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龍)이 어찌 못 속의 물건(物件)이랴
조조가 하북을 평정하고 허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멀리 형주에 있는 유비의 귀에도 들어왔다.
하루는 대낮부터 벌겋게 술이 오른 장비가
유비를 보러 들어와 투덜거렸다.
"형님, 도대체 언제까지나
이 코딱지 만한 시골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계실 작정이오?"
코딱지 만한 시골이란
유비가 그 전 해부터 유표에게서 얻어 다스리고 있는 신야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울적한 마음을 달래며 돗자리를 치고 있던 유비가
손길을 멈추고 조용히 그런 장비를 건너다보았다.
그곳으로 옮긴 뒤부터 새로이 치기 시작한 돗자리였다.
이제는 젊은 날의 어느 때처럼 저잣거리에 내다 팔기 위해서는 아니었으나
돗자리 치기는 여전히 유비에게 여러 가지 뜻을 지닌 일이었다.
군사들이 베어 온 골 풀을 가다듬어
한 줄기 한 줄기 돗자리 틀에 넣으면서 이런저런 시름을 잊는 것 외에도,
그렇게 짜인 돗자리를 보면서 차고 기다리며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리라는 스스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남들이 모두 천하게 여기는
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은연중에 자신의 소탈하고 야심 없음을 강조해 두는 것도
그 무렵 들어서는 아주 중요했다.
"조조 놈이 원가를 깡그리 때려잡고 허도로 돌아왔단 말이요"
유비가 아무 말이 없자 장비가 한번 더 충동하듯 말했다.
☆☆☆
그제야 유비가 나직이 물었다.
"그게 어쨌단 말이냐?"
"이젠 다 틀렸소. 조조 놈을 잡기는 이제 영 글렀단 말이오.
중원이 통째 그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사실은 천하를 차지한 것이나 다름없소.
이젠 정말로 돗자리나 치며 남은 세월을 보내야겠소"
"실은 나도 여러 번 유경승에게 조조가 비워둔 허도를 치자고 말했다.
그러나 듣지 않으니 난들 어찌 하겠느냐?"
유비가 그렇게 말하자 장비는 더 부아가 나는 모양이었다.
돌연 목소리를 높이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
"유표 그 쓸모 없는 늙은 것은 이제 무덤 쓸 땅도 남지 않게 될 것이오.
젊은 계집의 치마폭에 휩싸여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다"
유비가 문득 엄한 표정으로 나무랐다.
그러나 장비는 이미 내친 김이라는 듯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형님도 그렇소. 우격다짐을 써서라도 일을 되도록 했어야 될 거 아니오?
진작 허도로 밀고 갔더라면 지금쯤은 조조 놈 갈 곳이 없었을 게요"
"세상일이 그리 네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이 때가 있으니 서둘지 말아라"
유표의 마음이 여린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친 게
애석하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나
유비는 짐짓 속마음을 숨기며 장비를 달랬다.
그래도 장비는 한동안을 더 불퉁거리다가
사냥이라도 하겠다며 말을 달려나갔다.
"형주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장비가 나간 뒤 유비가 한층 울적한 심경으로 돗자리를 치고 있는데
손건이 들어와 알렸다.
만나 보니 유표 곁에서 일하는 주리였다.
"우리 사군께서 장군을 부르십니다"
그 같은 전갈을 들은 유비는
곧 의관을 갈아입고 말에 올랐다.
까닭은 알 수 없었으나 신야로 옮긴이래
유표가 사람을 보내 부르는 일이 그리 드물지는 않았던 것이다.
바깥에 나오니 날이 흐리고 눈발이 조금씩 날리고 있었다.
따뜻한 남쪽으로 치우친 지방이라고는 하나 겨울은 역시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벌써 이곳 형주로 내몰린 지도 너덧 해가 되는구나.
내 나이 이미 마흔 일곱, 아직도 남의 식객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아아, 장차 남은 날이 어찌 되려는가......'
☆☆☆
찬바람을 맞으며 말 등에 올라 길을 재촉하던 유비는
문득 속으로 그렇게 탄식했다.
홍안의 청년으로 튼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난 지 20여 년,
아직도 그는 무릎 댈 땅조차 없는 떠돌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 대한 새삼스런 깨달음은
유비로 하여금 절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게 했다.
특히 형주로 옮겨 앉은 뒤의 너덧 해는
이제는 거의 후회와 같은 느낌으로 그를 괴롭혔다.
유비는 조조에게 쫓긴 나머지 어쩔 수 없어 의지해 갔으나
유표는 그를 맞아 몹시 두터이 대접했다.
한낱 갈 데 없는 객장이 아니라
피붙이의 정과 귀한 손님을 모시는 예로 대하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유비의 가솔들과 측근은
오랜만에 평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생각하던 그 무렵의 몇 년은 거의 칼의 숲을 헤치고
피의 내를 건너며 지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에 남의 밑에 있다가 항복하여 유표의 장수가 된 장무와 진손이
강하의 백성을 약탈하며 모반을 꾀한다는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때마침 유비를 불러 함께 술을 마시다가
그 같은 전갈을 들은 유표가 놀라고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두 도적이 다시 모반을 한다면 화가 결코 작지 아니하겠구나!"
"형님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저를 보내 그 도둑을 잡도록 해주십시오"
그 말에 어둡던 유표의 얼굴이 일시에 밝아졌다.
청하기라도 해야 할 판에 스스로 가겠다고 나서니
유표는 그 자리에서 허락하고 3만 군사를 유비에게 내주었다.
"아우는 먼저 가서 도적들의 기를 꺾어 놓게. 내 곧 뒤 따라 감세"
그 같은 명을 받은 유비는 그날로 행군을 시작하여 하루만에 강하에 이르렀다.
유비가 왔다는 말을 듣자 장무와 진손도 군사를 이끌고 나와 맞섰다.
유비는 관, 장 두 아우와 조운을 데리고 문기 아래로 나와 그런 장무와 진손의 세력을 살폈다.
그때 장무는 한 마리 말 위에 높이 거드름을 피고 있었는데
유비가 보니 그 말이 예삿말이 아니었다.
"저 말은 반드시 천리마일 것이다"
한동안 장무는 제쳐놓고
말만 바라보던 유비가 탐나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곁에 있던 조운이
미처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자신의 말을 박차 달려가며 소리쳤다.
"제가 저 도적을 죽이고 말을 가져다 주공께 바치겠습니다"
조운이 창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뛰어들자
그쪽에서도 장무가 겁 없이 말을 몰며 마주쳐왔다.
조운은 속으로 잘됐다 싶었다.
두 말이 엇갈리기 세 번도 되기 전에 장무를 찔러 말에서 떨어뜨리고,
놀란 그 말의 고삐를 잡았다.
그 말을 탐내는 유비에게 바치고자 함이었다.
진손은 조운이 자기 동료를 찔러 죽이고 그 말을 빼앗아 돌아가는 걸보고
두려운 중에도 분기를 참을 길이 없었다.
긴칼을 휘둘러 뒤쫓으며 동료의 말을 되찾으려 했다.
"저 놈은 내가 맡겠소"
그걸 본 장비가 장팔상모를 꼬나들고 말 배를 차며 소리쳤다.
조운이 적의 우두머리 둘을 모두 죽여 버릴까봐 걱정된다는 듯한 서두름이었다.
장무가 조운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처럼 진손도 장비의 적수로는 아무래도 모자랐다.
장비의 창에 찔려 말 아래로 떨어지니
그걸 본 졸개들은 그대로 풍비박산 흩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
유비는 나머지 무리들을 달래 항복 받고
강하의 여러 현을 다시 평온케 만든 뒤 형주로 돌아갔다.
유표는 친히 성밖까지 나와 이기고 온 유비를 성안으로 맞아들이고
크게 잔치를 열어 그 공을 치하했다.
술이 반쯤 올랐을 무렵이었다.
유표가 문득 술잔을 멈추고 말했다.
"아우가 이토록 웅재를 갖추고 있으니 우리 형주로서는 실로 의지하는 바 크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남월의 오랑캐가 느닷없이 몰려오는 것과 장로, 손권이 움직이는 것이네.
그들만 아니라면 두 다리를 편히 뻗고 지낼 수 있으련만......"
그러자 유비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일이라면 형님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이 아우에게 세 장수가 있는데 모두 쓸만한 인물들입니다.
장비로 하여금 남월과의 경계를 돌며 보살피게 하고
관우는 고자성에서 장로를 막게 하며
조운은 삼강으로 보내 손권을 당하게 하신다면
무엇을 달리 걱정하실 게 있겠습니까?"
유표가 들으니
가슴속의 걱정이 한꺼번에 스러지는 말이었다.
기꺼이 그 말을 따라
장비와 관우와 조운을 각기 유비가 정한 곳으로 보내 지키게 했다.
유표의 장수요, 처남인 채모는
그 소식을 듣자 곧 누이인 채부인을 찾아보고 말했다.
"유비는 수하 장수 셋을 외지로 내보내고 자신만이 성안에 남아있습니다.
반드시 우리 형주의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니 누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형주에서 유비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게
마땅치 않아서 하는 말이었다.
이때 채부인은 전처가 낳은 장남을 제치고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형주를 넘겨주게 하기 위해
밤낮으로 유표를 졸라대는 중이었다.
두 아우의 말이 진실이라면
형주는 제 아들이 물려받기 전에 유비에게 먼저 넘어갈 것 같아 안달이 났다.
그날 밤이 되자 유표의 베갯머리에서 속살거렸다.
"제가 들으니 형주 사람들이 모두 유현덕을 우러러 그와 오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미리 방비를 해야지요.
특히 지금 유현덕을 성안에 있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이로울 게 없으니 바깥으로 내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우선 유비를 유표에게서 떼어놓고 일을 꾸미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 유비의 인품에 흠뻑 반해 버린 유표는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유현덕은 어진 사람이니 쓸 데 없는 걱정은 마시오"
유표가 그렇게 나오자 채부인도 당장은 어쩌는 수 가 없었다.
더는 조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마디 쐐기를 박아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랬으면 오죽 좋겠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을까 봐 걱정입니다"
유표는 그 말까지 타박을 주지는 않았으나
찌푸린 얼굴로 입을 다무는 걸 보아 마음이 움직인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런데 일은 뜻밖의 방향에서 채부인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다음날이었다.
유표가 보니
유비가 매우 좋은 말을 타고 있는데 전에 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말이 아주 훌륭하군. 어디서 얻었는가?"
유표가 이리저리 말을 살피다가 물었다.
무장은 아니지만 전란의 시대를 살다보니
졸은 말을 탐내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유비가 겸연쩍은 듯 대답했다.
"지난번 싸움에서 얻었습니다. 바로 장무가 타던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말이다.
여포의 적토마인들 이보다 더하겠는가?"
유비의 대답을 듣고도
유표는 그렇게 찬탄하기를 마지않았다.
유비는 유표가 그 말을 탐내는 걸 보자 기꺼이 유표에게 바쳤다.
"마음에 드신다니 받아주시면 기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표는
건성으로 몇 번 사양하다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말을 갈아타고
성안으로 돌아가니 괴월이 문득 그 말을 살피다가 물었다.
"전에 보이지 않던 말을 타셨습니다.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유현덕이 준 것일세"
유표는 기쁜 얼굴로 말을 얻은 경위를 밝혔다.
그러나 괴월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전에 선형 괴량이 말의 상을 잘 보았는데 저 역시 조금은 볼 줄을 압니다.
지금 이 말은 눈 아래 눈물 받이가 있고 머리에도 흰 점이 있는 걸로 보아
적로란 이름의 말이 틀림없습니다.
이 말은 반드시 그 주인을 해친다고 하니 주공께서는 타지 않도록 하십시오.
전 주인인 장무가 죽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유표는 공연히 가슴이 섬뜩했다.
그리고 그 말을 자기에게 준 유비에게까지 의심스러워졌다.
유표는 다음날 일찍 유비를 불러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어제 좋은 말을 주어 참으로 고맙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 말은 나 같은 위인이 탈 물건이 못 되는 것 같네.
아우는 언제 싸움에 나갈지 모르는 사람이라 항상 좋은 말이 필요할 게 아닌가?
내게 준 뜻은 고마우나 돌려 보낼 테니 잘 쓰도록 하게"
이미 그 말이 주인을 해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은 알려주지 않고
말만 돌려보낸다는 것은 그만큼 유비를 의심한다는 뜻이었다.
☆☆☆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유비는 고맙게 적로마를 되돌려 받았다.
그로서는 내심 아끼면서도 마지못해 바친 말이었기 때문이다.
유비가 고마워하며 되돌려 받는 것으로 미루어
나쁜 뜻으로 그 말을 자신에게 보낸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으나
한번 시작된 유표의 의심은 스러지지 않았다.
며칠 전 밤에 채부인이 속살거리던 말이 떠오르며
문득 유비를 성안에 데리고 있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어 다시 말했다.
"현제가 이 성 안에 머문 지 오래 되어
자칫하면 군사 다스리는 일을 잊어버릴까 두렵네.
양양에 딸린 땅으로 신야란 현이 있는데 그리로 가보는 게 어떻겠는가?
그리 넓지는 않아도 돈과 곡식은 넉넉한 곳이니
거느린 군마를 이끌고 가서 머물 만은 할 것이네"
말하자면 점잖은 축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