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세월의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잠시 1962년대로 시간 여행을 합니다.
❤️당시 나는 건강이 너무 안 좋아서 영일군 청하면 월포국민학교로 초임 발령이 났지만 임지에 부임하여 일주일도 참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집에 와서는 정신수양한답시고 혼자 산으로 들로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면서 부모님 속을 새카맣게 태우는 불효자 노릇을 했습니다.
❤️그 때는 박정희 군사정권 초기여서 사회 질서도 안 잡히고, 국민들의 살림살이도 엉망이었습니다.
❤️그 때 사범학교 동기생들 중 나처럼 1941년 생 뱀띠 신사생은 나이가 한 살 더 먹었다는 이유 같지 않는 이유로 발령도 동생 뻘 되는 42년 생이나 43년 생보다 일년 조금 늦게 받았습니다.
❤️이유는 곧 군에 입대해야 하니까 군복무 마치고 와서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년이 거의 다 되도록 군에 입대하라는 소식이 없자, 도교육청 당국에서는 부랴부랴 서둘러서 졸업한 그 이듬해 그것마저 한 달 늦추어서 1962년 4월 2일자로 임시교사 발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1942년 말띠생 동기들, 1943년 양띠생 동기들은 교사경력 1년을 채우고
2년차로 접어들 무렵,1941년생 우리는 교단에 첫발을 디뎠으니 같은 해 1961년 3월 20일에 졸업장을 받은 동기생들 마저 선후가 바뀌는 처지가 되어 황당하고 억울했지만 모든 이유가 통하지 않는 군사정권 시절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얻은 초임 교사 자리마저 지키지 못하고, 1942년 4월 2일자 발령장을 받고도 건강을 핑계로 한 달 가량 허송세월하다가 애태우는 부모님이 가엾어서 5월 3일에 첫임지인 영일군 청하면 월포국민학교로 갔던 것입니다.
*거기서 3학년 2반 담임을 맡았는데 바닷가 어촌학교여서인지 교육환경이 여간 열악하지 않았습니다.
❤️교실이 부족하여 3학년 1반과 오전 오후로 교대하면서 수업을 했습니다.
❤️3학년 1반 담임 선생님은 만성 폐결핵 환자였고, 아이들은 어촌 태생이어서인지 온몸에 생선 비린내가 풍겨 가뜩이나 비위가 약한 나는 아이들에게 정이 가지 않았습니다.
❤️초임지 학교 부임 일주일 만에 나는 학교당국에 이야기도 하지 않고 보따리를 싸서 내 멋대로 고향으로 귀향하고 말았습니다.
❤️4월분 봉급은 누가 어떻게 처분했는지도 모르고, 5월분 봉급 5만환이 조금 넘는 돈만 갖고 도망치듯 귀향했으니 그 당시 내 정신상태는 지독한 우울증과 염세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박정희 군사정권 화폐개혁 직전이라 <원>이 아니고 <환>이었습니다.
❤️나는 고생하시는 부모님 속타는 심정 아랑곳하지 않고, 백수건달이 되었지만 신문은 날마다 꼬박꼬박 챙겨 읽은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시골에 전기도 안 들어오고 호롱불로 밤을 밝혔으며 100호가 넘는 집성촌 마을에 라디오를 가진 집도 없었으니 신문을 통하여 세상 형편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신문 배달은 우리 마을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면소재지 우체부가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저녁 무렵에 내 시골집 마당에 던져 놓고 가곤했지요.
❤️그래도 당시 나는 살아가는 유일한 보람이 신문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구독한 신문은 서울신문이었는데 특히 연재 소설이 재미 있었습니다.
❤️"에헤!" 벌써 날씨가 밝아 아침이 되었네요.
❤️시간이 아깝지만 당시 우리의 우방인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남긴 한 마디만 남기고 끝을 맺을까 합니다.
❤️국민 여러분은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까 바라지 말고, 국민된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라고 한 것 같습니다.
❤️물심양면 포플리즘에 중독된
지금의 우리 국민들의 귀에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 같습니다만 미국인들은 벌써 그 때 그 시절 대통령의 그 한 마디를 감명깊게 받아들인 국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2022.05.14(토) 금당퐁당 혜인