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社稷檀)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사직단은 토지와 곡식에 대한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경복궁과 종묘에 이어 국가의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사직단이란 나라와 국민 생활의 편안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 지내는 곳으로 사(社)는 땅의 신을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또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때에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이 문은 사직단의 정문으로 태조 3년(1394) 사직단을 지을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
그 뒤 숙종 46년(1720) 큰 바람에 기운 것을 다시 세웠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지금 있는 자리는 1962년 서울시 도시 계획에 따라 14m 뒤쪽으로 옮긴 것이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새부리 모양의 부재를 이용해 기둥 위에서 보를 받치고 있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기법과 튼튼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어 사직단 정문의 법식과 넉넉한 느낌을 주는 건축 문화재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한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뒤 사직단을 세우고 토지의 신인 국사단을 동쪽에
곡식의 신인 국직단은 서쪽에 두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토지와 곡식을 중요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풍년제나 기우제 등도 이곳에서 올렸다고 합니다.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경복궁 동쪽에 종묘(宗廟)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였다1395년(태조 4) 공사를 착수하여 설단(設壇)이 완성되자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의 동·서 양단(東西兩壇)을 설치하였는데 동단에는 국사(國社:正位土神), 서단에는 국직(國稷:
正位穀神)을 모셨으며 단에는 주척(周尺)으로 높이 2.5자, 너비 1자의 석주(石柱)를 각기 세워 후토씨(后土氏)와 후직씨(后稷氏)를
배향하였다. 단은 네모반듯하며 세벌장대석을 높이 3자가 되게 하고 한 변이 2장 5척(주척)의 크기로 평면을 설정하였다.
서울 사직단(社稷壇)
사직은 국토를 지키는 신(神)인 사(社)와 오곡(五穀)의 신(神)인 직(稷)을 일컫는 말로서 종묘(宗廟)와 함께
국가를 의미하였으며 종사(宗社)라고 표현하였다. 말하자면 국가가 평온하기를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지금의 사직공원의 유래는 사직단에서 비롯되었다.
사직단(社稷壇)은 조선시대, 국가에서 토지의 신(神)인 사(社)와 곡식의 신(神)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건 태조가 한양에 도읍를 정하면서 좌묘우사(左廟右社)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종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하였다.
사직단은 두 겹의 담장 안에 둘러싸여 있으며 담장의 사방에는 홍살문을 세웠다.
단군성전(檀君聖殿)
사직동의 단군을 모신 대종교 신전 대종교는 단군(檀君)숭배를 기초로 하는 민족종교이다.
근본 교리는 성(性) ·명(命) ·정(精)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止) ·조(調) ·금(禁)의 3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가 한국을 강점(强占)할 때였으므로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직동 단군성전(檀君聖殿)
사직공원내 단군성전은 대종교 단군성전이 아니라 대한민국 최초의 공공건물(서울시 소유)로 세워진 단군성전이며
봉안된 단군영정은 정부 표준단군영정(문공부심의번호 77-27과 성상은 정부지정 국민경모상 문공부심의번호 77-16)임을
알려드리며 용도는 종교를 초월한 국민교육과 국가 홍보에 사용 되고 있다.
사직동 단군 영정
단군의 영정을 모신 성전이다. 이 성전에는 불교 조각가 신상균이 제작한 높이 9 척의 단군소상(檀君蔬像)과
정부 표준영정 그리고 역대 왕과 충렬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황학정(黃鶴亭)
-시도유형문화재 25호
이곳은 원래 서촌(西村) 오사정(射亭, 활터에 있는 정자)의 하나인 필운동 등과정(登科亭) 터이다.
정자건물은 조선 고종 광무2년(1898) 어명(御命)에 의하여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지었던 것을
1922년 현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지금은 오사정이 모두 없어졌으나
이곳에서는 가끔 궁술행사를 열어 옛무인들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오사정(五射亭)은 옥동(玉洞) 등룡정(登龍亭), 삼청동(三淸洞) 운룡정(雲龍亭), 사직동(社稷洞) 대송정(大松亭),
누상동(樓上洞) 풍소정(風嘯亭, 원명(原名)은 백호정(白虎亭)), 필운동(弼雲洞) 등과정(登科亭)이다.
황학정은 원래 오사정 중의 하나였던 등과정이 있던 자리에 지은 정자를 말합니다.
고종이 나라 잃은 슬픔을 잠시라도 달래기위해 국궁을 들었던 황학정.
원래 황학정 건물은 조선 고종 광무 2년인 1898년 어명에 의해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어져 활터로 사용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2년 일본이 경성중학교와 총독부 관사를 지으려고 이 활터를 철거하자 몇몇 인사들이 나서
인왕산 자락의 필운동에 있던 등과정터로 옮겼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날 황학정이 자리 잡고 있는 종로구 사직동 1번지다.
ㄹ
우리나라 국궁1번지 황학정입니다. 이곳은 서울시유형문화재 재2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황학정은 1898년
고종 광무2년에 세워졌으며 당시 조선시대 무과시험장이었던 등과정으로 옮겨와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황학정은 원래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황실사정으로서 1899년 경희궁의 북쪽 산록에 자립잡고 있었다.
그것이 일제시대에 경희궁이 헐리게 되자 황학정을 이전을 해야 했다. 1920년대 초의 일이다.
현재 사단법인체로 운영되고 있으며 국궁 발전을 위해 궁사들을 양성하고 매년 각종 궁술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무과에 오르기 위하여 열심히 활을 쏘았다는 이름을 가진 등과정은 조선조 말기 서울 서쪽의
5대 사정 중의 하나로서 무과를 준비하던 한량들이 득실대던 활터였다.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어진 궁술연습을 하던 사정(활터에 있는 정자)이다.
고종 광무 2년(1898) 지어졌으며 192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황학정(黃鶴亭)
사직공원 뒷산 인왕산 기슭에는 활 터인 황학정이 세워져 있다.
원래는 경희궁내 왕비가 거처하던 회상전 북쪽에 있던 것을 일제 때인 1922년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황학정 안에 있는 정자
등과정(登科亭) 터
황학정 뒷쪽 약수터 바위벽에 등과정(登科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이 조선 시대 서촌(西村) 5사정(射亭)의 하나인 등과정(登科亭)이라는 활터였음을 알 수 가 있다.
배화여자고등학교
고 육영수 여사의 모교로 유명한 배화여고는 1898년 서울시 종로구 내자동에서 개교해 1916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배화여고 생활관은 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어져 쓰이다가 1971년부터 동창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 숙소 건축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성 깊은 건축물이다.
배화여고 생활관은 선교사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반지하와 다락방이 있는 서양식 건축물이다.
종로구 필운동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배화여고는 1898년에 설립된 배화학당을 계승하고 있는 학교이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 학교 생활관은 1916년에 현재의 자리로 배화학당이 이전해 온 해에 선교사 주택으로
지어진 건물이라 한다. 배화여고 생활관은 2009 년에 등록문화재 29 호로 지정되었다.
1916년 배화여고 선교사 사택으로 건립된 건물로서 당시 선교사 주택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인 건물이다.
겸재 정선 선생의 필운대 그림
배화여고 뒷정원에는 높다란 암벽이 있는데 그 왼쪽면에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를 세로로 새기고
가운데에는 몇줄의 싯구를 적어 놓았으며 오른쪽으로는 아홉 사람의 이름을 나열해 놓았다.
조선 선조때 권율도원수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집터로 바위에 각자한 필운대
이항복의 후손인 이유원이 계유년(1873년 고종 10년)에 이곳을 찾아 석벽에 남긴 또다른 바위글씨이다.
이유원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경복궁 광화문의 상량문도 그가 지었다.
我祖舊居後裔尋 우리 할아버지 옛집 터를 후예가 찾아드니
蒼松石壁白雲深 푸른솔 석벽에 흰구름이 깊구나
遺風不盡百年久 유풍은 사라지지 않고 백년토록 오래니
父老衣冠古亦今 부로의 의관은 지금까지 전해지네
癸酉月城李裕元 계유년에 월성 이유원이
題白沙先生弼雲臺 백사선생 필운대에 제하다
배화여자고등학교 대강단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가옥
이상범 가옥은 2006년 서울시 매입 후 2008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해서 2012년부터 일반인에 개방되었다.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은 근대 한국화를 빛낸 화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이미 30대후반에 미술계의 춘원 이광수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지금도 대표적인 한국 근대 미술가를 뽑을 때면 항상 그는 첫번째로 손꼽힌다.
그가 이처럼 유명한 것은 산수화에서 청전양식으로 불리는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하고 우리 근대 미술의 자부심을
살려줬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이러한 개성과 창의력은 우리의 자연과 고향에 대한 민족 공통의 정서와 미의식을
자극하고 국민적 공감력을 지닌 한국적 풍경을 탄생케 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게 생각된다.
마당 벽면을 장식했던 벽화가 6.25 당시에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며 바라 본 아랫방과 부엌의 놋그릇이 가지런하다
청전 화백의 방. 선생의 생활 공간이었으며 이 방에서 화실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남정 박노수 화백 가옥
(종로구립미술관)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은 서울시 제1종 미술관으로 박노수화백이 기증한 작품과 컬렉션 등
총 1,000여 점(작품 500점, 수석 379점, 고가구 및 애장품 115점)의 풍부한 소장품을 가진 예술품의 보고이다.
이를 바탕으로 박노수화백이 40여 년간 살던 집에 아름다운 미술관을 만들었으며 계속해서 미술관 소장품을
활용한 전시와 다양한 전시 연계 예술프로그램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잘 만든 현관 포치에 걸려있는 여의륜(如意輪)
여의보주와 법륜의 공덕으로 모든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고 이익을 주는 팔 여섯개 달린 7관음보살의 하나
이 문으로 드나드는 모든 이의 고통을 없애고 이익을 준다는 의미의 추사체 글씨다.
박노수 가옥(朴魯壽 家屋)은 윤덕용이 그의 딸을 위하여 1938년에 건립한 이층집이다. 집터 뒤는 송석원이라는
추사 김정희가 쓴 암각글씨가 있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집은 당시 중국 기술자들이 참여했고, 한옥과 중국,
그리고 양옥의 수법들이 섞인 절충식이며 1991년 5월 28일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됐다.
가옥 뒤를 한바퀴 돌아갈 수 있게 만든 정원
박노수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낸 동양화가로서 이 가옥에 1972년부터 거주하고 있었다.
반지하층이 있는 2층 가옥인데 1층은 벽돌조이고, 2층은 목조이며 지붕은 서까래가 노출된 처마가 나온 박공지붕을 하였다.
건물은 남향을 하였으며 건물 서쪽에 포치가 설치되었는데 포치의 서쪽과 북쪽 벽은 벽돌로 아치를 틀어 뚫어 놓았다.
수성동 계곡 아래 옥인1길 34번지 선인들의 흥취가 배어있는 터에 화백의 숨결이 살아있는 미술관으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게 된 것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뛰어넘어 한국 역사와 화가 개인의 기억이 깃든 장소로서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의 공유지로서 그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하겠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사직단도 한 눈에 보고 이해 할 수 있도록 하여주셨군요.
날씨도 청명하게 길을 나서게 만들었다는 탐방!
항상 탐방하시고 아르켜 주시고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바빠서 사진에 대한 해설을 못 올렸습니다.
곧 자료를 찾아서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淸岩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