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서
집이 경복고등학교 바로 위 부암동이라 인사동과는 도보로 20분 거리다. 그래서 인사동은 나에게 좋은 추억거리였다.
원성 스님과 해후(邂逅)
뉴욕과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원성(圓性)스님은,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준수하여, 불자들은 물론이요 일반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스님은 동자승과 살림 도구들을 윤곽선이 없이 농담만으로 잘 그린다.
학고재(學古齋)에서 고미술품을 감상하고 나오는데, 원성스님의 동자전(童子展) 포스터가 보였다.
미남 스님에 관심이 많은 터였다.
외국에서 순회 전시하기에 앞서 선보인 작품들이라고 했다.
스님은 작품들을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맑은 음성으로 설명해주셨다,
작품 사이의 공간에도 파격(破格)이 필요한지? 이질적인 포인트가 있어야 작품이 돋보인다. 그래서 모서리마다 연꽃이 고즈넉이 놓여있었다.
연꽃을 들고 미소(蓮花示衆)짓는 석가모니
연꽃은 망자의 외로운 저승길을 동행하고.
연꽃으로 꽃상여를 장식하고
옥황상제가 이승으로 보낸 심청의 환생도 연꽃 속이다.
왼 손가락 끝이 엄지손가락 끝에 닿았으니 손이 아니라 연꽃이더라.
나는 어느 분의 연꽃 시를 암송하면서 작품을 보는데, 원성스님의 음성이 들렸다.
관객이 자기 작품은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연등만 쳐다보고 있으니 이상했으리라
“연꽃이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비 맞지 않게 잘 포장해 드리세요.”
아무리 좋은 작품일지라도 임하시중(荏荷示衆)의 미소(微笑), 연꽃의 심오한 진리에 비하면, 한낮 보잘 것 없는 마발(馬勃)에 불과하다.
연꽃이 떠난 빈자리를 대신해서 스님이 미소로 채워주겠지!
나는 고마운 마음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만보완상 (漫步玩賞)하는
문화유객(文化遊客)들이여
느긋하게 와유(臥遊)하라.
고려청자가 막사발이 된들
통영반이 닭다리 소반이 된들
문화는 장사꾼에게 맡기고
친구들을 목포집으로 불러내
홍어가 얼마나 잘 익었는지
코 좀 풀고 와야 쓰겠다.
눈이 호강을 했으니 다음은 뱃속을 채울 차례, 그래서 사찰음식 전문인 식당 산촌(山村)으로 갔다.
산촌은 육류, 생선을 사용하지 않고 산채만으로 5색 6미를 만든다.
산사에서 승려 생활을 한 적이 있는 주인은, 병무청장을 지낸 허상구 형과 알고지내는 사이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좋아 찾았는데, 낯선 외국인과 마주하여 술을 마셔야 한다니 입맛이 가셨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것은 권주(勸酒)가 제일이다.
그래서 곡차(막걸리) 한 동이를 시켰더니, 곧바로 화기애애한 술자리로 변했다.
영국에서 온 젊은이는 의류 디자이너였다.
동양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유럽패션에 접목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한다.
젊은이의 차림새는, 검은색 정장에 흰 와이셔츠가 깔끔했다. 그 사람의 감각 수준을 말해주는 넥타이는 자주색 스트라이프였다.
말로만 듣던 영국신사들의 세련된 풍모였다.
내 넥타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젊은이가 갑자기,“그건 예술이야! 예술” 찬사를 쏟아냈다.
곧바로 우리 넥타이 바꾸어 맵시다. 했더니, “와! 브라보! 땡큐 써!”
그것은 화가인 친구가 보라색 등나무 꽃을 실크 천에 그려 나염(捺染) 한 것이다.
젊은이 넥타이의 빨간색은 정열적인 화려한 색
친구 화가의 넥타이는 보라 중에 진보라 아름다운 색
내 넥타이는 연보라색이다. 내 딴에는 고상한 색이었다.
곡주(穀酒)를 사발 가득 채워 단번에 들이키니 취기가 알딸딸하게 밀려왔다.
헤어지기 섭섭해서 따라 온 젊은이와 2차로 밥 먹고 숭늉 마시는 다반사(茶飯事)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벽에 화살표와 함께 여인의 나상(裸像)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많을 다, 부처 불, 놀 유, 때 시, (多彿游時) 넉자가 있었다.
부처님도 여성과 어울리는 모양이죠?
저희 집 오시는 손님 수준이라면 바로 압니다. 힌트 하나 드리죠. 메이드가 티슈를 들고 있습니다.
의아해하는 기미를 느꼈는지, 힌트 하나 더 드리죠! 세상에 가장 급한 사람이 가는 곳이라 보폭(步幅)이 석자는 되어야지요.
큰 소리로 몇 번을 반복해서 읽고 나서 그 뜻을 알았다. 신라시대 사용하던 이두(吏讀)문자였다.
먹고 마시는 정갈한 곳이라도, 손님들에게 그것이 있는 곳을 알려야겠는데, 식당 주인의 재치였다.
소리새 금난새 이문세
세 마리 새가
종로 피맛골에 행차시다.
영코베기 비욘새도
발톱 숨긴 송골매도
자기도 새라며 따라온다.
흥겨워 어깨춤이 덩실 덩실
조통달이 김세레나 꿰차고
헛기침을 하며 거드름을 피운다.
영국 신사
첫댓글 왠지 자꾸 읽고햇읍니다
잘 즐감하고 갑니다
내가 고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