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기념관 The MacArthur Memorial 맥아더의 메모장 (appointment book)에는 |
"이 상자 안에는 1945년~1948년 사이의 맥아더 문서들이 있습니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들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보낸 전보(1945. 7월 ~9월)'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전보를 보낸 것은 귀국문제 때문이었다.
조속한 귀국을 위해 미군정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미 국무부에 승인을 받지못한 이승만에게
맥아더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내가 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역할을 위한 기회를 주십시오."
이승만의 편지엔 간절한 진정이 담겨있었다.
그에게 맥아더는 강력한 후원자였고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귀국길을 열어준다.
2. 이승만의 귀국, 미군정이 준비한 대대적 환영식.
그러나 김구 선생과 임정 요원들의 귀국은 아무도 몰랐다.
중국 중경시 임시정부터.
해방이 되던 그때
임시정부는
중국 중경에 있었다.
미일전쟁(1939년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며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한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해방을 맞는다.
험난했던 항일 독립 투쟁이 이제 끝이었다.
그리고 감격의 귀국길에 오르면서 한 장의 사진을 찍는다.
"그러니까 내일은 조국으로 돌아간다, 그 전날 찍은 거니까,
귀국 전날 기념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그래서 임정 요원들도 거기서 일하던 동지들 전체가 거기서 찍은 건데,
그땐 상당히 흥분된 기분이었죠."
- 윤경빈(90, 김구 비서)
하지만 고국땅을 먼저 밟은 것은 이승만이었다.
1945. 10. 16.
이승만은 임정 요원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1945. 10. 17.
이승만 귀국 직후 중앙청에서 열린 기자회견.
이날 기사는 다음날 자유신문에 자세하게 실렸다.
이승만보다 한발 앞서 들어와 그를 소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존 하지 중장(John Reed Hodge)이었다.
그는 당시 미 육군 남한 주둔 사령관으로
미군정 남한 최고 책임자였다.
"제가 이박사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에 조선 사람들의 위대한 지도자가 있습니다.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일해왔고,
개인의 야심은 전혀 없는 분입니다.
군이나 정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개인 자격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 존 하지 중장
"어제 아침에 동경을 떠나서
어제 오후에 서울에 와서 내렸습니다.
내가 소문 없이 온 것은
무슨 비밀 관계가 있거나 무슨 정당 연락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 이승만
"세상에서 일본과 동양 전체로 해서 맥아더가 제일 높은 사람이고,
그 다음으로 한국에서 하지중장이 제일 높은데,
그 제일 높은 하지중장이 게걸음을 걷고 걸어오고
그 앞에 천천히 안내를 받아 오는 사람이 이승만 박사야!
얼마나 높으면 그렇게 안내를 받고 와요!"
- 문제안(90살, 前 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
이승만에 대한 하지 중장의 예우는 각별했다.
그는 이승만이 연설하는 내내 옆에 서 있었다.
"하지 중장이 부동자세로 탁 서 있는 거야.
이승만 박사가 "앉아주세요." 하니까
"감사합니다." 하더니 옆에 앉는 걸 보니,
아, 제일 높은 하지 중장이 그러는 걸 보니까
이승만이 제일 높은 사람이구나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연설을 했어."
- 문제안(90살, 前 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
그리고 3일후,
1945. 10. 20.
당시 남한을 통치하고 있던 미군정은
이승만을 위해 대대적인 환영식이 열렸다.
5만의 인파가 참석한 가운데
군악대까지 동원된 성대한 환영식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1945. 11. 23.
김구가 이끄는 중경 임시정부 요원들이 귀국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마련한 환영행사는 없었다.
"아무도 안왔지 내가 제일 먼저 갔는데.
아무도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 도착한 걸 모르고 있었어."
- 문제안(90살, 前 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
"미군 몇 사람하고,
미군 지프차 몇 대 밖에,
우리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우리가 가지고 갔던 태극기를 흔드는데
또 그건 흔들지 말라고 한다고
미군 헌병들이 뒤에서 못하게 하더라고."
- 윤경빈(90, 김구 비서)
귀국 당시 이승만은 개인 자격으로 돌아왔다.
그는 남한의 많은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극진히 대우했다.
이승만이 그 당시 돈암장(서울특별시 성북동 동소문동)에 머물렀는데
하지 중장은 이승만이 외출할 때 순종이 쓰던 리무진을 내주기도 했고
자신의 부관 스미스를 임시 부관으로 시중을 들게 했다.
이승만의 경호 또한 미군정이 담당했다.
미군정은 왜 이승만을 특별히 대우했던 것일까?
미국 버지니아 노포크 시.
맥아더 문서자료실.
"이것이 맥아더의 개인 메모장입니다. 42년에서 49년까지의 기록입니다."
하지의 상관이자,
남한은 물론 극동아시아에서 막강한 권력을 잡고 있던
맥아더의 메모장을 보면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이라고 적어놓았다.
'임시대통령 이승만' 이건 어떻게 된 일인가?
단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이승만에 대해
미국이 다른 정치인들보다 주목하고,
당시 극동 아시아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그를 임시대통령이라 칭한 것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수한 역사'가 얽혀있다.
3. 같은 꿈, 다른 길-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노선차이
- 이승만, 오직 '외교'
'미국 여론 악화하는 야만적인 테러리즘'에 냉담!~
중국 상하이 노만구.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터.
1919년 3.1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상하이 최초 임시정부 청사는,
허름한 골목안 작은 2층집으로 규모가 작고 초라했지만
의정원과 행정원 등 정부조직 형태를 갖추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손병희, 이동녕, 안창호 등이 주축이 된 임시정부는
국무총리와 장관 등 정부 각료들의 인선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임시정부가 주목한 이가 이승만이었다.
다른 요원들과 달리 미국에 거주하는 이승만.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를 준비하며
재미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은
이미 그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19년 4월 15일.
자신이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는 전보를 받는다.
그는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 다섯.
그는 한인 사회는 물론 미국내에서도 인정받는 최고의 엘리트였다.
미국 동부 최고의 명문대로 손꼽히는 <프린스턴 대학>
두 명의 미국 대통령을 배출한 이 대학에서 이승만은,
미국 22대 대통령이자 당시 총장이었던 윌슨과 각별한 인연을 맺으며
박사과정을 밟았다.
<프린스턴 대학 고서 자료실>에는 이승만의 학위 논문이 보관되어 있다.
그가 서른 여섯에 쓴 논문이었다.
"이것이 1910년의 이승만의 논문입니다.
그가 접수시킨 원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승만의 파일에 들어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온 유학생 이승만이
국제법상에서의 전시중립과 미국의 역할을 분석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불과 2년만에 박사학위를 수료한 것이다.
1910년 이승만의 논문
-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당시 2년 만에 이승만 박사가 논문을 썼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보통 5년에서 7년 걸리는 일인데 지금이라면 불가능합니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 이승만.
프린스턴 대학에 오기전에 이승만은
명문 하버드 대학에서 1년 반만에 석사학위를 마쳤다.
그의 성적을 보면 서양 역사와 정치학 관련 과목이 주류를 이룬다.
그의 관심사는 일찍부터 국제정치사였다.
그리고 프린스턴 입학 지원서에는
자신의 장래 희망을 교육과 선교사업으로 적어놓고 있다.
장차 조국에 돌아가 서양문물을 도입하겠다는 생각이
유학시절 이승만의 계획이었다.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그때,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리광장에서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일하던
미국인 스티븐슨의 암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세 발의 총성이 울리다' - 1908. 3. 24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지(紙)
"1908년 3월 23일.
저 시계탑에서 북쪽으로 한 20야드쯤,
이 장소가 바로 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슨을 저격한 장소입니다."
스티븐슨은
일본 외교고문으로 일하며,
'일본의 통치가 조선인들에게 행복한 일'이라고 선전하며
미주 한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었고,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가
그를 저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누가 그랬냐?
황인종이 백인 외교관을 쐈다고?
당시 미국 사람들에게 황인종은 인간도 아니었는데
근데 어떻게 황인종이 백인 외교관을 쐈느냐 크게 분노했고,
그들은 전명운과 장인환을 린치(폭행)하자고 하면서 500명이나 모였습니다."
- 문충한 (<의사 장인환> 저자)
스티븐슨 저격사건은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여
재미 한인들을 결집시켰다.
일제 침탈에 항거한 전명운, 장인환.
한인 사회는 두 의사를 위한 재판 준비와 대대적인 모금 활동 시작했다.
'전명운, 장인환 재판 준비와 모금 활동' - 1908. 3. 25 공립신보
그리고 전명운, 장인환의 재판을 위해
이승만을 찾아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이승만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들의 재판 통역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장인환 전명운의 사진이 실린 공립신보 의열투쟁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실린
이승만의 자서전
"이승만이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형편을 살피고 통역하기를 거절하였다." - <재미한인오백년사>
"예수교인 신분으로 살인사건 재판의 통역은 원하지 않는다." - <재미한인오백년사>
당시 조선인에게 독립의 열기를 불어넣었던 이 사건.
하지만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미국의 여론을 살피고 있었다.
"두 명의 한국인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스티븐슨을 사살하였다.
이 살해 사건은 일본의 선전기관들이
한국 사람들을 흉도이고 최악의 일당이라고 묘사하는데 대대적으로 이용되었다."
- <이승만 자서전(Autobiographical Notes)> 초고 중
일제에 대한 분노와 나라를 잃은 분노속에 고통받던 그때,
필요했던 건 다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독립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투쟁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듬해 1909년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도
그는 미국 여론의 악화를 걱정했다.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 신문에 한국인들은 살인마이며 무지몽매하다는 기사들이 가득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한국인인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교수는 나를 무서워하며 만나주지 않았다."
- <이승만 자서전(Autobiographical Notes)> 초고 중
안중근, 장인환, 전명운.
이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식민지 조선에서 최후의 방법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장렬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프린스턴 대학 출신의 박사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한마디로 이건 테러 행위이고,
미국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독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생각과 행동은 당시 여느 독립운동가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4. '프레지던트''임을 주장하는 이승만,
임시정부에 불어 닥친 대통령 논란!
이승만과 상하이 임시정부.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조직을 정비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미국 박사인 이승만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이승만으로부터 날아온 편지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국무총리로 임명된 이승만이
자신을 '프레지던트(President)' 즉, 대통령으로 주장했던 것이다.
자신이 대통령임을 알리는 우편엽서 홍보물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각종 공문에도 '대통령' 직함을 고집했다.
그는 유난히 대통령이라는 직함에 집착했다.
'이승만이 일왕에게 보낸 공문 (1919. 6. 18)'
- President of the Repubilic of Korea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대통령'이라는 직함이 없었기 때문에
임시정부 요원들도 격분했다.
안창호가 사태 해결을 위한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 각하.
임정은 국무총리 제도이고,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은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사를 하시면
헌법 위반이며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5일 안창호가 이승만에게 보낸 전보
그러나 이승만은 취임식을 갖는 등
대통령으로 활동하며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밀어부쳤다.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 축하 행사 - 미국 하와이'
"내가 대통령 명의로 각국에 국서를 보냈으니...
지금 대통령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겠소.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
- 안창호에 보내는 이승만의 편지중에서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임을 자인하며
자신의 정치 구상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5. 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 탄핵'
-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요!"
이승만의 탄핵 기사가 실린 독립신문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는
조선의 독립 보장을 위해 국제연맹에 위임 통치를 청원 하는 등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과 동떨어진 주장을 했다.
1919. 4. 18. <신한민보>에는
우리나라를 예수교국으로 만들어
일본의 통치권을 벗는 그날로 미국식 국가 선포를 주장하는
이승만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1921. 3. 5일자 독립신문에는
미국 정치를 본떠 대통령의 교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른바 '준비론', '비인도적 행동을 삼가할 것'을 적으며
임시정부의 항일 투쟁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표명했다.
"무력의 승리는 준비에 달려 있다."
"비인도적 행동이 없기를 바란다.'
이러한 이승만의 행동과 발언에 임시정부는 크게 분노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요!
우리 소중한 주권을 남의 나라에 맡긴다니 말이 됩니까!"
- 신채호의 성토문
중에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법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조직과 자금, 권력을 모두 장악하려고 했다.
"제가 기억하는 대화들을 기억해보면 이렇습니다.
임시정부는 권력과 재정권이 임시정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승만은 달랐습니다.
모든 권력이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속해 있었지만
워싱턴의 조직을 통하여 재정권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분열이 생겼죠."
- 안필영(도산 안창호 아들)
그리고 1923년 4월 4일.
임시정부는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초대대통령을 탄핵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탄핵'
'임시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
말하자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서 결정된 모든 사항을 부인하였으며
심지어 정부까지 부인한 바 사실이라'
- <독립신문>
"탄핵안이 제출된 주된 이유는
'임시대통령으로서 주된 근무지인 상하이를 오래 떠나서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 조범래 박사(독립기념관 연구소)
이승만은 대통려 면직과 함께
<구미위원부>를 해체하라는 통보를 받자 격렬히 반발했다.
독립운동 자금인 하와이 인구세를 여전히 자신이 관리했고
임시정부의 정통성까지 거론하며 쿠데타 계획까지 세웠다.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택한 것이다.
1932. 4. 29.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일본 전승 기념 축하연에 폭탄이 투척되었다.
임정 요원 윤봉길이 일으킨 거사.
이 의거는 중국인에 한국의 독립 열망을 알리고
침체되어 있던 독립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미국에서 윤봉길 의사의 거사 소식을 들은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 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 <이승만 자서전> - 로버트 올리버
이때 이승만은 제네바 국제 회의(1933)에 참석하는 등
공식적인 외교활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피차의 갈 길을 갔을 겁니다.
김구 선생으로서는 어떤 대중적 지지기반이 없고 조직이 없는 상황 속에서
순교자적인 열혈한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은
테러리즘이었을 것이고 어떤 순교자적 투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공부했고 외교를 공부했고
그 분야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던 이승만 박사로서는
그러한 테러리즘을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외교 우선주의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 신복룡(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중국 가흥시.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해 임정은 폐쇄되었고
김구와 임정 요원들은 이곳에서 숨어지냈다.
당시 김구가 숨어지냈던 피난처.
"김구 선생님이 긴급할 때 도망갔던 통로입니다."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며 버터나간 김구와 임정.
처절한 상황들을 감내하며 김구와 임정 요원들은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김구는 이승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김구는 이승만에게 국제사회와 미국 외교에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 DC.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세계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김구의 중재로 다시 임정 요원이 된 이승만은
해체되었던 <구미위원부>를 다시 설치하고 활동을 펼쳐나간다.
'1942 한인자유대회.'
그리고 재미한중사회 통합조직인 재미한중연합회 외교위원으로
미국 언론과 여론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선전, 호소활동을 벌여 나갔다.
1944년 이승만은 자신의 활동 상황을 적은 편지를 김구에게 보냈다.
여기엔 미국 체신청이 발행한 태극우표가 동봉되어 있었다.
이 우표는 이승만의 외교 성과물이었다.
'1944. 7 미국 체신국 발행 태극우표'
6. 혼란한 해방정국, 고국으로 향하는 이승만의 행보
이승만의 길과 김구의 길.
그들의 목적은 같았지만 이들의 길은 너무도 달랐다.
일본을 공격하기보다는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세계 언론에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결국 임정과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해방이 가까워오던 1945년.
이승만은 워싱턴에 있었다.
미일전쟁 이후 국제사회 움직임을 지켜보던 그는
임정과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한다.
해방이 된 뒤
미해군 군함 미주리호에서 열린 일본 항복 문서 조인식.
'1945. 9. 2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
이날 미국 대표로 항복문서를 받아낸 사람은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였다.
태평양 전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한국 전쟁에도 참전했던 전쟁영웅 맥아더.
철저한 반공주의자, 반소주의자였던 그는 미 국무부와 또 다른 입장을 고수했다.
당시 극동아시아의 최고 권력자인 맥아더는 소련과의 협상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태평양 지역에서의 맥아더는
손 댈 수 없는, 뭐라고 이야기해도 할 수 없는 존재였거든요.
신적인 존재, '맥아더 정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맥아더대로 움직이고 의견이 달라도 그거 상관없이 했죠."
- 이정식(前 펜실베니아 대학 교수)
당시 귀국길이 막혀 있었던 이승만은 맥아더를 주목하고, 맥아더를 설득해나간다.
이승만은 해방 되기 이전에 7월부터 여러 차례 맥아더에게 전보와 편지를 보냈는데
이를 통해 자신의 강력한 반공노선을 맥아더에게 전달한다.
"한반도에서 미군만의 단독 점령을 환영한다."
"소련과의 공동 점령을 반대한다."
- 1945. 8. 11
이승만의 이런 행동은 맥아더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당시 맥아더는 미국 정부로부터 독자적 권한을 행사하며
점령군으로서 동아시아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런 맥아더가 이승만에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이승만 귀국길에 자신의 전용비행기를 내어주며
이승만의 귀국을 도왔다.
결국 미국 정부가 막고 있던 이승만의 귀국은 맥아더의 보증과 승인하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워싱턴에서 하와이, 거기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귀국길에 오른 이승만은
괌을 거친 뒤 바로 서울로 가지 않았다.
그가 향한 곳은 일본 도쿄.
당시 도쿄엔 전후 처리를 맡은 미국 극동사령부가 주둔, 맥아더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이승만은 도쿄에 3박 4일 머물렸다.
그는 무엇 때문에 도쿄에 들렸을까?
이때 이승만이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맥아더였다.
두 사람은 두 번의 회담을 가진다.
남한의 정치지도자 이승만과 극동아시아 최고사령관 맥아더.
이들이 귀국하기전에 협의해야 했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맥아더는,
임정이 아닌,
남한을 이끌 새로운 정치조직을 요구했고,
그 임무를 '이승만'에게 부여했다.
"맥아더 장군이 민족통일의 결집체를 만드는데
시일이 얼마나 걸리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 자유신문, 1945. 10. 30
"이승만 박사는 10월 23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조선호텔에서
각 정당 대표 200여 명을 초청해가지고 자주 독립의 역사적 단계를 의논하였다."
7. 이승만의 정읍발언, 분단을 선택하다!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 <서울신문 1946년 6월 4일>
기대와 환호속에 귀국한 이승만.
그는 미군정과의 교섭속에서 좌우익을 아우리는 다양한 정치 세력들을 설득해나간다.
그리고 돈암장에서 자신의 최고 라이벌 김구를 만나 설득하기 시작한다.
이승만과 김구.
과거 임정에서 초대 대통령과 경무국장으로 만난 두사람.
26년만의 해후.
"김구 선생은 이승만 박사에 대해
일정한 존경심과 외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연상이었고,
같은 고향 선배였고,
또 자기보다 학벌도 우수하고,
김구 선생이 가지고 있는 어떤 열패감 같은 것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김구 선생은 이승만 박사에게 공사석에서
'형님 좋으신 대로 하시지요'라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 신복룡 석좌교수
그러나 '반공'을 내세우며 대결을 표방한 이승만과,
'민족화합'을 강조하는 김구는,
길이 달랐다...
당시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려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었으며
최대 방해는 '김구'였다고 적고 있다.
'이승만의 사설정보기관(KDRK) 보고서'
자유신문에 실린 존 하지와 이승만 이승만의 사설정보기관(KDRK) 보고문서
이승만의 정치적 행보는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설정보기관을 가동, 남한내 정치인들의 정보를 수집했는데
각 정치단체의 움직임에서부터 각 개인 행동에 이르기까지
이승만은 정치권의 흐름과 동향을 꽤뚫어보고 있었다.
"이승만 박사와 해방정국의 몇몇 정치인들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데
그 어느 사람보다도 질이 높은 아주 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 박사하고 다른 정치가들이 서로 상대가 안돼요.
다른 정치가들은 상대해서 이길 수가 없었어요."
- 유영익(연세대 석좌교수)
그리고 이승마은 자신의 극단적 반공노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1946년 5월. 목포에서 이승만은 향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밝히는 중요한 연설을 한다.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세워
38도선을 깨트리고 소련군을 쫓아내고
북조선을 차지할 것이다."
- <청년해방일보. 1946. 5. 20>
"이박사하고 우리 백범 선생은 사이가 처음에는 참 좋았습니다.
정말 호형호제하고 형님이라고 그랬으니까요.
내가 백범 선생이 이박사에게 형님이라고 했던 것을 들었어요.
그러다가 정치적인 문제에서 의견이 갈리기 시작한 것지요.
정부 형태에 있어서요.
'단독 정부'냐, '남북평화통일정부'를 세우느냐에 있어
근본적으로 생각이 달랐어요."
- 윤경번 (김구 비서, 90세)
그리고 완전한 해방에 대한 염원과 분단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야" - 서울신문. 1946. 6. 4
그리고 이승만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에 등을 돌린다.
김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세우면
반드시 민족은 분열이 되고 민족 간의 상잔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면 수백만이 희생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피차가 단독정부를 세우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백범 선생의 일관된 주장이죠."
- 윤경번 (김구 비서, 90세)
8.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역사의 심판은 내가 다 받겠다~"
이승만은
국내의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미국과의 교감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수순을 밟게 된다.
1948년 결국 총선거가 실시됐고,
1948년 7월 20일.
초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투표가 진행되어
마침내 김구를 누르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다.
"나 이사람 대통령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에 감격적인 말씀 드립니다."
"'나중에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지 않냐,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김규식씨가 이야기 했을 때,
'역사의 심판은 내가 다 받겠다 그런 걱정 말라'라고 했는데,
이승만 박사는 자기가 택한 노선이
확실히 한국 사람에게 최상의 선택이라고 믿고 있었던거죠."
- 유영익 석좌교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처절한 독립투쟁을 통해 되찾은 대한민국.
하지만 둘로 나눠져 서로 다른 나라가 세워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에서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승만의 선택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었고
한반도의 역사는 험난한 역사를 시작한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암살.
1949년 6월 26일 , 김구 암살.
육군 소위 안두희는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에 응함으로써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에
그를 죽이게 되었다고 살해 동기를 진술하였다.
당시 정부는 김구 암살사건은 안두희의 단독 범행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하였고,
복역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처분으로 석방하여 바로 군에 복귀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1960년 4월 19일. 학생 의거.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하야.
민주주의 발전과 경제 건설을 위해 달려온 지난 60년.
대한민국이 소용돌이 칠 때마다
이승만의 업적에 대해 칭송이 되기도 했고
엄중한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기도 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그의 행적과 판단은
바로 지금 우리 사회, 우리 역사의 시발점으로
이승만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60년전에 이승만을 선택했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그를 하야 시킨 대한민국
그 모두가 우리의 모습이다.
이승만은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대한민국속에서
끊임없이 국가적 비전과 반성의 좌표로 제시하는 살아있는 역사다.
- 한국사 전(傳)을 보고
(늘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