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파불교의 심식설
부파분열 경위의 약고(略考)
원시불교 시대의 심식설(心識說)을 고찰 한 후 그 다음 단계인 부파불교 시대의 심식설을 고찰하기에 앞서 먼저 일고해야 할 문제는 부파불교 시대의 의의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이 그 순서일 것이다. 교주 석존이 생존하였을 때는 교주의 위대한인격의 위덕(偉德)과 법력의 자연적 통어력(通御力)에 의하여 교단은 수유일미(水乳一味) 화합일체(和合一體)가 되어, 그다지 큰 파란이 없이 교단의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성(大聖)이 입멸(入滅)하시자 한참 동안은 무사 하였었으나 교단은 점차 동요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먼저 부파 분열에 관한 사료에 대하여 일언하기로 하자. 이에 관한 정사료(正史料)는 세우(世友)의 작(作)으로 전하는 것에 북전(北傳)에 대개 3종역(譯)이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18부론>: 이 논(論)은 초후(初後)의 2부로 되어 있는 바 그 전부(前部)는 양(梁) 승가바라(僧伽婆羅)역의 <문주사리문경>의 하권인 [분별부품]이요, 그 후부(後部)는 라집법사집(羅什法師集)이라는 <18부론>이다.
2.<부집이론(部集異論)> 진(陳) 진제(眞諦)역
3.<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 당(唐) 현장(玄裝) 역
이밖에 서장전(西藏傳)으로 세우의 작(作)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은 것에
Bhavya kāyabhetrovibhanga라는 것이 있어 그 내용은 <이부종륜론>과 유사하다 한다.
그 다음에 남전(南傳)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도사(島史, Dīpavaṁsa)
2.대사(大史, Mahāvaṁsa)
이제 이에서는 대체로 한역 문헌을 주로 하고서 그 분열의 과정을 고찰키로 하고 기타는 참고로 하겠다. 한역 중에서도 <이부종륜론>을 주로 하고 기여(其餘)의 2역(二譯)은 참고로 하겠는바 본서는 2부(部)로써 조직이 되어 있어 그 제1부에서는 부파분열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고 그 제2부에서는 각 부파의 교리사상의 상이점이 약술되어 있다. 이제 이에 필요한 부분은 그 제1부인 것이다.
이제 피론(彼論)에 의하면 불멸후 백유여년(百有餘年) 경에 마갈타국(摩揭陀國) 구소마성(具蘇摩城, 후에 華氏城 pātali-Putra이라 개칭하다.) 무우왕(無憂王, A'soka-rāja)시에 불교 교단은 대중부(大衆部)와 상좌부(상座部)와의 양부로 분열하였으니 이것이 근본이부의 분열이었다. 그 후 이 대중부는 제1차로 불멸후 2백년까지에 또 3부를 유출하였으니 1은 일설부(一說部)요, 2는 설출세부(說出世部)며, 3은 계윤부(鷄胤部)다.
그 다음 제 2차로 제 2백년 중에 대중부에서 또 일부를 분출하니 다문부(多聞部)라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다음 제 3차로 제 2백년 중에 대중부에서 다시 일부를 파생하니 설가부(說假部)라 하였다.
그 다음 제 4차로 제 2백년 만시(滿時)에 대중부에 출가한 대천(大天)에 의하여 일부를 또 분출 하였으니 제다산부(制多山部)와 서산주부(西山住部)와 북산주부(北山住部)이었다.
대중부는 이와 같이 전후 4차에 걸쳐 8개의 말파(末派)를 파생하였으니 본말(本末)을 합하면 9파가 되는 것으로 이것을 도시하면 여하(如下)하다.
그 다음 상좌부는 불멸후 3백년 초경에 소승쟁(少乘諍)이 있어 제1차로 양부로 분하여졌으니 1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또는 설인부(說因部)라 명하였고 2는 본상좌부(本상좌部)로서 또 설산부(雪山部)라 명하였다.
그 다음 제 2차로 제 3백년 중에 설일체유부로부터 일부를 유출하니 독자부(犢子部)라 명하였다.
그 다음 제 3차로 제 3백년에 독자부로부터 4부가 유출되었으니 1은 법상부(法상部)요, 2는 현주부(賢冑部) 3은 정량부(正量部)요 4는 밀림산부(密林山部)이었다.
그 다음 제 4차로 제 3백년 중에 설일체유부로부터 다시 일파가 파생되었으니 그것은 화지부(化地部)이었다.
그 다음 제 5차로 제 3백년 중에 화지부로부터 일부가 파출되니 법장부(法藏部)라 명하였고 스스로 우리는 채숙씨(采叔氏, 木健連)를 사(師)로 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 제 6차로 3백년 중에 이르러 설일체유부로부터 다시 일부가 나왔으니 음광부(飮光部)라 명하였고 또는 선세부(善歲部)라고도 명하였다.
그 다음 제 7차로 제 4백년초에 이르러서 설일체유부로부터 다시 일부를 내니 경량부(經量部)라 명하고 또는 설전부(說轉部)라고도 명하였나니 스스로 우리는 경희(慶喜, 阿難)으로써 사(師)로 한다고 하였다.
상좌부계(상座部系)는 이와 같이 전후 7차에 걸처 본말 11파로 분열되었으니 이것을 도시(圖示)하면 여하하다.
한역문헌은 이상과 같이 대중 상좌 양파 합20부파인 바 남전(南傳)인 도사와 대사에는 대중부가 본말 합하여 6파요, 상좌부는 본말 합해서 12파 양부를 합해서 18파라고 되어 있다.
이상의 고찰에 의하여 부파가 어떠한 것이라는 것은 밝혀졌다. 그런데 이에 또 한 가지 생각할 문제는 일미화합(一味和合)의 교단이 어째서 이와 같이 심한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던가 하는 것이다. 그 분열에는 반드시 그 불가피한 원인이 없지 않았을 것이니 근본2부에는 근본 2부대로 또 18지말파에는 지말파대로 다 각각 그 분열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18지말파 분열이유에 대한 고찰은 이것을 생략키로 하고 그 근본 2부 분열의 동기에 관한 것만을 약술하여 후세 교리사상발달의 근거를 밝히고자 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 근본 2부 분열의 이유에 관하여 남북양전(南北兩傳)은 전연 상위되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먼저 남전(南傳)에 의하여 본다면 대중 상좌 양부가 분열하게 된 근본원인은 소위 제 2결집의 동기이었던 10사(事)의 계율적 조목이 시(是)냐 비(非)냐 하는 교단적 분쟁에 있었다고 한다. 이에 관한 문헌으로 남전의 율문(律文)인 [소품(小品, culla-vagga)] 제12장과 도사(島史)와 대사(大史) 등이 있는바 이제 [소품] 소전(所傳)에 의하여 그 전말을 약술하기로 한다면,
불멸후 백년 경에 발기족(跋耆族) 출신으로서 비사리(毘舍離)에 주하던 비구들이 10사(十事)를 제창하였으니 10사라 함은 1.각염정(角鹽淨), 2.이지정(二指淨), 3.타취락정(他聚落淨), 4.주처정(住處淨), 5.찬동전(贊同傳), 6.소습정(所習淨), 7.불찬요정(不攢搖淨), 8.음도루애정(飮闍樓礙淨), 9.무연좌구정(無緣座具淨), 10.금은정(金銀淨) 등이다.
그 때 존자 야사가건타자(耶舍迦乾陁子)는 비사리의 중각강당(重閣講堂)에 있었다. 발기족 비구들은 포살일(布薩日)에 동발(銅鉢)에 물을 담아 우바새(優婆塞)가 참예(參詣)하는 자에 향하여 왈(曰) '승가에 일전(一錢)을 시여하라. 혹은 반전을 혹은 일리(一厘)를 시여하라. 승가는 그것에 의하여 종종의 용구를 득하리라.'라고, 야사(耶舍)는 이것을 듣고 우바새들에게 왈 '그만두라, 금전을 사용하는 것은 석자(釋子) 사문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다. 그 보시를 받는 것도 또 그것을 분배하는 것도 허락되어 있지 않다.
석자 사문은 모든 귀금 보주(寶珠)를 버리고 금은을 저축하지 못한다'.라고, 다른 비구들은 우바새로부터 얻은 것을 각자에 분배하여 야사에게도 그 일부를 주었으나 야사는 받지 않았다. 비구들은 서로 의론하되 '이 야사는 독신자(篤信者)를 비방하여 노하게 하였으니 그에게 사죄과를 과(課)하리라.'라고 의결하였다. 이것을 안 야사는 구섬미(拘睒彌)에 달려가 사자(使者)를 서방 남방에 파견하여 이 문제의 해결을 획책하였다.
때에 존자가 삼부다란방화수(三浮多蘭邦和修)에 있었는바 야사가 가서 찬성을 구하였다. 그리하여 서방 제국으로부터 약 60인의 비구와 아반제(阿槃提) 및 남방 제국으로부터 88인의 비구 등이 모두 아호환하산(阿呼桓河山)에 모였다. 야사당은 아담(阿含), 논(論), 율(律)에 통하는 장로 이바다(離婆多)의 동의도 얻었다. 존자 사란(沙蘭)은 정(定)에 입(入)하여 어느 도(徒)가 합법적인가를 관한 결과 법과 율에 비추어서 서방 비구(耶舍徒)가 정당함을 알았다. 이와 같이하여 이바다의 발의에 의해서 사건이 일어난 비사리에서 회의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전 발기족 비구들은 이바다에게 증회(贈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또 그의 제자 울타라(鬱陀羅)를 설복하여 이바다를 동방의 자당(自黨)에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그것도 실패하였다. 야사당은 비사리에 갔다. 때에 장로 살바가마(薩婆加摩)는 법랍(法臘) 120. 아난의 제자라 하며 그 땅에 있었다.
이와 같이 동서 양당은 서로 논의하였으나 중의분분(衆議紛紛) 판결을 보지 못하여 이바다의 발의(發議)로 쌍방으로부터 위원을 선출케 하였다. 동방에서 살바가마, 사란, 불도종(不闍宗), 파사람(婆沙藍), 서방으로부터 이바다, 삼부다란방화수, 야사, 수마나(修摩那) 등이 각각 선발되어 파리가원(婆利迦園)에 모여서 이바다가 10사(十事)의 일일을 살바가마에게 물었다. 그 결과 10사는 모두 비율(非律)이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이리하여 이것을 대중중에 다시 선언하였다.
이상이 제2의 율(律)의 결집 7백 결집이라고 이르는 것으로 도사는 상기사(上記事)의 대의(大意)를 간단히 약기(略記)하였을 뿐이나, 그러나 상율문(上律文)에 없는 기사(記事)가 있으니, 그것은
그 때 수수나가(須殊那伽, susunāga)의 자(子) 아육(阿育)이 파련불성(巴蓮弗城)의 왕이었다. 그들 8인의 장로는 악비구(惡比丘)를 배척하고 10사의 비법(非法)을 파한 후 7백 아라한을 선발하여 그들 자신의 법을 가지기 위하여 결집을 하였다. 이제 2결집은 비사리의 중각강당에서 8개월을 요하여 마쳤다. 발기족 비구들은 장로들에게 배척되어 다른 당을 만들었다. 그들 다수는 비법을 가지고 1만인이 모여서 다른 결집을 하였으니 이것을 대결집(Mah-saṅgīti)이라 한다.
라고 있는 것이다. 즉 이에 장로파(長老派)인 상좌파와 발기족 비구를 중심으로 한 다수파가 이어 서로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전(北傳)에 의하면 양부 분열의 원인은 율(율)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대천에 의해서 제창된 교리에 관한 5사(五事)에 의한 것이라 한다. 이에 관한 사료는 <이부종륜론>을 위시한 기타 2종의 이역(異譯)과 <대비바사론> 권99 등이다. <이부종륜론>의 본문은 너무 간단하여 않은 부연(敷演)을 요하지 않고서는 이해가 곤란하므로 <대비바사론>에 의하여 그 요지를 엿보기로 하자.
옛적 마토라국(摩土羅國)의 한 상인의 자(子)에 대천(大天)라는 자가 있었는바 장성하여 그 모(母)와 통한 후 그 부(父)를 살해하고서는 그 발현을 두려워하여 모(母)와 함께 파련불성(巴蓮弗城)에 도주하여 왔던바 일찌기 알던 아라한을 만나자 발각을 염려하여 그 아라한을 살해하였다. 그 후 그 모(母)가 또 타인과 통하였음을 알고 모(母)도 살해하여 그는 삼역죄(三逆罪)를 범한 것을 참회하였다. 사문 석자에게 멸죄법이 있다 함을 듣고 계원사(雞園寺)에 출가하였다. 그는 총민(聰敏)하여 불구(不久)에 삼장(三藏)에 통해서 국왕의 귀의까지 받았다.
그는 어느 때 몽정을 설류(泄漏)하여 그 부정(不淨)을 제자들에게 세척(洗滌)케 하였다. 그 제자는 아라한에게 이런 일이 있음을 괴이히 여겨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대천왈, '루(漏) 2종이 있으니 번뇌루(煩惱漏)와 부정루(不淨漏)다. 아라한에게 전자는 없으나 후자는 오히려 있는 것이다.' 라고, 그 다음 그는 제자들의 환심을 사고자 사문과(沙門果)를 수여(授與)하였다.
제(諸) 제자 의문왈, '아라한은 스스로 증지(證智)가 있을 것이어늘 어찌하여 우리들에게 수여하나이까. 대천왈, '무지(無智)에 2종이 있으니 염오무지(染汚無智)와 불염무지(不染汚無智)이다. 아라한에게 전자는 없으나 후자는 오히려 있다. 그러므로 알려주는 것이다.' 라고 다음에 제자왈, '아라한은 의혹이 없을 것이어늘 우리는 제실(諦實)중에 오히려 의혹이 있음은 하고(何故)인가 라고'. 대천왈, '의(疑)에 2종이 수면성(隨眠生)과 처비처(處非處)이다. 아라한에게 전자는 없으나 후자는 오히려 있는 것이다.'라고. 다음에 제자들이 독경함에 '아라한은 성혜안(聖慧眼)이 있어 자(自)의 해탈에서 능자증지(能自證智)한다.' 했다.
이에 제자들이 문왈(問日), '우리가 이미 아라한이라면 스스로 아라한임을 증지(證智)할 것이어늘 하고(何故)로 사(師)에 의하여 입(入)하게 되는가.' 라고. 대천왈, '아라한은 다만 타(他)에 의하여 입(入)하게 되고 능(能)이 스스로 알지는 못하나니라.' 라고. 또 대천이 몽중에 그 모든 구악(舊惡)의 죄를 생각하여 번민 끝에 고재 고재(苦哉 苦哉)라고 부르짖었다. 그 소리에 경기하였던 제자들은 그 익일 그 연고를 물었다. 대천왈, '성도(聖道)는 지성으로 고재라 부르짖어서 소명(召命)하지 않으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고재라 부르짖었노라.' 라고.
대천이 그 후 포살(布薩) 시에 상좌에 저(著)하여 계조(戒條)를 송한 후 하오사(下五事)를 송(頌)으로 작하여 말하되
餘所誘 無知 猶豫 他令入
道因聲故起 是名眞佛敎
그때 대중들은 경기치 않는 자가 없이 돌재(咄哉)라 우인(愚人)이 어찌 이러한 말을 하는가. 이것은 3장(藏)중에서 증소미문(曾所未聞)이로다 하며 모두 이에 대하여 그 송을 번복하여 왈
餘所誘 無知 猶豫 他令入
道因聲起故 汝言非佛敎
라 하여 경야(竟夜)토록 투쟁이 분연하여 그로부터 붕당이 전성하여 졌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승가람(僧伽藍)에 나아가 그 분쟁 지식(止息)의 방법들을 대천에게 물었던바 대천은 다수결로 할 것을 진언(進言)하였다. 그 결과 대천의 반대파에는 기년(耆年)은 높으나 그 수가 적었고 대천의 파에는 연치(年齒)는 젊으나 그 수가 많았는지라 대천의 승리로 낙착이 되니 소수파는 상좌부라 하고 다수파는 대중부라 하게 되었다. 상좌부는 그 후 동거할 수가 없어 드디어 서북방에 위치한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으로 이주하였다.
이것이 북전(北傳)의 양부(兩部) 분열에 관한 전설이다. 남전(南傳)에도 5사설(五事說)이 없지는 않으나 그러나 이로써 양파가 분열되었다고는 되어 있지 않다. 오인(吾人)은 이에 이르러 이 남북 양 전설을 그대로 시인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만약 이 양설을 다 같이 인정한다면 그 어느 설도 그것이 진실한 양부 분립설(分立說)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일이 남북에 전연 상이하게 전해질 리가 없지 않는가. 그러니 10비사설(十非事說)에나 5사설은 기실 따로 유포되던 계율문제와 교리문제이었고 또 양파 분립은 이것대로 따로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렇던 것을 후세 사람들이 양파 분립설화를 구성함에 당하여 남방전(南方傳)에서는 10비사설을 북전에서는 5사설을 각각 이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추측이 단순히 허무한 추측이 아닌 증거로서 북전에도 10비사설이 전하되 양파 분립에 관하여서는 하등의 언급이 없으며 또 5사설이 남전에도 전할 뿐 아니라 북전에도 전하는 문헌이 있으되 역시 양파 분립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다만 일반적인 교리문제중의 일종으로 취급되어 있음에 의하여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오인(吾人) 이상과 같이 고찰하여 와서 결국은 양파분립의 이유를 부정한 셈이 되는 바 그렇다면 양파 분립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과 분립의 이유 원인을 전연 부정하는 것이나 하면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상술한 바와 같은 양파 분립 구성전설은 그대로 믿을 수 없으나, 그러나 양파분립의 소인(素因)은 불멸후 백년 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실은 교주 입멸 직후 적어도 제1회 결집시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따라서 그 분립의 원인은 생활상 문제와 교리사상 문제에 대한 태도 및 견해의 차이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제1회 결집시에 대가섭(大迎葉)을 좌주(座主)로 하고 법과 율(律)을 결집해 마친 후 남방에 5백제자와 더불어 유행하던 부루나(富樓那)존자가 왕사성에 돌아왔을 때 가섭은 그에게 사후(事後) 승인을 요구하였었으나 그는 말하기를 '우리들은 또 우리들이 세존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 있으니 그대로 가지리라.'라고 사절하였다고도 하며, 또 부루나는 왕사성 남방 북록(北麓)의 대죽림(大竹林) 중 석굴에서 제1회 결집을 하였다고도 한다. 가섭과 부루나간에 교환된 것은 계율문제가 주였다.
그리고 제2회 결집의 기사(記事)로 전하는 <마하승기율(摩訶僧祗律)> 권33에 불멸후 장로비구가 비사리의 사퇴승가람(沙堆僧伽藍)에서 제비구가 단월(檀越)에 구걸을 하되 이와 같은 애언(哀言)을 하였다. 즉 세존이 재세시에는 전식(前食), 후식, 의복, 공양을 얻었다. 세존외 멸후 우리는 고아다. 누가 마땅히 보아줄 것인가.
'그대들은 승(僧)에게 재물을 보시하라.'라고 있는 바 이러한 것은 교단원 생활상 중요 문제로서 그 실정을 전하는 것인 동시에 이로 인하여 계율만을 그다지 중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물며 대가섭 주재하에서 울(律)의 결집을 마쳤을 때 아난존자로부터, 석존으로부터 면수(面授)하신 말씀에 '불멸후 소소계(少小戒)는 버려도 좋다.'고 하셨다는 말이 발설되었음에 있어서이랴.
그 다음에, 아난이 아라한이 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라든가 또는 화수밀(惒須密, 世友)이 또한 아라한이 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통합하여 보면 이것은 소승교도의 극과(極果)인 아라한을 경시한 교리문제다. 이와 같은 모든 문제들이 불멸후 교단원간에 서로 의견을 달리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계율문제 같은 것은 형식적인 문제로서 사상을 중시하는 교도들로서는 이것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도 또한 결국은 교리문제에 속하는 셈이다. 그러니 교단원의 사상은 대체로 형식 편중의 보수파와 자유발전적인 진보파와의 2대 조류(潮流)가 있었을 것으로 이 두 조류가 은연중 대립되어 오다가 언젠가 자연으로 유유취당(類類聚黨)게 되었으니 보수파를 상좌부라 하였고 또 자유파를 대중부라 하였던 모양 같다.
부파불교 교리에 관한 문헌
부파불교의 교리에 관한 문헌은 매우 희귀하다. 그에 관한 직접적인 문헌은 전장에 소개한 <이부종륜론> 등 외 2종서의 후반분과 남전(南傳)의 논사(論事, Kathāvathu) 등이다. 그러나 <이부종륜론> 등은 본문이 간략하여 주석서 없이는 독파하기 곤란하다. 먼저 진제역인 <부집이론(部執異論)>에는 진제 자신의 저술인 <부집이론소> 10권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본론을 역출하면서 주소(註疏)로 쓴 것으로, 일시는 널리 유포되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그 원본은 산일(散逸)되고 겨우 <삼론현의(三論玄義)>, <삼론검유초유몽(三檢幽鈔)>, <삼론유몽(三論誘蒙)>, <삼론관주(三論冠註)>, <의림장(義林章)> 등 제서(諸書) 중에 인용되어 있는 것에 의하여 그 대체를 알 뿐이다. 그 다음 현장역에는 자은(慈恩) 기(基)의 저술에 <이부종륜론기> 3권이 있다.
본서는 진제(眞諦)의 소(疏)를 참조하여 가면서 쓴 것으로 진제의 그릇된 점도 정정하여 있다. 그러므로 기(基)의 소(疏)가 나온 후로는 진제의 소(疏)는 자연 유행이 안 되므로 산일된 모양이다. 그 다음 간접적인 참고문헌으로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 2백권, <아비달마구사론> 30권 등 기타 <구사론>의 기(記) 및 유식론의 제종말소(諸種末疏)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제종 문헌상에 편언척구(片言隻句)로 나타나 있는 각 부파의 심식에 관한 의견을 주워 모아서 이것을 통합하여 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남전(南傳)의 [논사(論事>]는 전 23 장에 걸쳐서 유부의 교리를 주로, 기지파의 견해는 모두 일괄하여 이론사설(異論邪說)로 취급하되, 217조에 요약하여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각 부파로 따져 보기에는 힘들게 되었으나 비교참고해야 할 자료인 것이다.
<불교 유심사상의 발달/ 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