!"
너무나 놀랍고 어처구니가 없었던 탓에 남궁력은 제대로 말을 잇
지도 못했다.
"호호호, 어떻던가요? 그 계집이나 저나 다른 것이 있나요? 당신
은 저를 그 계집으로 알고 그토록 황홀해 하더군요?"
표운하는 깔깔거리며 그의 가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녀는 그
때까지도 알몸이었다.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남궁력의 아랫배에
짓눌려 터질 듯했다.
"주, 죽일 년!"
퍽!
표운하는 그의 발길에 걷어 차여 침상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허
공에서 한 차례 곤두박질을 친 그녀는 볼상 사납게도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미친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도 탐하던 절 박정하게
대하다니 정말 무정한 사내군요!"
"혜... 혜매는 어디로 빼돌렸느냐?"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남궁력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지금까지 속은 것이 너무나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눈 앞에서 두 다리를 활짝 벌리고 앉아 있는 표운하를 당장
이라도 쳐죽이고만 싶었다.
한편, 표운하는 그의 돌변한 태도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녀도
자존심이 있는 여인이었다. 과거에는 그녀 역시 도도한 여인이었
다. 숱한 귀공자들이 추파를 던졌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그
녀가 지금은 일개 청루의 기녀보다도 못한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왈칵 증오심이 솟아난 그녀는 이를 갈며 말했다.
"호호호홋, 남궁력! 이 의리 없는 놈아, 너의 그 계집은 지금쯤
다른 사내와 발가벗고 뒹굴고 있을 것이다. 호호호호호! 그래도
그 계집은 너같은 사내는 안중에도 차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너는 그 계집에게 홀려 짝사랑을 하고 있으니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깔깔깔!"
"이이... 이... 찢어 죽일 년이!"
인간은 이성을 잃으면 평소의 영명함도 일시에 마비되고 만다. 남
궁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속이 깊은 위인이
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너무나 화가 치민 나머지 이성을 완전
히 상실하고 말았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죽엇!"
푹!
무엇이 터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표운하의 목
구멍에서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그의 손이 여지없이 그녀의
가슴을 찌르고 심장을 꿰뚫은 것이었다.
"크으......!"
그녀는 시뻘건 핏줄기를 토해내며 두 눈을 부릅뜬 채 남궁력을 노
려보았다. 곧이어 원망과 불신으로 굳어진 그녀의 동공이 휘그르
르 돌아가며 흰자위가 드러났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으으... 이... 이것이... 아닌데......."
남궁력은 그녀가 고개를 떨구는 순간 비로소 자신이 무슨 일을 저
질렀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표운하의 가슴 속으로 뚫고 들어간 손
을 뽑았다.
그 손에는 그때까지 뛰고 있던 표운하의 붉은 심장이 들려져 있었
다.
"크으으!"
후들거리는 손아귀에 쥐어진 심장을 바라보던 그는 괴성을 지르며
냅다 그것을 팽개쳤다. 그리고는 미친 듯 밖으로 뛰쳐 나갔다.
"우우우우......!"
알몸으로 내달리는 남궁력의 입에서는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괴성이 터져나왔다.
해후(邂逅)의 밤은 짧았다.
산신묘는 낡고 황폐한 곳이었으나 그들 두 사람에게는 어떤 장소
보다도 아름답고 화려한 곳이었다. 달빛이 구멍 뚫린 천장으로부
터 비쳐들어 한 몸이 되어 있는 유천기와 백문혜를 부드럽게 감쌌
다.
백문혜는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그 동안의 고초로
인해 한껏 수척해진 얼굴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에는 오직 행복함
만이 가득 어려 있었다.
유천기는 그녀의 머리칼을 연신 어루만지며 향기로운 냄새에 취한
듯 눈을 반 쯤 감고 있었다. 그는 아득한 과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래 된, 항주에서의 소년문사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렸다. 독서를 하고 음(音)에 심취하며, 시를 읊던 시절의 그
는 행복하기만 했다.
그때는 세상이 온통 아름다움과 고귀한 의미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가 자원하여 민간정벌군에 참전하지만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그런 생활을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에게 행복한 생활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운명은 유천기에게 무척이나 값진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
다.
그것은 바로 그가 겪었던 여러가지의 상황을 통해서 세상은 결코
천국도 지옥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지금 그는 품에 사랑스런 여인을 안고 있으므로 행복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을 생각한다면 그 행
복은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기억을 잃고 백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소녀 수아를
비롯하여 오직 그에 대한 사랑 때문에 험난한 무림계로 뛰어든 옥
사향, 그리고 선과 악의 기로에 선 채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구양
빙을 떠올리면 그는 천국에 있다기보다는 어쩌면 지옥 쪽에 더 가
까이 있는지도 몰랐다.
"무얼 생각하고 있나요, 가가?"
백문혜의 부드러운 음성이 유천기의 상념을 흩뜨렸다.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백문혜가 그의 가슴에 기대어 검은 눈동자
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온통 사랑의 감정이
넘치고 있었다.
"아무 것도. 그저 감개무량할 뿐이오."
백문혜의 얼굴에 한 가닥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고운 손가락으
로 유천기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거짓말 말아요. 난 가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구요. 한
번 알아맞춰 볼까요?"
유천기는 그녀의 향기로운 옥지를 살짝 깨물며 물었다.
"글쎄. 알아맞춰 보오."
"사향 언니를 생각하고 있었죠? 그렇죠? 전 당신의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유천기는 그녀의 직감에 놀랐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부인하지 않겠소. 다만 혜매에게는 미안한 기분이오."
백문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난 달라졌어요. 전에는 오직 나밖에 몰랐었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당신이 사향언니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
요. 언니를 잊어 버렸다면 어쩌면 제가 화를 냈을지도 모르는 일
이에요."
유천기는 의아했다.
"화를 내다니?"
"가가가 의리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의리없는 사람을 전 사랑할
수가 없거든요."
"혜매."
유천기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이 치밀었다.
그는 감격하여 그녀의 몸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백문혜는 몸을 가
늘게 떨며 그의 품에 나긋하게 안겨들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지며 뜨겁고 진한 애정이 교환되었다. 부드
러운 달빛이 그들의 머리 위에 월광화(月光花)를 뿌려대고 있었
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얼굴이 복숭아 빛으로 물든 백문혜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절 구해냈죠? 더구나 동령영주의 손을 빌어서
말이에요?"
그녀는 그 점이 못내 궁금했던 것이다. 유천기는 표운하가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보면 그녀야말로 불행한 여인이오."
그는 옥녀곡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를 비롯하여 얼마 전 그녀와의
관계를 이야기해 주었다.
유천기는 질투에 눈이 멀어 판단능력을 상실한 표운하를 이용해서
백문혜를 빼내온 것이었다. 당시 표운하는 백문혜로 인해 남궁력
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렸다고 믿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백문혜만
사라진다면 다시 남궁력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
다.
유천기는 그런 표운하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유천
기가 일러준 대로 혼례식의 혼란을 이용해 자신이 신부로 변장하
고 대신 백문혜를 자신으로 분장시켜 강남제일장을 빠져나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백문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보니 정말 불쌍한 여인이군요."
유천기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만악(萬惡)의 근원은 간악한 남궁력이오."
백문혜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의 얼굴에 한 가닥 공포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유천기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 자는 정말 무서운 인물이에요. 게다가 그 자
는...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어요."
유천기는 흠칫했다.
"음모라니?"
"아! 가가가 생각하고 있는 남궁력이란 자는 상상 이상으로 무서
운 자예요. 가가는 그 자가 누구의 제자인지 아시나요?"
유천기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반문했다.
"그에게 천지성승 말고 또 다른 스승이 있단 말이오?"
백문혜는 몸서리치며 말을 이었다.
"그 자는 제게 말해 주었어요. 오래 전부터 자신에게는 또 하나의
스승이 있었다고요. 하지만 그와 스승의 관계는 상호 서로 이용하
고 견제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영원한 천적(天敵)이라고 말했어요."
'영원한 천적? 스승과 제자 사이가?'
유천기는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에게 또 다른 스승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인데... 세상에
천적인 사도지간이 있다니 정말 괴이한 일이군."
"저도 그 말을 들으며 전율을 금치 못했어요. 그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사부를 죽이기 위해 수없이 시도했으며 사부 역시 그것을
알면서도 이용해 왔다는 거예요. 그가 그렇게 교활하고 음악한 인
간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사부와의 그런 관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도 몰라요."
유천기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대체 그의 사부는 누구요?"
"바로 천사교의 삼봉공인 천면수사(千面秀士) 호청우(胡靑羽)라고
했어요."
"그... 그럴 리가!"
유천기는 놀란 나머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실상 따지고 보면 남궁력은 천사교와 원수지간이나 다름이 없었
다. 그것은 그의 부친인 강남대협이 마녀 희옥화에게 죽었기 때문
이다. 또한 희옥화의 후예를 데리고 사라졌던 삼마(三魔) 역시 남
궁력의 간접적인 원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남궁력이 원수 중의 한 명인 천면수사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문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들의 관계는 천사교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어요. 그
뿐이 아니예요. 천면수사 호청우의 진정한 내력을 알게 되면 더욱
놀라실 거예요."
유천기는 흠칫했다.
"그의 내력이라니? 그가 또 다른 신분을 가지고 있단 말이오?"
"호청우는 본래 천(千)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변장술에 능
한 인간이에요. 그가 다른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별로 이상
한 일이 아니예요. 하지만 본래의 그의 신분은 정말 놀라운 것이
에요. 저도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으니까요."
"......?"
유천기는 점점 더 의혹이 짙어졌다. 잠시 후 백문혜는 입을 열었
다.
"그는 본래 마도삼영 중의 무영자(無影子)의 제자였는데, 훗날 사
부를 암살했다더군요. 이유는 사부가 가지고 있는 한 권의 비급
때문이었어요. 천면경(千面經)이라는 비급이었는데 그것을 익힘으
로써 그의 역용술은 천하제일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거예
요."
"으음......!"
유천기는 치가 떨리는 것을 금치 못했다. 스승은 어버이나 다름없
는 존재였다. 때문에 스승의 명을 거역하거나 위해를 가한다는 것
은 가히 역천(逆天)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만일 스승을 해친 자가 있다면 그는 무림에서 매장을 당할 뿐더러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남궁력의 본래 스승인 천면수사
호청우가 자신의 스승을 시해하고도 버젓이 살아 숨을 쉬고 있다
니,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유천기는 그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정말... 그 스승에 그 제자로군!"
백문혜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더 엄청난 일은 그들 두 사람이 꿈꾸고 있는 야망이에요. 그들
은. 역천(逆天)을 꾀하고 있어요."
"역천이라고!"
유천기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역천이라면 바로 황제의 위를 노린
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천기는 가슴이 박동하는 것을 가까스로 억
누르며 물었다.
"그게 사실이오?"
백문혜는 대답대신 다시 반문했다.
"가가는 개봉성의 친왕부에서 나왔던 주무현이란 인물을 기억하나
요?"
유천기의 뇌리에 만병서여의 사건이 떠올랐다. 당시 장무진과 백
문혜는 바로 그곳에서 실종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곳에서 실종되었던 백문혜가 남궁력의 손에 떨어졌
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순간 무엇인가를 깨달
은 듯 유천기의 안색이 변했다.
"그렇다면.....?"
"그래요. 주무현 왕자는 남궁력의 또 다른 분신이에요. 그는 진짜
주무현을 죽이고 왕자의 신분으로 행세하며 역천을 노리고 있어
요."
"그럴 수가!"
"또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이 있어요. 그것은 천면수사가 바로 북경
(北京)의 자금성에서 암중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동창(東廠)
의 부영반이라는 사실이에요. 그 자는 천사교에서는 일부러 세력
을 축소하여 대봉공인 삼안마군을 따르는 척 하면서도 실은 야심
을 품고 자금성 내에서 힘을 구축하고 있어요. 그는 황제의 몰락
을 조종하여 막후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 종내에는 스스로 대권을
움켜쥐려 하는 거예요."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
유천기는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는 과거 문사 출신이었으므로 자
금성 내의 정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당금의 황제 만력
제는 만년 들어 황음에 빠져 정사를 도외시하고 있었다.
때문에 환관들의 득세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탐관오리와
간신들의 준동으로 정사는 엉망인 지 오래였다. 따라서 뜻있는 선
비나 지사들은 시대를 개탄하며 초야에 묻히기 일쑤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명의 찬란한 역사가 언제 종지부를 찍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근자에 들어서는 갖가지 의혹어린 궁중의 비사건(秘事件)
이 빈발하여 더욱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반심을 품은 호청우의 음모에 의
한 것이란 말인가?'
유천기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백문혜는 굳은 안색으로 말을 이었
다.
"호청우는 동창의 부영반으로서 겉으로는 황태자를 옹호하는 편에
서 있지만 암중으로는 복왕(福王)을 낳은 정귀비(鄭貴妃:만력제의
총애를 받은 귀비. 한때 만력제는 그녀를 총애하여 왕귀비 소생의
황태자 대신 복왕을 황태자로 세우려다 실패한 적이 있다)와 결탁
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거예요."
백문혜는 다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 했다. 그녀는 남
궁력으로부터 많은 비밀들을 들었다. 남궁력은 백문혜의 사랑을
얻기 위해 비밀을 서슴없이 털어놓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꿈에도
그 사실들이 외부로 흘러 들어가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유천기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가공한 것들이었
다. 본래 무림인들은 황궁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누가 황제가
되든 그것은 무림인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천기는 달랐다. 그는 문사 출신이었으므로 충(忠)에 대
한 관념이 깊었다.
그는 이른바 정격( 擊)의 안(案)이라고 불리우는 중대사안에 대
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황태자의 처소인 자경궁(慈慶宮)
에 괴한이 침입한 사건이었다. 당시 괴한은 마침 환관에게 발각이
되었는데 그는 환관을 때려 죽이고 달아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자금성을 진동시켰는데 그 사건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항간에서는 복왕을 황태자에 올리려다 중신들의 반발
로 무산된 정귀비 일당이 한 짓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그러나 결
국 그 사건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사건도 호청우의 짓이란 말인가?'
내심 경악하던 유천기는 마침내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그것은 이
곳의 일이 끝난 후 북경으로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으나 확실한 것은 역천을 방관할 수는 없다는 사
실이었다.
문득 그는 장자(壯子)가 말한 삼검지도(三劍之道)를 떠올렸다.
'제왕의 검과 제후의 검, 그리고 범인(凡人)의 검.......'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나는 범인의 검을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범인의 검이 때로는
제후를 계도하고 천자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스......
천장의 뚫린 구멍으로부터 희미한 달빛과 함께 한 줄기 서늘한 바
람이 불어왔다.
"가가."
백문혜는 추운지 몸을 바싹 움추리며 유천기의 품으로 파고들었
다. 그러다 그녀는 유천기의 눈에서 한 가닥 장엄한 빛이 흘러나
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강렬하여 마치 태양을 바라보
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