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문장대에서 본 풍경
반 고흐와 자포니즘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아침, 첫 비행기를 탄 제 마음은 한층 들떠 있었습니다. 사실 런던에 머물면서 갤러리와 미술관 산책을 즐기고 있었지만, 가장 고대했던 것은 암스테르담으로 건너가 좋아하는 반 고흐의 작품에 푹 빠져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걸음도 가볍게 스히폴 공항에서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거쳐 반 고흐 미술관에 도착했습니다.
트램 정류소에서 고흐 미술관까지 걷는 동안 ‘아이 암스테르담(I Amsterdam)’이라 씌어진 조형물이 포토 존이 되어 발목을 잡을 만도 하고, 우아하고 고풍스런 외관의 국립미술관(Rijks Museum)과, 스트리트 아티스트로 유명한 뱅크시와 앤디 워홀의 전시관이 시선을 붙들기도 했지만. 제 마음은 오직 반 고흐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반 고흐의 따스한 공간으로 들어갔습니다. 반 고흐의 작품은 국내전시를 통해서도 보아왔기에 무척 익숙했지만 그의 고향땅에서 바라보는 작품은 또 다른 감상에 젖게 했습니다.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해서는 연민할 수밖에 없고, 철저한 연구자적 태도와 작업에 대한 열의에 존경은 새록새록 묻어났습니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순차적으로 전시된 작품을 보면서 조금씩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남프랑스 아를(Arles) 시절 작품에서부터 고조되는 일본화풍 때문입니다. 그동안 <귀가 잘린 고흐의 자화상>이나 <탕기 영감의 초상>과 같은 작품을 보며, 그 배경에 일본의 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繪)가 묘사된 것을 보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당시 유럽에 영향을 미쳤던 일본 취향 또는 일본 미술의 영향을 가리키는, 자포니즘(Japonism)으로서 거부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으로 넓게 해석했었습니다. 그러나 반 고흐의 <아몬드 꽃>그림 앞에 섰을 때, 그가 지금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본화풍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일찌감치 유럽에 진출한 일본화가 솔직히 부러웠던 것입니다.
그의 일본화풍에 대한 선호는 <꽃피는 매화나무> 그림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그림은 아예 원본이 되는 히로시게의 <매화나무>와 나란히 걸려 있었는데, 그가 일본화를 유화로 모사하며 얼마나 추종하고 연구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뮤지엄 숍엔 반 고흐에게 영향을 준 히로시게나 호쿠사이의 도록뿐 아니라 일본의 문양 그림책과 기모노 책까지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 고흐의 책들은 일본어로도 출간되어 있을 정도로 그는 일본과 깊은 인연의 끈을 갖고 있었습니다.
암스테르담으로 오기 전, 런던의 여러 미술관에서도 수많은 풍경과 인물을 보았지만 반 고흐의 작업은 상당히 차별성을 가지며 독특하게 다가옵니다. 그의 그림은 평면적 화면구성을 갖고 있으며, 짧은 선묘적 특징이 살아있는데, 이것이 동양적이어서 색다른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인이 보았을 때는 친숙함을 느끼고, 서양인이 보았을 때는 동양적 요소가 가미되어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와 닿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예로부터 서양의 미술은 빛에 의해 드러나는 대상과 그 표현이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명암으로 자연스런 실제감을 드러내는 면적 표현특징이 강합니다. 그에 비해 동양은 빛보다는 대상의 존재론적 본질이 중요했기에 표현에 있어 빛을 생략하고 대상의 골격을 이루는 선적 특징을 갖습니다. 그런데 반 고흐는 빛과 선,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결합시킵니다. 서양미술의 오랜 전통 속에 계승되어온 빛의 양감을 일본화의 영향아래 포착한 선의 흐름으로 결합시킨 셈입니다.
반 고흐가 만약 우리의 풍속화나 민화를 먼저 만났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위상, 한국 작가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자포니즘 덕분에 유럽에서 일본인의 인지도는 높고 문화적 위상은 상당부분 발휘되고 있습니다. 미술이 국력을 만드는 발판이 되는 것을 목도합니다.
반 고흐와 자포니즘의 결합을 보며, 미술이란 창의적이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세계이기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것이라는 말을 재삼 확인합니다. 한국화를 전공한 제가 또 새롭게 개척해 나가야 할 길이 있음을 느끼며, 고흐의 일본화풍을 바라보던 그 불편했던 마음을 자신감으로 돌려놓습니다.
[펌] / 필자소개; 안진의(한국화가, 색채전공 박사, 홍익대에서 채색화와 색채학 강의) / 2016년 07월 27일 (수) 03:04:19
고란초 (고란초과) Crypsinus hastatus / 2016.7.14. 부여 부소산성 고란사에서 / 박대문(환경부 국장 역임) 촬영
극장 예고편 제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 운전이 금지돼 있다. 학교에 등록하고, 직업을 구하고, 여행을 갈 때도 남성 허락을 받고 동행해야 한다. 지난해까지는 투표권조차 없었다. 이란에서는 마네킹에 히잡을 씌우지 않는 것도 불법이다. 얼마 전 파키스탄에선 ‘여성 체벌법’이 발의됐다. 남편 말을 듣지 않거나 허락받지 않은 복장을 하면 때려도 된다는 법이다.
이런 웃지 못할 황당 법안이 나올 때마다 봉건시대에나 있을 법한 금지법 사례가 인용된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여성이 머리를 자르거나 틀니를 낄 때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학교나 술집, 예배장소의 1500피트(457m) 이내에서 동물이 교미하는 것도 위법이다. 곰을 총으로 쏘는 것은 괜찮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 잠자는 곰을 깨우면 안 된다는 법까지 있다. 영국에서 왕이나 여왕 사진이 있는 우표를 거꾸로 붙이면 불법이란 건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캐나다에서 아기 보행기를 금지한 건 그나마 발달지연이나 사고위험이라는 명분이라도 있다. 의회의사당에서 죽는 것을 금지한다거나 스케이팅 속도를 시속 50마일(약 80㎞) 이하로 규정한 것은 불필요한 법이다. 중국에서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가 금지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역사 왜곡과 공산당 강령 위반 때문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말라위의 ‘방귀 금지법’은 해외 유머감이다.
남의 일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묻지마 법안’들이 툭하면 발의된다. 너도나도 무슨무슨 금지법부터 만들고 보자는 통에 과잉 입법, 황당 법안 사태가 끊이지 않는다. 일명 ‘퇴근 후 카카오톡 금지법’은 국회의원부터 지키지 못할 법이다. 근로자들의 표를 좇아 얼씨구나 하고 만든 졸속법안의 대표 사례다.
이젠 한가롭게 영화를 볼 때마저 시간을 재가며 불법 여부를 감시해야 할 판이다. 영화 시작 전 광고나 예고편 상영을 제한하는 법안이 잇달아 발의됐다. 이를 조금이라도 어기면 10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물린다고 한다. 권위주의 시대의 관변 뉴스라면 모를까, 정보전달 기능을 겸한 광고나 흥미로운 예고편까지 규제의 틀에 가두는 건 지나치다.
영화 예고편은 사실 덤으로 얻는 재미다. 1분 남짓의 ‘맛보기’에 눈과 귀가 즐겁다. 소비자로선 관람료 이외의 소득이다. ‘스타워즈’ 열풍 땐 수많은 팬이 시리즈 예고편만을 보기 위해 여러 극장을 섭렵하기도 했다. 어쩌다 이런 것까지 법으로 옭아매게 됐을까. 그렇잖아도 무엇을 하지 말라는 법이 너무 많다. 이러다 ‘금지 공화국’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펌] / 출처; 한경닷컴 / 고두현(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 2016-07-27 00:04:50
정전협정 63주년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은 3년여 간 이어지면서 한반도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한 뒤 9월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유엔군과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10월 중공군 참전으로 퇴각해 북위 38도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교착상태에 빠지기까지 1년 걸렸다. 그후 정전(停戰)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중부 고지 전투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정전협상은 1951년 7월 개성에서 시작돼 이듬해 10월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겼다. 전쟁을 끝내는 게 아니라 일시 중단하는 협상이어서 임시 국경선 설정, 정전 이행 감시 등 합의할 사항이 많았고 내용과 절차가 복잡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하면서 반발했지만, 1953년 7월27일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정전협정에 서명해 모든 전선에서 포성이 멎었다. 광복 직후 38도선으로 분단됐던 남북한은 155마일의 구불구불한 군사분계선(MDL)으로 다시 나뉘어졌다. MDL 기준 남북 양쪽 2㎞ 구간을 비무장지대(DMZ)로 설정했고,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출범했다.
당시만 해도 정전체제가 이토록 오래 지속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대통령이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도 분단을 과도기적 상황으로 여긴 탓이라고 한다. 하지만 벌써 63년이 흘렀다. 젊은 시절에 전장을 피해 남쪽으로 일시 피신했던 사람들은 이제 백발노인이 돼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짓는다. 세월에 따라 정전체제도 변모했다. 협정 일부 조항은 유명무실화됐고 DMZ에는 중화기가 배치되고 있다.
판문점은 분단을 상징하는 곳이다. 소설가 성석제는 지난해 펴낸 산문집에서 “판문점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 각자의 삶, 생애의 지지물 중에서도 가장 강고한 것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판문점 회담장에 대해선 이런 말을 남겼다. “일시적인 용도에 맞춰 지은 시설이 세세연년 자연의 풍상은 물론이고 인간끼리의 극한 대결을 견뎌내야 했으니 껍질은 계속 덧씌워지고 덧칠을 했을 것이다. 사람은 또 얼마나 바뀌고 갈렸을 것인가.”
[펌] / 출처; 세계일보 / 박완규(세계일보 논설위원) / 2016-07-26 22:48:19
대인과 소인배
‘대인배’라는 말이 불편하다. ‘통 큰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 말이 곧잘 쓰인다. 인터넷 게시판 같은 곳은 물론이고 기사에서도 보인다.
수년 전 방송인 김구라씨가 이혼하면서 아내가 진 빚 10여억원을 떠안겠다고 선언하자 “대인배”라는 사람들의 반응이 나왔다는 식이다. 지상파 방송 앵커가 이 말을 쓰는 걸 보고 뜨악했다는 네티즌도 있다. 네이버의 오픈사전에서는 대인배를 신조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 웹툰 작가가 자신의 만화에서 처음 썼고, 팬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퍼뜨려 유행하게 됐다고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봤다. 대인배라는 말은 없다. 그냥 ‘대인’이다. 소인배와 짝을 이루는 말도 군자(君子)다. 조선의 의병장으로도 유명한 조헌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군자는 초야에 있고, 소인배가 관직에 있으면 백성이 삶을 누리지 못한다’며 붕당과 학정의 폐단을 논하고 있다. 둘 사이를 일컬어 빙탄지간(氷炭之間)이라 했다. 얼음과 숯처럼 어울릴 수 없는 사이라는 말이다. 군자와 소인배를 두고 훈유, 즉 향기가 나는 풀과 악취를 풍기는 풀로도 비유한다.
▦ 대인은 군자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이를 일컬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종 때 홍문관 부제학 최보한이 주역을 인용해 ‘대인은 수신제가치국 평천하를 이룬 다음에야 될 수 있는 것’이라며 임금이 대인의 덕을 쌓을 것을 주문한다. 이쯤 되면 대인은 가히 최고 경지의 리더십이라 할 수 있겠다. 인격과 뛰어난 능력을 겸비했지만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선의로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동아시아에만 있는 게 아니다. 폴리네시아나 파푸아 뉴기니, 아프리카 등 여러 문화권에 존재하는 이런 유형의 리더를 인류학자들은 ‘빅맨(Big Man)’으로 개념화했다.
▦ 배(輩)는 무리를 뜻한다. 선배(先輩)나 후배(後輩)처럼 중립적 의미로도 쓰이지만 대개는 부정적인 말에 붙이는 접미어다. 폭력배나 모리배, 간신배 같은 경우다. 군자보다 고고(孤高)한 대인에게 붙이기에 적당한 말이 아니다. 언중(言衆)이 이치에 맞지 않아도 말을 만들고, 그 말이 번져 유행어가 되고, 언젠가 표준어까지 넘볼 수도 있겠지만 대인배는 아니다 싶다. 인터넷 시대에 재기발랄한 신어, 조어가 넘쳐 나지만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펌] / 출처; 한국일보 / 정진황(한국일보 논설위원) / 2016.07.26 20:00
Beach Scene at Trouville / 1867 / Private collection Painting - oil on panel / Height: 20 cm (7.87 in.), Width: 35 cm (13.78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