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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묵상글 ( 연중 제24주간. - 용서하지 않는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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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연중 제24주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용서하지 않는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여라.”
지난주 교정의 사랑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우리가
이번 주는 용서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웃을 용서하라는 가르침이지만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이번 주 가르침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이웃을 용서하면 하느님도 나를 용서하신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 인간의 용서를 굳이 하느님 용서와 연결하시는 겁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심리학에서도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 용서와 상관없이 용서하라고,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제거하지 않고 암 덩어리를 가진 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앙심과 복수심이라는 암 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은 또 날카로운 칼을 품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를 찌르기에 앞서 자기를 찌를 것이고,
그를 한 번 찌르기 위해 어쩌면 자기를 수천 번, 수만 번 먼저 찌를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린 사랑 없이 또 하느님 없이도 이기적인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행복을 위해 그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나의 행복을 위해 그를 용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앞서 봤듯이 우리 용서를 하느님 용서와 연결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해 주지 않으신답니다.
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듯이 이웃의 죄를 용서하라 하지 않고
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듯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치셨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그분의 날카로운 지적이 맞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용서도 배우고 용서할 힘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주인이 먼저 종을 용서하는 비유를 드십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보다 조금 빚진 다른 종을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노하여 줬던 용서를 회수하고 벌을 내린다는 비유를 드십니다.
같은 용서의 문으로 하느님 용서가 우리에게 들어오고 우리의 용서가 나갑니다.
같은 용서의 됫박으로 하느님 용서를 우리가 받고 우리가 이웃을 용서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관된 가르침으로서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판단하는 대로 판단 받고,
복수하는 대로 복수 받고
용서하는 대로 용서 받는다는 말씀인데 이것은 오늘 독서 집회서도 하는 말입니다.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려고 문을 열 때 그 용서가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한 용서의 문을 열지 않을 때
우리를 위한 하느님 용서도 들어올 수 없다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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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연중 제24주간.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의 핵심 주제는 용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 두가지를 말한다면 죄를 짓지 않는 것과 내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때 마음에는 화 · 분노 · 쓰라림 · 적개심 · 복 수심 · 모멸감 · 우울함 · 무가치 등 온갖 부정적 감정이 쌓입니다. 이러한 감정이 가득차게 되면 무엇보다 우리 몸이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아프고, 소화가 안 되고 잠을 이룰 수 없고 안절부절 못하게 됩니다. 가슴에 가득 차 있는 화, 치를 떨게 만드는 분노는 우리 몸과 영혼을 망가뜨리는 독소입니다. 이러한 독소가 스며들 때 내적 자유도 평화도 은총의 삶을 느끼지 못합니다.
용서를 위해 용서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강조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용서는 의지적으로 결심함으로써 가능한 것/ 둘째, 용서란 상처에서 비롯한 울화와 분노의 악순환에서 해방되는 것/ 셋째, 용서란 내면의 평화와 자유와 힘을 되찾는 것/ 넷째, 용서란 상처 준 사람이 더 이상 내마음을 차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다섯째, 용서란 나의 책임 아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여섯째, 용서란 상처를 치유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 상처를 준 상대방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 일곱 번째, 용서는 있었던 일을 잊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같은 일로 상처 받는 일이 없도록 기억하는 것/ 마지막으로, 용서와 화해는 다르고, 우리는 용서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과 화해하거나 상대방과 헤어져 나만의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으며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 신학’을 전개한 신학자 스미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하는 것은 60킬로그램짜리 배낭을 지고 12킬로미터 정도 산을 오른 후 배낭을 내려놓는 것이다. 용서하는 것은 죄수를 풀어주고 나서 그 죄수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게되는 것이다’
남을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루까 6,37).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도 여러분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마태 6,14; 참조: 마르 11,25)
성 프란치스코의 말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분노와 흥분은 본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 애덕의 장애물이 되므로, 누구의 죄 때문에 화내거나 흥분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가 완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주여, 완전히 용서하게 해 주시어, 우리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는 일 없이 주님 때문에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원수를 위하여 당신께 열심히 기도하며 당신 안에서 모든 이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해 주소서.”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경본 속에서 피흘리는 성체
이탈리아 –1330 년
그가 이 성체를 카스치아로 모셔오기 전에 어느 한 신앙심이 깊은 수도자는 그 기적의 성체가 붙어 있던, 피가 배인 직사각형의 양피지를 경본에서 찢어냈다.
1417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이른 아침에 기적적으로 인도되어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원에 들어간 성녀 리타는 피를 흘리신 그 지극히 성스런 성체 앞에서 그리스도의 고뇌를 깊이 묵상하던 일이 얼마나 잦았던가. 그녀는 양심없는 사람들이 지극히 성스러운 성체 안에 계시는 구세주께 범한 모든 경멸과 불경을 용서해 주십사 하고 얼마나 열렬히 간청하였던가. 그녀는 또한 우리도 성체께 대한 열렬한 사랑과 미사성제를 매일 참례하는 헌신적인 열성을 갖도록 간절히 원하셨다!
두 분의 교황 보니파시오 9세와 그레고리오 12세는 엄격한 교서를 통해 카스치아의 피흘리는 성체유물에 조배하도록 허락하셨고 여러 번 대사를 베풀어 주었다.
1926년에 이 기적의 성체에 관해서 새로이 상세한 연구가 행해졌다. 그 때 모든 학자들은 이 성체에서 분명히 예수님의 모습을 인식 할 수 있다고 확인하였다.(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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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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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연중 제24주간.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의 맑고 푸른 드넓은 하늘처럼, 우리 마음이 너그럽고 맑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드넓고 한계가 없는 무한한 용서를 입었으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인간이 죄인을 용서해주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하는 그 사람의 죄도 용서해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용서하는 것이 용서받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 28,2)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기에,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8) 라고 고백합니다. 곧 주님의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사실, 베드로의 이 질문은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라는 말씀을 듣고서 하는 것이기에,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한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일흔 일곱 번’이라는 이 말씀이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시각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일흔 일곱 번’이라는 말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을 죽이는 이는 누구든지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받았던 것보다 일곱 배나 더 큰 벌을 주겠다고 위협하셨는데, 이는 카인에게 내리는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그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를 보호하기까지 해 준다는 큰 자비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카인의 후손 라멕은 자신에게 가볍게 상처를 입힌 사람과 막대로 자신을 건드린 사내아이를 무자비하게 살해했다고 두 아내 앞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해치는 이는 누구든지 일곱 배가 아니라 ‘일흔일곱 배’로 앙갚음을 할 것이다!”라고 자랑삼아 떠벌립니다(창세 4,23-24).
여기서 보듯이,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되갚고 앙갚음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악함이 클수록 앙갚음도 더 격렬해서. 눈에는 눈, 손에는 손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 더하여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 반면에, 하느님은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그 한계를 두지 않는데서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러니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상대방의 악함보다 항상 더 큰 선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단지 용서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를 보호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를 도와주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돌보아주라는 말입니다. 곧 용서를 넘어서는 용서, 용서한 다음에 거기에 더하여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예수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곧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과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카인의 루손 라멕과 같은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용서”는 빚진 종을 왕이 “가엾이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곧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 자비는 단지 놓아 줄뿐만 아니라, 빛을 탕감해주고 잘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더구나 그것은 청하기도 전에 미리 헤아려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자비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왕은 종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18,33)
이는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의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 고백하기도 전에, 아니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구원해주신, ‘먼저’ 베풀어진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용서에 더하여 선으로 앙갚음되는 더 큰 은총의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역시 하느님의 ‘호의’(헤세드)의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마치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6)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골로 3,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이제는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겠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셨으니
이제는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고,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합니다.
이제는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고,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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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연중 제24주간.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많은 용서를 받고 살았습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한없이 용서하라’,‘언제나’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결코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용서를 받아왔고 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와 잘못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배반자 유다를 용서하시고, 베드로에게 3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당신 오른편에 매달린 죄수에게“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침표를 찍어주신 것에 물음표를 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 하면서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적개심, 원한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며,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너그러이 용서한 데 대한 칭찬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용서는 무조건적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하지만, 이런 용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도록 청하고 무던히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저는 못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름으로 용서할 뿐입니다.’
1독서의 말씀에 머물러 봅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28,2).“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기억하고 네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집회28,6-7).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우리가 관속에 들어갈 때 증오심이나 적개심을 가지고 가서야 되겠습니까? 원한을 버려야 합니다. 종말을 생각하고 미워하지 맙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19.21). 용서한다는 것은 ‘다 잊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서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했을 때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본인을 해칩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서로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십시오! 용서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 4.2%가 홧병(분노증후군)에 걸려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화병은 속에서 불이 나는 병입니다. 화날 일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상황인데도 가슴 안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고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입니다. 상처가 뿜어내는 분노, 화, 적개심, 복수심을 내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둔다면 어찌 우리 몸이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분노와 원한으로 치를 떨 때 우리 몸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 화병에 걸려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죽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더 억울한 것은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이들 중 많은 이가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히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잘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덧나게 하고 스스로를 파괴할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하십시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원망은 황산과 같아서 그것이 담긴 그릇조차 녹인다.” 속상한 일이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만큼 나만 손해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서 미움과 원한을 움켜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집착이 얼마나 우리의 진을 빼는지 모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놈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이를 갈다가 결국은 내가 원한 속에 죽고 맙니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음으로 해 보십시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이 기도를 계속 이어가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나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셔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만 탈렌트(한 노동자가 이십만 년을 일하고 받을 수 있는 품삯)나 되는 빚을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의 정의에는 항상 자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의는 한계가 있습니다. 백 데나리온(한 노동자가 백 일 동안 일하고 받을 수 있는 품삯)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에게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치는 사람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자비로운 사랑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은 모두 합쳐도 ‘백 데나리온’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탕감받은 용서의 빚은 ‘만 탈렌트’나 됩니다. 이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맺힌 한을 푸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용서를 넘어 화해에 이르기 까지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상처가 크면 클수록 더 그렇습니다. 따라서 그 상처로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까지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성가신 파리가 왔다가 돌아가고 또 돌아오듯 자꾸 돌아오고 되살아 나는 증오를 몰아내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누구에게 상처를 받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지지 말고 그 사람을 도구로 쓰셔서 그대를 성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구엔 반 투안 추기경).“우리가 제비꽃을 밟으면 제비꽃은 우리 발뒤꿈치에 좋은 향기를 남긴다. 용서는 그 향기와 같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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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연중 제24주간.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일본과 한국을 이야기할 때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부산에서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일본의 ‘대마도’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가까운 나라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과 한국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국가입니다. 일본의 해적들이 우리의 바다로 와서 약탈을 하였습니다. 급기야 전국을 통일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우리의 문화재가 약탈당하였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많은 도공들이 끌려갔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많은 의병들의 활약으로 일본은 본국으로 철수 하였습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룩했던 제국주의 일본은 1910년에 대한제국을 합병하였습니다. 우리는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만주와 간도로 떠나야 했고,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은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으면서 패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이 일본과 한국의 관계입니다. 한쪽은 끊임없이 침략을 하였고, 한쪽은 그 침략을 막아야 했습니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한국의 지배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있음에도 일본과 한국은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공산주의에 맞서서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국제관계는 개인과의 관계와 다르기에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난 8월 24일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에서 발생하는 ‘오염수’를 바다로 방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최소한 30년은 방출해야 하고, 100년이 넘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일본이 오염수를 바다로 방출하는 것은 비용의 문제라고 합니다. 바다가 방사능에 오염되는 것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오염수라면 자국에서 공업용수로 사용해도 될 것이지만 그렇게 못하는 것은 역시 비용의 문제라고 합니다. 방사능에 오염된 물을 공업용수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있을 것입니다. 일본과 같은 바다를 공유하고 있는 중국은 일본의 수산물 수입을 전면 금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오염수 방출에 대해서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적으로 안전하다면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일본의 오염수 방출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습니다. 한국의 주교회의도 일본의 오염수 방출에 대해서 반대를 표명하였습니다. 바다는 어느 한 나라의 바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은 문제 해결의 본질은 아닙니다. 수산물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문제 해결의 본질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다와 인간이 서로 공존하려는 자세입니다. 바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바다에 오염수를 방출한다면 바다는 오염된 물을 우리에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방관, 외면, 묵인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의 그릇된 행동을 꾸짖었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맡겨주셨던 베드로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공정과 정의를 외면한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회개와 용서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의 전제는 치유 받고자 하는 간절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느님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할 것이다.” 진정한 회개 없이 ‘나는 죄를 용서 받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용서를 ‘돌아온 아들과 자캐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아들을 그리워하겠지만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왔기에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였고, 잔치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행동으로 보여 주었을 때 참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 공정과 정의에 따른 용서를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용서를 청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는 결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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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연중 제24주간.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고해소에 앉아 있다보면 가끔 이런 분들을 만납니다.
신부님! 저는 이런저런 일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몸도 망가지고 재산도 잃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모든 것을 용서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다시 묻습니다.
정말 용서하셨습니까?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아프지 않으시나요? 그 사람의 얼굴이나 음성을 떠올리면 화나지 않으세요?
이렇게 묻는 이유는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만큼 용서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일회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단 한 번의 마음 먹음으로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다 회의적인 단어입니다. 아픔이 떠오를 때마다, 생각날 때마다, 분노할 때마다 용서를 구하고 청해야 합니다.
한가지 아픔과 상처에 수백 번 혹은 수천 번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용서를 청할 때 우리는 비로서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힘은 주님의 은총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용서는 주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뜻은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용서하려고 힘써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한번 용서해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아픔을 계속해서 용서하고 어루만져주세요. 그곳에 주님의 은총과 치유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맛깔스러운 조합
비 오는 날에는 떡볶이와 채소튀김
하루 종일 꿀꿀하고 비 내리는 날에
칼칼한 떡볶이를 만들어봅니다.
떡은 밀떡
어묵은 큼직큼직
대파와 양파도 숭덩숭덩
그리고 떡볶이를 더욱 빛나게 해줄
채소튀김
있는 채소를 총동원하고
반죽에 샤워시켜 팬 위에 올려봅니다.
안 드셔본 분은 있겠지만
한번 드셔본 분은 없을
그 조합~~~
혼자도 좋지만 둘도 좋습니다.
떡볶이와 채소튀김처럼
그렇게 어우러지는 하루는 참으로 맛깔스러운 하루일 것입니다.
비가 오면 어떻습니까?
맛깔스러우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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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연중 제24주간.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을 판단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냥 모든 사람의 말과 행동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까요? 분명히 잘못되었고 또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판단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으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행동에 관해서는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특정한 윤리적 행위를 분석하고 그 행위가 객관적인 윤리 규범과 부합하는지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 관한 판단은 멈추고, 그 사람의 행위에 관한 판단은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행위, 또는 저런 행위는 죄가 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는 사람 자체에 관한 판단은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를 판단하는 것이지 사람을 판단할 권한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며 사랑으로 함께해주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너무나 엄격한 잣대를 세우면서 행위가 아닌 사람 자체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우리 자신도 늘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안에서 용서의 끝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죄인에게도 언제가 공동체의 문을 열어 두고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 자체만을 바라보면서 용서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으며 지적합니다.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만 탈렌트 빚진 사람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일 탈렌트는 당시 노동자의 6,000일 일당에 해당한다고 하지요. 15년 이상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아야지만 손에 쥘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 만 배라면 어느 정도일까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빚을 임금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울까요? 하지만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붙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과장된 금액인 만 탈렌트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무한한 용서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본받지 않는 매정한 종의 모습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외치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사람에 관한 판단 자체를 멈추고,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용서 안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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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내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순간, 내가 가진 것을 절실히 부러워하는 ‘또 다른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라(푸블릴리우스 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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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연중 제24주간. 키엣대주교님
용서는 소통의 세상을 만듭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세상을 장님으로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용서라는 것이 없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는 공기처럼 사람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용서가 필요합니다.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무의식 중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피할 수 있는 잘못도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고 그 때마다 분을 참지 못한다면 가슴에는 분노가 쌓이고 마음의 평화는 파괴되어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 때문에 피해를 입고 싶지 않다고 피한다면 내 옆에는 한 명의 친구도 없이 고독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내가 바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너무나 많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고, 앞으로도 잘못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스스로도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죄의 고통 속에서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나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나 또한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나약한 인간이고,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에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면 형제들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떳떳하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당신께 죄를 지은 인간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셨다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것입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많이 강조하신 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는 ‘주님께 우리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기 전에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 후에 마태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 6,14-15)
용서는 사람의 영혼을 아름답게 합니다. 아름다움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어진 마음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가치를 고귀하게 만들어 줍니다.
용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여 소통의 세계로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바로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이며 하느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닮은 세상입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 후의 마음의 변화를 느껴보았습니까?
2. 나 자신을 용서해 주고 있습니까?
3. 주님 용서의 은총을 받아보았습니까? 형제들과 함께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십시오.
말씀의 실천
1. 내가 바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 마음 속에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용서를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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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연중 제24주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비로운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루 시작을 집무실 예수님 십자고상과 그 아래 태극기를 보며 성호경, 영광송 기도후 만세육창후 시작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만큼 국내외 상황이 엄중하고 위태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벌써 여러번 강론에 인용했습니다만, 인용할 때 마다 새롭고 신선합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기도에 전념할 때, 그리고 일에 전념할 때의 모습일 것입니다. 어제도 여러분들의 면담성사를 드렸고 보속으로는 예외없이 말씀처방전, 행복기도 읽기, 끝으로 애국가 제1절을 소리내어 부르도록 했습니다.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 나라 사랑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애국가를 부르도록 했습니다. 애국가가 성가요 기도임을 새롭게 발견한 요즈음입니다. 역시 나이에 상관없이 정성을 다해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들은 참 경건하고 아름다워 감동적입니다. 언제 들어도 감동적인 애국가 1절 다시 인용합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어제 10년만에 피정차 왔다는 80대 자매와 고백상담전 나눈 대화도 생각납니다. 본당 신부님이 노골적 좌파신부라 참 싫다고, 그런데 요셉 수도원에 참 좋은 우파 신부가 있다고 동료 자매가 크게 설득하는 바람에 피정왔다는 자매님 말을 듣고 즉시 대답했습니다.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수도사제입니다! 좌파와 우파를 함께 아우르는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파’입니다.”
혹자들은 간혹 우리 교황이 좌파가 아닐 까 의심하는 자도 있겠지만, 예수님파의 원조는 분명코 프란치스코 교황님일 것입니다. 만세육창후 하루를 시작하는, 하루에도 자주 만세육창을 하는 저는 누가봐도 예수님파일 것입니다. 예수님파라 대답한 것이 참 잘했다 싶었고, 더욱 예수님 공부 많이하여 예수님처럼 살아야 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마침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 1면 사진과 말씀이 참 고무적이었습니다.
한국주교회의 의장인 이용훈 마티아 주교님이 바티칸에 설치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상을 교황님께 드리는, 그리고 반갑고 경건한 모습으로 웃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상을 받아 안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이어 교황님은 한국교회가 복음의 희망으로 온갖 분열과 장벽을 극복할 것을 격려하셨습니다. 한국신자들 좌우를 막론하고 누구나 존경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참 예수님파입니다.
누가 극단의 좌파도 우파도 아닌 참 예수님파 신자들입니까? 어떻게 참 예수님파 신자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그 방법을 나누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 자비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화답송 후렴, “주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매우 인자하시도다.”도 이와 일치합니다.
첫째,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용서하는 사랑은 신적 사랑입니다.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무한한 용서를 하라는 말씀에 이어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다시 이를 강조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주시는 말씀이자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는 횟수를 세지 말고 무한정, 숨쉬듯이 끝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하늘나라의 비유입니다. 임금에게 만탈렌트 빚을 탐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고작 백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냉혹한 처사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무한한 은혜를 망각한, 참으로 무지에 눈이 멀어 자기를 모르는 우리 인간의 부정적이자 보편적 모습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며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같이 하실 것이다.”
무한히 용서하라는, 무한히 자비로우라 명령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각자 하느님께 받은 무한한 용서의 사랑의 빚을 깨닫는 다면, 이웃의 나에 대한 죄나 잘못은 조족지혈鳥足之血 새발의 피요, 저절로 용서요 자비로운 삶이 뒤따를 것입니다.
둘째, 화내거나 성내지 않는 사랑입니다.
물론 예언자들과 같은 사회적 불의에 대한 공적 분노는 예외입니다. 오늘 집회서에서 주님은 사적 분노와 진노, 복수심을 과감히 내려놓을 것을 권합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내용을 고스란히 인용합니다.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말그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삶의 지혜요 자비로운 삶의 구체적 실천지침입니다. 정말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다면, 분노, 진노, 격노, 성냄, 화냄, 복수, 적개심, 얼마나 백해무익한 영혼을 망가뜨리는, 후회로 가득 채우는, 무지한 행위들인지 깨달아 저절로 떨쳐버리게 될 것입니다.
셋째, 심판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교만한 사람이 남을 심판하지,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절대로 남을 판단하지도 단죄하지도 심판하지도 않습니다. 제 분수를 넘는 일이 남 판단하는 일이요,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은 일체의 판단도 심판도 보류하고 하느님께 맡깁니다.
주님께 구원받아 은총으로 살아가는 주제에, 사랑하기에도, 감사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이요 할 일은 한없이 널려 있는데, 한가하게 누가 누굴 심판하거나 단죄합니까?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형제를 심판하지 마라”는 주제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독서는 여기서 끝납니다만, 이어지는 내용이 보완되어야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무지로 인한 심판이요 판단이요 정죄입니다. 역시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끊임없이, 한결같이 자비를 실천하는 예수님파로 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용서하는 사랑, 화내거나 성내지 않는 사랑, 심판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으로 날로 자비로운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파 신자들의 구체적 자비로운 삶의 실체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은 자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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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연중 제24주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목숨>
숨만 남은
목숨을
이어가려고
얼이 깃든
목숨을
버릴 수 있나
숨보다 먼저
얼을 주신
님 앞서가시니
숨은 잃어도
얼은 살려
님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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